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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433화 (1,433/1,559)

제 1433화

비화가 여신에게 배운 것은 지켜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을 보고 온전히 무시하는 건 그녀로서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화는 문득 노사제가 죽기 전 걱정하던 것들이 떠올랐다.

그는 엘리시아가 모르게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죽고 난 뒤 보호를 받지 못해 곤란한 상황에 처해질까 두려워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부탁했다. 평생을 독실하게 기도를 올려온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욕심을 기도한 것이다.

물론 들어주고 들어주지 않고는 전혀 다른 문제였고, 심적으론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그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몽마라는 사실을 알아챈 일부가 순간적으로 끓어오른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녀를 신고했고 평소 엘리시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던 남작은 이것을 기회 삼아 그녀를 손에 넣으려 들었다.

그저 지켜보던 비화는 영혼석에 보관하고 있던 노사제의 혼을 흘끗 보았다.

“나를 원망해? 조금만 내가 신경 썼어도 이런 일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그녀의 질문에 영혼석은 옅게 반짝였다.

“난 프리아 여신님과 달라, 하나의 초월적인 영격일뿐,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존재는 아닐 거야.”

그래도, 지금 같은 경우에 나서줄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 아닐까.

이윽고 비화의 등 뒤로 새하얀 날개가 펼쳐졌고, 마을 사람들을 죽이려던 병사를 막으며 여신이 강림했다.

* * *

비화가 엘리시아에게 접근한 이유는 꽤 불순하기 그지없다.

비록 자기합리화하기엔 충분한 여건들이 있다지만 결과적으로 엘리시아의 입장에선 뜬금없는 제안을 해오는 것이 비화였으니까.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엘리시아는 이곳에서 오래 있을수록 스스로에게 안 좋아.’

어차피 그녀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녀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할 것이고, 노사제의 걱정처럼 그녀의 삶은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내몰릴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막아줬다고 한들, 몽마의 본능에 노출되는 만큼 엘리시아에게도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엘리시아가 상위 몽마인 것도 아니고, 초월적인 힘을 가진 것도 아니니까.

차라리 이렇게 연이 닿은 것을 기회로 그녀를 데리고 와 그녀의 본능을 제어하는 법을 알려주고 그 과정에서 연습 상대가 되어줄 시우와 엮게 한다.

‘완벽한 계획.’

물론, 그 모든 과정이 엘리시아의 의견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우선은 나서야 했다.

비화는 최대한 목소리를 티 나지 않게 가다듬고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다…… 당신은…… 얼마 전에 찾아왔었던…….”

엘리시아는 비화의 얼굴을 알고 있었던 만큼 더욱더 혼란스럽고 놀라운 심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비화는 예전 그녀와 대화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세를 내뿜으며 말했다.

“슬픈 일이구나…… 자신들을 위해주던 선의에 칼을 들이미는 것은…….”

마치 타박하는 듯한 말투였다.

비화의 실제 모습을 아는 이들이라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숙하며 신성한 목소리였다.

“다…… 당신은…… 천사님이신가요?”

엘리시아가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주저앉으며 비화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천사처럼 보여?”

“……설마…… 여신님…… 이신가요…….”

상상도 못 한 정체라는 듯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비록 프리아 여신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비화는 천천히 다가가 엘리시아의 어깨에 새하얀 손을 올렸다.

동시에 비화의 힘이 엘리시아를 끝도 없이 괴롭히던 본능을 억제한다.

“흐읍!!”

마치 오랜 시간 본인을 짓누르던 정체 모를 무언가가 사라진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한결 편해진다.

“종의 본능은 모두가 지니고 있지. 인간이 식사를 하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다들 무기를 내려주겠니?”

비화의 말에 병사들은 마치 홀린 것처럼 검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마치 뜨거운 무언가를 잡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허겁지겁 그 현장을 은폐하려는 것처럼 그들의 행동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여…… 여신님! 다…… 당신의 종자가 감히 위대한 존재를 알현하나이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높은 존재는 왕이겠지만 모든 면에서 놓고 볼 때 그들이 착각하고 있는 프리아 여신은 감히 일개 국왕 따위가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남작은 벌벌 떨며 머리를 조아린 채 소리쳤고 비화는 잠시 머릿속에 계획을 세우고 그에게 다가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비화가 문득 놀란 얼굴로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동시에 비화의 전신에 어떤 힘이 서렸다.

비화의 신격이 아닌. 그보다 더 상위의 신격.

왕성 연회에서 국왕을 상대로도 이처럼 긴장한 적은 없을 것이다.

남작이 덜덜 떠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자 비화는 묵묵히 그를 바라보다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그녀와는 조금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이게 최선이었니?”

“여…… 여신님?”

“네게는 더 좋은 길이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정말로 이게 네 최선이었던 거니?”

마치 자식의 엇나감에 슬퍼하는 부모님처럼, 비화의 말에 그는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비화는 남작을 향해 말했지만, 사실 이 말은 그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엘리시아를 가족처럼 여겼으나 그녀가 마족이라는 사실에 돌변했던 일부 마을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화는 이런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별개로 목소리는 이미 흘러나간 후였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마치 슬퍼하는 부모님을 보면 자신도 슬퍼지는 아이처럼.

그 악독하기 그지없던 남작이 오열하며 머리를 땅에 처박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흐윽…… 흐어억…… 죄송합니다.”

그를 시작으로 마을 사람 중에서도 일부 그런 이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건 보드의 모친이었다.

“내가…… 내가 대체 무슨짓을…….”

슬퍼하는 그들의 모습에 엘리시아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아니 그녀는 아직도 놀란 상황이었다.

엉뚱한 제안을 하고 사라져버린 교단의 사제가 알고 보니 프리아 여신일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여신님…….”

“나는 너희 모두의 의지를 존중해. 그렇기에 설사 죽더라도…… 네 선택을 존중해주고자 했지만…….”

비화가 천천히 다가가 엘리시아를 품에 안았다.

“네 아비의 기도가 내게 닿았구나.”

그 말과 함께 비화의 손을 잡은 엘리시아의 몸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화의 등 뒤에서 흩어져 흩날리던 새하얀 깃털들이 일제히 대지에 스며들며 엄청난 생명력을 머금기 시작했다.

“내 제안 속에서 어떤 것을 찾았니?”

비화는 평소답지 않게 최대한 말투를 신경 써서 물었다.

두루뭉술한 화법.

무려 비화가 여신님과 대화하며 얻은 속 터지는 화법이었다.

물론, 여신의 말은 두루뭉술하지만 너무 많은 의미가 한 번에 들어가기에 그런 뜻이었고, 현재의 비화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이 대충 뭉뚱그려 내뱉은 말일뿐이었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이는 달랐다.

한창 프리아 여신이라며 착각하고 있는 와중에 그런 말이 그냥 내던진 말이라고 판단하는 이는 없을 테니까.

“제가 여기 있으면…… 이분들에게 너무도 큰 폐가 되겠죠.”

“…….”

“이제 돌이킬 순 없을지라도……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엘리시아는 천천히 돌아본 뒤 마을 사람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저를 사랑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에…… 엘리시아…….”

촌장이 슬픈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간간이 간식을 가져와 주고 가셨던 촌장님. 제가 더 예뻐질 수 있다며 화장품을 가져와 주던 밀리아, 언제고 찾아와 내가 제일 좋다고 말해주던 티미.”

그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와 그들 사이의 추억을 곱씹었다.

“묵묵하게 찾아와 궂은일을 대신해주시던 보드 씨…… 마치 제 어머니처럼 저를 돌봐주시던 벨라 아주머니…….”

이름을 불려진 이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윽고. 엘리시아의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목소리가 울음에 잠겼다.

“여러분들은 제 가족이었어요. 평생을 가도 여러분들이 주신 그 따스함은 잊지 않을게요.”

“아아…… 엘리시아!”

“엘리시아 누나!”

마족임이 드러났다곤 하나 그들과 엘리시아 사이에서 있었던 모든 과거는 거짓이 아니었다.

“여신님…… 당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내 뜻이 아니야.”

비화는 그녀를 향해 옅게 웃었다.

“네가 걸어갈 길을 보여 주는 것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비화의 힘은 일대를 성역으로 뒤바꾸어놓았고, 새하얀 빛과 함께 모두의 시야에서 두 사람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 * *

여신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이들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마을 사람들은 몰라도 남작이 변할지에 대해선 비화도 회의적이었다.

물론, 그들에게 말을 한 건 프리아 여신이기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본래대로라면 그녀의 성역으로 돌아갔겠으나 엘리시아라는 특수한 케이스가 생겨버린 이상 비화는 그녀를 미리 준비해둔 베이스캠프나 다름없던 에반젤린의 레어로 향했다.

다만 에반젤린이 개인적으로 머무는 저택은 문제가 있었기에 섬 내에 비화와 넬타리드가 일부러 작은 거주지를 만들어둔 참이었다.

물론 땅에 만들었다간 에반젤린이 달려들 터이니 하늘의 공간을 살짝 슬쩍한 것을 에반젤린은 모른다.

“저…… 이곳이 성역인가요? 아름다운 곳이네요…… 마치…… 천상계가 실존한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아요. 프리아 여신님.”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위압은 없어졌기에 엘리시아는 제법 편하게 말을 걸어왔다.

“난 프리아 여신님이 아니야.”

“네? 그…… 그럼!”

마치 배신당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는 그녀를 돌아보며 비화가 말한다.

“조율의 여신 비화. 그게 내 이름이야. 처음 듣지?”

“아…… 네.”

“비록 프리아 여신님처럼 전능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우습게 보지 않는 게 좋을걸?”

그리 말하며 비화가 손을 휘젓자 두 사람의 신형이 마치 바람에 실려 가듯 현대식 양식으로 지어진 새하얀 신전에 도달했다.

“이래 봬도 나는 상위 여신님…….”

퍼억!!!

그때였다.

무언가에 맞고 날아든 누군가가 그대로 비화와 충돌한다.

“꾸엑!!”

거의 자동으로 비화의 몸을 보호하듯 신력이 펼쳐진 만큼 비화에게 이렇다 할 타격도 주지 못하고 나뒹군다.

하지만 비화에게 날아온 소녀의 손에 쥐어진 음료는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그대로 비화와 엘리시아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꺅!”

갑작스런 물세례에 당황한 엘리시아가 몸을 움츠렸다.

여신이 직접 찾아와 그녀를 데리고 가는 이 상황도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지금 상황이 무엇인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닥에 쓰러진 건 붉은 머리의 소녀였다.

나이는 비화와 비슷해 보이지만 내면은 그렇지않으리라.

굳은 얼굴로 가만히 있던 찰나. 비화가 천천히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와 엘리시아에게 쏟아진 음료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허공으로 몰려들었고 이내 사라졌다.

이후 비화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아야야…… 진짜 돌대가리야?! 무슨 커헉!!”

소녀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상관없었다. 비화에게 도리어 화를 내려는 그녀를 향해 비화가 손을 뻗자 빛으로 된 거대한 손이 그대로 소녀의 얼굴을 낚아채듯 잡아들어 올린다.

“서…… 선배님! 안됩니다!!”

“죽어, 이년아!!!”

비화. 아무리 조율의 여신으로 각성하고 데이비와 페르세르크의 사랑을 받으면서 유순해졌다 해도 본 성질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콰아아앙!!!!

태어나자마자 넬타리드와 데이비를 향해 밥 갖고 와! 라고 소리치던 배짱 좋은 호문클루스 노아는 결국 비화의 한방에 기절해버렸다.

뒤이어 데이비와 넬타리드. 그리고 예전에 본 적 있던 한 서큐버스가 나왔지만, 비화의 처단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 * *

“보통 이런 특성의 몽마들은 단명하는 편이에요. 인간이 식사를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요.”

밥을 먹어야 사는데 입이 없는 인간이라면 생존할 수 없다.

물론 이토록 극단적인 케이스는 아니지만, 이성에게서 사랑이나 정기를 갈구하지 못하는 몽마는 빠르게 쇠락할 수밖에 없다.

“특히 어린 나이에는 단순 식사만으론 살 수 없어요. 부모가 나누어주는 정기가 필요하죠.”

엘리시아의 부친이 어떤 마족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엘리시아의 친부모는 그녀를 어떻게든 살려낸 모양이었다.

“차라리 상위개체 몽마였다면 이런 정기 같은 게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하급 몽마는 불가합니다.”

식사는 몽마의 육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지만 정신적인 갈구는 이성의 정기나 사랑이 필요했다.

“방법이 있어?”

“방법이라……다행히 상태가 심각하진 않네요. 이성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는 걸 넘어 거부감을 드러낼 정도로 페로몬을 자연 방출하는 상황이긴 해도 내면의 본능은 제법 본능에 충실해요.”

즉 본능은 이성을 갈구하고 있으나 그녀의 이질적인 특성이 그 본능을 억누르고 이성에 대한 거부감과 막연한 두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조금 극약처방이긴 하지만…….”

잠시 고민에 빠진 유시르가 극단적인 방법을 꺼내 놨다.

“단단한 방에 둘을 가둬놓는 게 제일 좋죠.”

익숙해질 때까지.

그 말에 비화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데이비는 담담하게 그 상황을 정리했다.

“누가 몽마 중에서도 유별난 또x이 아니랄까 봐…….”

“이른 시간 안에 해답을 찾으려면 그게 제일이긴 합니다.”

“다른 방법은?”

“익숙해질 때까지 같이 지내야죠.”

과거 몽마 여제에게 가장 큰 힘을 보태주던 마스터급 초월자인 몽마의 검 유시르는 심드렁하게 해답을 내놓았다.

“고생했어.”

“다음에 필요하면 그때 또 불러주세요. 이 정도는 은혜를 갚는 것으로 충분하니.”

과거 몽마 여제의 곁에서 도움을 받던 몽마의 검 유시르는 여제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 이유는 티오니스 대륙에서 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그게 알고 보니 아이나 헬리샤나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스승과 제자의 사이로 이어졌던 두 사람이 서로를 찾아 헤맸다는 사실은 묘한 느낌을 주곤 한다.

엘리시아의 상태를 확인해준 유시르가 데이비가 열어준 균열을 타고 돌아간다.

엘리시아는 유시르가 혈을 짚은 탓에 잠들어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 아빠. 쟤 뭐죠?”

비화는 그제야 이야기할 틈이 생겼다며 바닥에 추욱 늘어진 적발의 소녀를 가리켰다.

“아…… 그게. 넬타리드가 실수를 좀 한 모양이더라.”

데이비의 대답에 비화가 한숨을 내쉰다.

“넬타리드…… 네가 그러면 그렇지…….”

“면목이 없습니다. 선배님.”

“그런데 아빠는 왜 여기 있어요?.”

“네가 잘하고 있는지 보러왔다.”

그 말에 비화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안…… 혼내요?”

마치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비화는 의심부터 했다.

“그래. 안 혼내.”

“왜요?”

“왜긴. 믿어주기로 했으면 지켜봐야지.”

이전 종언의 일로 비화는 데이비에게 신임을 얻었다.

데이비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아빠…….”

괜히 감동한 듯 비화가 눈물을 글썽였다.

“그보다 나를 알아보진 못해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무슨 상관이에요.”

엘리시아에게 티오니스의 성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다.

물론, 외관을 알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걱정인 건 저건데…….”

비화는 바닥에 쓰러진 붉은 머리 소녀 노아를 보며 한숨을 내쉰다.

“저거 성격이 왜 저래요?”

“나도 머리가 아프다.”

차라리 호문클루스라 해도 에나벨이나 메라몽 같이 어느 정도 선이 느껴졌으면 문제가 되진 않을진대.

너무 사람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니 묘한 느낌이다.

“마치 아이를 태어나게 만들고 그 아이를 다른 곳에 팔아버리는 느낌이라는 거죠?”

비화가 알겠다는 듯 설명하자 데이비는 떨떠름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좀 묘하게 됐다.”

“네?”

“넬타리드가 처음부터 박승현의 곁을 지키게 하려는 의도로 태어나게 한 탓에 본능적으로 그에게 가야 한다는 건 인지하고 있어. 본인도 바라고 있고.”

애초에 넬타리드에게서 태어난 아이지만 노아에게 최우선사항은 사실상 절제, 박승현이었다.

문제는…….

“쟤 식사량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 한마디에 비화는 탄식을 흘렸다.

“뱃속에 천만 대군이 들어있는 쟤가 가면 박승현은 얼마 못 가서 파산할걸?”

그건 예상 못 했네.

“거기다가…….”

잠시 말을 멈춘 데이비가 한숨을 내쉰다.

“저거 상상 이상으로 게을러.”

가사도우미?

그전에 절제가 부려 먹히게 생겼다.

아무리 그래도 에반젤린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박승현에게 저 게으른 식충이를 맡기기엔 그 죄악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에 만약 절제가 노아와 만났을 때 저 게으른 식충이의 모습에 학을 떼버린다면.

유일한 목적에게서 외면받은 노아는 대체 무슨 존재가 되는 것일까.

“에이. 절제 오빠가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고.”

절제가 겉으론 가벼워도 제법 인격적으로 좋은 인간인 걸 알기에 비화가 두둔하려 했다.

하지만.

툭툭…….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비화의 옆구리를 발가락 끝으로 쿡쿡 찌르며 게으르게 누워있는 노아와 눈이 마주친다.

“…….”

“저기…… 밥 언제 먹어? 나 그 피자인지 뭔지 먹어보고 싶은데.”

하는 짓을 보면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복장이 터질 것 같은 몰골이다.

이에 비화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에 신력을 끌어모았다.

“괜찮아. 아픈 건 한순간이야. 널 그렇게 태어나게 한 넬타리드를 원망해.”

비화의 입가에 미소가 걸리자 그녀는 언제 게을렀냐는 듯 후다닥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이리 안 와!?”

노아와 마주한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하지만, 그 잠깐으로도 이렇게 복장이 터지는데 며칠간 지켜봐 왔을 데이비나 넬타리드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또한, 앞으로 계속 같이 살아갈 박승현은 그것을 견딜 수 있을까.

“아빠…… 나 알 거 같아요.”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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