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47화
내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리자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용사. 전에도 말했지만, 당장이라도 마음을 바꿔라.”
그의 말에 용사 아리스는 단호하게 일어섰다.
“미안해 영주님! 하지만 나는 물러날 수 없어!”
“고작 어린애가 뭘 하겠다는 거지? 그런 일은 귀족과 기사가 맡아야 할 일이다! 평민 출신의 어린애 따위가 용사라는 이유로 월권을 행할 자격 따윈 없다!”
“내가 아니면 많은 사람이 다쳐.”
귀족은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났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 제법 익숙해 보인다.
“흥! 허면 용병도, 모험가도, 기사도 아닌 의사를 그 위험한 곳에 데려가겠다는 건 무슨 꿍꿍이지?”
“영주님. 이 사람만이 그 사태를 해결할 수 있어. 대성녀님의 힘으로도 한계가 있다고.”
웃는 얼굴이지만 한치도 밀리지 않는 용사를 보며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됐다! 네년하고 말을 더 섞느니 내가 때려치우고 말지. 받아라!”
그가 용사 아리스에게 작은 금속패를 던졌다.
“어?”
“그걸로 전용 마부라도 고용해라! 네 녀석! 이곳에 올 때 걸어왔다지? 말도 제대로 못 타서?”
“기르울은 말이 무서워하고 나는 좀 미숙하지 헤헤.”
“흥!”
그렇게 말하며 돌아가 버리는 그를 보며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저 사람은 매번 저러더라. 전에는 전장까지 와서 나하고 투덕거리고.”
“하하…….”
사제라고 자신을 소개한 발린이라는 소년이 쓰게 웃었다.
“그도 나쁜 뜻은 없을 겁니다. 입이 좀 거칠긴 해도 말이죠.”
“자 그럼 결정해줄 수 있어? 당신의 힘. 제한이 어느 정도야?”
“그 정도 치료에 제한이랄 것도 없어. 극지의 위치를 알려주고 출입을 자유롭게 해준다면 얼마든지 치료해주지.”
내 말에 그녀는 환하게 웃는다.
하지만 저 미소에 숨겨진 선한 광기와 절벽에 내몰린 것 같은 괴리감은 많은 것을 다르게 보게끔 만들었다.
“그럼 교섭 성립이구나!”
솔직히 방금전의 귀족처럼 어린아이가 거대한 명운을 짊어지는 건 딱히 달갑게 보이지 않았다.
* * *
용사 아리스, 페어리 마법사 마리, 사제 소년 발린, 마지막으로 젊은 오크 기르울은 영주가 준 패를 이용해 마차를 구매했고 극지로 향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거리가 멀었는지 그들은 중간의 마나 게이트를 이용했고, 반쯤 폐허가 되어버린 요새에 빠르게 도달했다.
“여기야.”
입꼬리는 웃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언제봐도 참혹하네…….”
페어리 마리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반쯤 폐허가 된 요새 곳곳에 부상을 입은 이들이 가득해 보였다.
대부분은 마나를 다룰 줄 아는 기사들.
“여기가 극지인가?”
“극지의 입구. 정확히 어떤 지형인지는 우리도 쉽게 말해줄 수 없어. 정보가 새나갔다가 피해자가 나오면 안 되니까. 몬스터가 공세를 거의 없지만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사악한 기류는 이곳에 존재하는 데몬들에게서 흘러나와.”
“데몬?”
“저거야.”
페어리가 천천히 날아와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들것에 실려 운반되는 사체. 검은 근육질의 피부에 괴이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저 녀석들은 어느 날 한순간에 나타났어. 그리고 이 일대 지역을 모조리 죽음의 땅으로 바꿔놓았지.”
이들은 변이의 근본이 되는 순수한 에너지가 근본부터 사악한 것이라 여기는듯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아직 몰랐다.
“우리는 저 데몬들의 왕이 이 숲 어딘가에 자리 잡았다고 생각해. 그렇기에 용사가 필요한 거야.”
용사, 아리스. 그녀가 가진 힘은 그녀를 초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힘이 변이된 몬스터에게 치명적으로 적용한다는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아무리 싸워봐야 쉽게 쓰러지지 않는 괴물들이니 용사인 그녀의 힘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상황.
용사의 파티원들 또한 적당한 수재 수준의 힘을 지니고 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용사의 힘에 영향을 받아 시너지를 발현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재들이었다.
즉. 실질적으로 데몬들을 처리할 수 있는 건 용사의 힘과 그 힘에 영향을 받아 인챈트된 파티원들이 전부라는 모양이었다.
“아아…… 용사. 왔는가.”
“페르무드 아저씨. 베르울 저주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어!”
“무…… 무슨?! 진짜인가! 정말로 치료할 수 있는가!”
그의 시선이 내게 닿는다.
“자네로군! 이건 대륙의 흥복일세! 정말 다행이야! 용사! 정말 치료한 게 맞는가?!”
“직접 봤어. 아저씨. 그 자리에서 세 명을 완치시키는 것을.”
“세상에…… 오오. 정말 다행이야. 혹시 자네는 성자라도 되는가!”
성자 맞다.
“데이비. 지금 치료 가능해?”
그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인 그 순간이었다.
“용사님! 정찰조가 준비되었습니다!”
“벌써요?!”
“네! 용사님과 파티원분들만 오시면!”
“네! 금방 갈게요!”
“데이비! 나 갔다 올게!! 일단 이곳도 극지니까 원하는 대로 조사해. 하지만 내부로 들어가는 건 조금 있다가 갈 수 있을 거야! 우리가 널 지켜주려면.”
그녀의 외침에 나는 그녀를 향해 다시 질문했다.
“안 무섭냐?”
나는 들것에 실려 가는 시신과 화장되고 있는 시신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온전하게 죽은 이가 없을 정도로 끔찍한 죽음들이다.
“헤헤. 나는 용사잖아. 그보다 미안해. 제안을 해서 데려왔는데 바로 원하는 걸 들어주지 못해서.”
“상관없다. 여기 환자들이 일단 더 급한 상황이니까. 조사는 따로 하면 되고.”
그녀의 미소에서 다시금 본 것은 지독한 광기.
자신이 반드시 누군가를 구해서 대륙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는 광기였다.
오만이 아닌 그녀만이 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
한때 레이나도 비슷한 일념을 지니고는 있었다.
자신이 초대 리치 닉스를 처리하려 했을 때처럼.
생각해보니 그때와 상황이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레이나는 20대 후반의 나이였고, 눈앞의 아리스는 고작해야 열넷이라는 차이.
나이 차만 놓고 봐도 두 배에 가깝다.
용사파티가 조사대에 진입하고 출정을 위해 떠난다.
말을 잘 못 타는 용사 아리스는 사제 파티원인 발린의 뒤쪽에 앉아 떠나고 있었다.
“용사는 어리지.”
“…….”
페르무드의 중얼거림이 내 귓가에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아이가 우리의 희망이야. 퍽 웃기지 않는가. 지켜야 할 아이들이 전장에 내몰리는 이 상황이.”
그도 이상한 건 아는 모양이었다.
“용사의 목표가 뭡니까.”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면 이곳의 기사들은 지원이 불가하네. 초월급 존재들이나 그나마 버티지만, 근본적으로 용사파티를 제외하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런 이야기를 해줘도 됩니까?”
“자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리스 저 아이는 자네를 동료로서 받아들일 생각으로 가득하더군.”
“제가 전투를 못 해도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일세. 용사의 목숨은 이 대륙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은 자네와 같은 그녀의 파티원.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목숨을 버려 길을 여는 이들일세.“
미련할 정도의 정도였다.
“아마 우리는 죽어서도 벌을 받겠지. 저런 아이를 전장에 밀어 넣었다고.”
“뭐. 용병들 중에서도 14살짜리들이 간간이 보였는데요 뭐.”
“이곳은 지옥이야. 용병들의 삶과는 다르네. 어제 같이 밥을 먹던 이가 오늘 머리통이 날아가 버리는 게 흔하단 말일세.”
그의 말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는 검은 피부가 되어 괴로워하고 있는 환자에게 다가갔다.
“페르무드 이 사람은?”
“아. 대성녀님. 용사가 데려온 파티원 후보입니다.”
“파티원 후보?”
“베르울 저주를 해주할 수 있는 존재이지요.”
그 말에 대성녀라 불린 여성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는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곳은 지옥이다. 그곳보다 더 심하다.
그럴 수는 있다.
“미안하지만 공감은 못 하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화아아아악!!!!!
[7위계 성마법]
[역천]
[하이네스 힐]
구조가 변경된 고위 성마법이 펼쳐지기 시작하자 대성녀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여졌다.
동시에 내 등 뒤의 성흔이 우웅! 하며 공명한다.
“페르무드 장군.”
“어…… 어어…….”
직접 치료의 현장을 목격하고도 할 말이 없는지 그는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고작 열네 살 된 아이 셋이 코볼트에게 패배해 묶인 채로 산채로 파먹혔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살을 도려내지고, 팔다리가 사라지는 걸 보면서 죽었어요.”
“…….”
“그런데도 어느 한쪽이 지옥이라 확신합니까?”
그 질문에 페르무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약 10초가 지났을까.
무려 수십 명의 환자의 몸이 완전히 회복된다.
7위계 이상의 성마법을 사용한 이상 페르세르크에게 들킬 수 있겠지만 나는 순간적인 씁쓸함을 덜어내지 못했다.
운이 좋다면 걸리지 않겠지.
“세상에…… 그 많은 환자들이 한순간에…… 대체 당신은…….”
대성녀가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천막을 나서며 말했다.
“다들 푹 재우세요. 재발의 우려가 있으니 당근과 양파 꼭 먹이시고.”
내가 기적에 가까운 치료로 베르울 저주에 빠진 이들을 구해낸 소식이 퍼져나가는 건 한순간이었다.
수많은 사람은 지독한 저주에서 해방될 방법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뛸 듯이 기뻐하며 나를 성자라 칭했다.
다만 나는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딜레마일까.
나는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
그렇게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륀느는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숲 일대를 돌아다니며 변이 수정의 단서를 찾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용사파티가 귀환했다는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지만 피곤함이 숨겨지지 않는 미소였다.
사파이어색의 단발을 흩날리며 검을 높이 들어 올리는 용사.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쪽으로 따라오는 파티원 중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
“…….”
사제 발린.
용사와 비슷한, 아니 조금 더 나가는 나잇대의 소년.
그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데이비. 돌아왔어.”
웃는 얼굴로 말하는 그녀를 향해 내가 물었다.
“그 사제 꼬맹이는.”
그 물음에 페어리 마법사 마리는 시선을 돌린 채 눈시울을 붉혔고. 용사 아리스는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말했다.
“미안, 지키지 못했어…….”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기사들의 들것에 한 소년이 오는 게 보였다.
“용사. 무너지지 마라. 우리 파티원들의 목숨은 오로지 네가 종착역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바치는 것이다. 발린의 희생…… 덕에 우리는 데몬의 우두머리 중 하나를 죽였다.”
“흐윽…… 그래……. 네 검에 죽은 거야. 그 괴물 자식은. 그리고, 발린은…… 으으…… 흐으윽…….”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대륙의 명운이 그들의 어깨에 걸려있다면 맨정신으로 견딜 수 있을까.
실제로 오크는 말은 저리했지만 이미 그의 눈은 터질 것처럼 충혈되어있었다.
“그럴 수가…… 사제님이…….”
사제 발린은 어리다. 대성녀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그는 아리스의 힘에 시너지를 받아 대성녀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사제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죽었다.
“이제 다 끝인 거야?”
기사와 병사들 사이에 혼란이 가중되어지자 페르무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여기서 꺼낼 이야기가 아니었다며 나를 힐난하는듯한 시선이다.
그때 용사 아리스가 검을 높이 들었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아! 우리 파티가……! 내가! 여러분 모두를 지켜낼 테니!!”
용사의 환한 미소와 함께 새하얀 빛이 터져나가자 병사들과 기사들 사이에서 천천히 안정이 감돌기 시작한다.
그녀가 건재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냥 울고 싶은데. 무너지고 싶을 텐데.
어째서일까. 나는 저 웃음이 지독한 절규처럼 보였다.
친한 파티원이 죽었음에도 웃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지독한 짐에 짓눌리고 있는 불쌍한 아이처럼 보였다.
이곳은 가상공간 같은 가짜가 아닌 하나의 세상이다.
페르세르크에게 걸리더라도 내가 나서주는 게 맞을까.
그때였다.
[데이비. 결정은 네 자유지만 여기서 넌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 이곳의 인간들은 스스로 딛고 일어설 수 있으니. 넌 차원들이 스스로 일어설 힘을 기르게 하고자 했지? 그렇다면 괴로워도 지켜보렴.]
그래. 내가 지구에 요구했던 것처럼.
여신의 계시가 오랜만에 성흔을 통해 공명한다.
하지만 나는 질문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이 죽습니까?]
[그 과정에서 저런 아이들이 얼마나 희생되어야 합니까.]
마족과의 전쟁으로 티오니스에서 대량 생긴 전쟁고아들을 내가 수용한 전력은 있지만, 그조차 완전한 대책 따위는 되지 못했다.
대규모 전쟁이란 이토록 많은 피와 슬픔이 피어난다.
그리고. 비화가 보고 살아가야 할 세상에 이런 절규가 남는 것 자체가 달갑지 않았다.
지구의 일은 단순히 그들 스스로 일어서라 말했다.
하지만.
깊게 파고든 현실을 마주했을 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에 모순을 느꼈다.
그날 저녁. 베르울 저주를 치료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묵묵히 고뇌하던 내게 용사가 다가왔다.
“미안해. 사실 데이비를 파티원으로 데리고 다니려고 했어.”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 발린이 죽었어.”
“그래.”
“내가 오만했나 봐. 널 데리고 들어가는 게 얼마나 네게 부담이 되는지 생각지 않았어.”
“나는 네가 도와주지 않아도 들어갈 거다.”
“그러면 안 돼. 저 안은 위험해.”
“그래도 가야 하는 이유가 있어.”
단순히 페르세르크에게 줄 것을 구하고 변이 수정의 조사를 위해서가 아닌 지금 내가 고뇌하고 있는 것을 정리할 수단이 필요했다.
“널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어.”
“상관없다. 처음 말했듯 너희가 아니었어도 나는 들어갔어.”
“그 꼬마들을 데리고?”
“륀느는 저래 봬도 강하거든.”
“…….”
용사는 슬프게 웃었다.
“내가 더 강해질게. 데이비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웃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이 대륙의 유일한 희망.”
[용사]이니까.
“곧 비 온다. 들어가라.”
그렇게 말하며 아공간에서 우산을 꺼내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아리스는 비를 맞으면서도 내가 건넨 우산을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