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0화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어떻게 팔란 내부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또 어디서 그런 존재들이 튀어나왔는지.
마지막으로 철저하게 준비된듯한 이곳은 대체 무엇인지.
다만 그 와중에도 확실한 건 있었다.
이일, 보통 규모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들의 목적 중 하나가 대륙연합의 붕괴라는 점.
“지들끼리 힘 싸움하는데 힘없는 사람들이 휘말리게 두는 건 안 되지.”
에반젤린은 용신검에 묻은 피를 가볍게 털어냈다.
“세상에…… 오우거까지…….”
에반젤린의 경악스러운 힘에 놀란 듯 이오샤는 멍한 얼굴을 했다.
“애초에 라티우스가 공녀를 이길 가능성은 없었던 거네요.”
“그렇게 보였나요?”
“그럼 왜 일부러 마지막엔…….”
“짜증 나잖아요.”
에반젤린이 일반적인 대련과 달리 괴이한 대련을 진행해서 라티우스를 농락한 건 힘을 숨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데이비가 자주 사용하던 취검을 그녀 나름대로 변형시켜본 게 전부였다.
“다만, 아빠처럼 완벽하게는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엉성한 결과가 나왔죠.”
그녀가 완전히 취검의 묘리를 다루었다면 아마 라티우스도, 다른 이들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상황이 에반젤린의 의도대로 굴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완전하지 못했기에 엉성하면서도 압도적인 대련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제 약혼자…… 잘 있을까요. 자기 몸은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지만…….”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나가는 것부터 생각해요. 제 생각이지만 던전의 끝에 도달하면 다시 연회장으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에반젤린이 속도를 올리려던 그 순간.
던전의 벽면이 무너지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로네스 왕자님?”
“이오샤 영애와 에반젤린 공녀님…….”
한바탕 전투라도 하고 왔는지 그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그가 에반젤린에게 물었다.
애석하게도 그는 에반젤린이 라티우스와의 대련에서 실력으로 이겼다고 생각지 않았다.
라티우스의 행동이 워낙에 뜬금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라티우스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헛소리 말라며 소리 질렀겠지만 애석하게도 현재 모인 이는 이오샤와 에반젤린, 그리고 크로네스와 또 한 명의 친구인 마법사 크라마 린덴 뿐이었다.
“보시다시피 멀쩡해요. 그런데. 왕자님은?”
“생존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대로 희생이 발생하면 대륙연합은 붕괴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법 영리한 편이다.
“우선은 합류하시죠. 생존자들을 더 찾아서 이동할 생각입니다.”
“그런 말 말고 저리로 가세요.”
“음?”
에반젤린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왕자님. 괜히 목숨줄 태우지 말고 도망가라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에반젤린 공녀.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힘없는 영식과 영애들입니다. 그들을 두고 갈 순 없습니다.”
“감당할 수 없으면 일단 본인 목숨부터 챙기라는 소리입니다.”
에반젤린의 말에 크로네스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다른 이들이 죽어도 상관없다 이겁니까? 제가 사람을 잘못 봤군요. 당신은 티오니스 성자처럼 의로운 사람이라 여겼건만…… 아니 아닙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이군요, 겁이 나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쯤 되니 에반젤린도 열이 뻗쳤다.
“사람을 잘못 봐? 이봐요. 당신이 뭔데 사람을 잘못 보니 마니 그딴 말을 해요?
“적들은 강합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그들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어요.”
그나마 상대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조차 제대로 측량한 것은 아니었다. 에반젤린이 보기에 습격을 강행했던 검은 로브의 인영들은 아무리 천재라 해도 크로네스가 아직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나하나가 소드마스터 이상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파란의 소드마스터들이 상당수 참전해야 가능한 수준.
그렇기에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에반젤린을 제외하고 아직 어린 영식과 영애들이 그들을 정면에서 막는 건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두 번 말하지 않아요. 객기부리지 말고 도망치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그는 크라마에게 말했다.
“크라마. 두 영애가 도망칠 수 있게 보호해드려. 할 수 있나?”
“어렵지 않다.”
크라마의 대답에 이오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미 에반젤린의 무위를 봤던 그녀는 에반젤린의 힘이 저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봐요. 지금 뭔…….”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걸 왜 이리 방해받는 건지.
반사적으로 에반젤린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크로네스가 낚아챘다.
“위험합니다!”
화살을 낚아챈 크로네스가 검을 뽑았다.
“놈이 왔어요.”
그의 말과 동시에 넓은 던전의 복도 곳곳에서 스켈레톤들이 벽을 뚫고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끌끌. 어린것들이 제법이구나. 그래. 그쪽 소년은 특히 육체의 구성이 좋은 편이야.”
늙은 목소리였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영은 어둠 속에서 대량의 스켈레톤들을 대동한 채 나타나며 말했다.
“미안하네만 자네들을 살려서 보낼 순 없네. 대륙의 미래를 위해서 모두 죽어주게.”
“대륙의 미래? 너희들의 욕심이 아니고?”
크로네스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둘 다 물러나세요! 내가 저놈을 처리하겠습니다!”
그는 오러를 검에 피워올리고는 자신의 기세를 폭발시켰다.
“크로네스!”
“크라마! 두 영애를 지켜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다른 이도 아니고 티오니스 성자의 영애다.
그렇기에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령 술사로 보이는 노인은 끌끌 웃어넘긴다.
“이 대륙은 고여있네. 인간의 발전은 항상 전쟁과 투쟁으로 이어져 있지. 그런데 평화? 인권? 웃기는 소리. 그건 물을 고이게 만드는 불순물에 지나지 않네.”
노인이 천천히 로브의 후드를 벗어넘겼다.
동시에 크로네스의 눈이 부릅 뜨여졌고 크라마는 갑자기 구역질을 하며 비틀거렸다.
“리치?!”
“크흐흐흐흐!! 그쪽 마법사는 눈치챈 건가. 실력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그 말에 크로네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고위마법사와 하위마법사가 싸울 때 그 영향만으로 마나가 역류한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다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우욱…… 커헉!”
고통스러워하는 크라마의 모습에 크로네스는 이를 악물고는 검을 그에게 겨누었다.
“여기서 네놈을 소멸시키고 우리는 지나간다. 거기에 변동사항은 없다.”
그의 말에 노인이 껄껄 웃으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상당수의 스켈레톤이 크로네스를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당연히 크로네스는 천재라는 이명에 걸맞은 실력을 보여주며 스켈레톤들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베어 넘긴 스켈레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일어난다.
이에 에반젤린이 한숨을 내쉬며 검을 내리 세우고 참전하려던 찰나.
크라마가 그녀의 팔을 콱 잡았다.
“안됩니다. 공녀…… 너무…… 쿨럭. 위험합니다.”
피를 울컥 토해내는 크라마의 몰골을 보며 에반젤린이 물었다.
“당신이 더 위험해 보이는데요.”
“당신이…… 쿨럭,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크라마가 스태프를 들었다.
“두 사람은 내가 지켜주겠습니다.”
피를 토하면서도 일부 새어 나오는 스켈레톤들을 향해 마법을 발사하는 크라마였다.
“크로네스! 두 사람은 내가 지키겠다! 놈을 죽여!”
그의 외침에 크로네스의 검이 더욱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마스터 급 사령 술사를 상대로도 용케 잘 버티는 걸 보면 천재는 천재인 듯싶었지만, 에반젤린의 눈에는 왠지 모르게 하찮게 느껴졌다.
“하긴…… 비교군이 너무 높긴 하지…….”
고작 몇 살 차이.
하지만 에반젤린에게 있어서 남자라는 존재는 데이비처럼 강한 존재를 보고 자란 탓에 천재고 둔재고 딱히 별 차이점을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있었다.
“도와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전에. 숨어있는 놈부터 처리하죠.”
보아하니 사령 술사는 흥미 위주로 크로네스를 가지고 놀고 있다. 당장 그를 죽이진 않을 테니 조금 전부터 던전 전역을 쳐다보는 놈의 눈부터 찢어야 할 듯싶었다.
놈이 그 시선을 이용해 이곳에 갇힌 영애와 영식들을 감시하는 것이라면, 사령술사보다 우선적으로 그 눈을 막아야 할 테니까.
이윽고 그녀는 어두운 던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정확하게 시선을 한곳에 고정시킨 뒤 말했다.
“이오샤 영애.”
“네?”
“눈 감아요.”
동시에 에반젤린의 용의 눈처럼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며 특정 대상을 향한 피어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 * *
“컥?!”
적을 알고 자신을 알아야 반드시 성공한다.
이 던전은 자신들의 베이스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모든 준비가 되어있었다. 이번 계획의 핵심은 연회장에 참석한 아이들의 죽음.
그렇기에 하나라도 살려서 보내선 곤란했다.
물론, 이 엉망진창인 던전을 온전히 컨트롤하는 건 어려운 만큼 자신들의 전력이 헤매지 않도록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 길을 알려주는 존재가 있어야 했다.
그 역할을 바로 한 사내가 하고 있었다.
그는 던전 곳곳에 미리 심어둔 힘을 이용해 모든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험요소로 판단된 스파르트 왕자는 사령 술사가 직접 나섰으니 반드시 처리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을 죽이도록 자신은 그들의 위치와 상태를 실시간으로 전달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던 중 그는 문득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에반젤린의 시선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자신이 보고 있다는걸 눈치챌 순 없을 텐데.
그럼에도 에반젤린은 정확히 허공을 응시한다.
그리고 그 허공 너머 에반젤린과 크로네스 일행을 보고 있던 공간 술사는 기시감과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그때였다.
“이오샤, 영애. 눈감아요.”
그말에 당황한 이오샤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그 순간.
에반젤린의 동공이 마치 드래곤처럼 세로로 찢어진다.
“커헉?!”
던전 전체에 눈을 깔아놓고 상황을 주시하던 공간 술사가 피를 토하며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방금…… 무…… 쿨럭!! 커헉!”
방금 전 자신이 무엇을 당했는지조차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에 그가 강제로 마나를 끌어 올리며 온몸을 바늘로 찌르는듯한 섬뜩함을 걷어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다시 한번 에반젤린과 시선을 마주했을 때.
그는 눈과 코, 입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걸 깨달으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드래곤 피어…….”
단순한 드래곤 피어가 아니다. 가장 위험한 존재로서 크로네스 왕자를 꼽고 있었던 건 실수였다.
이곳에 불려온 이들 중 가장 위험하며 계획에 지대한 차질을 남길 수 있는 이는…….
티오니스 성자의 딸. 딱히 외부활동을 거의 하지 않은 그의 딸아이였다.
“젠장…… 젠장!!”
그는 겁을 먹은 채 힘겹게 몸을 기어 어디론가 향했다. 한번 잠식된 피어의 공포는 그의 마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수천 년 전 제국이 멸망하기 전 그들은 드래곤을 사냥한 적이 있었고, 그때 드래곤 피어에 대한 대책도 마련해두었었으니까.
드래곤의 피어 정도라면 자신이 가진 아티펙트로 얼마든지 대처가 가능하다.
이번에 사용하면 부서지겠지만 사실만 잘 전달하면 이렇게 무력하게 당할 일은 없으리라.
그는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낡은 상자 안에 보관되어있던 아티펙트를 가동시켰다.
이제 그의 몸을 잠식했던 피어의 기운이 사라져야 하건만.
“크억?!”
어째서인지 드래곤 피어도 막아내는 아티펙트가 그대로 박살 나며 부서져 내린다.
“말도 안 돼! 성룡급 드래곤의 피어도 막아내는 아티펙트가 어째서!!”
애석하게도 그는 에반젤린이 시조드래곤격인 유일한 고대룡이라는 걸 몰랐다.
눈의 역할이자 정보통. 그리고 공간 술사인 사내는 의식이 잘게 비틀리는 느낌을 억지로 저항하려다가 그대로 마나 역류가 일어났다.
동시에 던전 안에 있던 다른 동료들과의 모든 연결과 통신이 끊어진다.
조금만 침착했어도 이리 쉽게 당하진 않았을 테지만 그는 고대룡의 피어에 대해 잘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