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449화 (1,449/1,559)

제 1449화

고속 원정이라 하여 쉼 없이 달리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원정을 위해 들어온 직후부터 제대로 된 전투를 수행한 적이 없었다.

내가 지켜주었기 때문에?

아니, 정확히는 우글거리던 몬스터의 수가 극도로 줄어 들어있었다.

그 때문일까. 원정대는 적과 마주하지 않고 빠르게 진입하고 있음에도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몬스터의 수가 생각 이상으로 너무 적어. 낙관적으로 보이는 증세면 좋겠는데…….”

“함정일 수도 있다는 거지.”

내 대답에 용사 아리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이해했지만 이렇게 순조로우면 더욱 불안할 수밖에.

“그래도 걱정 마. 내가 데이비는 꼭 지켜줄게.”

“내 몸보단 널 신경 써.”

헤픈 웃음을 흘리고는 기사들에게 돌아가는 아리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마나를 퍼뜨렸다.

두어 차례 파장이 퍼져나가며 근처에 있는 것들에 대한 정보가 스며든다.

그리 위험해 보이는 몬스터는 없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소수의 상위 개체들이 근처에서 접근하는 게 보인다.

선발 정찰조가 그들을 발견하진 않았지만 시간문제이리라.

저 정도 수준의 몬스터라면 굳이 상위마법으로 위험하게 위치가 들킬 위험성을 감수할 필요도 없고 적당히 버프 마법만 알게 모르게 걸어줘도 해결될 일이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인간이 초인적인 힘을 내는 것처럼 위장하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적 발견! 다수의 상위 개체!”

그 말에 긴장을 놓으려던 원정대원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콰앙!!!

동시에 뒤따라오던 선발대들과 마주쳤는지 숲속에 굉음이 울려 퍼진다.

“개체는?!”

“변이된 오우거 한 마리와 홉 고블린 다수!”

아리스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성검을 뽑아 들고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그녀의 힘이 사방에 퍼져나가며 그녀의 파티원들에게 스며든다.

그리고, 그녀가 본대로 그녀의 힘은 내게도 다가왔지만 정작 스며들기만 할 뿐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리스의 예상과 달리 그녀의 힘이 내게 영향을 미칠 수준이 되지는 못한 듯 했다.

-크어어어어어엉!!!

이윽고 기괴하게 변이된 거대 오우거와 홉고블린 삼십여 마리가 들이닥친다.

“용사, 자잘한 홉들을 맡지. 오우거를 정리하고 합류해다오.”

초월급 용병 출신, 검성이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 오러블레이드를 뽑아낸다.

“알겠어요! 가죠!”

아리스의 대답에 나는 곧바로 신성력을 남들이 모르게 끌어올렸다.

[스트렝스]

[어질리티]

[하이퍼바디]

[스톤스킨]

순식간에 4개의 마법이 각자 5중첩 이상으로 용사 파티원과 기사들의 몸에 스며든다.

전투에 들어간 이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당신…….”

대성녀가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신성력을 다루는 그녀의 실력이 마냥 낮은 게 아니라서 내게서 움직이는 변화를 눈치챈 듯 보였다.

굳이 숨길 필요는 없어 보였다.

“흐아아압!!!”

선공은 검성이었다.

대성녀가 사용한 버프 마법이 모두에게 스며들기가 무섭게 그는 십여 마리의 홉고블린들 사이로 파고들며 검을 휘둘렀다.

소드마스터급 존재에게 홉고블린은 한 끼 간식거리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놈들은 일반적인 홉과 달리 막대한 방어력과 재생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데이비! 뒤쪽으로 물러나!!”

아리스의 외침과 동시에 오크 기르올이 양손에 든 베틀 엑스를 들고 포효한다.

“발카토르!!!”

그의 함성에 마나가 스며들며 전투를 고양시키기가 무섭게 그는 정면으로 오우거에게 덤벼들었고 오크 특유의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오우거와 정면에서 힘겨루기를 했다.

[5서클 풍계 마법]

[윈드커터]

페어리 마리의 전신으로 마나가 넘실거리며 거대한 바람 칼날이 기르올을 보조하듯 오우거의 급소를 향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으으아아아아!!!”

이윽고 기르올의 괴성이 울려 퍼지더니 그의 전신에 그려진 문양들이 번뜩였다.

막대한 힘을 순간적으로 폭증시킨 그가 오우거를 힘으로 튕겨낸다.

“빈틈이다!!! 아리스!”

그의 외침에 아리스가 섬광처럼 파고들었다.

[섬광의 검궤]

[일섬필광]

미소를 지운 채 굳은 얼굴로 섬광처럼 날아든 그녀의 검이 정확히 오우거의 급소, 즉 마리가 상처를 낸 곳에 파고들었다.

용사만이 사용 가능하며 그녀의 파티원이 영향을 받는 용사의 힘. 순백의 에너지였다.

변이된 몬스터에게 치명적이며 아리스가 용사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에너지체.

다만 지금 확인해보니 저에너지가 단순히 적에게 치명적인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어린 그녀가 초월급 용병들 이상의 힘을 발현하는 게 가능한가 의문이었는데 저 힘은 그녀의 육체 능력 또한 상승시켜주는 듯 보였다.

-그아아아아아!!

엄청난 속도로 파고든 그녀의 검은 곧바로 오우거의 급소를 뚫어버렸다.

“어?”

푸콱!!!

그것도 모자라서 내부를 진탕으로 만들어버린다.

정작 공격을 감행한 아리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검을 빠르게 회수하며 오우거의 후속타를 피해 거리를 벌렸다.

페어리 마리와 오크 기르올 또한 아리스에게 가해질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긴장했다.

하지만.

쿠웅!!!!

평소라면 수차례 연계를 해야만 쓰러뜨릴 수 있는 오우거가 순식간에 쓰러져버린다.

“어…… 어어?”

단 한 번에 오우거가 쓰러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아리스는 떨떠름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한방에 쓰러져?”

“이게 무슨…….”

본인들이 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내가 말한다.

“정신 놓을 거냐? 다른 사람들 싸우는 거 안 보여?”

내 말에 아리스가 흠칫 놀라더니 맹렬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홉고블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리스의 힘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건지 일격에 처리하진 못하지만 그들 또한 착실히 하나하나 수를 줄여가고 있었다.

그중 단연 독보적인 존재는 검성이었다.

그는 홉고블린들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고기 조각으로 나눠버리며 적들을 베어 넘겼다.

다만 본인도 뭔가 이상하다 느꼈는지 떨떠름한 표정이다.

“합류할게요!!”

“무슨?! 벌써 처리한 것인가?!”

“뭔가 이상해요! 온몸에 힘이 넘쳐서!”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나 또한 그러니!”

순식간에 오우거를 처리하고 합류한 아리스 덕분에 전황은 순식간에 원정대 쪽으로 기울었다.

전장이 정리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했을 오우거가 순식간에 죽어버린 탓이었다.

다만 자신들의 변화에 경악할 뿐.

“당신…… 당신이 한 건가요?”

“간단한 버프 마법입니다.”

“그게 무슨 간단한 버프 마법…….”

당황한 채 대성녀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을 들은 아리스가 눈을 반짝였다.

“데이비! 데이비 네가 한 거야?”

“신성 마법 정도는 쓸 수 있으니까 버프는 걸어줄 수 있는 거야.”

그제야 이해한 듯 아리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그 점을 생각 못 했어.”

“대단하군, 정말 엄청난 버프였다.

오크 기르올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씨익 웃었다.

“네 덕분에 희생이 최소화되었다. 사망자는 없고 경상자에 그쳤다.”

“이제 시작이야. 긴장 놓지 마.”

지금이야 버프 마법으로 정리가 가능하지만 만약 버프 마법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존재 또한 분명 존재할 것이다.

“나는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게 말했잖아.”

“대단해!”

순식간에 나에 대한 평가가 떡상하는 분위기인 듯하지만 정작 대성녀는 혼란스러운 시선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요. 용사 아리스의 힘이 당신의 힘을 강화 시켜줄 수 있다곤 해도 이 버프는 정도를 넘었어요. 당신…… 대체 정체가 뭐죠?”

그녀는 신성 마법을 사용하기에 가장 혼란스러워했다.

“대성녀,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한 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이 늘어났다는 것뿐입니다.”

“알아요. 아는데 이건 제 상식으로는…….”

“베르울 저주도 해주할 수 있는 뛰어난 사제입니다. 일반적인 사제와 비교 불가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대부분은 내 쪽을 옹호했다.

이에 대성녀는 불안함을 묻어둔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렇겠죠…… 미안해요. 의심해서.”

“괜찮습니다. 대성녀님의 입장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니까요.”

“이해해주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 기세라면 원정을 정말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아리스는 다친 이 없이 승리했다는 사실이 기쁜 듯 보였다.

“우리는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래. 내가 도와줄게.”

비록 여신의 계시를 제하고도 이 이상 힘을 발현했다간 페르세르크에게 들킬 가능성이 있기에 과하게 도와줄 순 없지만, 저들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

본래 존재해선 안될 것들이 존재해서 이 상황의 판을 엎으려 드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후로도 용사파티와 두 명의 초월자. 그리고 상위기사들은 더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처음엔 몬스터만으로 대응하던 이들은 곧 데몬들이 출현하기 시작하자 버프를 받아도 부상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거였다면 죽었을 이들도 중경상에 그치는 정도였다곤 하지만 상황이 마냥 호전된 건 아니라는 게 원정대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

“무슨 생각해?”

세 마리의 데몬들을 베어버렸던 아리스가 굳은 얼굴로 원정대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내가 물었다.

“데이비. 대답해줘.”

“말해봐.”

“이 이상 들어가면…… 희생자가 나오겠지?”

“그렇겠지.”

내가 걸어주는 버프도 힘을 제한하다 보니 한계가 있다.

애초에 내가 이들을 도와주는 건 단순히 아리스의 신념이 마음에 들었고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 봤어. 네가 베르울 저주에 감염되기 시작하는 기사들을 치료하는걸. 본래라면 여기까지 오는 길에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죽었을 거야.”

베르울 저주가 해주되지 못했다면 아마 원정대의 규모는 극단적으로 축소되었거나 늘어났을 것이다.

수로 밀어붙이던지, 질로 밀어붙이던지.

어느 쪽이든 그러하다.

“모두가 살아서 돌아가는 건 욕심일까.”

“글쎄다. 낙관적으로 생각해두는 게 좋다고는 말하지만, 현실적으론 쉽지 않겠지.”

그녀는 쓰게 웃었다.

“그래도 걱정 마라. 내가 도와준다고 말했잖아.”

“데이비.”

“전부 살아 돌아갈 수 있게 해줄게.”

내가 직접 처리하지 않더라도, 저들 스스로 모두 살아서 돌아가게 할 방법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이에 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려던 찰나.

지진이 일어났다.

구구구구구구구구구!!!!

“무슨?!”

깜짝 놀란 아리스와 주변 모두가 긴장하고 있던 찰나.

“데이비?! 조심해!!!”

갑작스레 내 뒤에서 허공이 찢어지며 균열이 일어난다.

이에 영향권 내에서 벗어나려던 나는 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그대로 맡겼다.

스팡!!!

시야가 일변하며 내 앞에 푸른 머리칼의 여신이 나타났다.

“프리아 여신님.”

여신이 나를 불렀다.

프리아 여신은 이내 허공에 손을 그어 어떤 광경을 보여주었다.

갑작스러운 지진과 내가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저기…… 바쁜 일 아니면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방금 전의 지진은 여신이 일으킨 게 아니다. 즉. 제대로 된 공세가 이루어질 터.

그 과정에서 내가 버프 마법이나 보호 마법을 걸어주지 않으면 아리스의 바람대로 모두 살려 보낼 순 없다.

실제로 그녀가 보여준 광경에는 지금까지 조용하던 데몬들과 몬스터들이 일제히 원정대를 압박하듯 움직이는 게 보였다.

데몬들도 본능적으로 더 이상 원정대의 진입을 허가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콰아아앙!!!

이윽고 화면 너머의 갈라진 대지 속에서 거대한 촉수들과 거대한 데몬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황이 좀 급박한 거 같은데.”

내 말에 여신은 천천히 태블릿을 들었다.

[넌 저세상을 책임질 수 있니?]

그 물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 세계는 성장 중이야. 네가 무리하게 도우면 저 세계는 네게 안주해서 저 많은 인류들을 발전하지 못하게 할 거야.]

위기를 넘어설 정도의 과발전은 차원을 망가뜨리니까.

각 차원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전장치를 지니고 있다.

거품 세계를 제외한 다른 세계들에서 내가 날뛰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 건 그 세계들이 성장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다 자란 성년과 아이에게 같은 말을 해도 후에 변화를 일으키는 범주가 다른 것처럼.

그 외의 거품 세계는 애초에 트로이와 같은 세계도 아니었다.

“예전에 다프네에게 들은 적이 있네요. 그럼 제가 이 이상 간섭하면 저 세계는 발전을 못한다는 소리인가요?”

[언젠가 네가 저들을 돌봐주지 않는 상태에서 위기가 닥쳤을 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그 위기를 견뎌낼 만큼 충분히 성장하지 못할지도 몰라.]

티오니스가 많은 발전을 이루었으나 과학발전이 극히 더딘 것처럼 각 차원은 저마다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지구도 지금은 여러 마법발전을 이루지만 한계점 이상으론 올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점에서 넌 정말 이질적인 존재라 할 수 있어.]

내 존재가 그런 차원의 경계선을 마음대로 주물러버리고 있으니까. 본래 프리아 여신이라면 나라는 존재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돕겠니?]

그 물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적당히 손만 거드는 겁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페르세르크에게 들키지 않는 정도의 버프만 사용할 거에요. 그것만으로도…….”

[그건 핑계잖니.]

그녀의 물음에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실제로 내가 정말로 세계를 돕는 이유는 아리스 때문이었다.

“그…….”

[스스로 이겨낼 순 있어. 하지만 네가 제대로 간섭하지 않으면 아리스 저 아이는 반드시 죽어.]

옅게 보이는 운명의 선에서 아리스의 희생이 엿보였다.

[결국, 넌 차원이 스스로 자립하는 걸 지지하기에, 지구에서도 그런 결정을 내렸어.]

변이된 다곤 패러사이트를 지구에 소속된 존재끼리 처리할 수 있도록 나는 그저 지켜보았다.

하지만 트로이에서는 아리스를 지켜주고 싶어서 그런 결정을 철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트로이를 네가 계속해서 신경 쓸 수 있는 게 아니면 지금의 네 행동은 저들에겐 독이야.]

“솔직히 지구에 그런 결정을 내린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저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더군요.”

그러면서 페르세르크에게 들키면 안 된다는 핑계를 대며 내 행동을 은연중에 억제하고 있다.

제대로 방관하는 것도, 제대로 돕는 것도 하지 않는 어정쩡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슬픈 일이지.]

그녀가 나를 똑바로 본다.

[단순히 네 감정에 앞서서 저들을 돕는 것이라면 조금 더 신중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결정해.]

값싼 동정은 뒷일을 책임지지 않으니까.

지금 당장이야 챙겨줄 수 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내가 트로이를 챙겨줄 수 있을까.

불가할 것이다.

나는 그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비화. 에반젤린. 네 아이들 때문에 네가 마음이 흔들리는 것도 이해해.]

용사 아리스는 아직 어리다. 외관만 보면 비화보다 어려 보이고 에반젤린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어려 보인다.

그래서 내가 더욱 그녀의 존재에 신경을 쓰고 있는 건지 모른다.

마치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처럼.

[하지만 너는 온전한 신격. 그것도 자격을 부여받아 세상에 간섭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유일한 기적의 존재. 그게 데이비 너라는 아이이니까.]

이번 일에 대한 선택은 내게 많은 것을 바꾸게 할 것이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따라 앞으로 내 모든 행보가 달라질 테니까.

“인정하겠습니다. 트로이에 들어선 이후로 저는 제 행동에 일관성이 없어요. 희생이 있더라도 그들 스스로 딛고 일어서라 말한 주제에 아리스를 보고 있으면 계속해서 그 아이를 돕고 싶어 합니다. 그 애가 죽지 않았으면 해서 이랬다가 저랬다가를 반복하고 있어요.”

마냥 돕는 것도 아니고, 마냥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어정쩡한 위선이다.

악한 인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인격적으로 좋은 인간들이었다.

그들이 죽는 건 그리 입맛이 달지 않으리라.

너무 따뜻한 세계이기에 더욱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과거의 신들이었다면 네가 간섭하는 걸 절대적으로 막았을 거야.]

효율적으로 안 좋고, 차원의 성장에도 방해가 되니까. 내가 트로이를 일일이 신경 써줄 것도 아닌 만큼 내 행동 자체를 오히려 독이라 판단했겠지.

[하지만 감정이 있기에. 나 또한 저들의 따스한 마음씨에 흔들리곤 해.]

최고위신 프리아 여신조차 그리 느낄 정도.

[그러니,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저들을 위한 게 정확히 무엇인지. 또 네가 결정을 내렸다면 앞으로 네가 어떻게 해야 할지.]

그녀는 내게 선택을 종용했다.

[잘 생각해보고, 결정이 내린다면 다른 쪽은 쳐다보지도 마.]

도와줄 거면 확실하게 도와주고, 그게 아니면 못 본 척 잊으라고.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건 트로이가 멸망하진 않을 테니.

나는 생각했다.

아빠가 되기 전의 나와 아빠가 된 후의 나는 확실히 다르다.

그건 인정해야 했다.

천 년 동안 변하지 않았던 주제에. 아이가 몇 생겼다고 이리 변하기 시작하는 내가 씁쓸하게 느껴진다.

[참, 사실 너를 이리 불러들인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야. 잘못했으면 혼나야지.]

그때 여신님의 태블릿에 느낌표 아이콘이 떴다.

“예?”

동시에 그녀의 뒤쪽에서 누군가가 검은 오오라를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홀리 쉣…….”

동시에 나는 침음성을 삼키며 한발 물러났다.

“그래. 도망은 다친 게야?”

음산한 분위기를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페르세르크였다.

“페르세르크!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그래야지. 그리해야지. 하나 그전에 그대가 죽도록 맞는 것도 할 수 있는 게야.”

“잠깐만 조금만 진정하고.”

“그대는 본녀가 무얼 위해 그걸 오랜 시간 준비했는지조차 모르지. 단순히 연구 때문인 줄 아는 모양인데, 이번엔 본녀도 못 참아.”

그녀가 몽둥이 대신 초월의 종언을 높이 들어 올렸다.

“여신님! 어찌 저를 배신하신 겁니까!!”

“닥치고 이리와 이 새끼야.”

고고한 말투도 집어던진 흉신악귀 페르세르크가 다가온다.

아직 그녀의 화를 풀어줄 것도 확보하지 못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들키고 나발이고 일직선으로 뚫어버리고 회수했어야 했다.

내 외침에 프리아 여신은 내게서 시선을 돌린 채 작은 연못의 걸터앉아 발을 담그고 아름다운 음률을 노래한다.

클래식 같은 그녀의 노래에 맞춰 나는 문자 그대로 죽도록 얻어터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