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84화
남매는 사이가 나쁘다고 한다. 남매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은 서로 싸우기 위해서라고 하던가.
퍽!!!
“야. 발 치워라.”
“아 뭐래. 여기 내 자리야 꺼져,”
“발에서 썩은 내 나니까 치우라고.”
내 투정에도 그녀는 발로 내 뺨을 퍽퍽 걷어차듯 밀어낸다.
소파를 차지하고 재밌는 드라마를 보면서 생긴 사태였다.
“아니 원작은 안 저랬잖아. 이게 말이 돼? 망할 방송사 인수해버릴까 진짜.”
“미친x끼…….”
가벼운 돌핀 팬츠 한 장에 나시티.
세간에선 신성을 이끄는 젊은 주역 중 하나로 차기 총수로서 거론되는 현아지만 그런 그녀가 집안에서 저러고 있는 것은 알고 있을까.
“넌 대체 왜 살이 안 찌냐?”
요가 매트도 오래 안 써. 볼도 안 써. 그런 주제에 저런 이기적인 몸매를 상시유지하는 걸 보면 유전자가 좋은 건지. 아니면 알게 모르게 각성자가 되어버린 건지 모를 일이다.
“타고난 거야.”
“타고난 건 에이리아고. 넌 임마 그러다가 훅 간다. 의사가 하는 말이니 잘 새겨들어.”
“응, 구라 즐.”
“뭘 모르네. 지금 네 장기들이 비명 지르고 있어. 몇 년 내로 너 피부는 퍼석퍼석해지고 몸매는 망가질 거다. 장난으로 하는 소리 아니야. 내가 누군지 알지?”
진지하게 말하자 그녀가 움찔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래도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신의에 있는 내가 진지하게 상황을 알려주니 겁이 나긴 하는 모양이었다.
“지, 진짜로?”
“뻥이야.”
“x발! 겁나게 그럴래!?”
퍽퍽!!
어마무시한 함성을 선보이며 나를 걷어차는 발길질이 매섭다.
“어휴…… 저 화상이 뭐가 좋다고…….”
아무래도 크리스 마텐의 눈에 콩깍지가 씐 게 틀림없다.
잘생겨, 인상도 좋고, 성격도 모나지 않고 유쾌하다. 키도 큰 편에 몸도 좋다. 여성에 대한 자잘한 소문이야 있는 편이지만 직접 보기에 그가 현아를 향해 품고 있는 마음은 유별날 정도로 진심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어쩌다가 저런 해산물에게 반한 것일까.
자세히 따져본다.
진지하게 냉철하게 고민해보자.
외모.
크리스 마텐은 확실히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축에 속한다. 오죽하면 그에게 영화배우로서 활동할 것을 요청하는 연락도 오겠는가.
그 반면 저 화상은…….
“음…… 차이가 크네.”
그렇다면 성격은?
“뭘 봐.”
“음. 역시 비교가 안 돼.”
재력.
“아. 이건 그나마 봐줄 만하네.”
크리스도 미국 최고의 히어로로서 돈을 많이 벌긴 했지만 현아는 애초에 세계급 기업인 신성의 차기 총수로서 불리는 존재.
그 탓에 벌어놓은 돈은 많았다.
그 외에도 내가 보기엔 어떤 면에서도 현아보다는 크리스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는 너무 주관적이야.”
페르세르크가 내 뺨을 쿡쿡 찌르며 타박했다.
“아가씨 정도면 얼마나 예쁜가. 몸매도 좋고. 성격도 착하지.”
“넌 저게 착하고 예쁜 거로 보이냐?”
“하면 지금 본녀가 거짓을 말한다고 하고 싶은 겐가?”
“아닙니다. 마님.”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무서워지니 움찔했다.
“본녀가 보아하니 동생을 누군가에게 시집보내야 한다는 게 달갑지 않아 보이는데.”
“웃기는 소리. 윈리가 율리스와 결혼할 때도 나는 선뜻 보내줬어.”
“웃긴다? 너랑 만나러 갔다가 율리스 그 사람 피떡이 돼서 돌아왔는데 잊었어?”
“나는 모른다.”
담담하게 말하자 이야기에 끼어들었던 일리나와 페르세르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좋다 이거야. 사람이 어디 외견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고 반할 수 있나. 다만 맞지 않는 단추를 억지로 맞추면 서로 힘들어져. 괜히 국제결혼이 힘든 줄 알아?”
현아가 비록 세계각지를 돌아다니는 입장이라곤 하지만 엄연히 한국출신이고 크리스는 미룰 출신이었다.
“두 국가 사이엔 애초에 살아가는 문화부터가 달라.”
“크리스 그 사람. 현아 아가씨 때문에 한국어도 익혔다더라. 그리고 한국문화에 익숙해진다면서 수시로 왔다던데.”
“미친 놈 아냐 이거.”
대체 뭐 하는 놈인지.
“그대도 본녀와 혼인하려고 마왕까지 되지 않았는가.
“조용히 해라.”
페르세르크를 낚아채려 하자 그녀는 잽싸게 내 손을 빠져나간 뒤 혀를 내밀었다.
“풉.”
“어쨌든 두 사람이 결정할 일이지, 네가 할 일은 아니야.”
일리나의 직설에 나는 침음성을 삼켜야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두 사람은 착각을 하고 있다.
“아니, 내 의사는 오히려 크리스를 돕는 쪽이야.”
“엉?”
“잉?”
“그 정도 되는 보살이 아니고서야 누가 저 어마무시한 패악질과 함성을 감당하겠냐.”
데려가 준다는데 쌍수 들고 환영해야지.
“오히려 내가 걱정인 건 저년이 아니라 크리스 쪽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아직 고민 중이다.
“음 그런데 고민할 게 있다고?”
“저 심해 끝자락에서나 살 법한 살벌한 해산물에게 물려버린 크리스를 구해줘야 하는지…… 그를 도와줘야 하는지…….”
내 중얼거림에 누군가가 내 등을 가볍게 때린다.
“현수야. 동생한테 그게 무슨 심한 말이야.”
“아. 누님.”
“그래도 누나도 걱정이긴 한데. 현수 네가 잘 도와줄 거라 믿어.”
연희 누님의 미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예, 누님.”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을 포기하다시피 가족을 먹여 살렸으며 삼촌과 만난 후에도 각고의 노력 끝에 여기까지 온 연희 누님에게만큼은 도저히 덤벼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럴 생각도 없고.
“누님. 손 좀 줘보세요.”
나는 방대한 생명력을 손에 모아 그녀의 몸에 밀어 넣었다.
그녀는 다소 무리하는 편이기에 이렇게라도 활력을 충전시켜주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다.
“참, 현수야.”
연희 누님이 뭔가 떠오른 듯 내게 조용히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뭡니까 이건?”
“현아가 좋아하는 현대 로맨스 소설이야. 간간이 이런 프러포즈 받아보고 싶다고 중얼거리는걸 들어본 적 있어.”
나는 말 없이 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책을 전부 읽었을 땐 하루가 지나있더라.
“쓸데없이 흥미진진하고 난리야.”
한번 보고 나니 또 비슷한 건 없나 찾아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러다가 외출을 기피하는 방구석 폐인이 되는 건 아닐까?
소설이라는 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 * *
현아는 늘 있는 서류를 담당하던 도중 연희의 방문을 받았다.
“언니? 무슨 일이야?”
“이거 네가 좀 도와줄 수 있어?”
연희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각성자 게이트 장비 점검이었다.
“알지? 이번에 신장비 직접 검수하는 거.”
“아…… 응.”
현아가 신성에서 높은 위치라 곤하지만 새로운 장비가 새로이 실전 배치는 되는 만큼 직접 확인해야 했다.
“어으…… 난 기자들 싫은데…….”
“공식 업무가 아니라서 많지는 않을 거야. 부탁 좀 하자. 언니 그날 중요한 약속이 있을 거 같아서 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있을 거 같다는 뭐야. 언니 스케줄 관리 똑바로 안 하는 거야? 내가 가서 들쑤셔줘?”
“얘는? 됐어. 다들 일 잘하는 엘리트들이야.”
“후우…… 알겠어.”
저리 연약해 보여도 연희의 경영능력은 대단한 편에 속했다.
경영실력은 나이에 비례한다는 소문을 깡그리 뭉개버리는 존재.
스스로 발전해온 연희는 흔히 말하는 맨몸으로 대기업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존재이기도 했다.
언니의 시선이 묘하게 거슬렸지만, 현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가 있는 현장은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산업도로변이었다.
“오셨습니까.”
차량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그녀를 향해 모여드는 관리직원들의 표정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고했어요. 예의 장비는 어디 있나요?”
“네. 저기 이미 배치 중에 있습니다. 돌출형 게이트의 몬스터를 감지, 분석한 뒤 등급에 따라 특수한 파장을 내뿜어 움직임을 방해하는 장비입니다. 자세한 서류는 드릴까요?”
“주세요.”
귀찮으면 넘겨버릴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꼼꼼하게 세부 사항을 확인했다.
“출근한 각성자분들은 몇 분인가요?”
“요기 있다!”
그때 호쾌한 목소리와 함께 크리스가 나타났다.
“크리스? 당신이 왜 여기에?”
“왜긴 일하러 왔지.”
“언제부터 당신이 일했다고요? 미국에 있어야 할 당신이 여기 있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말이야. 게다가 이 게이트. A급이야.”
상당한 등급이다. 이전에 비해 강해진 크리스라곤 하지만 혼자서 괜찮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미국의 S급 각성자가 이렇게 타국에서 활동할 때엔 많은 제약이 있을 텐데 싶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걱정 마시지, 공주님. A라고 해도 나 혼자서 감당이 가능한 놈이 나오니까. 약해질 대로 약해진 게이트거든. 조국의 상부에도 그렇게 전해놨어. 나도 실전경험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묘한 분위기였다.
돌출형 게이트는 일정 시간이 흐르면 지속적으로 내뿜던 파장을 먹어치우고 몬스터를 토해낸다.
그렇기에 각국에서도 사실상 가장 먼저 처리하는 1순위 던전이기도 했다.
“…….”
말없이 크리스를 노려보던 현아가 손짓을 하자 그가 다가온다.
이에 현아는 그의 넥타이를 강하게 잡아당긴 뒤 다시 매기 시작했다.
“넥타이 똑바로 안 매요? 기자들 안 보여요?”
“저기…… 공주님이 여기서 이러는 게 더 눈에 띄지 않을까 싶은데.”
마치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린 그가 비실비실 웃자 현아의 얼굴이 못마땅함으로 일그러졌다.
콱!!!
그리고는 목을 졸라버리듯 당겼다.
“컥!”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장비체크나 해요. 솔직히 왜 정장을 입고 이러고 있는지도 이해 못 하겠고.”
“별로 어렵진 않거든.”
“그렇다고 해도 싸우면 옷이 더러워질 텐데요? 비싼 거 같아 보이는데.”
“괜찮대도. 그리고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거 몬스터 소재로 만든 전투용 정장이야. 미국에서 이번에 만든 건데. 제대로 완성하면 각성자들이 평소에 입고 다니도록 법을 제정하니 마니 하더라.”
그는 장난스레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이후 한국소속의 각성자 두어 명이 더 왔다.
“혹시나 해서 이번에 C급 각성자 두 명도 대동했어. 한국소속이기에 정부 측에서도 별말 없고, 기업 측에선 교육도 할 겸.”
“평소에 그렇게 협조적이면 좀 좋을까…….”
“알잖아. 나도 꽤 무거운 위치인 거.”
비록 미국방부에 직접적으로 소속되길 꺼리는 그였지만 S급이라는 타이틀이 어디 가는 건 아니기에 행동 하나하나에 제약은 큰 편이었다.
“자 그럼 두 사람 전부 긴장하고, 시작해보자고.”
긴장한 얼굴의 두 C급 각성자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었고 크리스는 느긋하게 양주먹을 뚜둑 소리 내며 목을 꺾었다.
동시에 장비에서 삑삑 소리가 나며 색이 변하기 시작한다.
“여길 보시면 게이트의 마나 잔향을 분석해 게이트의 형태와 내부 몬스터의 정체까지 알 수 있습니다.”
“몬스터의 정체까지 알 수 있다고요? 신기하네요.”
“마침 나왔군요. A급 몬스터인 페른 드레이크입니다.”
“다행히 상성이 나쁘진 않네요. 수는 확인할 수 없나요?”
“예. 아직까지 그런 건 확인이 힘듭니다. 죄송합니다.”
“아녜요. 이 정도도 굉장한 발견이죠.”
츠츠츠츳…….
이윽고 게이트에서 스파크가 일며 푸른색의 드레이크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4m에 달하는 거대한 몸집으로 균열을 찢어발기듯 튀어나온 두 몬스터는 순식간에 사람들을 확인하고 적의를 내비치며 포효를 질렀다.
-커헝!! 커허어엉!!!
독특한 포효소리와 함께 현아는 몸이 무거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장비…… 작동해주세요.”
겁을 먹을 법도 했건만, 현아는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고 창백하게 질려있던 현장 관리원이 장비를 가동시켰다.
우웅…… 우웅…… 우웅…….
동시에 강렬한 파장이 일며 많은 몬스터에게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그그그그…….
-그르륵…….
고통스러운 듯 휘청거리는 놈을 보니 디버프가 제대로 작동한 듯 보였다.
마치 겁을 먹은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던 드레이크 두 마리가 비틀거린다.
“계산대로라면 놈들의 저력은 30퍼센트 가까이 떨어질 겁니다. 기본적으로 조금 스펙이 떨어지더라도 문제없이 잡을 수 있는 수준이지요.”
“모든 몬스터에게 포함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아직 일부 몬스터에게만 통해서…….”
“그래도 큰 수확이네요. 그동안 열심히 투자해둔 보람이 있어요.”
이런 게 있었으면 피해가 얼마나 줄어들었을까.
그동안 많은 각성자들이 사고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씁쓸했다.
“조금만 더 빨리 개발됐더라면…….”
“다만 문제가 있습니다. 파장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자칫 놈들이 면역이 되면 약해진 이상으로 강해지기도 합니다.”
그의 설명에 현아는 복잡한 얼굴을 했다.
“설마. 문제가 생길 확률은…….”
“때문에 크리스 님을 초빙한 겁니다. 문제가 생겨도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도록요.”
C급 각성자들은 A급 몬스터인 드레이크를 상대로 제대로 된 공격이나 방어를 할 수 없다.
그렇기에 크리스는 전투 방식을 보여주는 쪽으로 가며 홀로 두 마리를 상대했다.
퍼엉!!!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움직이던 크리스의 손에 한 마리의 드레이크가 순식간에 제압당한다.
“실력이 녹슬진 않았네요.”
“대단하죠. 미국에서도 최고의 각성자라 불리니까요.”
특히 그의 힘은 슈퍼히어로 같은 맛이 있어서 유명세가 굉장한 편이다.
사람들은 넋 놓고 크리스의 일방적인 사냥을 지켜보았다.
다만 현아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넋 놓지 마세요! 장비 상태 체크!”
“아…… 죄송합니다!”
그녀의 호령에 현장 직원들이 다시금 장비에 집중한다.
이윽고 남은 두 마리째 드레이크도 어렵지 않게 쓰러뜨린 그는 어깨를 가볍게 풀었다.
“식후운동도 안 되는데? 얼마나 더 나옵니까?”
“아직 게이트는 작동 중입니다. 더 나올 것 같습니다.”
“딱 좋네. 공주님. 거기서 구경이나 해. 내가 싹 정리해줄 테니.”
“진짜 저 얄미운 말투 좀 어떻게 안 되나…… 그리고 공주님이라 부르지 말아 줄래요?! 기자들도 있는데 낯간지럽게 뭐 하는 거예요!”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의 얼굴은 더 붉어진다.
이윽고 게이트가 열리며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었다.
“조금 독특하네요. 이렇게 단계적으로 나오다니. 처음 발견되는 게이트인가요?”
“어…… 그…… 그런가 봅니다.”
당황한 현장 직원이 허둥지둥거리자 현아는 의심스레 바라보았다.
“대체 언니는 어디서 뭘 하고 있던 건지…….”
그렇게 말하던 도중 그녀의 눈에 실실 웃고 있는 양아치가 하나 보였다.
“야.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뭐하긴 구경하지.”
“…….”
뻔뻔하게 대답하는 존재는 다름 아닌 데이비였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코오나가 몸을 반쯤 기대듯 접근하려다가 차단당하고 있었고 반대편엔 륀느가 무표정한 얼굴로 간식으로 가져온 전투식량들을 아예 입안에 털어 넣고 있었다.
“신장비가 나왔다길래. 한번 보러 왔지. 대단하네, 티오니스에도 저런 건 없었는데.”
“하하. 지구의 과학력은 세계제일이거든.”
장난스레 그녀가 대답했다. 데이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안정된 듯 보였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없었는데? 어디 있다가 온 거야?”
“어? 아. 그냥 주변 논밭이나 보고 있었지. 정령들이 많아서.”
데이비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하자 그녀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난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막는 거야. 다치면 나서겠지만 그 외엔 알아서 해.”
“그러시던가.”
기자들이 찍고 있지 않은 지역에서 한바탕 푸닥거리를 한 그녀는 이내 크리스가 두 번째 웨이브까지 무리 없이 처단하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았나요?”
“예. 아직 남은듯합니다만…… 어어?”
그때였다.
게이트에서 거대한 진동이 일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무언가가 발톱을 들이밀었다.
“저건?!”
동시에 그녀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오. 치는 맛 좀 나겠다.”
이에 크리스가 한 발 내딛자 녀석이 괴성을 내지르며 주변을 경계하다 크리스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디버프의 효과는 확실한 거 같네요…….”
이전처럼 느긋하게는 못하지만, 크리스는 제법 네임드급 몬스터를 상대로 잘 싸워나갔다.
비록 그의 장난스러운 행동 때문에 꼬리에 맞아 튕겨 나가기도 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크리스가 몬스터를 몰아넣으려던 그 순간. 놈이 발악하듯 포효했다.
-크어엉!~! 크어어어엉!!
장비에서 기이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어? 무슨 일이죠?!”
동시에 위압이 사라지고 몬스터의 전신에서 흉포한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주변의 마나를 흡수하듯 강해진 것이다.
“어?”
동시에 드레이크의 시선이 일순간 현아를 시야에 담았고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꺄아악!!”
“무슨?!”
당황한 이들의 외침 속에서 현아는 그대로 굳어버린 듯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지축을 울리며 빠르게 달려드는 괴물의 거대한 입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순식간에 현아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행동에 그녀가 경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찰나.
크리스가 섬광처럼 날아들어 그대로 괴물의 턱에 주먹을 꽂아 넣으며 놈을 다시 게이트 쪽으로 밀어냈다.
“괜찮아?!”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다급하게 현아를 향해 다가오려 한다.
“뭐 하는 거야 멍청아!!!!”
전투 중에 적을 뒤에 두고 등을 돌리다니. 평소 안 하던 짓을 왜 하는 건지.
그리고 표정은 왜 이렇게 심각해 보이는데.
현아가 급박하게 소리쳤다.
크리스가 아무리 대단한 각성자라곤 하나 지금 장비의 오작동으로 강화된 네임드 몬스터의 공격에서 멀쩡할 순 없다.
자신을 향해 다급히 뛰어오는 그를 막기 위해 그녀가 다시 움직이려던 찰나.
드레이크의 꼬리가 순식간에 크리스의 몸을 후려쳤고 그를 저 멀리 튕겨내 대지에 처박히게 만들었다.
“크리스!!!”
그녀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며 휘청거렸다.
터어엉!!!!
동시에 데이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네임드 몬스터를 가리켰고, 그의 손끝에서 응축된 성화포 한발이 날아들어 몬스터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몬스터가 정리되면서 게이트는 사라졌지만, 현아의 신경은 오로지 쓰러진 크리스에게만 향해 있었다.
“크리스!! 크리스!”
그녀가 허겁지겁 뛰어가 쓰러진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부축한다.
한쪽 무릎을 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크리스의 상태가 심각해 보이자 현아는 급기야 눈물까지 보이며 소리쳤다.
“대체 뭐 하는 거예요! 몬스터에게서 등을 돌리다니 미쳤어. 당신?!”
그녀의 외침에 크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비실비실 웃는 그가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열어 보였다.
순백색을 띠는 작은 반지였다.
“…….”
현아는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하니 그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