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472화 (1,472/1,559)

제 1472화

온몸이 포박된 채 늘어져 있던 리치의 혼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데이비에게 꽂혀있었다.

“우와…… 지금 보니 진짜 크네요.”

“그러게……. 느껴지는 힘도 보통이 아닌 거 같은데…… 그래도 데이비 앞에선 꼼짝 못 하는구나?”

그리고 그의 뒤로 용사 아리스와 성녀 슈네리아 레켄이 서로 속닥거렸다.

-가르강티아…… 네차흐.

천천히 내뱉은 이름 속엔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놈은 드래곤이다.

“그건 아는 사실이고.”

-그리고. 동족과 달리 유일하게 독특한 힘을 지닌 드래곤이지.

닉스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협조하지 않을 것 같더니, 말할 생각이 들었나?”

-닥쳐라.

“세상을 혼란에 던져넣은 욕심만 그득그득한 뼈다귀가 부정이라도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진짜야? 더럽게 깨네. 빌어먹을 뼈다귀 새끼가.”

-닥치라고 말했다.

“저기…… 데이비? 그래도. 너무 심한 말이 아닐까…….”

아리스가 조심스레 데이비를 만류하자 데이비는 한숨을 내쉬며 짧고 간결하게 닉스가 어떤 놈인지 말해주었다.

“혼내줘! 아주 세게 혼내줘!!”

그리고. 아리스가 돌변하는 데엔 많은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주 나쁜 뼈다귀네!”

-크흐흐흐…… 죽어서도 저런 젖비린내나는 홀른에게 모욕을 당하게 된다니. 꼴이 우습군.

“이야기는 마저 하자고. 네가 똑바로 말하면 네 혼은 다시 업을 치르게 해주겠다. 다만, 입을 다물 거면, 그때부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가르강티아는 닉스가 봉인한 드래곤. 눈앞의 닉스는 여전히 또x이같은 파괴의 화신이지만 어째서인지 가르강티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만큼은 느낌이 달랐다.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닉스는 순수악보다는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앞세운 지략가.

그 또한 저만의 서사는 존재할 것이다.

물론, 그의 사정 따윈 알 바가 아니었지만 말이다.

-가르강티아의 힘은 정신계, 정확히는 비틀린 정신계다.

“정신계?”

에반젤린과 같은 케이스의?

놀란 데이비가 표정을 애써 굳혔다.

-놈은 헤츨링 시절부터 자신의 근본에 서린 힘을 제어하지 못했다. 때문에 놈은 자연스럽게 대륙 전역에 자신의 사념을 잘게 쪼개 흩뿌려놓았고 수많은 생명체와 접촉하고 공명함으로써 성장해왔다.

너무 많은 생명체와 단기간에 공명한 어린 드래곤은 미쳐버렸다.

그의 비늘은 검게 산화했고 정신은 붕괴하며, 감각은 사라졌다.

고통도 슬픔이나 기쁨.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나 본래 생명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소멸에 대한 극한의 두려움까지.

그 어떤 것도 완성되지 못했다.

다만 데이비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정신계 드래곤은 고대룡, 그것도 그중 일부의 특권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에반젤린이 정신계 드래곤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에반젤린은 단 한 번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인 바가 없다.

-보아하니…… 뭔가를 알고 있는듯하군.

“이야기나 계속해라. 닉스.”

-마치 물이 빈 곳으로 빨려 들어가듯 속이 빈 놈은 본능적으로 그 속을 채울 것을 갈망한다.

놈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대륙 곳곳에 퍼뜨린 자신의 의념 파편을 통해 수많은 것들을 끌어모았다.

자신의 힘을 온전히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한 그의 정신이 붕괴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성룡이 되며 더 이상 사념파편이 흩어지진 않게 되었지만 이미 너무 많은 파편이 흩어져 세상에 녹아들었다.

그것들은 생명체와 융화하여 공명하고 힘을 빨아들이는 것은 물론, 그 생명체가 죽으면 근처의 다른 생명체와 또 공명한다.

문제는 그가 빨아들인 그 힘의 원천.

즉. 놈의 불사는 이 대륙에 존재하는 그가 흩뿌린 사념을 모두 없애지 않는 이상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가르강티아의 정체 모를 심해와 같은 힘의 근원 또한 그런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간단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건가?

-놈의 사념파편과 공명하는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고 사념파편을 모두 소멸시켜라, 그게 놈의 불사를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제야 데이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이게 개수작을 부리네.”

-…….

“왜 갑자기 이렇게 협조적이었는지 알겠구만. 확인차 묻는 건데. 닉스. 가르강티아의 사념파편이 가장 많이 스며든 종족이 뭐지?”

-홀른이다.

“역시.”

이놈의 행동 패턴엔 여러 가지 의문이 있었다. 단순히 마왕까지 조종하여 마계의 왕이 되고 싶었는가 싶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설명하지 못할 패턴 또한 분명 존재했다.

만약 이 미친 뼈다귀가 행한 모든 행동원리에 가르강티아의 저 비틀린 체질을 없애기 위함이라면…….

지금까지의 그의 알 수 없는 행동 패턴이 이해가 된다.

“확실히 평행선에서 닉스 넌 단순히 말살시키기보다는 마치 무언가를 찾아내듯 말살시켰지. 그건 마족이나 다른 종족, 동물, 몬스터를 가리지 않기도 했고”

실제로 놈은 마왕 페르세르크에게 간언한다는 명목으로 어떤 루트를 제공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말살하거나 눈앞에 적이 있음에도 일부러 돌아가는 짓도 저질렀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가르강티아는 사념파편 이외에도 대륙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현재 데이비는 그것들을 모두 부숴버렸지만, 놈을 근본적으로 처리할 수단은 되지 못한다.

-크…… 크흐흐흐. 한때 서로 죽도록 싸웠거늘. 결국, 현재에 이르러 네놈과 내가 향하는 길은 동일하구나. 가소롭고 우습도다.

그의 비웃음에 데이비는 그대로 발을 들어 그의 영혼을 걷어차듯 짓뭉갰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이제 와서 다른 생각이라도 드는가?

“아니. 새삼 네가 미친놈인 걸 다시금 확인해서.”

데이비는 망설임 없이 영혼석을 들었고 닉스의 혼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흐흐흐…… 흐하하하하하!! 꼴좋구나! 실로 우스워! 결국, 네놈은 내 목적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죽어서 혼만 남은 망자라곤 하나 지옥 밑바닥에서 네놈의 그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을 지켜보며 한껏 비웃어주…….

일순간, 영혼이 빨려 나가던 것도 멈추기 시작했다.

동시에 데이비의 손이 그의 영혼을 잡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이 뼈다귀가 자꾸 열 받게 하네.”

-으…… 으음?!

“뭐, 그렇게 속 긁듯이 말해놓고 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무슨?! 말도 안 돼! 이미 내 혼을 붙잡는 방법 따윈 없을 터!!

“왜 없어. 네 혼을 보관해놓은 성모의 돌.”

데이비가 닉스의 혼을 가두어둔 성모의 돌을 가리켰다.

“영혼의 강에 간섭할 수 있는 신의 권능.”

그리고는 자신을 가리켰다.

-사도다! 일개 홀른 따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터!

“여기 있잖아.”

데이비의 전신에 신비한 빛이 머금어지며 육체가 신체화하기 시작했다.

닉스의 안광은 거침없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한때 인간이었던 적이건만, 재회 후 그는 신적인 존재가 되어있었다.

애석하게도 닉스가 싸웠을 때의 데이비와 현재의 데이비는 달라도 너무 달라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데이비의 서슬 퍼런 미소에 닉스의 안광이 흔들린다.

“입 다물고 있었으면 곱게 보내주려 했더니.”

데이비의 서슬 퍼런 미소에 닉스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다급해진 닉스는 황급히 소리쳤다.

-머…… 멈춰라! 네놈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도 없는…….

“그걸 네가 말하면 안 되지, 이 거지발싸개 같은 리치 자식아. 그래도 고맙다고는 해줄게.”

그의 설명 덕분에 기본적으로 제거가 불가능한 비틀린 가르강티아의 힘을 급속도로 약화시킬 방법을 찾았으니 말이다.

-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을 지르는 닉스를 더욱 뭉개며 데이비가 스산하게 웃었다.

“저기…… 아리스?”

“응?”

“조금 전의 설명에서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거야?”

“무슨 말이야?”

“아니…… 저 뼈다귀 말대로라면 그 정신계 드래곤이라는 거, 절대적인 존재 아니야? 그런 존재를 죽일 수나 있어?”

그놈 하나 잡자고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데이비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글쎄? 잘 모르겠네.”

아리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여유가 넘치는 거야?”

“헤헤 데이비가 저렇게 웃으면 뭐든 계략이 있는 거 같더라고.”

그 말대로였다.

* * *

보는 이가 불쌍할 정도로 닉스를 짓밟아버린 데이비는 끙끙거리며 영혼째로 고통받는 닉스를 한차례 더 밟아대고는 놈의 혼을 성모의 돌에 안착시켰다.

“이제 가는 거야?”

“불쌍할 정도로 패던데…… 동정은 안 하지만요.”

워낙에 닉스가 저지른 악행이 많다 보니 동정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다.

“저기 데이비. 내가 쭈욱 생각해봤는데에.”

아리스가 활기찬 목소리로 물었다.

“방법이 있는 거야?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가서 네가 도와줘야…….”

“아니 연합군 작전은 그대로 갈 거야.”

“죽지 않는 드래곤을 상대로?”

“힘을 못 쓰게 만들면 되지.”

긴 머리카락이 귀찮은지 아공간에서 밴드 하나를 꺼내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묶어내렷다.

“잘라버릴 수도 없고 진짜…….”

짜증스레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아리스가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우와…… 예쁘다…….”

“조용히 해라.”

애석하게도 신체화는 과거와 같이 육체에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그는 한 손을 귀에 대고는 물었다.

“륀느.”

치이이익!

-현재 확인된 강화된 언데드 수백, 중급 리치 40여 개체. 교전 중. 짧게 요청 바람.

“교전 중이라고? 상황은?”

-전면전이 곧 벌어질 거라 판단. 현재 인질의 구출 중에 마주친 적들을 소탕 중, 전면전이 발생할 시 상당한 소모와 피해가 발생할 것으로 분석 중, 빠른 대책을 요청.

“그래. 30분만 버텨. 그 안에 그놈 끝장낼 수단을 만들어줄 테니.”

-륀느, 데이비 님의 야비한 계략을 높게 평가.

놈은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오하면서도 가장 잘 이용해먹고 있다.

그런 놈이 과연 더 이상 불사가 아니게 되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는지.

“아리스, 슈네리아.”

데이비가 몸을 가볍게 풀었다.

“응?”

“네?”

“세상에 퍼진 놈의 사념파편은 놈과 이어져 있다. 맞나?”

“그렇죠?”

왜 방금들은 사실을 다시 꺼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슈네리아가 중얼거렸다.

“그럼 말이다. 어떤 수단을 쓰던 놈의 사념파편 하나를 찾아서 거기에 독을 투여하면. 놈은 어떻게 될까?”

거대한 거미줄처럼 이어진 하나의 망이다. 문제는 이것들이 다 떨어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어져 있다는 것.

일일이 찾아내는 건 너무도 어리석은 짓이다.

“하지만 그게 됐으면 그 뼈다귀도 하지 않았을까?”

그녀의 말에 데이비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닉스의 혼을 끄집어냈다.

만신창이가 된 그의 혼은 다시금 데이비를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켰다.

-썩 꺼져라! 이 악마 같은 놈!!

“자자. 우리 서로서로 윈윈하자고 닉스.”

-네놈!!

“가르강티아를 죽일 거다. 너, 가르강티아의 사념파편을 찾아낼 방법을 알고 있겠지?”

데이비가 미소를 지우며 말하자 닉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상에 퍼진 사념파편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일일이 찾아내는 건 단시간엔 불가…….

“하나만 찾으면 돼. 네가 말했잖아. 사념파편은 놈의 힘으로 이어져 있다고.”

독사의 맹독 한 방울에 사람의 온몸이 굳어죽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바이러스를 쓸 거다. 하나만 감염되면 죄다 비틀려서 본체까지 위협하는. 위기를 느낀 놈이 급히 모든 라인을 끊어버릴 수 있는 그런.”

-독 같은 게 먹힐 거라 생각하나?

“왜 안된다고 생각해.”

데이비의 물음에 닉스가 크크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놈의 말마따나 그런 독이 있다고 치도록 하지. 그럼 그 독을 투여했을 때 네놈이 지키던 홀른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크흐흐흐! 위선이나 떨어대더니 결국 상황이 급박해지니 고육지책이라. 그 꼴이 우습군.

그 물음에 데이비는 빙그레 웃으며 놈의 두개골을 빡! 소리 나게 후려쳤다.

-커헉!!

영혼이 울리는 타격에 그가 비명을 내지른다. 신체화 상태의 데이비는 단순한 타격에도 신력이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하라면 할 것이지 말이 많아, 이 새끼야.”

-빌어먹을 놈!

“대륙 전역에 놈의 사념이 퍼져있다면 이 숲에도 있겠지?”

-마침 저기 있군.

닉스의 안광이 보랏빛으로 한차례 크게 빛났다.

“호오…….”

닉스가 가리킨 것은 고개를 빼꼼 내민 작은 토끼 한 마리였다.

이에 데이비는 망설임 없이 바닥을 박차더니 그대로 토끼를 낚아채듯 생포했다.

“우와…… 빠르다…….”

아리스가 감탄을 연속 발사하며 손뼉을 친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구요?”

이윽고 슈네리아가 질문을 던지자 데이비는 빙그레 웃으며 한 손에 신력을 끌어모았다.

“이렇게 할 거야.”

푸콱!!!

* * *

“1군 후퇴!! 제1 기마병단!! 차지!”

마치 잘 조율된 조각처럼 완벽하게 도열한 기병대가 일제히 기창을 들어 올렸다.

척!!

“차지!!”

이윽고 명령과 함께 다량의 보호 마법과 버프 마법을 받은 기병대가 돌진하며 언데드 군단을 무참히 쓸어넘긴다.

하지만 찢겨 나간 언데드들중 일부는 자신의 몸 따위는 돌보지 않고 매달려 기마병들을 낙마시키고 삽시간에 물어뜯어 죽여버렸다.

익스퍼터급의 실력가도 있었지만, 언데드들중에 드문드문 익스퍼터 급 이상의 사기를 내뿜는 언데드들이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암 왕국의 수도는 말 그대로 망자의 도시 네크로폴리스를 방불케 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휘청거리며 전진하는 언데드 군단의 수는 어림잡아 확인된 수만 해도 20만이 넘었다.

일반적으로 일정 기준의 남성들이 훈련을 받아 병사가 된다면 언데드에겐 그런 조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암 왕국은 수도에 수많은 왕국민이 모여있는 왕국 중 하나기도 하다. 그런 만큼 가르강티아가 일으킨 대참사로 인해 죽은 이들이 너무도 많다는 뜻이었다.

당장 연합군과 전면전을 치르고 있는 군세만 봐도 그 수가 무려 20만이 넘어가고 있건만, 정찰조의 보고에 따르면 한창 전쟁놀이를 즐기고 있는 가르강티아의 휘하에 비슷한 수의 병력이 더 모여있다는 게 감지되었다.

한없이 생자에 가까운 언데드를 부리는 존재.

본래라면 전쟁의 양상은 가르강티아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성국의 지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급하게 준비된 토벌대인 만큼 준비가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가르강티아가 직접 날뛴다면 그 피해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리라.

그럼에도 엇비슷한 전력, 아니 서서히 밀어붙이기 시작하는 건 네 명의 존재 덕분이었다.

쉬리릭!!! 콰아앙!!!

엄청난 속도로 전장을 누비며 가르강티아가 쏘아 보내는 검은 마법들을 일일이 베어 넘기고 있는 일리나.

그리고 전장 전체를 제어하에 두고 그의 마법을 디스펠하거나 사령 마법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페르세르크.

그리고 빛의 검을 만들어내 전장에 대규모 폭격을 가하는 레이나와 브레스를 에반젤린 때문이었다.

고작 4명의 존재가 연합군 내에서 압도적인 입지를 지니고 있으니 그 광경을 직접보고 있는 이들의 황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하하하하!!”

그리고, 이 상황을 가장 즐거워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가르강티아 네차흐, 본인이었다.

자극을 필요로 하는 그에게 사실 언데드와 연합군의 싸움 승패는 아무래도 좋았다.

현재 그가 가장 기분이 좋은 이유는 자신의 마법을 베어버리는 걸 넘어 틈만 나면 그의 몸에 엄청난 위력이 서린 검기를 박아넣는 일리나의 존재 덕분이었다.

불사의 힘만 아니었다면 벌써 수십 번은 죽었으리라.

고작해야 하찮은 미물이.

일개 홀른 따위가 휘두르는 검기에 고룡, 그것도 고룡 중에서도 특히나 이질적인 그가 이토록 무력하게 잘려나가는 건 그에게 어떤 생소한 감정을 느끼게 만들었다.

“좋아…… 좋아!!”

거대한 성벽의 중심. 옥좌에 앉아 그저 전장을 관망하며 마법만을 쏘아 보내던 가르강티아는 더 이상의 욕망을 참을 수 없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핏빛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래! 역시 넌 내 반려로서 자격이 충분해.”

“헛소리하지 마. 미친 도마뱀 자식아.”

그는 자신의 언데드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장 한복판에 엄청난 굉음을 내며 낙하했고 이내 검을 쥐고 있는 일리나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네가 휘두르는 검은 내게 어떤 생소한 감정을 전해주고 있어. 이렇게 하는 거야. 너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웃기고 있네. 내가 할 일은 여기서 네 목을 따고 돌아가서 쉬는 거야.”

그녀는 백은의 거검을 그에게 들이밀며 말했다.

“불사라고 해도 영원한 부활은 아니잖아?”

“틀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스스로도 죽을 수 없는 존재다.”

가르강티아는 양팔을 펼치며 그녀에게 어서 다가와 자신의 품에 안기라는 듯 말했다.

“지금껏 이토록 강렬한 감각을 선사해준 건 네가 처음이야. 일리나라고 했나. 홀른이라곤 하지만 그런 건 사실 이제 중요하지 않아. 다시 한번 제안하지. 내 반려가 되어라. 너를 위해 나는 이 대륙 전체를 선물해줄 수도 있다.”

그의 말에 일리나는 검을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중지 손가락을 뻗어 올렸다.

“엿이나 먹어.”

과거엔 전혀 몰랐던 거친 언사나 이런 행동거지도 데이비와 함께 하며 지구를 들락날락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셈이다.

데이비는 게임이 문제인가. 라며 고민하는 듯했지만 일리나에게 지구의 문화는 굉장히 생소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었으니까.

“오우. 거친 맛이 있어. 예로부터 기가 센 부인을 다루는 데엔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지.”

그가 피처럼 붉은 검을 가볍게 내려 세웠다.

동시에 일리나의 신형이 살짝 낮아졌고 둘의 신형이 거의 동시라고 할 시간에 사라지듯 흩어졌다.

쩌어어어엉!!!

엄청난 금속음과 함께 터져 나온 충격파가 주변을 배회하던 수많은 언데드들을 조각내버리며 터져나갔다.

“아하하하하하!! 이거야!! 이거라고!”

가르강티아는 자신의 몸에 생긴 상처를 보며 환희에 차 소리를 질렀다.

“단순한 상처가 아니야! 이 상처가 생기면서 느껴지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이 감각! 나는 이게 사랑이라 생각한다!”

그의 광기 어린 외침에 질린 표정을 지은 일리나가 검을 털어냈다.

푸화아아악!!!!

동시에 방금까지 멀쩡하던 그의 목에서 엄청난 피 분수가 일었다.

“진짜 변태 새끼 아냐, 이거…….”

질색하며 인상을 찡그린 일리나의 검격에 당한 부상이 뒤늦게 터져 나온 것이다.

일반생명체라면 반드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고 외쳤다.

“흐아아아…… 이 짜릿한 감각…… 이 살아있는 듯한 자극!”

그가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쳐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자신의 목을 손으로 살살 긁으며 침을 흘렸다.

“너무 좋아…….”

벌써 일리나의 검에 수차례 당했다.

연합군의 공격에 이미 조각났어야 할 언데드는 계속해서 일어났고 가르강티아 본인도 죽지 않고 계속해서 부활했다.

소모전으로 가면 반드시 연합이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에 일리나가 어떻게든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검을 거칠게 튕기며 기수식을 잡은 그 순간.

“컥?!”

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무시한 채 황홀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가 새카맣게 변질된 피를 울컥 토해냈다.

“무…… 슨?”

당황한 그가 휘청거린다.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당황한 움직임이었다.

“대체 뭘…….”

그가 놀란 얼굴로 일리나를 보며 물었다.

분명 그녀의 검은 치명적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를 죽이기엔 상성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죽진 않지만 엄청나게 힘이 소모된 느낌이 들었다.

이에 급히 세상에 퍼져있는 사념의 파편과 공명하여 더욱 빠르게 순환시키기 시작한다.

어차피 사념의 파편과 연결된 수많은 힘이 다시 모여들면 완전히 부활하는 건 일도 아니건만…….

어째서인지 힘의 흐름이 늦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무슨…….”

“지구라는 곳에는 곳에서는 말이야. 컴퓨터라는 전자장비가 존재하거든. 바이러스 한번 잘못 먹으면 아주 미친 듯이 증식하고 전염되면서 컴퓨터를 아주 망가뜨려 놓기로 유명해.”

일리나가 스산하게 웃었다.

“그렇게 보안이 허술한 망을 우리 남편이 그냥 두었을 거 같아?”

그녀의 거검이 가르강티아를 노린다.

“치킨게임이라고 알아? 네 힘이 먼저 소실될지. 내가 쓰러질지. 해보자고.”

분명 강렬한 자극이다.

하지만 가르강티아는 어째서인지 사념의 파편과 이어진 곳에서 흘러들어오는 이 기이하고 역겨운 자극은 전혀 달갑지가 않았다.

“무슨…… 무슨 짓을 한 거야아아아!!!”

그가 갑자기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뒤이어 보조하듯 날아든 기검이 휘둘러지던 가르강티아의 팔에 꽂혔다.

“어?”

푹!! 푹푹푹!!!

동시에 일곱 자루의 기검이 그의 후두, 심장, 비장, 명치 등등 수많은 급소에 동시다발적으로 꽂혔다.

휘청거린 그가 한발 두발 물러난다.

하찮은 힘이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힘의 소모가 가속화되며 불사의 근원이 되는 생명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왜? 실제로 죽을 수 있게 되니까 뭔가 아닌 거 같아?”

모든 감정은 그에게 생소하다. 가르강티아는 처음 느끼는 이 정체 모를 거부감에 몸서리를 쳐야 했다.

그리고, 그가 휘청거릴 때마다 그가 제어하는 언데드들이 눈에 띄게 약해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본능적으로 일리나에게서 몸을 돌린 그가 황급히 왕성으로 돌아가려 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거부감.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지독하고 생소한 감각이 그를 지배했다.

하지만 돌아서는 그의 앞에 섬광처럼 누군가가 나타났다.

“륀느가. 인류의 구원자를 높게 평가.”

동시에 푸른 은발의 소녀는 양손에 틀어쥔 묵빛의 빠루, 크로우바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가랑이 사이로 쳐올렸다.

“1번 드라이브, 풀스윙. 홀인원을 륀느가 높게 평가.”

콰작!!!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륀느의 거침없는 공격에 일부가 끔찍한 탄식을 흘리는 소리가 들린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걸로 놈이 큰 타격을 입으면 좋으련만.

그의 표정에는 갑작스레 자신의 힘의 흐름이 엉망진창이 되면서 밀려 들어오기 시작한 알 수 없는 감각들에 의해 혼란이 가득해 보였다.

"으…… 으으으으!!!"

이윽고 그의 전신에서 터질듯한 드래곤 피어가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놈의 약화가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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