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6화
기사단 암호, 뻐꾸기가 운다.
겉보기엔 헛소리처럼 보이지만 이건 하나의 전술 암호였다.
테러의 조짐 의심상태.
일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인스가 눈에 띄게 평화로운 것이지, 다른 국가는 협의를 하면서도 서로 힘겨루기를 하곤 한다.
팔란 제국은 주변에 시기하는 국가들이 많다.
당연 해당 국가들은 부인할 일이지만 이런 일은 과거에도 간간이 보였던 일이기도 했다.
“이번엔 어디야.”
“그게…… 저희도 아직 파악 중이라…….”
“제대로 파악도 안 됐는데 암호문을 돌린 거야?”
한 기사의 보고에 일리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고장이 왔습니다.”
기사단장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 한 장을 꺼냈다.
분홍빛의 예쁜 편지지였다.
“엇! 단장님 그건!”
“어?”
그제야 일리나는 그 편지가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흠! 커흠!!”
“기사단장!!”
“죄송합니다. 저하께서 보내신 편이를 품에 지니고 다니다 보니.”
“기사단장, 혹시 미쳤어?”
일리나가 기겁하며 중얼거리자 그는 허허 웃으며 다른 편지를 꺼냈다.
“이것입니다. 본래라면 보여드리면 안 되지만…… 어디 저하와 저희들이 보통 사이입니까.”
“그러다가 오라버니에게 들키면 혼이라도 날걸.”
“그땐 이 늙은이의 목이라도 내놓지요.”
일리나는 짜깁기된 편지를 스윽 훑었다. 책의 활자를 잘라 붙인 경고장이었다. 황궁이 폭파되는걸 보고 싶지 않다면 당장 연회를 취소하라는 경고문이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이전부터 꾸준히 편지가 도착한 적이 없고 한 장 달랑 온 것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꾸준히 왔으면 우습게라도 여겼겠지만…….”
단 한 장. 어떤 타협도 없다는 듯한 단호한 경고에 일리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게다가 거수자로 의심되는 존재에 대한 보고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해서…….”
“암호를 돌렸다는 거네?”
“예.”
“도와줄게. 그 수색.”
일리나가 브로치를 살살 건드렸다.
“괜히 눈에 띄지 않게 놈들을 찾아서 제압하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저희는 저하께 충성을 다한 몸입니다. 저하께서 원하신다면.”
“그거 외부에 알려지면 기사단이 공중분해 될 말인 건 알지?”
“하하하. 입단속 하지요. 현재 저희가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거수자 중 일부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황성의 외곽 한쪽을 가리켰다.
“저하. 어릴 적부터 황성을 이리저리 들쑤신 저하라면 저놈들이 어디로 첨입해 들어올 것 같습니까?”
“가능성은 두 가지야. 이 황성에 대해 잘 아는 인간일 경우엔…….”
그녀는 좁은 통로 하나를 가리켰다.
“여기. 예전에 올만 경을 피해서 황실에서 도망칠 때 한번 가본 적이 있어. 내 생각에 침입자는 이 황성에 대한 정보를 꽤 가지고 있는 것 같아.”
“그리 판단하시는 근거가 있습니까?”
“거수자가 발견된 경로를 봐. 여기, 여기, 여기 보여?”
“예.”
“황성에 대해 잘 아는 놈이 아니면 이런 루트를 탈 수가 없어.”
일리나의 말에 기사단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저하십니다. 황성 최고의 말괄량이.”
“기사단장…….”
“하하, 장난입니다. 저하. 한데, 올만 경이라…… 올만 경은 잘 지냅니까?”
“교수직이 천직인지 돌아갈 때가 됐는데도 남아있더라. 학생들에게 정이라도 들었나 봐.”
“허허. 그 올만 경이…….”
“감자에 환장하는 건 조금 걱정이지만.”
하인스 아카데미의 감자 교수 올만. 팔란 제국의 뛰어난 소드마스터였지만 아카데미 내에서 그의 별명은 그런 우스꽝스러운 별명이었다.
학생을 가르치는 대련 중에도 한 손에 감자를 놓지 않는 모습 때문에 유래되었다.
그런 것치고는 굉장한 실력이라 인기가 많은 교수이기도 했다.
* * *
“예쁘게 되었구나.”
에반젤린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불편한 듯 이리저리 보다 쓰게 웃었다.
“역시 불편하네요.”
“어찌하겠느냐, 그렇다고 해도 다른 영애처럼 처음부터 입고 오지 않은 게 다행인 게지.”
“그렇긴 하죠.”
에반젤린은 몸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려본 후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준비됐어요.”
“이게 남았구나.”
일리나를 대신해 에반젤린을 봐주던 페르세르크는 예쁜 귀걸이 하나를 그녀의 귀에 걸어주었다.
“뭐에요 이건?”
“보호 아티펙트인 게야. 정령이 깃들어있는 게지.”
“이런 거 필요 없긴 한데…….”
“그리하여도 있어서 나쁠 건 없는 게지.”
페르세르크는 당부하듯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날개나 부분 현신은 되도록 하지 말고.”
“엄마는? 저도 다 알아요.”
익살스레 웃음을 띤 에반젤린은 숨을 짧게 들이켠 뒤 그동안 배운 궁정 예법을 지키듯 우아하게 걸어 나갔다.
연회장은 이미 참석한 이들로 인해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신원을 밝혀주실 수 있겠습니까.”
“에반젤린 올 라운, 하인스 대공녀입니다.”
에반젤린은 담담하게 대답했고 입구를 지키던 시종은 놀란 듯 그녀를 보다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에반젤린 올 라운 대공녀님. 입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문제없이 입장하는 것을 보며 페르세르크는 옅게 웃었다.
“초대장을 늦게 보냈다기에 설마 초대명단까지 누락시키는 어리석은 짓을 할까 싶었건만, 그리 어리석지는 않은 모양이로구나.”
아마 에반젤린에게 초대장이 늦게 가도록 만든 것은 어느 정도 세력이 있는 영애들일 것이다.
본디 이런 사교회에서 영애를 견제하는 건 같은 영애이며 영식을 견제하는 것은 같은 영식들이니 말이다.
보아하니 에반젤린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니 살짝 찔러본 느낌이 강해 보였다.
굳이 하인스와 척을 질 이유가 없으니 대충 찔러나 보고 간이나 보이자는 심정일 터.
달갑진 않지만 여성들의 사교회라는 게 대개 이런 식이라 백날 문제 삼아봐야 입만 아플 따름이었다.
“에반젤린 올 라운 대공녀께서 드십니다!”
보통 사교연회는 여성이 홀로 참석하지 않는다. 보통 에스코트하는 이가 있게 마련이지만 이번 연회만큼은 조금 특수한 케이스이기도 했다.
물론, 호명과 동시에 들어서는 에반젤린의 모습에 사람들 모두의 시선이 한 번에 잡아 끌리는 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에반젤린의 외모는 이미 지구에서도 검증된 바 있듯 어린 나이와 별개로 수많은 이들을 홀리기에 충분한 외모였으니 말이다.
마법으로 뿔을 가렸다지만 그녀의 근본적인 매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오…….”
“세상에. 저 영애가 그 소문이 무성한 성자의 딸…….”
“그런데 성자는 이제 스무 살 남짓 아니었나? 어떻게 저런 딸이 있는 거지?”
의아해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홍단이 청단이가 존재하지만, 그녀들은 이렇다 할 공식적인 활동이나 존재를 드러내는 짓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반젤린이 가장 대륙에서 잘 알려진 혈육이기도 했다.
들리지 않게 수군거린다고 했지만, 에반젤린의 청력은 그것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새삼 놀랄 것도, 피곤해할 것도 없었다.
예상했던 일이고, 반대의 입장이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다만, 그런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가 순수한 인간이 아닌 이종의 혼혈이라는 사실이 퍼지면서 인간과 다른 성장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분위기가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의 존재를 고깝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볼 뿐 대놓고 찾아와 에반젤린에게 시비를 거는 이는 없었다.
에스코트 없이 오로지 본인만이 입장하는 이런 특수한 연회인 탓에 내부로 입장한 에반젤린은 무엇부터 해야 할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각지의 젊은 세대들을 불러모은 연회답게 꾸며진 모습은 참 아름다웠다.
“에반젤린 올 라운 양이시죠.”
그때였다.
아직 어리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가 에반젤린에게 다가와 우아하게 예를 표하며 말을 걸어왔다.
“아…… 네. 에반젤린 올 라운, 하인스 대공녀입니다.”
“이런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이오샤 페트릭이라고 한답니다. 제 언니로부터 이야기는 전해 들었답니다.”
그녀가 환하게 웃는다.
“언니분?”
“네. 나이 차이가 좀 있긴 하지만 한때 일리나 대공비 마마를 모시며 보필하던 알리샤 페트릭의 동생입니다.”
아.
그제야 에반젤린은 페트릭이라는 성을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냈다.
팔란 제국 내에서 과거 일리나를 보필하던 귀족 영애. 알리샤 페트릭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알리샤 페트릭은 일리나와 마찬가지로 리인 포스 알파 기사단원이지만 그 사실이 외부에 공표된 적은 없기에 그저 친한 사이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고 보니 엄마 친구분 중에 알리샤 페트릭이라고 분명 있었지.
“실은 저희 언니가 이번에 참석하시는 에반젤린 공녀님께 이것저것 안내해달라는 부탁을 해서요.”
“고마워요.”
“무얼요. 부탁이 아니더라도 실은 공녀님과 개인적으로 친해져 보고 싶기도 했구요.”
그녀는 아직 성년은 아니지만 여러 사교활동에 이미 나선 경험이 있었다.
그런 만큼 그녀는 제법 빠삭한 정보를 바탕으로 자잘한 소개를 해주었다.
“사실 명목상이지만 이런 연회의 경우 자국민들끼리 합심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니면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끼리 세력을 형성하기도 하죠.”
그녀는 과일음료를 음미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다만, 사교회라는 게 어떤 목적이건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요. 선택은 공녀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부디, 당신의 권세를 등에 업거나 이득을 노리기 위해 아부하는 자들과 당신을 이용하려는 자들, 그리고 웃는 얼굴로 당신을 깔아뭉개 자신의 권세의 재료로 사용하려는 이들을 조심하세요.”
영식은 몰라도 영애들의 사회는 그러했다.
단순 직위가 높은 것이 모든 것이 아니다.
“실제로 저기 보이시나요?”
이오샤는 한쪽을 가리켰다.
“베르도르 왕국 발로스 후작가의 막내딸이죠. 태생이 착하고 유약한 사람이에요. 그 곁에 있는 이들은 백작가와 자작가, 남작가의 영애들이죠.”
이오샤의 말에 에반젤린은 멀찍이서 고고하게 티타임을 나누고 있는 영애들을 보았다.
“듣기로는 성정이 유약해서 뽐내거나 위압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고 해요. 때문에 저렇게 잡아먹힌 거죠. 흔한 일은 아니지만 드문 일도 아니랍니다.”
이곳은 하나의 전쟁터다.
그녀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저들의 중심에 있는 것은 한 백작가의 영애. 척 보기에도 화려한 의상을 입은 그녀는 주변 영애들의 아부를 받아들이며 마치 자신의 권세를 뽐내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후작가의 영애라곤 하지만 백작가의 영애에게 기가 눌려서 완전히 액세서리화 된 것이다.
“정보에 해박하시네요.”
“뭐 예전부터 엄격하게 배웠거든요. 국제정세, 새로운 신진 세력. 뭐, 그런 점에서 보면 사교계도 하나의 정보 판이고 전쟁터니까요.”
해맑게 웃어 보인 그녀는 근처에 있던 영식들의 이름과 영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며 어떤 이들인지를 알려주었다.
그때였다.
“스파르트 왕국의 1왕자 크로네스 란 스파르트 님이 드십니다.”
단조로운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모두의 시선이 또 돌아간다.
“왔네요. 두 번째 주인공.”
“두 번째 주인공?”
“네. 첫 번째 주인공은 소문만 무성하던 공녀님이죠.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티오니스 성자, 하인스의 대공의 금지옥엽이니까요. 공녀님이 참석한다는 소식만 전해 듣고 무작정 참석한 영식들도 상당할 정도로 유명해요.”
어쩐지. 조금 전부터 계속해서 눈치를 보는 이들이 있더라니.
“그런 것 치고는 접근하는 사람이 없네요.”
“헤헤. 아마 저 때문일 거예요.”
“이오샤 영애 때문에요?”
“이래 봬도 제가 사교계의 미친개로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대체 무슨 짓을 해야 아리땁고 가녀리며 작은 영애에게 미친개라는 이야기가 붙는 것일까.
“그게…… 전에 제 약혼자를 비방하는 영애의 머리에 찻잔을 부어버리는 바람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부끄럽다는 듯 말하지만, 내용은 그렇지않았다.
물론, 그것만으로 그녀가 미친개라 불리는 이유는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때 이오샤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 소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공녀님, 죄송하지만 잠시만 자리를 비워야 할 거 같아요.”
“무슨 일이 있나요?”
“제 약혼자가 왔답니다. 타국에 있는 사람이라 이럴 때가 아니면 혼인 전까지 만나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게 해요. 너무 오래 붙잡았네요.”
“아니요. 금방 돌아오도록 할게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총총 걸어가는 그녀를 뒤로한 채 에반젤린은 조금 전 두 번째 주인공이라 부르던 소년을 바라본다.
나이는 열다섯 정도 되었을까.
금을 녹여 만든듯한 곱슬거리는 금발에 반짝거리는 에메랄드빛 벽안을 지니고 있다. 에반젤린이 지구에서 간간이 읽던 로맨스소설의 남자주인공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인상의 소년으로 그녀가 놀란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신기한 체질이네.”
특질 능력과 흡사해 보이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검사들이 주로 보이는 마나 순환계통인데 서클또한 보인다. 수준은 익스퍼트 상급에 3서클 정도. 그렇다고 해도 이 나잇대 아이들에겐 굉장한 경지이며 선망의 대상임은 틀림없으리라.
그제야 흘리듯 아빠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스파르트 왕국 초유의 천재. 왕위계승권이 낮았으나 그 특수한 성질의 체질 덕에 왕태자 책봉이 거의 기정사실화 되었다고 했던가.
물론, 전력만 놓고 보면 비교가 미안한 수준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번엔 고개를 살짝 돌려보자 그와 함께 온 것으로 추정되는 두 남자가 보였다.
이지적인 안경을 쓴 차가운 인상의 소년과 굉장히 까불거릴 것 같은 쾌활한 미형의 소년까지.
에반젤린은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셋은 친구 사이라도 되는지 제법 친해 보였다.
셋의 등장에 에반젤린을 눈여겨보던 영애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선망과 황홀함의 시선을 담아 세 소년을 보았다.
반면 비교가 되는 영식들의 표정은 곱지 않다.
서로 경쟁하고, 선망하고, 서로 견제하는 위치.
참 어린 나이부터 고생한다 싶은 그녀였다.
그때였다.
“크로네스 님!”
그때 환한 금발을 풍성하게 늘어뜨린 한 소녀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다수의 추종자를 이끌고 그의 앞에 나섰다.
이에 에반젤린은 자신의 위치도 잊은 채 접시에 든 케이크를 오물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이런 게 재미지.’
보아하니 저 금발의 소녀가 크로네스 왕자에게 연심이 있어 보이는 건 분명하다.
반면 크로네스라 불린 담담한 인상의 저 소년은 딱히 그녀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