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3화
에반젤린에게서 벗어난 두억시니는 작은 체격을 유지한 채 어깨에 도깨비방망이를 쥐고 저벅저벅 걸어나갔다.
“빌어먹을, 그놈 자식 아니랄까 봐.”
자신이 이렇게 심부름이나 하는 처지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강대한 포효를 내지르며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영역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짓뭉개던 절대적인 존재.
두억시니가 바로 자신을 일컫는 말이 아니던가.
“어이구 내 신세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걸음 속도는 게으르지 않았다.
-그르르르…….
이윽고 그의 앞을 막아서는 다수의 몬스터들.
그 위세는 제법 강렬했다. 그리고, 개중 일부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두억시니를 기습하듯 뒤를 점했다.
“냄새가 난단 말이지.”
인간의 냄새가.
코를 킁킁거린 두억시니는 자신의 목덜미에 날아드는 사마귀 몬스터의 칼날이 닿기 직전 방망이를 살짝 들었다.
“얼씨구, 절씨구, 어디 한번 신명 나게 놀아보자꾸나.”
쿠웅!!!!
그렇게 휘둘러진 방망이는 커다란 굉음 한번을 남기고 침묵했다.
먼지가 사라진 후 보인 것은 성큼성큼 걸어가는 두억시니의 뒷모습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서 있던 장소에는 완전히 곤죽이 된 채 본래의 형체조차 남지 않은 몬스터의 사체만이 즐비했다.
“흠…… 이곳인가?”
콧노래를 부르며 종횡무진 진입해나가던 두억시니는 두꺼운 벽 너머에서 인간의 잔향이 느껴진다고 판단했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흥얼거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너의 혹을 떼어 내게 붙여 어디 한번 놀아보자꾸나~”
덩실덩실 춤을 추는 두억시니의 주먹에 스며든다.
터질듯한 근육을 지닌 두억시니는 그렇게 계속해서 춤을 이어나갔다.
“산골 아무개 영감, 소의 피는 빼주오, 그렇지않으면 내 방망이가 영감의 머리통을 오목하게 만들 터이니~”
도대체가 의미 모를 괴이한 흥얼거림, 기괴한 가사.
그리고, 순간 주먹을 말아쥔 두억시니는 아무것도 없는 벽면을 그대로 후려쳤다.
[도깨비 광란]
콰아아앙!!!
순식간에 벽면을 날려버린 도깨비는 내부에 존재하는 인위적인 공간과 덩그러니 놓인 침대에 기절해 누워있는 소녀를 발견했다.
“허어, 아주 팔자가 좋구나. 흐음. 근골이 괜찮은데.”
두억시니는 턱을 어루만지며 기절해있는 륜 베르타스 공작 영애를 훑어보았다.
이윽고 방을 이루던 결계가 부서진 탓인지 그녀가 미동한다.
두억시니도 이야기를 들었기에 대충 상황은 이해가 되었다.
황실 마법사단장이라고 했던가. 그 베르타스 공작인지 공자인지 하는 놈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던 말.
이 방은 애초에 누군가의 눈에 띄게끔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었다. 즉, 처음부터 그녀를 이곳에 숨기려는 작정이었다.
꼴을 보니 제법 집 안에서 귀여움을 받은 것 같은데 딸을 잃어버린 아비까지 의심할 순 없다 여길 테니.
“으읏…… 당신은 누구죠?”
정작 본인은 자각이 없는듯하지만.
눈을 비비며 일어난 그녀가 무어라 말하려다 멈칫한다.
그리고, 이내 본래의 체격으로 돌아온 거대한 두억시니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자 파랗게 질렸다.
“이봐. 공작 영애라고 했나?”
“흐끅!”
말을 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그녀가 흠칫 놀랐다.
“뭐 자잘한 건 됐고, 중요한 제안이 있다.”
“뭐…… 뭔가요. 그보다 당신의 정체는 대체…….”
“너, 혹시 운동해볼 생각 없느냐. 지금이야 빈약하기 그지없지만 작정하고 운동하면 넌 나처럼 끝내주는 근육을 지닐 수 있을 거 같다.”
“뭐…… 뭐라고요?!”
겉보기엔 가녀리고 굉장히 고고해 보이는 소녀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내 눈을 믿어라. 넌 최고의 근육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 내가 기초부터 모두 가르쳐주마!”
“미…… 미친 소리하지 마세요!! 꺄악! 어딜 오는 거야! 누…… 누구 없나요?! 이…… 이 미친 괴물 좀 떼어내 주세요! 크로네스 왕자님!!”
두억시니. 하인스 영지의 근육연구부라 불리는 마경의 우두머리 중 하나.
실제로 하인스의 기사들조차 그들의 마수에 한 번 빠졌다가 돌아오면 일주일은 앓아눕는다고 한다.
물론, 정체 모를 엄청난 성과를 이루긴 하지만.
그의 근육을 향한 집념은 가히 대단했다.
* * *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반젤린은 담담하게 물었다.
“우리 아빠를 알아?”
곧바로 경계에 들어가는 에반젤린의 시선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다마다.”
“어떻게 아는데?”
“그걸 말해줘야 할 의무가 있나?”
“그렇긴 하지.”
“궁금하면 계속 궁금해해.”
그는 손뼉을 치며 만족스레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가 저 쓸모없는 놈의 눈을 가려버린 덕에 던전을 제어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었는데. 이리 다 몰려와 주니 일 처리가 쉬워졌네.”
그의 오만한 말투에 화를 낼 법도 하건만. 그래도 자존심 꽤 있다는 영식이나 영애 중에서 입을 여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그가 은연중에 내뿜는 힘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다들 모였으니 일 처리는 해야지. 모두 치워라.”
그말에 에반젤린의 피어에 당했던 사내가 소리쳤다.
“주군이시여! 저년은 위험합니다!”
“알고 있다. 하프. 그것도 헤츨링 주제에 제법 강한 기세를 내뿜고 있구나.”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에반젤린을 바라본다.
“설마 나머지도 처리 못 한다는 불평을 하진 않겠지?”
즉, 직접 나서서 그녀를 제압하겠다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에반젤린을 향한 경계나 두려움이 상당하지만, 자신의 주군에 대한 공포가 그것을 이긴 것일까.
공간 술사 또한 식은땀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추…… 충분합니다.”
“뭣들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말에 검은 로브를 입은 이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장검을 든 존재. 양손에 대검을 든 존재. 그리고, 한 대 맞았다간 골로갈 것 같은 건틀릿을 낀 존재까지.
이들은 모두 인간으로 보였지만 그 힘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모두 경계!!”
상황이 심상찮게 돌아감을 깨달은 크로네스가 황급히 소리쳤다.
“저항하지 마라. 주군께서 명령하신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다. 저항해봐야 고통만 커질 뿐.”
검을 든 사내가 담담하게 말한다.
“그래. 아직 어려서 너무 무모하구나.”
미청년은 옥좌에 앉은 채 오만하게 에반젤린을 향해 말했다.
“넌 네 힘에 자신이 있었겠지. 다만, 이런 경우는 어찌할 거지? 내가 널 막는 사이에 내 수하들이 저들을 다 죽인다면.”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못할 것도 없지. 설마. 나를 상대로 저들까지 다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말에 에반젤린은 차갑게 조소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바짝바짝 탔다.
‘뭐야, 엄마보다 마나량이 높아?’
페르세르크보다 마나량이 높다는 뜻은 다른 말로 하면 9서클 마법사 이상의 존재라는 소리였다.
물론 마나량이라는 게 경지의 척도가 되는 건 아니기도 하고 페르세르크의 진가는 단순 마법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의 마나량이 정상범주를 넘어서고 있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튀어나온 것일까.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게 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되었건 갑작스레 밸런스가 파괴될 정도의 강자가 출현한 것만 놓고 보면 현재 상황이 좋지 않은 건 분명했다.
“인간 같은 단명종 사이에서 홀로 용족의 피를 지녔으니 자신이 우월하다 느끼기도 했겠지. 하찮은 것.”
그가 손짓을 하자 수십 개의 바람 칼날이 순식간에 에반젤린을 향해 날아든다.
이에 에반젤린은 용신검을 손에 꽉 쥐고 빠르게 바람 칼날들을 쳐냈다.
휘말렸던 영식과 영애들은 미청년이 한 말 중에 에반젤린이 하프드래곤이라는 것을 들었지만 신경 쓸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공녀! 일단 후퇴해야 합니다!!”
에반젤린의 강함을 봐왔다곤 해도 미청년이 은연중에 내뿜는 마나량으로 인해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크흐흐흐흐!!!”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대거를 든 사내가 마치 그림자처럼 흩어지며 크로네스를 지나쳐 겁에 질린 영애의 목에 대거를 찔러넣으려 했다.
화아아악!!!
하지만 순간적으로 돌아선 에반젤린의 강대한 피어가 그대로 그를 휘감자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고 크로네스가 그 틈을 타 그를 저지해냈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상대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그렇게 혼이 났는데…….’
처음부터 저들을 안전한 장소에 두고 홀로 왔다면 차라리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단순 날뛰는 것과 지키면서 싸우는 건 차이가 컸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눈 뜨고 당할 생각은 없었다.
순식간에 에반젤린을 위협하듯 날아드는 바람 칼날들.
단순한 바람 칼날이 아니라 그 위력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드래곤도 부상을 입게 할 수준임은 틀림없었다.
일반적인 헤츨링. 그것도 하프드래곤이라면 단번에 치명상에 가까운 공격이다.
그럼에도 에반젤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펄럭!!!
“아니?!”
“흐음…….”
흑의인들이 경악했고, 미청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기한데, 그런 방식의 현신은 듣도 보도 못했다.”
에반젤린의 등 뒤 허공이 찢어지며 튀어나온 날개가 바람 칼날들을 모조리 막아낸 것이다.
“…….”
“너. 그냥 잡종 하프가 아니구나.”
“알 게 뭐야.”
비밀로 해달라 말했지만 그건 단순한 귀찮음을 방지하기 위한 방비책이었을 뿐이다.
지구와 달리 티오니스에선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극히 구설에 오르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이 상황에서까지 숨겨야 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미청년은 자신의 힘을 다 드러내지도 않은 채 에반젤린을 압박하여 그녀가 절망하는 꼴을 보려던 것 같지만, 그 오만함이 현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말은 그리했지만, 에반젤린의 표정도 마냥 풀어지진 않았다.
‘생각보다 위력이 강한데…….’
옥좌에서 벗어나지 않는 청년의 힘은 강하다. 물론, 대비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지만 마스터 급 초월자를 넘어서는 존재가 넷이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경험 부족.
그리고, 훈련 부족.
에반젤린은 방송을 시작한 이후로 이전보다 수련 자체를 게을리한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알아서 강해지는데 힘들게 수련하는 게 의미가 있는가 싶은 나태한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영식이나 영애 중 저들의 공격을 잠시 막아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야기는 편해지겠지만 그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는 크로네스 왕자조차 흑의인 한 명을 상대로도 잠깐도 버티기 힘든 정도의 수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상황이 좋지는 않다.
“요즘 내가 너무 놀긴 했나 봐.”
에반젤린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날아올랐다가 사람들의 앞에 내려섰다.
“공녀…… 미안합니다…….”
크로네스는 자신의 무력함을 느꼈는지 주먹에서 피가 날 정도로 강하게 쥐고 있었다. 숫자는 이쪽이 압도적임에도 전력은 그 반대였다.
에반젤린 혼자서 모든 짐을 지게 하는 것은 이 상황을 격노하며 지켜보는 크로네스나 라티우스, 크라마 같은 적당한 천재들에겐 꽤 큰 자극이었으리라.
“빌어먹을…… 빌어먹을! 겁을 먹었다고?! 웃기는 소리!!”
라티우스는 미청년이 내뿜는 마나에 제압당한 자신의 몸을 미친 듯이 내리치며 움직임을 재촉한다.
천재. 대단한 명칭이긴 하지만 아직 어린 그들은 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도의 수준일 뿐이었다.
“공녀님…….”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약혼자의 손을 꼭 잡아주던 이오샤도 분함이 가득한 얼굴로 에반젤린을 불렀다.
“미안해요…… 도움이 되진 못할망정…….”
“애초에 여러분들을 데리고 들어온 건 저잖아요.
그때였다.
안 좋은 상황 속에서 에반젤린이 씨익 웃는다.
이에 기분이 나빠진 청년이 다시 바람 칼날을 날려 보냈지만, 에반젤린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튼튼함을 보여주며 그것들을 날개로 쳐내버렸다.
“이야기하고 있잖아. 이 상도덕도 없는 새끼야!”
“그것참 미안하군. 적을 눈앞에 두고 등을 보이다니, 혹시 미친 건가 싶었다.”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놈이 주둥이만 살아선.”
그녀의 말에 청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동시에 그의 주변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화염구들이 만들어진다.
고서클 화염 마법이었다.
“잡종 주제에 너무 혀가 더럽구나.”
그러거나 말거나 에반젤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오샤 영애. 걱정 말아요. 내게 필살기가 있으니까.”
그리 말한 에반젤린은 천천히 등을 돌렸다.
“필살기요?”
“네, 필살기.”
그 말과 함께 에반젤린이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수납한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기가 무섭게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건 가능하면 하기 싫었는데.”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머리 위 허공이 깨지고 갈라진다.
마치 유리에 균열이 생긴 것처럼 갈라진 틈에서 이내 낮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가만히 앉아있던 청년이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년을 막아!!”
뭔가 깨달은 듯 그의 외침이 퍼지자 흑의인들이 일제히 에반젤린을 향해 덤벼들었다.
그 속도는 가히 놀라운 수준이었다곤 하지만 이미 에반젤린은 준비를 마친 후였다.
[별의 숨결]
반 현신은 에반젤린의 본체를 투영하여 현실에 불러내는 것.
지금 허공이 찢어지며 튀어나온 것은 에반젤린의 본체의 머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진 거대한 용의 입에서 모여든 별빛 무리는 이내 천장으로 향했고, 누군가가 손대기도 전에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키며 거대한 브레스 줄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쏘아진 브레스는 순식간에 던전의 천장을 녹여버리며 쏘아져 나갔고 거대한 구멍을 만들어냈다.
다만 균열 속의 던전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본래라면 이런 식으로 바깥과 이어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그녀는 해냈다.
무식하게 밀도가 높은 거대한 브레스를 일점에 조사시키는 것으로 균열을 만들어낸다.
“지상이건 지하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구멍만 뚫으면 되는데.”
막대한 마나를 소모해 휘청거리면서도 에반젤린은 청년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통화권 이탈은 이제 없네?”
수가 적을 경우 적을 상대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쪽도 수를 늘리면 되는 것.
다량의 방어마법까지 걸렸다곤 하지만 이 던전이 통짜 아다만티움이나 헬릭시윰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닐 터.
물론, 아공으로 이어진 공간임을 감안할 수도 있지만, 에반젤린이 던전의 천장을 날려버릴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그가 화염구를 바르게 방사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방어를 취하지 않고 손목에 채워진 팔지를 비틀어 부수며 소리쳤다.
팔란의 황성에선 난리가 났겠지만, 그곳에 있는 두 사람은 오로지 에반젤린만을 걱정해주고 있을 것이다.
“엄마!!! 이 새끼가 나 때려요!!”
아주 잠깐이라도 상관없다. 브레스가 티오니스와 이어졌고, 그 사이에 에반젤린의 팔찌, 즉 신호기가 발산되는 순간 이곳으로 지원을 부르면 그만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