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2화
자기 역량을 넘어서는 걸 무리하게 사역하려다가 제 역량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브레스에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버린 어리석은 뼈다귀는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마나 역류가 있었다고 해도 이리 쉽게 죽을 줄은 몰랐으니까.
리치라는 존재는 극히 드물지만 라이프 포스 베슬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살린다.
실제로 에반젤린의 아빠인 데이비와 마주했던 리치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마치 고양이마냥 여러 개의 생명을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놈은 본 드래곤이 최고라 여겼고, 그것을 사역하기 위해 다른 모든 이점을 포기할 정도로 낭만에 미친 또X이였다.
그렇다고 해도 그가 마냥 약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마나 싸움만으로 크라마를 완전히 전투 불가로 만들었고, 천재라 불리는 크로네스 왕자를 가지고 놀 정도의 실력은 충분히 지니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 에반젤린이 없었다면 이 던전 안에서 각국의 젊은 세대들이 때거지로 죽임을 당했으리라.
아니, 정확히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이봐. 그 숨결의 위력이 평소 이상으로 강한 것 같던데.
“저도 잘 몰라요. 그냥 평소보다 조금 격해졌나 봐.”
에반젤린은 그림자 속에 숨어서 말을 거는 두억시니에게 조용히 말했다.
-뭐. 상관없다만.
심드렁하게 그가 침묵하자 에반젤린은 리치의 잔해 속에서 혹시 도움이 될만한 게 있는지 찾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게 없네.”
“에반젤린 공녀…… 당신은 대체…….”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에반젤린에게 말을 거는 크로네스 왕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현재 에반젤린은 귀가 뾰족해져 있었고 머리 위엔 작은 용의 흔적인 뿔도 드러나 있었다.
“왜 그러시죠?”
혼란스러운 시선이다.
저것은 의문일까. 질투일까. 무엇이 되었건 별로 관심을 둘만 한 일은 아니었다.
에반젤린은 브레스의 여파로 먼지가 잔뜩 묻어버린 드레스를 씁쓸하게 내려다보았다.
“엄마가 직접 구해준 드레스인데…….”
그래도 소중한 사람이 준 옷이 아니던가. 조금 전 본 드래곤, 성체. 아니 헤츨링 같은 드래곤과 대처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욱하며 힘을 과하게 끌어내면서 옷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움직이죠. 여기서 기다리다간 사람들이 다 죽어 나갈 거에요.”
에반젤린이 그리 말하자 넋 놓고 있던 세 사람이 흠칫 놀랐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상황 속에서 각국의 영애, 영식들이 죽으면 무슨 사태가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옷 좀 갈아입을게요. 이오샤 영애. 조금 도와줄 수 있어요?”
“그럼요. 그런데 갈아입을 만한 장소가 있을는지…….”
그녀의 말에 크로네스와 크라마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헛기침을 했다.
“우…… 우린 다른 곳을 보고 있겠습니다. 공녀.”
“적당히 고개만 돌리고 있어요.”
동시에 그녀의 등 뒤 양쪽 날개뼈 뒤쪽의 허공이 찢어지며 엄청나게 거대한 용의 날개 일부가 나타나 에반젤린과 이오샤를 휘감았다.
“이 정도면 되겠죠. 관음하는 변태도 없으니.”
자신의 날개를 반 현신시켜 주변을 가린 그녀는 곧바로 공간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지구 의상을 꺼냈다.
“신기한 의상이네요.”
“뒷쪽의 끈을 좀 풀어주겠어요? 평소라면 잘 입지 않는 옷이라 어색하네요.”
에반젤린이 부끄러움을 애써 누르며 말하자 이오샤는 옅게 웃으며 에반젤린의 드레스 뒤편에 묶인 끈을 풀어냈다.
“걱정 말아요. 생명의 은인인데 이런 것 하나 못 해줄까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흠! 큼!!”
그 소리조차 자극인지 크로네스는 얼굴을 홍당무마냥 시뻘겋게 물들인 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녀들이 있는 곳의 반대편을 보고 있지만 소리만 들어도 모든 장면이 상상되기라도 하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크로네스.”
“아…… 아니다! 이상한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마치 제 발 저린 것처럼 당황하여 소리치자 크라마가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크흠. 아니, 미안하군.”
“그보다. 방금 우리가 본건 대체 뭐였던 것 같나…….”
“나도 모른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임에는 틀림 없었다.
압도적으로 강한 힘을 내뿜던 사령 술사가, 고작 두 번의 공격에 본 드래곤과 같이 조각나버렸으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이는군.”
크라마는 식은땀을 흘리며 거대한 날개를 흘긋 보았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적어도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는 건 분명하다. 용족, 그래. 그녀의 특징을 보면 고서에나 나오는 드래곤과 흡사해. 자안으로 변할 때 용족 특유의 눈동자로 변한 것과 지금 저 모습을 보면…….”
“단순 마법일 수도 있지 않나. 게다가 그녀가 정말로 용이라면 헤츨링이라는 소리인데, 성룡급 본 드래곤을 브레스 한 번에 날려버린다고? 네가 전에 말하지 않았나. 헤츨링은 제대로 된 브레스를 쓰지 못한다고.”
“나도 잘 모르겠군…… 다만, 그녀 덕분에 우리가 살았다는 건 분명하다.”
“뭐가 되었건 라티우스가 그녀에게 패배한 것은…….”
“그래. 그가 봐준 게 아니야. 처음부터 그녀에겐 상대도 되지 않았던 거다.”
그제야 조금 의문스러웠던 것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라티우스 성격상 아무리 그래도 일부러 져줄 리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세상에. 이렇게 부러운 몸매는 또 처음이네요.”
그때 에반젤린을 감싼 날개가 사라지더니 아름다운 원피스를 입은 에반젤린과 묘하게 뾰로통한 표정의 이오샤 페트릭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크로네스는 눈을 크게 뜨고 굳어버렸고 크라마는 그런 크로네스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늦어서 미안해요.”
“아…… 아닙니다!”
잔뜩 긴장한 양 크게 답하는 그녀의 행동에 에반젤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이오샤는 묘한 얼굴로 크로네스를 바라보았다.
“현재 연회장 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이 던전 안으로 내던져진 건 분명해요. 다행히 저들이 당장 죽이고 있지는 않지만 수틀리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몰라요.”
“그렇군…… 늦기 전에 그들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공녀는.”
“네. 저는 지금부터 길을 따라 보이는 이들을 전부 찾아내 보호할 생각인데. 두 분은 어떻게 하실 거죠?”
에반젤린의 말에 크로네스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당연히 따라가겠습니다. 당신이 강한 것은 알겠지만 혼자서 그 많은 인원을 통솔하고, 보호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별 상관없긴 한데, 왕자님이 다쳐도 곤란하니 잘 따라오세요.”
에반젤린은 다섯 갈래 길로 나뉜 길을 거침없이 걸어나갔다.
“자…… 잠깐! 공녀! 막무가내로 들어가면 함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에 크라마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생존자의 냄새에 소리가 이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어요. 뭐가 됐건 정면으로 뚫고 들어갈 테니 따라오기나 해요.”
그 말과 동시에 에반젤린이 바닥을 밟자마자 바닥의 파편이 안쪽으로 들어간다.
동시에 옆면의 벽이 열리며 거대한 도끼날이 그녀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공녀!!!”
당황한 크로네스가 황급히 그녀에게 달려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에반젤린이 굉장히 유연한 움직임으로 머리를 숙이면서 도끼는 그녀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듯 벽 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가능하면 그 자리에 모여서 안 움직이면 좋겠는데…….”
그것을 본 에반젤린이 쓰게 중얼거렸다.
물론 에반젤린의 앞길을 틀어막는 건 함정뿐만이 아니었다.
-그르르르…….
한눈에 봐도 정상은 아닌 듯싶어 보이는 블레이드 멘티스들이 저벅저벅 걸어 나오며 모두를 압박한다.
“블레이드 멘티스! 크라마! 싸울 수 있겠나?!”
긴장하듯 그가 소리쳤다. 하지만 크라마는 멍한 얼굴로 앞쪽을 가리켰다.
“음?”
이에 크로네스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린 그 순간. 에반젤린이 한 손에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쥔 채 천천히 그들을 향해 다가간다.
-샤아아아악!!
사마귀가 마치 먹이를 낚아채듯 순식간에 공격해 들어오지만, 에반젤린의 몸이 슬쩍 휘청거린 그 순간.
그녀의 신형이 옅은 잔상을 남기며 흐릿하게 블레이드 멘티스를 지나치며 지나갔다.
동시에 그녀의 검에 새겨진 짙은 오러 블레이드가 모든 것을 마치 뫼비우스의 띠마냥 잔상을 남겼고 블레이드 멘티스들의 단단한 앞발과 육체가 조각나듯 흩어졌다.
“맙소사…… 오러 블레이드…….”
크로네스가 침음성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어서 따라가죠.”
뒤이어 이오샤가 겁도 없이 에반젤린이 걸어간 자리를 똑바로 따라가자 크라마와 크로네스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뒤따라갔다.
* * *
모두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사실상 연회에 참석한 이들 중 가장 강한 것이 크로네스라고 쳤을 때 그들의 수준으로는 리치나 몬스터들의 세례, 급작스러운 함정에 대비할 정도로 뛰어나 보이진 않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에반젤린은 한 명이라도 살려야 했다.
‘만약 여기서 큰 희생이 생기면 자칫 거대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어.’
근본적으로 팔란의 황실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니까.
문제는 황실 내에 이들과 결탁한 존재가 있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이에 에반젤린은 점차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함정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다 부숴버리면서 진행했고, 보이는 몬스터란 몬스터는 닥치는 대로 찢어발겼다.
“두억시니.”
-왜 부르나.
“따로 빠져서 이곳에 날려진 사람을 구할 방법은 없어요?”
-나는 그 토끼 놈이랑 달라서 대량으로 움직이는 건 불가하다.
“이대로면 상당수가 죽게 될 거에요.”
-네가 현신을 하는 건 어떠냐.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순 없을 거예요. 게다가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칫 거대화했다가 던전이 무너져버리기라도 하면…….”
에반젤린도 많은 힘을 지녔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이비처럼 다재다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데이비처럼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하는 건 불가했다.
당장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빠른 속도로 그들을 찾아내서 보호하거나…….“
이 이상 사태가 더 지속되기 전에 강제로 이 상황을 끝맺는 방법이었다.
다만 끝맺는다고 해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빠라면 어떻게 했을까…….’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에반젤린은 빠르게 나아갔다.
불편한 구두도, 드레스도 사라진 에반젤린의 움직임은 말 그대로 물 만난 고기나 다름없었다.
덜컹!!!
-샤아아아아아악!!
함정과 함께 나타난 거대한 거미들이 위협하듯 포효했다.
하지만 에반젤린이 그들을 한 번씩 툭툭 밟고 지나갔을 때. 놈들의 머리가 툭툭! 하가며 떨어져 나간다.
당연히 에반젤린을 뒤따르는 셋은 이제는 에반젤린이 어떤 기행을 저질러도 놀라기보단 아, 그녀니까 당연하겠지 라는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저기…… 에반젤린 공녀님.”
“네.”
“조금 전 제게 비밀로 해달라 말씀하셨는데. 다른 이들에겐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러네요. 막상 다른데 알리지 말라곤 했는데…….”
“원한다면 지금부터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공녀.”
“그건 좀…… 그게…… 왕자님…….”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에반젤린이 쓰게 웃었다.
“약하시잖아요.”
“컥!”
에반젤린의 순수한 매도에 크로네스는 충격을 받은 듯 휘청거렸다.
“걱정 말아요. 딱히 숨겨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괜히 소문나면 시끄러울까 봐 그런 거니까. 정 안되면, 검만 쓰죠. 뭐.”
별거 있겠느냐며 배시시 웃지만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때였다.
“아…….”
흠칫 놀란 에반젤린이 급히 뛰어가기 시작했고 이에 다른 이들 또한 그녀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의외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거대한 공터에 모여 오들오들 떨고 있었고 그런 그들을 위협하듯 엄청난 크기의 오우거 한 마리가 쿵! 쿵! 소리를 내며 접근하고 있었다.
“라티우스!!”
동시에 크로네스가 오우거로부터 사람들을 지키고 있던 소년을 발견하고 경악하며 소리쳤다.
“크…… 크로네스?! 멍청아! 뭐 하는 거야! 당장 도망쳐!”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그는 겉보기에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한쪽 팔은 완전히 부러졌는지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고 다리도 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상당한 부상을 입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대체 오우거 한 마리한테 왜…….”
“조심해!! 그놈 괴물이다!!”
뒤이어 소리치지만, 오우거는 이미 크로네스를 향해 육중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에 크로네스가 다시금 아티펙트로 보관해둔 마법검을 뽑아 들며 오우거를 단칼에 베여버리려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검기까지 머금은 그의 검은 놈의 육신에 닿기가 무섭게 마치 육체가 슬라임처럼 일그러졌다.
“무슨?!”
퍼어엉!!!
검이 허공을 가른 것처럼 오우거의 육체를 관통해버리자 뒤이어 날아든 오우거의 주먹이 고스란히 크로네스 왕자의 몸에 꽂혔다.
일반적인 오우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튕겨 나간 크로네스가 피를 울컥 토해냈다.
“이 무슨…….”
“그놈…… 내 주먹도 가볍게 흘려버렸어. 그러니까 조심해!”
그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이쪽의 공격은 먹히지도 않는데. 정작 저쪽은 무자비하게 공격해 들어온다.
약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연회 도중에 끌려온 이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아티펙트나 무기가 형편 좋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크로네스는 자신의 팔찌를 이용해 검을 끄집어냈다지만 다른 이들은 무기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하…… 팔 한 짝만 남아도 내가 물러날 거 같나? 덤벼 돼지 같은 놈아.”
라티우스는 오우거를 도발하며 남은 손을 뻗어 손가락 끝을 까딱였다.
물론, 허세였다. 이미 수차례 당한 그는 단순히 간을 볼만한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에반젤린 공녀! 내 말 들려!? 내가 저놈을 막는 동안 이들을 데리고 저 안쪽으로 들어가! 그곳에 이곳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거다!!”
그의 외침에 에반젤린이 탄성을 흘렸다.
“그걸 어떻게 알죠?”
“일단 가라면 가!! 내가 여길 막을 테니!!”
그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했다는 듯 빠르게 뛰어나갔다.
이에 에반젤린이 인상을 찡그린다.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그리고는 순식간에 그의 곁으로 접근한 뒤 슬쩍 다리를 걸어 라티우스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그를 뒤로 던져버렸다.
“꾸억!!! 뭐 하는 짓이냐!”
수차례 구른 그가 온몸의 격통에 비명을 지르면서도 소리 질렀다.
오우거가 바로 뒤까지 왔음에도 에반젤린은 심드렁하게 그를 바라본다.
“그건 어떻게 알았는지 묻잖아요.”
콰아아앙!!!!
뒤이어 오우거의 주먹이 날아들었지만, 에반젤린의 신형은 어느새 오우거의 머리 위까지 올라가 있었다.
촤아아악!!!
동시에 용신검 트와일라잇의 오러 블레이드가 오우거의 전신을 베어버렸다.
-크아아아앙!!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며 휘청거리지만, 치명상은 되지 못했다.
게다가 트롤의 재생력도 있는 건지 녀석의 액체처럼 일그러진 상처들은 다시금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 대체…….”
라티우스는 에반젤린이 너무 자연스럽게 오우거를 베어버리며 넘어서자 입을 떡하니 벌렸다.
“너…….”
“그리고, 계속 궁금한 건데.”
에반젤린은 오러 블레이드를 두르고도 핵이 부서지지 않는 오우거를 짜증스레 보더니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회수한 뒤 주먹을 말아쥐었다.
“왜 자꾸 반말이야. 죽고 싶어?”
-그렇다! 건방진 놈! 에린의 떡볶이라도 먹고 싶은 거냐?
콰직!!!
발을 들어 그림자를 강하게 짓밟아버린 에반젤린이 주먹을 말아쥐었다.
“우선 이것부터 좀 치우고.”
“주먹?! 안돼! 주먹을 내지르면…….”
당황한 그가 급히 소리쳤지만, 에반젤린의 주먹은 마치 물 흐르듯 정확하게 놈의 명치에 파고들었다.
“주먹을 먹어치우고 무방비상태로 만든다!!”
그가 당한 이유는 그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에반젤린은 자신의 주먹이 오우거의 명치 속에 쑥하고 파고들어 가 단단하게 고정되자 인상을 찡그렸다.
라티우스의 한쪽 팔이 박살 난 이유는 오우거의 공격때문이 아닌듯했다.
아마 탈출을 위해 스스로 부서뜨린 것이리라.
이대로 가면 에반젤린도 라티우스와 똑같은 꼴을 겪게 되겠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으랴아아아!!”
애초에 단순한 주먹질로 놈을 잡을 생각 따윈 없었다.
몸체에 꽂힌 주먹을 빼지 않은 채 그녀가 기합을 내지른다.
[데이비 式 군중 제어기]
[명치 X나 세게 치기]
[충격파]
쩌적!!! 콰아앙!!!
순간적으로 주먹에 응축시킨 충격파가 그대로 터져나며 오우거의 육신 전체에 쿵!! 하고 퍼져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거대한 무형의 충격파가 거대한 프레스 기계처럼 오우거의 육신 전체를 짓눌러버렸다.
미래의 에반젤린이 종언을 상대로 보여주었던 공기마저 짓누르는 충격파의 편린이 아주 옅게 보인듯했다.
파작! 소리가 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푸스스스스…….
동시에 핵에 거대한 타격을 입은 오우거는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일반생명체가 아니네. 슬라임처럼 핵이 부서지면 형태도 유지 못 하는 건가?”
모두가 얼이 빠진 얼굴로 에반젤린을 바라본다.
“후. 별것도 아닌 게. 아니 그래서. 왜 반발이냐고.”
넋이나 가버린 라티우스에게 다가간 에반젤린이 으르렁거리듯 위협하자 그림자 쏙에서 작은 도깨비형상이 머리만 쏙 내밀었다.
-건방진 놈! 3백 년은 에린이 떡볶이 형에 처할…… 커헉!!!
겁도 없이 주둥이를 늘리다가 다시금 짓밟힌 두억시니가 꾸억 소리를 내며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어…… 너…….”
“너? 또 반말이네? 야.”
에반젤린이 저벅저벅 다가가 그의 몸을 콱! 하고 밟았다.
“너 뭐 돼? 뭔데 자꾸 반말이야? 나랑 친해? 너 뭐 대공가보다 위세가 좋아? 네가 우리 아빠보다 강해?”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그녀의 말에 라티우스는 얼이 빠진 듯 아무 말도 못 했다.
급기야 라티우스의 멱살을 틀어잡고 들어 올리려는 에반젤린의 행동에 크로네스가 황급히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지…… 진정하십쇼. 에반젤린 공녀!”
“놔요! 이 새끼가 자꾸 꼴 받게 하잖아요!”
연회장에서 보여주던 고고하던 이미지는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왈가닥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모습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보는 게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리는 표정이었다.
“케흑…… 나…… 나 죽어…….”
에반젤린의 악력이 상상을 초월하는지 라티우스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목을 틀어잡은 그녀의 손을 찰싹찰싹 때렸다.
파악!! 털썩.
결국, 에반젤린이 손을 놓자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 미친놈처럼 웃으며 끙끙댔다.
“라티우스!”
뒤이어 크로네스와 크라마가 달려들어 그의 몸을 돌보기 시작했다.
뒤이어 무언가를 확인하던 이오샤가 천천히 다가와 에반젤린에게 말했다.
“모두 무사한 거 같아요. 한 명 빼고.”
“한 명?”
“륜 베르타스 공작 영애.”
그말에 에반젤린은 문득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던 금발의 공작 영애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반젤린 공녀님.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단순 추측일 수 있어요.”
“말해봐요.”
“베르타스 공작가는 대대로 황실 마법사를 지내온 유서 깊은 가문이에요.”
“그렇죠.”
“그리고 이번 사태는 황실 내에서 대규모 전이 결계가 펼쳐졌죠.”
이오샤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증거는 없지만. 현재 제가 생각하기로는, 황실 마법사단장이 이번 일에 개입된 거 같아요.”
만약 베르타스 공작이 정말로 이 일에 가담한 게 맞다면, 자기 딸을 죽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만을 빼돌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도 이건 추측이에요. 그녀 홀로 떨어져 있을 가능성도 생각해야 하죠.”
“하고 싶은 말은 뭔가요?”
“그녀를 포기할지. 찾을지. 공녀께서 판단해주세요. 저는 공녀가 결정을 내리면 이 던전의 모든 정보를 취합해볼 테니.”
그말에 에반젤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두억시니.”
-왜.
“찾아와요. 가설이긴 하지만 만약 아니면 그런 암 덩어리라도 일단 구해나가야 문제가 커지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는 그림자 속에 손을 쑤욱 밀어 넣고 도깨비를 꺼내 휙 던져버렸다.
“안 그러면 오늘 있었던 일 아빠한테 다 이를 거예요.”
-빌어먹을!
작은 몸체를 한 채 스르륵 사라지듯 없어지는 도깨비. 두억시니를 에반젤린은 라티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 뒤가 탈출 장소라는 건 어떻게 알았는데?”
“어? 왜 반말…….”
“뭐. 너는 반말해도 되고 난 하면 안돼? 나보다 약한 게.”
“윽?!”
에반젤린이 톡 쏘아붙이자 그가 움찔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대답했다.
“내 감이다.”
그의 어처구니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이에 에반젤린은 크로네스에게 물었다.
“저 새끼 죽여도 돼요?”
“아…… 안됩니다!”
불세출의 천재이기에 세상 여유롭고 그 누구보다 모든 것을 멀리 내다본다고 알려진 크로네스였지만 도저히 에반젤린의 앞에선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첫눈에 반해버린 것도 문제였지만 에반젤린의 박력이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라티우스의 말도 틀리진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결계형 던전 같네요. 저희 왕국에서 두어 차례 발견된 던전인데 문을 타고 들어가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소환되는 겁니다.”
“그래서요?”
“보스 룸을 공략하면 나갈 수 있는 균열이 다시 생겨나는 겁니다.”
지구의 균열과 비슷하다. 구조는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이 앞의 보스 룸을 처리하면, 적어도 이 위험천만한 던전 밖으로는 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잘하면 외부와 연락을 취해 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없어 빨리 움직여야 해. 우리를 감시하던 놈들이 있었어. 갑자기 감시가 멈추긴 했지만, 다시 감시가 시작되기 전에.”
“아, 그건 걱정 말아요. 그놈 마나 역류로 고생하고 있을 테니.”
다시금 존대하는 에반젤린의 말에 라티우스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지금 뭐라고…… 아니. 뭐라고 하셨습니까?”
강제로 예절이 주입된 그의 모습에 에반젤린은 처음 왔을 때 드래곤 피어를 집중시켜 마나를 역류시켜버린 시선의 주인을 떠올렸다.
그제야 이들이 왜 안전하게 생존했는지를 깨달았다.
에반젤린이 그들의 눈이 되는 자를 무력화시켜버린 탓에 이들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적의 입장에서 어디를 향해있을까.
에반젤린은 뒤쪽에 있는 거대한 문을 바라본다.
이 던전을 완전히 통제하진 않았지만, 일부는 통제하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뭐가 됐건 저 문 뒤에 답이 있겠네요. 이곳에서 나가는 것도, 그리고 그놈들도.”
놈들은 보스 룸에 있다.
에반젤린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이…… 이봐. 어디 가는 거야…… 요.”
에반젤린이 서늘한 눈빛으로 라티우스를 노려보자 그가 황급히 말끝을 공손하게 바꿨다.
“저 뒤에 보스 룸이고, 그걸 처리하면 된다면서요. 그럼 가야지. 뭘 고민해.”
“그…… 그렇긴 한데. 우리를 이곳에 날렸던 그 괴물 같은 기세를 내뿜던 자들이 다시 나타나기라도 하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반젤린이 주먹을 말아쥐고는 그대로 거대한 문을 후려쳤다.
“실례합니다! 좋은 말씀 전해드리러 왔어요!”
콰아아아앙!!!!
문을 박살 내버린 에반젤린은 동시에 같이 무력화되어버린 함정을 무시한 채 고개를 돌렸다.
“걱정 말아요. 당신이 말하던 그 괴물 같은 시계를 내뿜던 음침한 작자들. 이 안에 있으니까.”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면, 상대가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장소에서 매복하면 될 일이다.
보스 룸이 드러나고 거대한 옥좌에 앉아있는 미형의 남자와 그런 남자를 보좌하듯 늘어서 있는 검은 로브의 존재 넷을 보며 에반젤린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저…… 저! 빌어 처먹을 년!”
동시에 검은 로브 중 하나가 휘청거리며 소리 질렀다.
“주군이시여! 저년입니다! 저년이 제 마나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주군의 피어와 같은…….”
그말에 주변 일대에 묵직한 중압감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헤츨링 수준이 아닌 성룡급의 피어로 피어에 노출된 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휘청거리며 쓰러지거나 주저앉았다.
심약한 이들은 과호흡 상태에 들어가 거품을 물기도 했고, 일부는 피를 울컥 토했다.
“닥쳐라.”
동시에 옥좌에 앉아있던 미청년이 에반젤린을 시야에 담았다.
“그렇군. 동족이었나? 그런 것치고는 역겨운 하프인 것 같은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에반젤린을 시야에 담았다.
“똑바로 눈을 뜨고 나를 보지 마라. 역겨운 하프야.”
“당신은? 이 사태를 만든 게 당신이야?”
그말에 미청년이 차갑게 웃었다.
“궁금한 게 많은 걸 보니 동족의 피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군, 미안하지만 그 대답은 틀렸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자는 어디에든 있는 법이지.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이니까.”
에둘러 말하지만 결국 이 조직의 머리통은 그라는 뜻이기도 했다.
담담하게 말한 그는 오만하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에반젤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유일하게 서 있는 존재가 에반젤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모두 데려 와주니 번거롭게 처리할 것 없이 해결되어 다행이군.”
“여기 보스 룸이라면서? 보스는?”
“보스? 저것 말인가?”
미청년이 뒤쪽을 가리키자 아직 죽지 않았지만, 완전히 제압된 사이클롭스 한 마리가 벽에 고정되어있는 게 보였다.
죽이면 던전이 파훼 되어버리니 죽지 않게 제압해둔 모양새였다.
이후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그래도 동족인데 자기소개 정도는 해야지. 일족의 하프여. 넌 어디 일족의 아이이지?”
그의 물음에 에반젤린은 대답했다.
“에반젤린 올 라운, 데이비 올 라운의 삼녀.”
담담하게 말하자 그의 입가에 찢어지는 미소가 걸렸다. 아니 단순한 미소를 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섬뜩함이 들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그래. 그랬지. 데이비 올 라운…… 참 그리운 이름이야.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