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70화
한바탕 폭음이 울려 퍼진 직후, 영혼 상태로나마 잠시 부활에 성공한 닉스는 자신의 온몸이 짓이겨지듯 묶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괴물 같은 놈! 그때보다 더 강해졌구나!
데이비라는 괴물은 닉스로썬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존재였다.
처음 부나방 같은 용사를 처단하고 자신의 위업을 다시 세워 마왕의 부활을 괴했던 그 섬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대기 전체가 전율하고 공포에 떨어야 했던 존재.
그래. 그때 그 인간을 만났고 닉스는 죽음을 맞이했다.
참으로 원통하고 허망한 죽음이었다.
하지만 어쩐 이유였는지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 그 증오스러운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붙잡고 있었다.
지금의 그는 이전과 달랐다. 과거엔 특수한 화살을 사용해 자신을 죽였던 그였지만 지금의 그에게서 나오는 힘은 자신의 영혼을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릴 힘이 가득해 보였다.
아아, 마족의 미래가 너무도 어둡구나…….
“이제 이야기라도 좀 나눠볼까?”
-네놈과 할 이야기는 없다.
“넌 이미 죽었어. 네 혼은 본래 소멸해야 하지만 수르트의 화살 때문에 네 영혼은 영혼의 강으로 회수되었고 오랜 시간 업을 치르고 정화되겠지.”
그 과정이 절대 곱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네놈과 대화할 생각이 없다. 지금 내게 드는 생각은 오로지 마족의 일통과 연합종족의 평화를 보지 못했음에 따른 괴로움뿐이다.
그의 말에 데이비는 아하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뒤늦게 합류한 아리스와 슈네리아는 거인족 리치의 혼이 거대한 바위에 빛의 창으로 꿰뚫린 채 묶여있는 모습이 영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이봐! 뭔 마족의 일통이야! 평화로우면 좋은 거잖아!”
이야기를 듣던 슈네리아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데이비는 다른 것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마족의 일통…… 마족의 평화라…….”
“데이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아리스가 흠칫 놀라 데이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데이비의 잔상을 훑을 뿐이었다.
콰아아앙!!!
뒤이어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닉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데이비가 닉스를 영혼째로 짓이기기 시작한 것이다.
-끄으으으!!
“마족의 일통? 평화? 말은 똑바로 하지. 내가 널 정말 모를 거 같나?”
-커허어억!?
“넌 그냥 페르세르크를 마왕에 두고 그녀를 조종해 네 맘대로 세상을 지배하고 싶었을 뿐이잖아.”
놈은 페르세르크가 마왕의 자리에 앉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물론, 페르세르크는 자신의 존재가 심연의 신 타나토스로 인해 비틀린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고, 모두를 구할 최선의 수를 둔 것이지만 평행선에서의 닉스는 페르세르크를 부활시킨 것도 모자라 그녀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했다.
비틀린 지배욕.
마왕조차 자신의 손아귀에 두려는 음습한 계략.
그의 과거사가 어땠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마족과 인간의 전쟁은 그가 깊게 관여해있었고, 두 번째도 데이비가 죽이지 않았다면 봉인에서 풀려난 이후 그런 행보를 밟았으리라.
-닥쳐라!
닉스의 안광이 번뜩이더니 영혼의 힘을 끌어모아 저항한다.
하지만 데이비는 망설임 없이 그의 하반신을 걷어차 박살내 버렸다.
-커억!?
“마족은 종전 후 평화를 찾았고 더 이상 너 같은 놈의 논리에 놀아나서 쓸데없는 피를 흘릴 이유가 사라졌다.
-닥쳐라! 네깟놈이 마족을 논하는가!!
“그럼. 마왕이 마족을 논하지 누가 마족을 논해.”
데이비의 말에 그의 안광이 거칠게 흔들린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감히 인간이 어떻게!
그의 비명 섞인 외침이 들려온다.
이성이 제대로 자리 잡지도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대화하면서 느낀 건데 상당히 기억에 손실도 상당해 보였다.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나 있을는지.
이윽고 데이비의 전신으로 마왕의 권능의 일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그것은?!
“그래. 페르세르크가 가지고 있어야 했던 마왕의 권능이다. 현재는 권능이 흩어져서 각 마족의 수뇌부가 일부 가지고 있고.”
-말도 안 돼…… 대체 어떻게 인간이…….
“마왕에게 진짜 충성했던 한 마족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내놓은 평화의 결과다.
돌아가긴 했지만, 마족은 인간과 종전 협상을 맺었고, 더 이상 적대할 이유도 사라졌다.
고대 마수의 난동은 사라졌고 마족의 땅은 태양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으니까.
데이비는 그를 짓누르며 말했다.
“마왕으로서 명한다. 닉스, 넌 정말로 마족을 위해 움직였나? 넌 마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존재라 할 수 있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 자체는 의미 없었다.
“닉스, 마지막으로 묻는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가 정말로 이해가 안 돼서 말이지.”
-…….
데이비가 마왕이라는 사실 때문에 닉스는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다만 그의 혼란은 이어지는 데이비의 말에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가르강티아 네차흐.”
-그 이름을 네놈이 어떻게?!
“그놈에 관한 이야기다. 진실만을 말해라. 마왕으로서의 명령이다. 거짓을 말하고 싶어도 전부 토해내. 그게 마왕으로서 네게 내리는 두 번째 명령이다.”
-가르강티아…… 그놈이 봉인을 푼 것인가?
닉스의 안광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이에 데이비는 빙그레 웃으며 그를 짓눌렀다.
-끄아아아악?!
“야. 네 앞에 있는 게 누구?”
-비…… 빌어먹을…….
“마왕, 그럼 넌 누구?”
마왕을 섬기던 마족.
답은 나와 있다.
“말이 짧다 개x끼야.”
쾅!!
데이비의 무차별 폭행을 보며 아리스와 슈네리아는 서로 소곤거리듯 대화했다.
“데이비. 이럴 때 보면 데몬보다 악랄한 거 같은데…….”
“내게 성흔을 하사한 신님이 이런 존재라는 게 알려지면…… 난 끝장이야…….”
* * *
언데드도 아닌 생자들이 막아선다.
그들의 실력은 제각각 겉보기엔 싸움 한 번 안 해본 존재들 같은 이들도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의 힘은 엄연히 익스퍼터급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 검은 드래곤이 힘을 나누어준 거겠지.”
뒤쪽에 있던 륀느가 한 손에 빠루를, 한 손에 뾰족한 너클을 쥐고 에반젤린의 왼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레이나 또한 빛으로 이루어진 기검을 만들어내며 새하얀 날개를 한번 펼쳤다가 없애고는 에반젤린의 오른쪽으로 걸어 나왔다.
“수가 상당하다고 평가. 적대하는 자에게 자비는 없음을 경고.”
“주군의 명에 따라.”
그들은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히 조종당하는 것이라면 피해자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눈에 서린 증오는 거짓이 아니었다.
“티오니스 성자의 자식이다. 살려두지 않겠다.”
지독한 증오가 느껴진다.
에반젤린은 한숨을 내쉰 뒤 뒤쪽에 있던 굴롬 왕자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따라와.”
존대 따위는 집어치운 날카로운 말투에 그는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현재 바깥에선 가르강티아의 시선을 끌기 위해 일리나와 연합군이 대치 중이고 페르세르크가 몸을 숨긴 채 가르강티아의 감각을 비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그는 이질감을 눈치챌 터.
그전에 인질이나 다름없는 4명을 되찾아오는 게 에반젤린의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궁금했다.
“잠깐.”
에반젤린이 손을 들어 모두를 제지했다.
이성이 있는 존재들이었기에 그들 또한 에반젤린에게 시선을 보낸다.
“하나만…… 하나만 물어볼게요.”
에반젤린은 의문이 들었다.
조종당하는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적어도 에반젤린이 느끼는 감정의 편린 속에서 저들은 지독한 증오를 품고 있었다.
“왜…… 왜 아빠를 그토록 증오하는 거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하인스 대공녀.”
“나는 보여요. 당신들이 아빠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이들은 자발적으로 가르강티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게 그의 힘에 반해서? 공포에 굴해서라는 이유였다면 고민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달랐다. 아니 이곳에 있는 적대하는 이들 모두가 달랐다.
이에 륀느와 레이나가 반사적으로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
아직 에반젤린이 들어선 안 될 이야기였으니까.
“내 형은 마족에게 찢겨 죽었다.”
“…….”
“내 부모는 볼티즈 왕가를 모시던 중 하인스의 공격에 살해당했다.”
정확히는 라운과 볼티즈의 전쟁에 휘말린 소수의 피해자.
하지만 본인에겐 세상 전부나 다름없다.
“그…… 그건?!”
“필요한 일이었다. 그리 말하고 싶은 것이냐? 공녀.”
“…….”
에반젤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내 형은 내게 전부였다.”
“내 부모는 평생을 나를 위해 힘들게 일하신 분들이다. 어릴 적부터 내가 아플까 노심초사했고, 내가 타국으로 일을 하기 위해 떠날 때도 눈물로 밤을 지새우신 분들이다.”
그들이 죽었다.
“하나 묻지 공녀. 하인스의 성자가 논리적으로 평화를 위해 싸워왔다면. 그는 내게 평화를 가져다준 이인가. 아니면, 내게 절망과 파멸을 가져온 악귀인가.”
“…….”
데이비의 행동 논리에 명분적으로 밀고 들어올 것은 없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업이 쌓이는 법.
“왜 내 형을 죽인 마족 놈들과 강제로 평화를 논하게 하는가.”
“그럼 죽도록 싸우길 바라는 건가요?”
“내가 바라는 건 평화 따위가 아니야 공녀.”
그의 눈에서 숨길 수 없는 증오가 흘러나왔다.
“내 형을 찢어 죽인 그 마족 놈들. 그 마족 놈들의 머리통을 으깨고 골수를 뽑아 마신다.”
“…….”
“내가 바라는 건 하나,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뿐이다. 힘이 없는 내 외침은 의미 없는 저항일 뿐이었고, 하인스의 성자는 세계의 영웅이 되었지. 그래, 그가 평화를 위해 움직인 것, 그리고 국제 연합의 계약에 따라, 또는 개인의 평화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싸운 것은 인정한다. 그렇기에 다시 묻겠다.”
그는 무기를 들고 한걸음 내디뎠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내 가족을 잃은 내 분노는 풀어내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다고 그 미치광이 도마뱀의 밑으로 들어가요?”
“그가 무슨 사상을 가지고 있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내게 생에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고, 나는 그걸 잡았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죽겠지. 하지만, 후회는 없다.”
에반젤린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가 내뿜는 지독한 슬픔과 증오를 똑바로 직시했다.
“하아…… 이럴 거 같더라니…….”
이윽고 레이나가 걸어 나간다.
“빛의 용사…….”
“당신의 논리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세상에 완벽한 행동 같은 건 없을지도 몰라요. 아무리 상식적으로 살아가려 한 그 사람이라도 행동 하나하나에, 큰 나비효과가 되어 많은 이들이 피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기검으로 사내의 목을 향해 겨누고는 말했다.
“당신은 틀리지 않아요. 우리 또한 틀리지 않을 겁니다.”
레이나의 기세가 퍼져나갔다.
“그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내는 건…… 아마 불가능하겠죠.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입에 발린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이 흘린 피눈물, 그 업보는 피하지 않고 짊어지겠어요.”
“그렇다면 더는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다. 공녀. 대답이 되었나?”
“에반젤린. 어서 갈 것을 명시.”
레이나는 이들의 존재를 보자마자 어렴풋이 눈치챈 것이다. 그래서 이런 슬픈 내면의 진실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무…… 무슨 촌극이냐! 빨리 길이나 터라! 감히 내 왕국에 침범한 놈들이 무슨 말이…… 커헉!!”
뒤이어 륀느가 바닥을 강하게 구르자 파편이 튀며 그의 얼굴에 적중했다.
“아가리를 찢는 것을 높게 평가.”
“저 새끼는 진짜 길 안내만 아니었어도 가만 안 뒀을 거야.”
에반젤린이 이를 빠득 깨물며 그를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지금부터 쓸데없이 입을 놀리면 진짜 널 내가 어떻게 찢어버릴지 몰라.”
에반젤린의 붉은 눈동자가 자색으로 일그러졌다.
세로로 찢어지는 동공에 굴롬 왕자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후 그녀가 거칠게 굴롬을 내던졌다.
굴롬은 뻔뻔하긴 해도 데이비에게 우호적이던 집단의 일원이었다.
물론, 그 결정은 그가 내린 게 아닌 암 왕국이겠지만 에반젤린은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녀. 티오니스 성자는 자신이 할 일을 했다. 그가 가져온 평화를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다만, 그 과정에서 피눈물을 삼키고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들 또한 얼마든지 있음을 잊지 마라. 왕성을 지키라는 명령에 강제되고 있는 우리는 너를 막겠지만…… 적어도 우리의 주군이 된 가르강티아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진 않았다.”
그 말과 함께 그는 오러를 피워올린 검을 빠르게 내질렀다.
서걱!!
하지만 레이나의 기검이 허공으로 떠올라 번뜩이자 그의 목이 잘려나갔다.
“내게…… 다른 선택 따윈 없었다.”
특수한 힘을 받은 그는 목이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도 쉬이 죽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육체였던 만큼 결국 생명의 끈은 끊어졌다.
“세상은 참 무섭네요……. 아군이던 이 인간은 정말로 죽여버리고 싶은데. 적군인 저들에겐 동정을 느끼는 이 상황도 우습고.”
에반젤린은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륀느와 레이나가 만들어준 길을 타고 걸어나갔다.
* * *
굴롬 왕자의 안내를 받아 왕성의 숨겨진 통로로 진입하던 중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이 앞이다. 공녀. 내가 본 그 전이 진이 있는 제단이었다. 본래는 없었다만, 팔란으로 오기 전 비상금을 숨기기 위해 성을 돌아다니다가 우연스레 발견한 곳이다.”
팔란에서 연회가 벌어지기 전부터 이미 암 왕국은 장악당했다는 소리였다.
그런 그가 하인스의 전력에 대해선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는 건 조금 의아하지만 중요한 건 목적지가 코앞이라는 뜻이었다.
“이봐요. 당신은 조금 전 그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어?”
에반젤린의 심란한 질문에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냐! 감히 암 왕국의 왕성을 습격하고 장악한 악한 괴물의 수하일 뿐이다!”
참…… 뻔뻔하리만치 자기 주관이 확실한 놈이었다.
“그들의 사연을 듣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
“무슨 상관이냐. 하찮은 민생 하나하나 챙기기엔 너무도 할 일이 많다. 이 몸은…….”
“그래. 당신 같은 작자가 이 나라의 미래가 아니라는 건 정말 다행이네.”
담담하게 말한 에반젤린이 그를 지나쳤다.
“무…… 무슨 말이냐!”
“닥치고 따라와. 지금부터 한마디도 입 열지 마. 속 터지니까.”
“고…… 공녀! 이 문은 특수한 열쇠가 있어야만…….”
으직!! 콰드득!!
허공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용의 앞발이 문짝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긴 뒤 사라졌다.
“…….”
굴롬은 딸꾹질을 하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고 에반젤린은 내부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으아아아악!!!”
제단이 있어야 할 내부에는 거대한 통로가 있었고 그 통로 너머로 파랗게 질린 얼굴로 네 사람이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 공녀!”
선두에서 달려오던 소년이 깜짝 놀라 소리친다.
크로네스.
스파르트 왕국의 왕자이자 불세출의 천재라 불리던 소년이다.
“이게 어떻게 된…….”
“함정입니다! 도망치세요!!”
그의 외침에 에반젤린은 뒤쪽으로 몰려오는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안개가 나리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벌레무리였다.
끔찍한 광경에 어지간한 담력이 붙은 에반젤린도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당장이라도 브레스를 쏴 벌레무리를 흩어버린 뒤 그들을 구하려 했다.
“안 돼요. 공녀!! 저것들은 마나를 흡수하고 더 성장해요!!”
뒤따라오던 이오샤가 비명을 토해냈다.
쿵!! 쿵!!
동시에 마치 마법처럼 주변의 모든 구조물이 변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또 지도가 변하고 있다!”
순식간에 에반젤린이 있는 곳까지 도망쳐온 그는 에반젤린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달렸다.
“우선은 도망쳐야 합니다! 이곳은 주기적으로 구조가 변하는 미로처럼 되어있습니다!”
실제로 조금 전 에반젤린이 들어왔던 복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막힌 통로가 되어있었다.
“이쪽! 이쪽이 분명해요!”
이윽고 허둥지둥하며 벽면에 그려진 기이한 문양을 확인한 이오샤가 소리치자 크로네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내달렸다.
“꺄아악!! 도와줘요. 왕자님!”
뒤이어 라우라 후작 영애와 베르타스 공작 영애도 반쯤 찢어진 휑한 드레스 자락을 잡고 허겁지겁 달려왔다.
빠르게 달리기 위해 구두도 벗어 던지고 긴 치맛자락도 찢어낸 모양이었다.
제법 오래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저쪽! 저겁니다!”
네 소년소녀들은 익숙하게 미로의 한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으…… 으아악!! 나…… 나를 지켜라! 나를 지키란 말이다!”
굴롬의 체력은 일개 영애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허둥지둥 뛰어오던 그는 금방이라도 저 벌레 더미에게 잡아먹힐 모양새였다.
필요한 것만 구했다고 헌신짝마냥 버리는 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비록 굴롬이 개 같은 놈인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속으로 수차례 참을 인을 새긴 에반젤린이 바닥을 끌며 몸을 멈췄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밀고 들어오는 벌레떼를 노려본다.
“안 돼요! 마나를 먹고 더 성장하는!”
그딴 편의주의적인 생명체가 있을 리가 있나.
[멈춰.]
순간적으로 방대한 피어와 함께 용언 마법이 발현되자 거대한 벌레의 파도가 일순간 일렁이더니 노이즈를 일으키며 멈추기 시작했다.
“구조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실체가 없는 건 아니네…….”
“길 찾았어요! 저쪽이에요!”
그때 문양을 보고 길을 파악해낸 이오샤가 한쪽 벽을 외쳤다.
모두와 살짝 떨어진, 굴롬 왕자가 있는 곳이었다.
동시에 에반젤린은 기이한 마법 술식이 그녀의 용언 마법에서 서서히 풀려나며 다시 밀려올 기미를 보이자 인상을 찌푸렸다.
“빨리 뭐라도 좀 해요. 당장 없애는 게 안되니까.”
차라리 에반젤린 혼자였다면 일대 전체를 전소시켜버리기라도 하겠지만 이 기이한 공간과 저 벌레 파도는 아무래도 결계에서 만들어진 특수마법이 분명해 보였다.
즉. 에반젤린이 문을 열었을 때 함정에 빠진 셈이다. 저항능력만 높을 뿐 고위 마법 능력이 없는 에반젤린으로썬 이 결계의 핵을 찾아 부수는 게 가장 손쉬운 파훼법이리라.
“굴롬 왕자! 그쪽의 문 열고 버텨요!”
이윽고 이오샤가 소리치자 굴롬은 조금 전까지 없던 자신의 옆에 문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문을 열었다.
구구구구구국!!!
동시에 벌레 파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만 벌레 파도에서 굴롬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아…… 아니지?”
콰앙!!
그 찰나의 순간 불안함을 느낀 이오샤가 소리치기가 무섭게 굴롬은 혼자 안전지역으로 진입 후 문을 닫아버렸다.
굴롬의 극한의 이기심에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동안 에반젤린은 벌레 파도를 보며 이상한 점을 빠르게 찾아 나섰다.
그때였다.
“으…… 으아아악!! 이것은 무엇이냐!! 으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굴롬이 들어간 문 안쪽에서 처참한 비명과 엄청난 벌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 살려…….”
“문 열고 버티라니까 대체…….”
이오샤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굴롬이 혼자 살겠다고 도망친 곳은 사실 안전지대가 아닌 특수한 기믹이었다. 이오샤는 그 사실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설마 그가 도망갈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젠장 문이 닫히면 안전지대를 열수가…….”
“찾았다.”
그때 에반젤린의 위쪽 천장이 박살 나더니 륀느와 레이나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내려왔다.
“륀느, 등장.”
동시에 륀느의 눈이 파랗게 번뜩이며 그녀의 눈동자에 수많은 숫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분석 완료. 소거 개시.”
동시에 그녀의 손등에 거대한 주포가 만들어졌고.
엄청난 굉음을 내뿜으며 날아든 주포가 벌레무리의 일점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파아아앙!!!
동시에 벌레떼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기 시작했고 제멋대로 변하던 미로 또한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뭔…….”
“핵을 부순 거죠?”
에반젤린의 물음에 륀느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빨리 나가야겠어. 밖에서 전면전이 시작됐으니. 그런데 굴롬 왕자는…….”
레이나의 질문에 에반젤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다가 벌레떼에 먹혔어요.”
고개를 까딱인 그곳엔 굴롬의 것으로 추정되는 새하얀 뼈만 남아있었다.
“적이었던 이는 죽이는 데에 부담스러웠는데. 아군이라는 놈은 죽어도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다니…… 제가 나쁜 걸까요.”
에반젤린의 고뇌에 륀느가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멍청한 아군은 가장 위험하다 명시.”
륀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쿵!! 쿵!!
이윽고 에반젤린의 진입을 들킨 건지, 아니면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사라진 건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굉음이 왕성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부 인질은 몰라도 대륙 곳곳에 그의 인질들이…….”
“페르세르크 님의 마법. 외부와 완전차단. 놈의 사령 마법은 더 이상 대륙에 퍼지지 못한다고 보고.”
“엄마 대단하네요…….”
“당한 게 있으니까.”
상대를 막다른 길까지 몰아넣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