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44화
데이비가 륀느와 초단이를 데리고 숨어버린 차원의 이름은 모른다.
아마 그 정체를 알고 있는 건 그에게 거품 세계 중 한 곳을 알려준 프리아 여신 뿐일 터다.
“이번엔 아빠가 잘못했네.”
비화도 이번엔 데이비가 조금 심했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탓하지는 않았다.
따지고 보면 결국 그녀가 넬타리드를 도발한 게 원흉이었으니까.
비화는 조용히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성모의 영혼석을 들어보았다.
에이리아의 힘으로 몽마 신관인 엘리시아가 떠나보낸 양부의 혼을 담아둔 그릇이다.
“아직도 준비가 안 됐어?”
[죄송합니다. 여신께서 보여주신 많은 것들은 저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다른 세상…… 몽마가 위협받지 않는 세상에 그녀를 아껴줄 수 있는 존재와 만난 것까지…….]
“이제 시간이 없어. 아무리 엄마의 힘으로 빚은 영혼석이라도 무한히 영혼을 붙잡고 있을 순 없는 거야…….”
[차라리…… 제가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게 아닐는지요…….]
엘리시아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천천히 딛고 일어서고 있다. 물론, 지구라는 존재와 그녀의 마음을 한순간에 빼앗아버린 시우의 존재가 그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지만 근본적으로 남성에 대한 면역이 없던 엘리시아가 단시간에 저렇게 발전할 수 있는 건 큰 축복이며 기회였다.
“그냥 떠나겠다고?”
[네. 엘리시아는 저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발판을 만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나타난다면 오히려 그 아이를 혼란스럽게 할 겁니다.]
그의 의견은 제법 타당했지만, 비화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냉철하다는 말이 맞네. 깔끔하지만 너무 차가운 판단이야.”
[여신이시여. 어리석은 저로서는 엘리시아의 눈물을 다시 볼 자신이 없습니다.]
“결정은 스스로 하는 게 맞겠지. 존중할게. 다만, 후회하지 않게 신중하게 생각해.”
* * *
에반젤린은 처음 입어보는 듯한 아름다우면서도 간편한 드레스를 이리저리 내려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불편한 건 감수할 일이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꾸민 모습에 어색함이 앞선다.
“음, 그래 아주 좋아. 어디 가서 기 안 죽겠다.”
“그냥 엄마 자기만족 아니에요?”
“얘는? 네가 사교회가 얼마나 지독한지 몰라서 하는 말이야. 기왕 가려고 했으면 누구도 널 업신여기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게 내 역할이고.”
“음…….”
“그래도 네 속을 뒤엎는 놈이 있으면…… 딱 세 번만 참고 한 대 후려쳐도 돼.”
“명심할게요.”
일리나의 기술은 레벨업을 했다!
단순히 티오니스의 유행을 넘어 지구나 다른 세상의 디자인까지 공부한 보람이 있는지 제법 생소하면서도 그리 어색하지도 않고 오히려 눈을 떼기 힘들게 만들었다.
마냥 일리나가 전문 디자이너 같은 노련함까지는 없다지만 적당한 선이기에 오히려 일반적인 시선으로 보면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간단한 화장과 장식, 드레스까지 풀무장 상태에 들어간 에반젤린이 마음에 드는지 일리나는 연신 미소지으며 지구에서 구해왔던 디지털카메라로 그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다들 아주 깜짝 놀랄 거야. 이럴 게 아니라 영상이라도 남겨놓을까?”
“어우 됐어요. 엄마는 사교회보다 전장을 더 많이 다녔으면서 왜 이렇게 전문적인 거예요?”
“제국의 황녀가 얼마나 숨 막히는 자리인지 모르는구나?”
“이제 됐죠? 이거 벗을래요.”
“아쉽긴 하지만…… 그렇게 해.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우웅…… 우웅…….
그때였다.
에반젤린은 자신의 앞으로 온 수정구가 울리는 것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야?”
아…… 별거 아니에요. 저 잠깐 연락 좀 할게요.“
간단하게 장식만 뺀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녀가 연락을 받기가 무섭게 데이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에린아.
“네, 아빠.”
담담하게 대답하던 에반젤린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는 데이비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화두를 열었다.
“아빠. 대체 무슨짓을 한 거예요? 이게 맞아요?”
-음…… 이게 설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또 무슨 변명 하시려고. 참고로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나한테만 말해봐요.”
-에린아. 아빠 믿어?
“아뇨?”
-그게…… 사실 조금만 쓰려고 했는데 말이야. 륀느가 착각해서 다 가져왔나 보더라…….
데이비의 대답에 에반젤린이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진짜 양심이 있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 대체재라도 구해갈 거야.
“솔직히 조금 실망이네요…….”
데이비는 조금만 가져오라 했지만, 륀느는 그 양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몰랐고, 대뜸 다 가져와 버린 것이었다.
륀느도 뒤늦게 명령전달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고. 그땐 이미 늦은 후였다.
“그래서. 대체할만한 건 있어요?”
-그렇지않아도 여기 괜찮은 재료가 있어서. 그때까지만 네 엄마에게 비밀로 해줄래?“
“어휴, 그래서, 어디에요. 지금.”
-트로이라는 곳이야. 야야! 륀느! 그거 먹는 거 아니다!
“트로이?”
-그래. 비화의 장치가 없어도 진입이 가능한 소수의 거품 차원이야. 륀느와 초단이는 며칠 정도 나와 움직일 테니. 그때까지만 네 엄마 잘 다독여줘. 알맞은 소재 구하기 전에 들켜서 잡히면 진짜 변명도 못 하니까.
그래. 아빠가 아무리 술을 좋아하고 취미에 환장하는 인간이라도, 세상 그 누구보다 엄마들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이런 짓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질렀을까.
물론, 지금 행동이 잘한 짓은 아니지만. 참 요령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참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사실 아빠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요.”
이에 에반젤린은 아주 악랄한 계획을 꾸몄다.
-음?
툭!
그리고는 미련 없이 연락을 끊어버렸다.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요소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두 번째는…….”
* * *
에반젤린의 말이 영 신경이 쓰여서 집중이 되지 않는다.
아니 그래서 뭔데, 말은 다해야 할 거 아니야.
“흐음…… 조사는 일단 며칠 정도 미루는 게 좋겠지, 그런데, 그건 또 뭐야.”
데이비는 심드렁한 얼굴로 거대한 새의 다리를 질질 끌고 오는 륀느를 바라보았다.
륀느는 콧김을 내뿜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이번엔 그거 해달라고?”
“데이비 님의 눈치를 륀느가 높게 평가.”
무표정이지만 그 안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보인다.
“우아! 큰 새! 큰 새!”
“치키니야? 청다니는 양녀미 좋아요…….”
홍단이 청단이는 그저 여기서 노는 게 즐거운 듯 보였다.
현재 데이비가 있는 이곳은 숲속에 버려진 마을이었다.
사람이 자리를 비운 지 얼마 안 된 듯 풍화 현상은 거의 없지만 완전히 버려진 곳이기에 며칠 정도 이곳에 조용히 머물기엔 최적의 장소이기도 했다.
굳이 이 세상을 탐험할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청단이는 양념이 좋아? 홍단이도?”
“홍다니는 간장!!”
“음, 재료가 있나 모르겠네.”
아공간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익숙하게 끄집어낸다.
어떤 상황이건 써먹기 위해 넣어둔 것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데이비는 익숙하게 새의 깃털을 뽑았고, 다리 살을 빠르게 잘라낸 뒤 피를 빼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트로이라는 세상은 정말 독특하기 그지없는 생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군은 물론 신기한 방향으로 진화한 녀석들도 보일 정도였다.
“으…… 으으. 좋은 냄새!”
익숙하게 살점을 잘라내고 가마솥에 넣어 튀겨낸 뒤 접시에 얹었다.
“마시따!”
특별한 소스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 아이는 그저 맛이 있다며 다리를 뜯었고 그럴 때마다 몸을 부르르 떨며 행복해했다.
고소한 튀김 향이 이 울창한 숲 곳곳에 퍼져나간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가서 머리 박고 빌까?”
“데이비 님의 업보,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그 업을 청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평가.”
“나도 죽지만 너도 끝장인 건 알고 하는 소리지?”
“륀느, 이곳에서의 휴가를 매우 높게 평가.”
아무렇지도 않게 아주 자연스레 태세 전환하는 것이 가히 놀라운 수준이다.
“계획의 개요를 요청.”
“우선 페르세르크가 화가 풀릴 때까지만 지켜보자. 조금만 진정하면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할 수 있을 거야. 그동안 페르세르크의 화를 풀어줄 만한 소재를 구하는 게 급선무겠지. 적당한 게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무려 마왕이었던 그녀의 뿔 표면을 조금씩 갈아서 모아온 것들인데 그리 쉽게 구해질 리가 없다.
“데이비 님. 차원 트로이에 데이비 님이 조사해야 할 것이 있다고 언급.”
“그것도 있긴 해.”
지구에서 한창 난리를 친 다곤 패러사이트는 이 거품 세계에서 넘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다곤 패러사이트는 처리되었지만, 만약 정말로 이곳에서 넘어온 게 맞다면 비화를 불러서라도 강제로 조율해서 길목을 틀어막아야 했다.
가서 한바탕 휘저어버릴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삭였다. 괜히 날뛰다가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페르세르크가 여는 지옥의 문을 볼 수 있으리라.
더구나 그녀가 극대노를 하게 만든 원흉이 결국 그 자신이었으니 어디 가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그때였다. 인기척이 숲 너머에서 느껴진다.
“구경 그만하고 나와.”
작은 인기척에 데이비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내는 이는 없었다.
“청단아, 그 뼈 줘볼래?”
“웅? 여기요…….”
청단이가 쪽쪽 빨아먹고 남은 뼛조각을 건네주기가 무섭게 데이비는 뼛조각의 끝에 날카로운 오러를 두르고는 그대로 던져버렸다.
터어엉!!!
동시에 거목하나가 마치 충격파에 찢겨나간 것처럼 원 형태로 뚫려버렸다.
“으…… 으아악!!”
“꺄아악!”
기겁한 듯한 세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세 명의 인영이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꼬맹이들이네?”
“그…… 그쪽도 젊어 보이는데요?”
“니들보단 많이 살았어.”
“으…… 우리 마을 영감님 같은 말투야…….”
잔뜩 긴장한 소년소녀들은 모험가라도 되는지 경장갑에 각자 무장도 하고 있었다.
요란스러운 롱소드에 지팡이, 그리고 신관을 상징하는 석장까지.
소녀는 상당히 귀여운 외모였고, 소년들도 하나같이 앳되고 잘생긴 편이었다.
언젠가 크면 미래가 제법 기대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생기고 예쁜 아이들이다.
우물쭈물하며 걸어 나오는 그들을 향해 데이비가 질문을 던졌다.
“너흰 뭐냐?”
“그…….”
“왜 남 밥 먹는데 구경을 하고 있어.”
그 물음에 소년이 눈치를 살피듯 우물쭈물하던 그 순간.
사제복장을 입은 소년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배고프냐?”
“네…….”
데이비가 튀긴 고기 하나를 이리저리 움직이자 녀석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이리저리 구르며 치킨을 따라온다.
“먹어.”
이윽고 데이비는 한숨을 내쉬고는 소년소녀들에게 치킨을 던져주었다.
“감사합니다!!”
“이거 간장이 마싯서! 홍다니가 아끼는 건데 줄게!”
“오…… 오오. 맛있다!”
“정말 맛있어요!”
세 꼬맹이는 마치 며칠간 굶은 것처럼 정신없이 고기를 입안에 쑤셔 넣었다.
어찌나 잘 먹는지 담담하게 식사를 하던 륀느조차 맛있는 부위를 떼어내 그들에게 건넬 정도였다.
“푸하…….”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뻑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는 녀석들을 데이비는 말없이 훑었다.
나이는 대략 십 대 중반 정도.
티오니스에선 16살이 성년이라지만 그보다도 어린 나이로 보인다.
지구에서는 20살이 성년이라고 했을 때 이 아이들은 아직 보호받아야 할 어린애들이었다.
“그래서. 뭔데 이 숲에서 밥도 못 먹고 다니고 있냐.”
“헤헤…… 저희는 그게 이번에 갓 용병이 되었거든요.”
“용병? 니들이?”
검을 든 소년은 칼릭스. 지팡이를 든 소녀는 베라, 그리고 사제로 보이는 소년은 바론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나이는 고작 14살. 예상대로 아직 어린 나이였다.
데이비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네. 실은 조합에서 랫서 마우스 퇴치 의뢰를 받아서요. 녀석들의 서식지를 찾아가던 중 길을 잃어버려서…….”
녀석들의 말에 데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랫서 마우스인지 뭔지를 찾아다니다가 길을 잃고, 배까지 꺼졌다?”
“네! 형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났을 거예요. 그런데…… 형은 용병이신가요?”
“멍청아, 복장을 보면 몰라? 귀족님이시잖아!”
소녀가 소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소리쳤다.
“아하하…… 그렇구나.”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오빠도 이곳을 탐사하러 오신 건가요? 그런 것치고는 어린애들도…….”
“가족여행.”
그 말에 세 꼬맹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족여행이요?! 이 위험한 곳에요?!”
“문제가 되나?”
“아…… 하긴, 닭 뼈로 나무를 날려버리시는 분이라면…….”
떨떠름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 용병 조합에서 저희 이름을 말하면 반드시 사례할게요.”
“너희는 용병 일을 계속 할 거냐?”
“물론이죠. 저희는 세상을 구한 초월급의 위인들처럼 강해지는 게 목표에요.”
“초월급이라…… 그냥 포기하는 게 어떠냐.”
데이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
“뭘 원해서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니들은 가망이 없어.”
때아닌 독설이었다.
하지만 데이비의 표정에 장난기는 없었다.
“죽고 싶은 게 아니면 의뢰 적당히 하고 손 털고 그냥 가업이나 물려받아.”
“이보세요! 형! 말씀이 지나치시잖아요!”
“야…… 그만해…….”
“지금 이게 화가 안 나? 대체 조합원도 그렇고 왜 다들 우리보고 포기하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 우리가 의뢰 경험이 적다곤 해도 전부 성공했잖아!”
제법 자존심이 강한지 소년이 씩씩거리며 화를 낸다.
“당장은 뭘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너희 지금 상태로는 까딱하면 죽어.”
“용병은 언제나 죽음을 달고 살아요. 그런 걱정은 오지랖입니다.”
화를 내듯 소년이 소리쳤다.
“그래. 어차피 곧 떠날 곳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냥 잊어라. 심하게 말해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저도 화를 내서 죄송합니다…….”
소년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정말 맛있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일 거예요.”
“그래그래.”
“헤헤 오빠 걱정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랫서 마우스 토벌 정도는 어렵지 않아요. 애들도 무기를 쥐여주면 잡을 수 있는 조그맣고 약한 몬스터니까요.”
“…….”
“그럼 저희는 가보겠습니다. 형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가기 전에 약속 하나 해.”
“약속이요?”
“쓸데없는 만용은 부리지 말라고.”
“또 그러신다. 저희 자신 있어요. 그래도…… 일단 새겨는 둘게요.”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그들을 보며 데이비는 조용히 침묵했다.
그리고 세 명의 꼬맹이들이 떠나간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됐다.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자. 알아서 잘 사린다는데 뭐.”
녀석들의 말마따나 용병은 자기 목숨을 내놓는 직업이었다.
재능이 없는 걸 나중에라도 알게 되면 언젠가 포기하겠지.
“랫서 마우스라…… 여기도 있나 보네.”
“아부아. 래…… 래…….”
“랫서 마우스.”
“우스! 그게 모야?”
홍단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데이비의 무릎에 올라앉았다.
“사람 팔뚝보다 작은 쥐야. 무리 짓는 쥐와 다르게 소수로 움직이고 잡식성이야.”
“으웅…… 지?”
“쥐.”
“지?”
“……그래, 지.”
저 발음은 절대 고쳐지지 않는다.
“그거 막 아야 해?”
“걱정 마, 쟤들 말마따나 그렇게 위험한 종은 아니니까. 쓸데없는 짓만 안 하면야 별문제 없어.”
“헤헤.”
홍단이가 품에 파고들자 데이비는 말없이 홍단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틀만 이곳에서 머무르자. 그 후에 움직이면서 페르세르크에게 줄 것도 찾아보고, 조사도 좀 하게.”
“명령 인수.”
비록 집이 있다곤 하지만 묘하게 거부감이 드는 곳이었다.
그래서 아공간에서 캠핑장비를 꺼내 적당히 세팅하자 홍단이와 청단이는 아주 좋아라했다.
그렇게 땅거미가 지는 시간이 흘렀고, 늦은 저녁 시간.
해먹에 나란히 누워 하품하는 홍단이와 청단이의 배를 토닥거려주던 데이비는 멀리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
“여기 있어 볼래?”
그 말에 홍단이와 청단이는 잠이 깨버렸는지 눈을 비비며 천천히 일어났다.
“데이비 님. 혈향을 감지.”
“나도 알아.”
데이비는 곧바로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주워들었고 그대로 숲속으로 포탄 쏘듯 날려 보냈다.
터어어엉!!!
동시에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숲속에서 피 칠갑을 한 사제 소년, 바론이 엉망진창인 얼굴로 뛰어와 쓰러졌다.
“흐아…… 흐으…… 흐아악!”
몸의 상태가 엉망진창이다.
데이비는 곧바로 사제 소년 바론의 몸에 가벼운 회복마법을 걸었다.
이 정도 마법으로 들키진 않을 테니까.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던 바론은 천천히 상처가 낫자 호흡이 천천히 편안해졌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혀…… 형!!”
“무슨 일이야.”
잠깐 만난 인연이지만 아직 어리고 순박한 소년이 피 칠갑을 한 채 정체 모를 괴물에게서 도망쳐온 건 그리 좋은 광경이 아니었다.
스으윽…….
“데이비 님. 랫서 마우스로 추정. 하지만 극심한 변이를 일으킨 것으로 확인.”
이윽고 숲속에서 륀느가 사람만 한 쥐 한 마리를 질질 끌고 나타났다.
데이비가 던진 돌멩이에 머리가 뚫렸는지 녀석은 즉사해 있었다.
“형! 도와주세요!! 카…… 칼릭스와 베라가! 제발요. 형!”
눈물 콧물을 다 흘리며 소리치는 녀석을 보며 데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넘어가질 못하네.”
자리에서 일어난 데이비가 손을 뻗자 홍단이와 청단이가 순식간에 검으로 변하며 그의 손에 안착했다.
“안내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지. 젊은 혈기는 가끔씩 육신을 죽음으로 내몬다.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바론을 제외한 나머지 둘이 어떤 상황일지 예측이 가는 기분이었다.
바론은 거의 넋이나 간 것처럼 데이비를 안내했다.
휘청거리면서도 칼릭스와 베라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는 녀석은 겉보기에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녀석이 데이비를 커다란 동굴로 안내했을 때.
데이비가 물었다.
“니들. 랫서 마우스 잡으러 간 거 아니었냐?”
“…….”
“무슨 깡으로 코볼트 동굴에 기어들어 간 거야.”
그 물음에 바론이 훌쩍거리며 아무 말도 못 하자 데이비는 그대로 그를 걷어차 버렸다.
“대답해 임마.”
“흐…… 흐어엉!!”
“후, 아니 됐다. 들어가자.”
한숨을 내쉬며 동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좁고 어두운 동굴 속에서 개와 인간의 얼굴을 합쳐놓은 듯한 기괴한 몬스터들이 기습하듯 데이비에게 덤벼들었다.
“혀…… 형! 위험해요!”
뒤따라오던 사제 소년 바론이 급히 외친다.
하지만 코볼트들은 데이비의 근처에 오기도 전에 그대로 새카만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데이비의 곁으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푸른 화염이 일렁였다.
“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따라와. 니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겠다만, 이거 하나 명심해라.”
이윽고 또다시 함정을 파고 공격해오는 코볼트들을 향해 가볍게 발길질을 날려버리자 거대한 풍압과 함께 동굴 일부가 무너졌다.
그리고, 그 너머의 풍경이 보였다.
“희망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어? 아…… 아아아아!!!!”
지름길을 뚫듯 뻥 뚫린 동굴 너머엔 참혹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나무에 검사 소년이었던 칼릭스와 마법사인 베라가 매달려있었다.
그래. 그것까지만 보면 문제가 없지.
하지만,
“우…… 우욱!!”
결국, 참지못하고 바론이 헛구역질을 하며 무너져내렸다.
나무에 매달린 어린 소년 소녀는 코볼트에게 산채로 파먹혔는지 팔다리가 잘려나가 있었고 배가 휑하니 찢어진 채 차가운 시체가 되어있었다.
동굴 내부에는 이전과 다른 것들이 있었다.
기괴하게 변이된 형태에 덩치도 큰 코볼트, 그리고 바론을 쫓아왔던 거대 랫서 마우스와 동일 종으로 보이는 녀석들이 가득하다.
이놈들에게선 다곤 패러사이트처럼 변이된 것들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산채로 파먹히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텐데.
칼릭스와 베라의 얼굴은 끔찍한 고통과 두려움으로 점칠되어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의식을 유지한 채 그것을 지켜보았다는 증거였다.
-크아아아앙!!!
동시에 늘어져 잠을 청하고 있던 변이 코볼트들이 일제히 데이비와 바론을 향해 고개를 들었고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며 일제히 날카로운 발톱을 꺼내고 달려들었다.
반사적으로 라이트 세이버를 뽑아 드는 륀느의 앞에 팔을 뻗어 데이비가 제지한다.
“륀느, 인류의 구원자.”
륀느는 대답 대신 자신의 손에 입자들을 끌어모았고, 이내 묵빛의 빠루를 만들어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데이비에게 건네주었고, 데이비는 그것을 받자마자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이 정도로 똑같으면 다곤 패러사이트가 여기서 넘어간 건 맞는 모양이네.”
트로이라는 이 거품 차원은 거품 차원답지 않게 생명력과 마나가 풍부하다.
어느 정도 안정되는 즉시 고등급 차원으로 발돋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다곤 패러사이트에 대한 조사.
그리고 페르세르크에게 건네줄 만한 상위급의 소재에 대한 단서.
두 개를 모두 한 번에 찾았음에도 데이비의 기분은 대놓고 더러워졌다.
그는 가볍게 빠루를 한 바퀴 돌린 뒤 가장 가까이 다가온 코볼트를 시야에 담았다.
칼릭스의 검을 빼앗았는지 코볼트가 날카롭게 검 끝을 찔러 들어오지만, 데이비는 망설임 없이 파고들며 빠루를 휘둘렀다.
코볼트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데이비의 빠루는 정확히 녀석에게 닿는다.
쩌어어어엉!!!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터져나가며 그대로 코볼트의 머리통이 터져나갔고, 그 충격파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몬스터들의 머리를 휘감고 터뜨려버렸다.
무형의 충격파가 체인 라이트닝마냥 퍼져나가는 건 가히 장관이었다.
바론은 생각지도 못한 폭발적인 위력에 경악한 듯 바짝 얼어붙었다.
이후 데이비는 조용히 말했다.
“륀느. 안쪽에 몬스터들을 변이시킨 매개체가 있을 거야. 조사에 필요하니까, 가져와. 방해하는 놈이 있으면 사지를 모조리 잘라도 좋아.”
“명령 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