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34화
엘리시아가 가진 서큐버스 고유의 특성을 해결하기 위해선 유시르의 조력도 필요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남성과의 접촉을 늘려 그녀의 거부감과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
레이나와 달리 그녀는 속마음 깊은 곳에선 거부감보다는 이성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짙다.
이것을 빌미로 유시르에게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시우와 결혼을 전제로 썸을 타게 하는 것.
시우의 소원도 들어줄 수 있으며, 노사제의 유언대로 엘리시아를 거둬들이고 책임질 수 있는 일석이조의 활로였다.
그 과정을 위해선 반드시 시우의 조력이 필요했던 만큼 비화는 곧바로 시우를 만나러 떠났다.
그리고, 현재 레어에 남아 느긋하게 드러누운 채 웃긴 영상을 보며 낄낄거리는 노아가 가장 최종 보스로 남았다.
아직 세상에 대한 상식이 많이 부족한 녀석이지만 넬타리드가 주기적으로 지구의 문화를 주입시켜준 결과 벌써 한 마리의 완벽한 나무늘보가 탄생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선은 들이 박아봐야 할 거 같습니다. 저 아이의 미래는 보이지 않네요.”
“넌 어디 가서 소원 들어준다는 말하지 마라.”
“제가 힘이 충분했고, 경험이 많았다면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건 의미 없는 변명이고.”
“그렇군요.”
씁쓸하게 중얼거린 넬타리드가 움직인다.
“필요한 지식은 모두 전수했으니 이제 그를 만나야겠지요.”
“그래. 내가 저 녀석이 태어나는데 일조하지 않았으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굳이 책임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지요, 당신은 참 좋은 홀른입니다.”
과연 노아와 박승현은 잘 녹아들 수 있을지 괜스레 걱정이 되는 데이비였다.
“그런데. 노아를 어떻게 데려가야 할까요.”
“취향 생각하면 재밌는 수단이 있긴 해.”
* * *
절제 박승현은 전날 에반젤린과 극 하이텐션의 합방을 진행하고 완전히 방전이 된 상황이었다.
둘 다 그림을 그리는 스트리머지만 유명할 정도로 게임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것은 에린 또한 마찬가지.
실제로 절제와 에린의 방송 시청자의 폭이 비슷한 편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현재 에반젤린의 구독자나 평균 방송 시청 인원을 생각하면 절제의 입장에선 제대로 빨대를 꽂은 셈이었다.
실제로 에린 덕분에 해외 시청자들이 그의 방송에 유입되곤 했다.
“아이고 머리야…….”
피로가 채 가신 게 아닌지 띵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침대에서 휘적거리며 일어난 그가 몸부림을 쳤다.
스트리머로써 성공하며 많은 돈을 벌었고, 번듯한 집도 생겼다. 처음엔 좋은 줄 알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집이 넓어질수록 공허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넓고 깨끗한 집인데. 왜 이렇게 삭막해 보이고.
추울 땐 보일러를 트는데 왜 이렇게 춥게 느껴질까.
과거 단칸방에서 방송을 시작할 땐 이렇지 않았을 텐데.
나중에 에린을 만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극심한 외로움을 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솔직히 뜬금없는 말이긴 했지만.”
그래서 넬타리드에게 빈 소원도 그런 것이었다.
누가 되었건 좋으니까 제발 이 삭막하고 싸늘한 집에 온기를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가사도우미? 덕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가족처럼 이야기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때 몸을 뒤척거리며 데굴데굴 굴러떨어진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팬티 한 장 차림으로 거실로 걸어 나갔다.
“늘 그렇듯 짜증 날 정도로 조용하네…….”
오늘도 에린이를 꼬셔서 게임이나 주구장창 할까.
그림도 손에 가지 않으니…….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였다.
문득 그는 거실에 있는 TV가 켜져 있고, 최신형 게임기가 켜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촤악!! 촥!!
화면 속에선 투박한 갑옷을 입은 캐릭터가 제 몸집보다 수배는 큰 몬스터와 일기토를 벌이고 있다.
한때 데이비의 동생이자 세계 학회에서 노벨상 후보로 오른 적이 있던 에오니샤가 한창 빠져있었다던 게임이었다.
그토록 영민하고 부지런하던 동생이 하루아침에 게임 폐인에 방구석 폐인이 되었다며 이를 부득 갈았다고 했던가.
“그런데 저게 왜 멋대로…….”
문득 저 게임이 왜 혼자 돌아가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든 그가 저벅저벅 걸어가며 다가간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새하얀 박스티 한 장만 걸친 채 소파에 드러누워 한 손으로 패드를 톡톡 누르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말이다.
“으…… 으아아악!!!”
비명을 내지른 그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게임 캐릭터가 우뚝 멈추더니 몸을 뉘고 있던 소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승현을 바라보았다.
“…….”
“…….”
잠깐의 침묵이 일었다.
두웅!!!
그러거나 말거나 화면 속에는 거대한 괴물에게 꿰뚫려 버둥거리다가 한입에 꿀꺽 삼켜지는 캐릭터가 보인다.
그리고 당신은 죽었습니다. 라는 문구가 떠오르고 있다.
노아와 승현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 동안 침묵했다.
입을 다물고 있는 노아는 한눈에 봐도 매력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매력 있는 모습이었기에 승현은 멍하니 그녀를 시야에 담았다.
“배고파.”
“어…… 어?”
‘밥 가지고 와!! 밥!!“
근의 외침에 승현은 잠시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팬티 한 장만 입고 있고 그것을 그녀에게 훤히 보였다는 사실에 절망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 * *
급하게 옷을 걸쳐 입고 나왔을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요리였다.
참…… 복스럽게도 처먹는구나.
승현은 식탁에 올린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눈앞에 있는 이 경악스러운 식충이를 바라보았다.
“맛있다! 한 그릇 더 줄 수 있어?”
“저기…… 냉장고에 달걀 다 썼다.”
한솥 해놓은 밥도 깡그리 사라졌다.
그가 할 수 있는 요리라곤 달걀볶음밥 같은 게 대부분이었고 재료도 없었던 터라 만들어주었다.
그래. 식사 한 번 대접 못 할까.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준 볶음밥이 벌써 7그릇째라면 납득이 될까.
저 아찔해지는 식욕도 식욕이지만 가사도우미의 힘을 지닌 저 소녀에게 왜 자신이 밥을 대접하고 있는 것일까.
“아…… 이제 좀 살 거 같다.”
만족한 듯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배를 통통 두드리는 그녀를 보며 승현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래.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네 이름은 뭐니?”
겉보기엔 절제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였기에 조심스레 물어본다.
“노아야. 그쪽은 승현이지?”
“어? 어어…… 그래.”
“넬타리드 님이 날 만들었어. 이제부터 너랑 함께 살 거야.”
소원을 들어준 것이구나.
그런데…… 소원이 뭔가 이상하게 와전된 느낌이다.
흔히 유명한 우주의 공포스러운 신들이 소원을 기괴하게 이루어준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싶어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그래. 뭐…… 생각하고는 조금 다르긴 한데 잘 먹으니 보기 좋네. 다 먹고 설거지는 해놔. 할 줄 알지?”
“싫어.”
“뭐?”
“귀찮아…….”
그렇게 말한 그녀는 박스티만 입고 있는 몰골 그대로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소파에 몸을 가볍게 날려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제 허벅지를 벅벅 긁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역시 늘어져 있는 게 제일 좋아.”
“…….”
소원, 취소해버릴까. 아니 이걸 따져야 하나? 그보다 왜 자고 일어났더니 그녀가 여기 와 있는 건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이고 머리야…….”
승현은 알싸해지는 편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며 그녀가 깨끗하게 비운 그릇들을 전부 싱크대로 밀어 넣었다.
* * *
승현이 지내는 건물의 옥상은 그가 간간이 마음을 비우고 싶을 때 올라오는 곳이기도 했다.
“이게 말이 됨?”
-아하하!! 걸작이네 크흐흐흐흐!
승현의 상황을 전해 들은 시우는 그 자리에서 숨김없이 폭소를 터뜨렸다.
“아니, 그쪽은 별 소식 없나?”
-나는 잘하고 있으니 너나 잘해 임마.
“아니 진짜!”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어버린 그는 저장되어있는 에반젤린의 폰으로 전화를 걸까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어휴. 됐다. 됐어.”
하지만 곧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뒤 체념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외관은 참 예쁘장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외관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아하하하하! 멍청이야 저거!”
꺄르륵 웃으며 TV를 보고 있는 식충이를 보며 승현은 어떻게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이미지가 이렇게 박살 나 버릴 수가 있는 건지 고민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제법 간단했다.
“반품!!”
그가 소리쳤지만, 당연히 무언가 변화가 있을 리 만무하다.
“반품은 얼어 죽을. 승현, 두 시간 정도 있다가 치킨 올 거야. 받아줘.”
“음? 웬 치킨?”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웬 치킨이냐니. 먹어야지. 나 치킨 먹어보고 싶어.”
“……네가 돈이 어디 있어서?”
“이걸로 결제했는데?”
그녀가 들어 보인 것은 승현의 태블릿 PC였다.
“…….”
“여기 어플 신기하더라 맛있는 게 한가득해. 이리와. 같이 게임 하자!”
해맑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으랴.
승현은 위가 쓰려 오는 기분이 들었다.
“어…… 웃었네?”
웃는다고?
키득키득하며 그녀가 손을 흔든다.
“빨리 와! 오면 이거 같이 해보려고 했거든!”
그녀가 내민 것은 2인용 협동게임.
승현은 자신이 웃어버렸다는 사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식충이에 굉장히 예의 없고 뻔뻔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대가 되는 것일까.
“그래? 한판 붙자고? 분명히 말하는데 나 그거 개 고수다.”
“그럼 이제부터 허접이 되는 거네.”
실실 웃으며 그녀가 게임 패드를 집어 들었다.
“드루와 드루와!”
“어휴 됐다. 조금 있다가 하자. 설거지도 남았고.”
“쫄?”
“덤벼, 이것아.”
승현도 게이머의 본능이 어디 가진 않았다.
당연히 경험이 많은 승현은 요리조리 노아를 농락하며 승리를 쟁취해냈다.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노아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게임의 이해도를 흡수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승현을 이겨버리고야 말았다.
“허접이네?”
“이런 망할! 이게 말이 돼?!”
“응 말 돼~”
“아오. 진짜! 너 그냥 돌아가라!”
“안 갈 건데? 여기 평생 살면서 네 등골 쪽쪽 빨아먹을 거야.”
뭐 이런 뻔뻔한 안드로이드가 다 있단 말인가.
정확히는 슬라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호문클루스라 했지만 승현에게 그런 건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발가락 끝으로 승현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던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아 참. 승현, 나 저거 궁금한데.”
“또 뭐…….”
진이 빠진다는 표정으로 그가 되묻자 노아는 팔짝팔짝 뛰어가더니 어딘가의 문을 벌컥 열었다.
“여기 뭐야?”
“어?”
그녀가 연 곳은 다름 아닌 방송 룸이었다.
“여기 이거 막 건드리니까 채팅 올라오더라?”
그녀의 말에 승현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튀어 갔고…….
[절제쉑. 빨리!!]
[해명해!!]
[무야!! 무냐고!!]
[누구야! 아니 이 쉑 방송 킬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곤 생각했는데 뭐야뭐야.]
[나]
[락]
[나]
[락]
승현은 머리가 아찔해짐을 느꼈다.
“되게 신기하다 이 사람들. 승현 친구야?”
승현은 천진난만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트롤링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분노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나가 이 년아!!”
결국, 그는 노아의 뒷덜미를 잡아 방송 룸 밖으로 내보내 버렸다.
그리고는 방송 룸의 문을 닫아버렸다.
쿵쿵쿵!!
“승현! 문 열어줘! 문!”
밖에서 노아가 소리치지만, 소리가 차단되는 외부와 내부 차이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한없이 작게 들려왔다.
[절제쉑 드디어 왔네.]
[그래서 누구임]
그 말에 승현은 어떻게 답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아는 동생이라고 답할까.
믿어주기나 할까.
친척이라 할까.
애석하게도 붉은 머리칼이 자연스러운 금안의 소녀가 친척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아하하. 여러분 방송 켠 건 실수에요. 아직 세상 물정에 어수룩한 아이라서.”
[그래서 누군데!]
[빨리! 나 숨 막혀 뒤지는 꼴 보고 싶어?!]
[됐으니까 데려와아아아!!]
[시커먼 남정네보다 귀여운 여자애 보니까 훨씬 분위기도 좋구만!!]
“넌 그냥 나가라.”
시청자 한 명을 익숙하게 밴한 승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티오니스에서 온 호문클루스입니다. 사정이 있어서 내가 돌보게 됐어요.”
[호문클루스?]
[그…… 현자의 돌?]
[연금술사야 뭐야.]
“뭐…… 자세한 건 몰라. 이 양반들아. 어쨌든. 나중에 다시 방송 켤 테니까 일단 방종!!”
[어어?]
[이렇게 궁금증 터지게 해놓고 튄다고?]
[이거 맞아?]
[엄마…… 난 커서 절제쉑이 될래요!]
[여기 어디…… 너무 추워…….]
정오부터 정신없이 올라오는 채팅방의 화력에 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강제로 방송을 꺼버렸다.
그리고.
선을 넘은 노아에게 진심으로 화를 내려 문을 벌컥 열었을 때였다.
퍽!!!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를 향해 달려든 노아가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흐어어엉! 잘못했어! 잘못했어! 제발! 나 버리지 마! 나 혼자 두지 마! 너무 외롭단 말이야!”
그 말에 승현은 화를 내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굳어버렸다.
외로움.
생각 이상으로 이 적적한 집에서 그가 가장 괴롭게 느끼던 것이었으니까.
결국, 승현은 그녀를 돌려보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