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64화
에반젤린은 가족을 믿는다. 분명 자신을 찾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자신의 위치를 단 한 번이라도 드러낸다면 그녀들은 곧바로 그녀를 찾아올 터였다.
물론, 에반젤린이 박살 낸 균열의 틈은 다시금 닫혔다. 일반적인 지하에 묻힌 던전이 아닌 공간이 이격된 던전이니까.
위치는 이곳에 있으나 마치 공간이 격리된 것처럼 되어있는 것이 바로 이런 던전이다.
차원의 틈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그저 공간의 격리.
하지만 에반젤린의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저거 보여?”
에반젤린은 방금 그녀가 날려버린 천장 쪽에서 느껴지는 상당한 균열이 간 게 보였다.
“흥. 뭐 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지? 깨진 균열이 다시 격리되는 것뿐인데.”
“틀렸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거야.”
“뭐?”
“당장이야, 버티겠지. 그런데 좌표가 정해진 뒤에도 버틸 거 같아? 저게? 얼마나 버틸까, 10분? 5분? 아니면, 3분? 장담하는데, 방금 전의 브레스를 못 막은 시점에서 당신은 끝난 거야.”
시간의 이점은 에반젤린에게 넘어왔다.
하지만 미청년은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아하하하하! 그래. 그렇군. 그럴 수 있어. 보아하니 널 지켜줄 이들을 부른 모양인데. 인정하지, 설마 브레스로 구멍을 뚫고 신호를 보낼 줄 몰랐다.”
박장대소하며 손뼉을 치던 그가 천천히 미소를 거두었다.
“그런데, 그게 지금 상황과 관련이 있나?”
“음?”
“넌 저들을 지켜야 하지. 설마. 그들이 오기 전에, 아니 온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만. 어쨌든 그들이 오기 전에 저들을 모두 지켜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흐음…….”
“게다가 이 유적을 찾는 건 더욱이 불가능하지 실제로 위대한 마법사였던 내 부친조차 이곳의 공간을 파악하진 못했다.”
“부친?”
“그래. 나는 그를 높게 평가하지만,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더군.”
근본적으로 에반젤린이 모두를 지켜내면서 미청년과 4명의 흑의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에반젤린은 고개를 끄덕인다.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그대로 날아들어 그를 향해 검을 찔러넣는다.
“어리석긴…….”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반투명한 막이 생성되며 에반젤린의 공격과 충돌했다.
그리고, 동시라고 할 타이밍에 흑의인들이 크로네스를 포함한 이들을 향해 빠르게 진입한다.
에반젤린이 그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나머지를 베어버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어리석긴, 지금의 너는 지키는 입장 아닌가?”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에반젤린은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방어막 사이로 용신검을 더욱 강하게 밀어 넣었다.
“대륙의 전쟁은 막을 수 없어.”
“아니.”
터어어어엉!!!
그때였다.
갑작스러운 굉음과 함께 흑의인들이 무언가에 의해 튕겨 나갔다.
“내가 지원을 부른 건 저들 때문이 아니야. 당신이 숨기고 있는 것 때문이지.”
해맑게 웃은 에반젤린의 검이 더욱 파고들었다.
-에반젤린. 이 핏덩이들을 지켜주면 되는 것인가?
“그래요.”
-그 정도는 쉽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두억시니는 한쪽 어깨에 기절한 베르타스 공작 영애를 둘러맨 채 여유롭게 대답했다.
갑자기 나타난 두억시니의 존재 때문일까. 청년의 표정이 한차례 일그러지더니 그의 의지에 영향을 받듯 다수의 마법진이 그의 주변에 생겨났다.
그의 입에서 작은 영창이 흘러나오는 건 동시라고 할 정도로 빨랐다.
콰지지지직!!!!
“그렇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천한 잡종.”
“아까부터 잡종, 잡종 거리는데 진짜 거슬리네! 네까짓 게 뭔데 내 친부모를 판단해!”
카앙!!!
막대한 반발을 일으키며 청년의 마법이 에반젤린의 검을 한차례 튕겨냈다.
그럼에도 에반젤린은 터프하게 검을 그의 마법과 충돌시켰다.
수차례의 충돌. 청년은 에반젤린이 자제를 잃었다고 판단하며 비웃음을 날렸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에반젤린의 검이 갑자기 궤도를 틀어버렸다.
그 목적지는 청년이 아닌 그가 앉은 옥좌였다.
청년이 펼친 방어 마법들은 엄연히 그를 보호하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옥좌 쪽은 방어가 미비했다.
에반젤린이 노린 것은 그것이었다.
옥좌에서 움직이지 않는 건 이곳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 그렇다면 그가 있는 장소 자체를 파괴하면 그만이리라.
하지만 청년의 표정은 일그러지지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추가로 마법진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에반젤린의 검을 휘감고 그녀의 오러 블레이드를 검째로 강하게 짓누르고 압박했다.
작정하고 그녀의 검을 부러뜨려버리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마치 고무줄을 서로 당기며 힘겨루기를 하다가 한쪽이 고무줄을 놓는 것처럼.
청년은 에반젤린의 검을 부러뜨려 그 에너지를 역으로 그녀에게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더욱더 힘을 가했다. 말 그대로 무지성 돌진 그 자체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엔 단순 이유가 존재했다.
반발? 내상? 형태를 잃은 오러블레이드가 비산하여 역류하는 건 어디까지나 검이 박살 났을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다.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신의 금속 헬릭시윰으로 만든 검이 부러진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무슨?!”
평범한 마법 검이었다면 오러 블레이드를 둘렀다 해도 부서질 정도의 압력이 가해졌음에도 용신검은 그 어떤 생채기 하나 남지 않고 끝내 반발하는 마법들을 꿰뚫었다.
그리고는. 허공을 가르며 끝내 옥좌를 베어버렸다.
화아아아악!!!!
설마 그 강력한 압력 속에서 검이 부러지지 않고 파고들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서린다.
“옥좌. 부서졌네? 뭘 숨겨놨는지 물어봐도 돼?”
비실비실 비웃음을 던지며 에반젤린이 묻자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하프 년이……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는 것이냐.”
“당신이 말을 안 해주고 알아주길 바라는 거야?”
“닥쳐라. 잡종! 네년 때문에 아버지의 부활이 물거품이 되었다!!”
숨이 막힐 듯 터져 나오는 기세였다.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끄으으어어억!!”
“주…… 주군이시여!!”
그에게서 흘러나온 검은 기류 때문인지 아이들을 노리던 흑의인들에게서 검은 무언가가 강제로 빨려 나가기 시작했다.
“주어진 명령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들 너희들에게 준 힘을 모두 회수하겠다. 돌아와서 다시 나의 양분이 되어라.”
“제…… 제발 자비를!”
“으아아악!!!”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흑의인들이 크게 경련한다.
그리고, 검은 것이 모두 빠져나갔을 때. 그곳에 남은 것은 흑의를 입은 뼈다귀뿐이었다.
“후우. 잡종.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을 주어 네년을 파멸시키리라. 내 아버지의 부활을 막은 네년을 절대 용서치 않겠다.”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를 대하듯 그가 말하지만, 에반젤린이나 두억시니, 아니 그곳에 있던 모두는 지독한 이질감을 느껴야 했다.
-미친놈이군.
“당신…….”
흑의인들의 힘을 흡수한 청년은 곧바로 주변을 검게 물들이는 안개를 발산했다.
하지만 에반젤린의 시선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청년에게 고정되어있었다.
섬뜩한 기분에 몸서리가 쳐진다.
그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왜…… 웃는 거야?”
아버지의 부활을 저지당한 그는 분노하고 있건만, 그의 얼굴에는 실소를 넘어 광소에 가까운 웃음이 걸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얼굴이 어떻게 분노한 자의 얼굴이란 말인가. 그의 기괴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체 모를 오한이 돋는 안개가 더욱 짙어지기 시작하자 에반젤린은 반사적으로 다시 브레스를 끌어모았다.
[별의 숨결]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질량과 고열이 머금어진 압축된 광선이 그녀의 숨결을 따라 놈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만!!!
하지만 들려온 것은 놈이 브레스에 적중하는 소리가 아닌 두억시니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뭐 하는 거냐!
“무슨…….”
안개가 일순간 살짝 걷힌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은 상당히 경악스러웠다.
그녀는 분명 청년을 향해 브레스를 쏘았건만, 정작 브레스가 날아간 방향은 영애와 영식들이 있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브레스를 막아낸 탓인지 두억시니의 한쪽 팔이 검게 그을려있었다.
“두억시니? 분명 뒤쪽에 있었는데?!”
-정신 차려라. 이 안개는 상대의 오감을 혼동시키는 것 같다.
그의 말에 에반젤린은 반사적으로 기세를 끌어올려 전신을 보호했다.
기괴하기 짝이 없는 마법은 단순한 마법의 수준이 아니었다.
“징그러운 작자…….”
오감을 보호한다 할지라도 이 혼동 속에서 이들을 지켜내는 게 가능한지 사실 의문이었다.
자칫 자신을 구하러 온 일리나나 페르세르크마저 휘말리는 건 아닐까.
걱정이 서리던 찰나였다.
-조심해라!!!
순간적으로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무언가가 에반젤린의 몸을 공격해왔다.
생각보다 묵직한 타격이지만 공격력보다는 조금 기이한 방식이 마음에 걸렸다.
에반젤린은 자신의 힘을 완전히 능수능란하게 다룰 경험이 부족했다.
애써 반격해봐도 놈은 이 기이한 공간을 이용해 요리조리 빠져나갈 뿐이었다.
카앙!!!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네 힘이라면 얼마든지 본질을 볼 수 있을 거다!
놈은 이 안개를 통해 에반젤린의 감각을 혼동시킨 뒤 그 틈을 공격한다.
“저 괴물은 눈치가 빠른 모양인데.”
어둠 속에서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눈동자는 에반젤린처럼 세로로 찢어진 파충류의 것과 비슷했다.
다만 에반젤린이 아는 드래곤과 달리 그는 극히 뒤틀려있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강한 힘, 날렵한 움직임. 정체 모를 힘의 출처까지. 훌륭해. 하지만 경험이 크게 부족하군.”
그는 안개 속으로 흩어지는듯하더니 순식간에 나타나 에반젤린의 뒤를 점하며 손을 내질렀다.
“뭐, 자기 힘을 온전히 다루지 못하는 것도 한몫하는 듯하지만.”
“크으…….”
검으로 몸을 지탱하며 에반젤린이 휘청거렸다.
타격이 큰 게 아니다. 조금 전 그의 공격을 맞고 육체에 정체 모를 부하가 가해지고 있다.
마치 이 공간 자체가 그를 위해 움직이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공녀!!”
다급한 크로네스 왕자의 외침이 들려온다.
어느새 안개 속에서 튀어나온 청년이 그녀의 멱살을 틀어잡아 들어 올린 것이다.
그의 행동에 제압을 당한 꼴이지만 에반젤린은 저항하지 않았다.
실체가 닿아있는 이 순간이 위기이면서도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이성을 잃고 마구잡이로 힘을 남발하는 건 어리석은 판단임을 이미 수차례 배웠기 때문이었다.
“네가 조금만 더 영리했으면 내가 당했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한 대만 맞아주지.”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잡종이라곤 하나 네 마나는 제법 맛이 있어 보이는구나.”
그는 여유롭게 말하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에반젤린의 몸에서 마나가 빠져나오며 그의 손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사령 마법인 드레인이었다.
미약한 양이지만 지속되면 분명 치명적이리라.
“오오…… 이토록 방대한 마나라니.”
그는 에반젤린에게서 흡수하기 시작한 마나가 정말로 마음에 드는지 옅게 웃었다.
이에 그의 실체를 완전히 파악한 에반젤린이 회심의 일격을 가하려던 순간. 그녀의 기감에 익숙한 두 개의 기척이 잡혔다.
“타임 오버.”
도박 수를 던지듯 반격을 가하려던 에반젤린은 최대한 처량해 보이도록 힘을 빼버렸다.
저항을 포기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청년은 황급히 에반젤린을 놓고 안개 속으로 다시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에반젤린의 자안을 마주한 그는 정체 모를 기운이 그의 전신을 옥죄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생각지도 못한 현상에 그는 드레인을 강제로 멈췄을 때 생기는 역류와 반발도 무시한 채 강제로 물러났다.
드래곤조차 움찔하게 만드는 피어? 그딴 게 있을 리가. 혼란 속에서 그가 에반젤린을 바라보았다.
착각은 아니었다. 방금 전 그녀에게서 느낀 것은 엄연히 공포였다.
같은 동족, 그것도 하프에게 이런 것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동시에 안개가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시간 됐어. 네가 진 거야.”
쩌억!! 콰창!!!
그 틈을 파고들며 백은색의 검광이 청년을 향해 날아든다.
반격을 할 것인가, 회피를 할 것인가. 어느 쪽인가 고민할 새도 없이 그는 본능에 맡기듯 몸을 날렸다.
막으면 죽는다! 그런 정체 모를 공포가 전신을 때린 것이다.
“이런! 몸이?!”
망설임 없이 벗어났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에반젤린과 시선을 마주했을 때 느낀 그 압박감이 그를 다시 한번 옥죄는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리고, 그 짧은 착각과 머뭇거림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백은의 검기가 그대로 피할 틈도 주지 않고 날아든 것이다.
‘피하긴 늦었다! 그렇다면!’
피하는 게 불가하고 막는 것도 안된다면 남은 것은 하나. 그는 주변을 장악한 공간을 비틀어 그 공격이 에반젤린에게 향하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검기는 올곧게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커헉?!”
그의 팔이 피를 뿌리며 잘려나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크아아악!!”
끔찍한 격통과 함께 피 분수가 일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과 치명상이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후속타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급히 몸을 들었지만 이미 그의 코앞까지 발이 날아들고 있었다.
콰아아앙!!
결국,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는 자신만 만회하던 공간 영역 속에서 두 번의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흐음…… 저 모습은 분명.”
뒤이어 공간이 완전히 찢어진 사이로 또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확실하구나, 가르강티아 네차흐.”
“아는 작자인가요?”
“본녀도 깨어있는 걸 본건 처음인 게야. 동족을 포식한 미친 드래곤, 초대 리치 닉스의 양아들…… 분명 3천 년 전에 닉스에 의해 영원의 봉인에 갇혀 정신을 붕괴시켰다고 들었건만.”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린 그녀는 에반젤린과 두억시니. 그리고 한자리에 모인 채 겁에 질려있던 영식들과 영애들을 스윽 둘러본 뒤 에반젤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에반젤린의 찢겨 나간 소매와 그 소매에 생긴 잔 상처를 보자마자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굳었다.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에요!”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에반젤린은 페르세르크의 뒤에 숨어버린 채 고개만 쏙 내밀어 가르강티아를 가리키고 소리쳤다.
에반젤린은 마치 지금껏 쌓였다는 듯 몸에 난 자잘한 상처들을 보여 주며 닥치는 대로 고자질했다.
“여기 머리카락 끝에 탄 거랑 여기 상처랑. 여기 긁힌 거랑…… 여기 멍든 거 전부!”
그녀의 말에 페르세르크는 쿡쿡 웃어 보였고 일리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대치할 테니 주변 분석을 부탁해요.”
“조심하거라. 가르강티아는 공간을 장악하는 괴이한 힘을 지녔다고 닉스가 말한 적이 있으니.”
“초대 리치 닉스의 잔재라, 직접적인 건 아니지만 관련이 꽤 깊은 놈이긴 하죠.”
제 몸집만 한 거검을 한 손으로 든 채 일리나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가르강티아 네차흐는 조금 전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순한 착각이겠지. 에반젤린의 시선을 마주했을 때 느낀 기괴한 압박 때문에 생긴 착각이겠거니.
그리 생각하며 그는 공간을 비틀었다. 모든 힘을 끌어올 수 없는 상황이지만 고작 인간 하나가 아닌가.
순식간에 팔 한쪽이 잘려나갔다곤 하지만 크게 위협적인 것도 아니거니와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박살 나버린 던전을 보며 천천히 몸을 빛으로 휘감았다.
“제단이 이렇게 박살 나버린 이상…… 스페어로 가는 수밖에.”
그의 목소리가 변한다.
-내 분노에 짓이겨지고, 절망하라 단명종들아.
순식간에 검은 비늘을 지닌 거대한 드래곤으로 변한 녀석의 몸체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족히 수백 미터는 되어 보일 만큼 거대했다.
일반적인 드래곤 이상으로 거대한 놈의 형체에서 주변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이에 일리나가 가볍게 검을 그어 검기를 날리자 놀랍게도 검기가 일그러진 공간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스페어?”
일리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모습을 올려다본다.
-크아아아아아!!!
이윽고 엄청난 크기의 포효소리가 터져 나오며 주변의 모든 공기를 짓누르고 공간을 비틀기 시작했다.
독특한 드래곤 피어였다.
“으윽?!!”
“꺄아아악!!”
저항이 낮은 영식들이나 영애들은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렸다.
다만 일리나에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스으으으으!!
이윽고 박살 난 균열 바깥으로 날아오른 가르강티아의 입에 브레스가 모여든다.
-잿더미가 되어라. 단명종!
그의 입에 모여드는 브레스는 확실히 기이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우웁…… 이게 무슨 냄새야…….”
용의 브레스에 구취 같은 게 남을 리가 없다.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였으니까. 즉. 에반젤린이 맡은 역한 것은 그의 마나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지독한 향을 내뿜는 건 보통의 경우로는 불가했다. 다만 일리나는 그 잔향을 맡을 수 없기에 침착하게 힘을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세를 낮춘 뒤 한 손에 칼디라스를 들어 검면이 머리 뒤쪽으로 가게끔 자세를 잡았다.
-소용없다. 내 주변은 이미 공간이 이격되어있다. 네년이 날린 검 따위로 브레스를 막을 수는…….
서걱…….
묵직한 파육음과 함께 가르강티아의 신형이 흔들린다.
거대한 체격을 자랑하던 가르강티아의 날개가 동시에 잘려나가 버린 것이다.
-음?
그는 자신의 부상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집중력은 입에 모으고 있던 브레스를 허공에 날려버리게 만들었다.
-크억?! 이게 무슨?! 분명 공간은 이격시켰을 텐데?!
“우리 잘생긴 남편도 이건 피하는데, 네까짓 게 뭔데 그걸 몸으로 받아내.”
일리나가 스산한 얼굴로 전신에 흘러나오는 기류를 갈무리했다.
조금 전 단 두 번의 검격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체력소모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년이!!
드래곤을 창공에 떠 있을 수 있게 해주던 날개가 사라지면서 추락하던 그가 기합을 내지르자 살점들이 찢겨 나가며 순식간에 날개와 잘려나간 앞발이 재생된다.
-감히!! 이 일대와 함께 모조리 사라질 것을 명한다!!
가까스로 몸을 다시 부유시킨 가르강티아의 주변으로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검은 마법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용언 마법 파워 워드 킬.
그의 의지가 마법에 녹아들며 대량의 캐스팅을 만들어냈다.
일반적인 마법사가 보았다면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볼 정도로 고위의 마법이었다.
이미 발현된 마법은 브레스와 다르다.
그렇다고 데이비처럼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분석 후 디스펠하는 건 페르세르크도 불가능했다.
브레스처럼 방향을 트는 건 불가하기에 일리나는 검을 양손으로 쥐고 종베기의 자세를 취했다.
“며칠간 온몸이 쑤시겠네…….”
짧게 중얼거린 그녀가 오른손에 힘을 주고 왼손을 걸치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윽고 잔잔하게 일렁이던 그녀의 방대한 힘의 상당량이 일순간 방출된다.
[시공격검]
[극쇄]
[붕괴 전력 가르기]
쩍!
그녀가 차원의 틈을 베어내어 차원 이동을 할 때 사용하는 균열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 규모는 평소 그녀가 사용하는 정도의 수십 수백 배가 넘는 규모로 일어났다.
비틀린 균열은 마법을 통째로 베어 넘기며 균열 너머로 날려버렸다.
엄연히 주변 공간을 장악하여 이격시키는 가르강티아의 능력의 압도적인 상위호환이었다.
-말도 안 돼…… 이 무슨?!
쩍!
마법이 박살 난 것을 깨닫고 사태의 심각성 또한 깨달은 그가 후퇴를 선택한다. 하지만 어느새 일리나는 그의 몸을 짓밟듯 올라탔고 검을 휘둘렀다.
일검에 그의 방어가 갈라진다. 그가 다급히 방어를 끌어올려 보지만 일리나는 담담하게 또 한 번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방어 마법과 그의 몸체에 커다란 상흔이 생겼다.
-이…… 이럴 순 없다!!
“아직. 한발 남았어.”
쩍!!
비명을 지르듯 그가 반격하려 하지만 일리나의 검이 그의 목을 날려버리는 것이 더 빨랐다.
피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그의 거대한 머리를 가볍게 발판삼아 몸을 튕긴 일리나는 빠르게 지상으로 낙하하며 몸을 비틀어 하늘에 떠 있던 그의 육체를 향해 수십 갈래의 검흔을 만들어냈다.
놈은 분명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꺼내기도 전에, 그리고 계획을 실현시키기도 전에 죽어버린다면 사실상 의미 없는 계획에 불가하다.
“와…… 아빠가 왜 엄마들한테 굽신거리는지 알겠네.”
페르세르크의 뒤에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있던 에반젤린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정확히 놓고 보면 놈의 공격이 공간과 관련되어있었기에 일리나에게 힘도 못 쓴 것이지만 그런 건 사실 상관없었다.
“해…… 치운 건가? 저 괴물을?”
그때 멍하니 상황을 바라보던 영식 중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동시에 흠칫 놀란 에반젤린이 영식과 영애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부분은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적이 죽었음을 받아들인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일부는 살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일부는 긴장이 풀렸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있던 세 소년은 달랐다.
“어이가 없네…… 저게 우리 전 세대의 천재라 불리던 이의 실력이라고?”
“그런 정도를 넘었다…… 저건 단순 천재나 둔재 같은 재능의 영역이 아니야…….”
일리나의 나이는 고작해야 스물 남짓.
아무리 천재라 불려도 저 나잇대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상을 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
크라마의 말에 크로네스 왕자는 굳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일리나가 베어버린 것은 가르강티아뿐만이 아니었다.
가르강티아가 떠 있던 하늘은 그녀가 만들어낸 수십 갈래의 검흔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채 허공에 거대한 상흔을 남기고 있었다.
저건…… 당분간 없어지지 않겠지.
반사적으로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불세출의 천재. 차세대의 기둥.
일각에선 그를 두고 과거 이름을 날렸던 티오니스 성자와 검의 황녀, 일리나 데 팔란과 견줄 재능이라 말하곤 했다.
그만큼 그는 다양하고 나이에 맞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실제로 아닌척했지만, 그는 은연중에 공감하고 있었다.
성년도 되지 않은 나이에 익스퍼터 상급의 경지하며, 마법까지 다루는 존재는 거의 없는 편이니까.
그래서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것을 굳이 제지한 적도 없었고, 언젠가 자신도 그런 존재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재능이 더 방대하고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의 친구인 라티우스는 무투계에서 그런 재능을 드러냈고, 또 다른 친구인 크라마는 마법 쪽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시 묻는다면 그는 자신 있게 대답할 자신이 없어졌다.
불세출의 천재? 티오니스 성자나 검의 황녀에 비견되는 재능?
웃기는 소리.
벽, 아니 압도적인 심해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을 들여다보는 공포가 온몸을 옥죄어온다.
대체 얼마나 오만했는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가.
그는 자신이 저 나잇대가 되어도 저런 말도 안 되는 검을 만들어낼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애초에 에반젤린 공녀만으로도 그런 자신감이 박살 나고 있는데, 소문으로 무성하던 검의 황녀님의 실력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그때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에반젤린 공녀…….”
“일단 저건 처리했으니 더는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던전이 붕괴해서 몬스터도 더는 나오지 않을 테고.”
“…….”
“표정이 좋지 않은데. 혹시 다친 곳이 있나요?”
에반젤린이 그에게 다가오며 묻자 그는 흠칫 놀라며 한발 두발 물러났다.
“아, 아닙니다…….”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네요. 한 명도 죽지 않았으니 그 거지 같은 계략도…….”
“아니. 그는 죽지 않을 게야.”
그때였다.
가만히 놈의 머리가 추락하고 먼지화한 곳을 지켜보던 페르세르크가 입을 열자 검을 갈무리하던 일리나, 상황을 지켜보던 에반젤린, 그 외에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초대 리치 닉스…… 그가 양아들인 가르강티아를 봉인한 데엔 그의 미친 사상, 그의 미친 행동 계획도 있지만…… 닉스 본인에게 절대 불사를 안겨다 준 힘의 근원의 주인이기 때문인 게야.”
페르세르크는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일리나가 공간 채로 잘라버렸다 해도 죽지 않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