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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485화 (1,485/1,559)

제 1485화

분명 연희의 부탁을 받아 신제품을 직접 검수하러 왔다.

돌출형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에게 사용하여 그 효능을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하려 했건만.

지금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레이디 현아. 아니, 현아 공주님.”

초기 그녀를 부르던 호칭은 사라지고 최근 들어 그가 부르기 시작한 호칭.

예전에도 간간이 불렀지만 요즘에 와서는 그의 호칭에 묘하게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더 화를 내곤 했었다.

“나와 결혼해주겠습니까.”

지금 보니 한쪽 무릎을 꿇고 아픈 척을 하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는 절도있는 자세로 그녀를 올려다보며 반지를 내밀었다.

“휘유~”

“우우우~!”

사방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현아는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는 조용히 그녀를 기다려주었다.

“크리스…… 이게 무슨……,”

“프러포즈다. 공주님. 우리가 알고 지낸 지도 꽤 됐잖아. 난 공주님이 아니면 이제 안 되는 몸이 돼버렸어. 알잖아. 나 이제 다른 여자랑은 말도 잘 안 하는 거.”

“…….”

“받아줄래?”

그가 반지를 조금 더 내밀었다.

사방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오자 현아는 그제야 이 모든 사태가 꾸며진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부상을 당한척한 것도 사실은 거짓말임을 깨달았다.

“……,”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주려는 듯한 모습.

그 누구도 그녀가 거절하리라 생각지 않는 이 분위기는 생각보다 집요하고 절묘했다.

이윽고 현아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크리스는 그런 그녀가 반지를 받아준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하지만.

짜아악!!!

현아의 손이 번개처럼 휘감기더니 그대로 크리스의 뺨을 올려쳤다.

“컥?!”

순식간에 튕겨 나간 그가 바닥을 구르자 모두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 뜨여졌다.

“어휴…… 저 화상. 성질머리하고는…….”

뺨을 맞은 크리스는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현아.”

“진짜 크게 다친 줄 알았잖아! 이 미친 새끼야!!!”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씩씩거리며 소리친 그녀가 그대로 그를 걷어차 넘어뜨려 버렸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돌아가 버렸다.

“어……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멍하니 있던 그가 쓰러진 채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평소에 이미지 관리 좀 잘하시지 그랬어요.”

그를 돕기 위해 같이 계획을 짰던 C급 각성자 두 명이 안쓰럽다는 듯 그를 일으켜 세웠다.

“솔직히 C급 나부랭이인 우리가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전 제 와이프에게 청혼하기 몇 년 전부터 아주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저도 곧 결혼할 몸이라…… 아니 그러니까 처음부터 좀 이미지를 멋있게 잡지 그게 뭡니까.”

“이 배신자들!”

그가 부들부들 떨며 이번엔 데이비에게 소리쳤다.

“백 퍼센트 넘어올 거라면서!”

“크리스 마텐. 솔직히 말해봐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현아한테 인식이 그 지경인 거야.”

“큭…….”

그가 우울한 얼굴로 다시 추욱 늘어지자 데이비는 그에게 다가가 발끝으로 그의 옆구리를 툭툭 걷어찼다.

“가서 내가 넌지시 떠볼 테니까 오늘은 발 닦고 잠이나 자시지. 설마 한번 까였다고 포기할 건가?”

“…….”

“그런 거면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으면 내가 이렇게 변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욱한 얼굴로 그가 몸을 툭툭 털어냈다.

“다들 고생했습니다. 이만 해산!”

그 말에 눈치만 보던 현장직원들, 연구원들, 각성자들. 각종 보조 스탭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주섬주섬 뒷정리하기 시작한다.

묘한 분위기였다.

* * *

객관적으로 크리스를 볼 때 그는 제법 잘난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그리 살았던 건 아니었다.

“그 인간 지독한 플레이보이라고 내가 말했어, 안 했어 이 개x끼야. 그 신제품인지 뭔지랑 몬스터도 전부 구라였지!? 어쩐지 그 몬스터 새끼들 이상하게 디버프보다는 겁을 먹은 모습이었는데 네가 한 거였어. 기자도 한패냐?”

“기자인 척하는 사람들이었지.”

“아오. 진짜!”

현아를 따라 삼촌의 집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현아가 손에 쥐고 있던 아령을 작은 아령을 집어 던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크게 다칠 행동이지만 나는 가볍게 그것을 낚아챈 뒤 옆에 내려놓고 물었다.

“그거 확실해?”

“뭐!!”

“플레이보이. 확실히 경박한 사람이긴 하지만. 크리스가 정말로 여러 여자와 뒹굴었다는 증거가 있어? 그런 것치고 추문이 이상하게 없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들던?”

“몰라 이 새끼야!”

실제로 그가 여자를 밝히긴 했지만 최근 행보를 보면 딱히 문제가 되어 보이진 않았다.

그가 정말로 구제 불능의 플레이보이였다면 여러모로 강력한 추문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다.

아마 그중 대부분은 거짓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됐어!!”

“솔직히 부끄러워서 그러지?”

“안 닥쳐? 이 어깨걸이극락조 같은 새끼야!”

빨개진 얼굴을 보면 마냥 마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확실히 크리스는 신성의 계약 각성자이지만 코오나처럼 특수한 케이스나 처음부터 신성에 뼈를 묻고 활동해온 이와 다르게 그녀를 위해 들어왔다는 느낌은 강하게 들었다.

“크리스 마텐, 그 사람 병은 고쳐진 건가?”

“심리적인 문제였다더라. 때문에 그는 사람을 잘 안 믿어.”

안 믿는다고? 제법 호의적이던데.

“어쨌든. 나는 믿을 수 있는 사람하고 사귈 거야.”

“크리스는 못 믿고?”

“실력이나 인성은 믿을만하지만, 결혼이 그런 것만 보는 건 아니잖아.”

“속물 같은 년.”

내 타박에 그녀는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었다.

아마 신중하게 결정하고 싶은 것이겠지. 스스로의 자리가 있으니까.

혹여 자신이 가볍게 결정한 일로 신성에 큰 문제를 일으킬까 두려운 건 아닌가 싶었다.

물론, 현아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신중한 게 아닐까.

현아를 뒤로한 채 크리스를 만나러 간 나는 신성 내부에 배치된 바에서 지독한 도수의 술을 연거푸 들이키고 있는 크리스를 찾았다.

“어? 왔습니까?”

혀가 상당히 꼬부라진 걸 보니 상태가 좋지 않다.

“꼴이 말이 아니네. 나도 한 잔 주세요.”

내 말에 그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테이블에 처박았다,

“하……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렇게 싫었나…….”

매번 호탕하게 웃어대는 그였기에 그의 이런 약한 모습을 보니 제법 진심이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포기하시게?”

여기서 포기한다 하면 나도 굳이 할 말은 없었다. 남녀 간의 관계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 게슴츠레 나를 보며 물었다.

“대공. 대공은 페르세르크 대공비와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죠?”

“크…… 어떻게 해야 하지……. 대공. 대공이 좀 도와주면 안 됩니까? 어디 무인도에 나와 단둘이 떨어뜨려 놓으면…….”

“크리스. 스스로 해결하세요.”

나는 그의 옆에서 실실 웃으며 잔을 들이켰다.

“인생에 어쩌면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르는 결혼이잖아요? 물론, 두 번 하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이런 것까지 전부 남에게 떠넘길래요?”

내 말에 크리스는 잠시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부릅뜨며 벌떡 일어났다.

“급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빠르게 뛰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키득거리며 크리스가 현아에게 저돌적으로 들이대다 뺨을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 * *

신성에서는 각성자의 개인 사정을 보장해주는 편이다.

그들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던 게 아닌 이상 사생활을 존중하는 만큼 현아에게 있어서 크리스 마텐이라는 미국의 슈퍼히어로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물론, 중간에 병에 걸렸니 뭐니 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을 향해 능글맞은 태도로 다가오는 그가 처음엔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었다.

그가 유별날 정도로 자신에게 살가운 것도 그가 가진 특유의 능글거리는 성격 탓이라 생각했다.

“푸우…….”

온몸에 열이 나는듯해 수영장에 몸을 던져보지만 열기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 씨…… 진짜 사람 신경 쓰이게, 진짜…….”

뺨을 맞고 충격받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를 떠올리자 그녀는 괜히 마음이 쓰였다.

사실 그가 얼마나 경박한 인간이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사람을 구하는 각성자이며 히어로라 불리는 존재인지는 그녀가 잘 알고 있으니까.

미국의 문화상 히어로를 좋아한다곤 하지만 유별나게 크리스만 슈퍼히어로라 부르는 데엔 단순 각성 능력만이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이번 계획에 제법 공을 들였다는 건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네임드급 개체가 현아에게 돌진했을 때…….

“……그냥 연기는 아닌 거 같았는데……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녀가 위험한 상황에 놓였을 때. 순간적으로 파랗게 질려 뛰어오던 그는 정말로 연기였을까.

그의 고백 방법은 사실 매력적이면서도 참 경박했다.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남자였다.

어쩌면 지금 그가 하는 행동은 단순 자신을 어떻게든 한번 자빠뜨려보려는 그의 얕은 충동이 아닐까.

그가 그런 악한 인간이 아닌 건 직접 봐서 알지만, 인간이 착하고 악하고를 떠나 남녀 간의 관계는 약간 그런 감이 있었다.

특히 현아는 남녀 간의 관계에 한해선 개방적인 것보다는 약간 보수적인 입장이었기에 본능이 브레이크를 걸고있는 것이다.

데이비는 그렇게 브레이크 걸다가 고장 나면 급발진이라며 비웃었지만 그게 뭐가 나쁘단 말인가.

“아오!!”

결국, 수영장의 가장자리에 올라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는 그녀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막상 데이비가 부인과 깨를 볶는 모습을 보고 부럽고 질투 난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니 머리가 아팠다.

“아냐. 정신 차리자. 이럴 땐 직접 알아보는 게 최고야.”

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크리스는 생판 남이 아니다.

제법 긴 시간 신성소속의 각성자로써 현아와 자주 부대낀 사이가 아니던가.

늘 하던 대로 대하며 그의 속내와 현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자.

몸에 묻은 물기를 가볍게 털어낸 뒤 수건으로 닦아낸 그녀는 샤워를 하던 중 멈칫했다.

“그런데 어떻게 말 걸지?”

평소엔 생각지도 않던 걸 의식하면서 오히려 하기 어려워진 이 복잡하고 짜증 나는 기분.

그녀는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다시금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벽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아오!”

물론, 이 상황은 크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의식하고 나면 모든 게 달라 보인다고 했던가.

그동안 능글거림을 가면 삼아 대하다가 진지하게 들이 막은 결과 미묘한 분위기가 그의 분위기까지 바꾸었다.

현아는 다시금 벽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치며 중얼거렸다.

“그래. 각성자를 케어해주는 건 회사에서 할 일이야.”

* * *

“오. 크리스.”

크리스 마텐은 신성에 찾아온 한 여성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찾고 있었어요.”

그녀는 크리스를 보자마자 다가와 그에게 안기고 입을 맞추려 들었다.

평소라면 어떻게 대했더라.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고 어떻게 할지 생각했겠지만, 생각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그녀를 밀어낸다.

“크리스?”

“미안. 스텔라. 미안하지만 이젠 안돼.”

“뭐라고요? 당신. 오는 사람은 안 막는 편 아니었나요?”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 거야. 대부분은 거래 관계 아니었나?”

“거래가 중요한가요? 그때 우리 제법 잘 맞았는데.”

“미안하지만 내가 마음을 주는 자리는 하나뿐이라서.”

그 말에 스텔라라 불린 여성이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 하나에 제가 들어가면 되겠네요.”

“스텔라.”

그녀는 미국 국가소속의 B급 각성자였다. 물론 B급이라 하여 S급과 눈도 마주치지 말아라 이런 웃긴 법 따윈 없기에 두 사람은 등급에 상관없는 태도를 보인다.

물론, 그녀의 집안이 제법 잘 나가는 하원의원의 집안이라는 점도 한몫한다.

그녀는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크리스에게 자신을 어필했다.

“이봐 스텔라.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당신과 엮일 생각이 없어.”

“다른 이들은 다되고 나는 안된다는 건가요?”

“그들은 계약관계였을 뿐이야.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대외적으로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한 이들이라고.”

크리스의 대답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는 연기가 아닌데요.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난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더는 이런 흔적은 남기지 않을 거다.”

상당한 플레이보이. 그럼에도 추문이 거의 없는 이유는 그가 여성과 잠자리를 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매체를 통해 여성과 부대끼고 있는 장면은 여럿 나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크리스의 자기방어 기재일뿐이었으니 말이다.

현아가 플레이보이라며 화를 내고 데이비가 생각보다 숭고한데? 라고 생각하는 차이점은 거기서 나왔다.

“크리스. 오늘 일 끝나면 내게 한국 관광이나 시켜줘요.”

“미안하지만 며칠 내로 팀원들과 미국으로 떠날 거야. 게이트 토벌을 해야 하거든.”

“그런 시시한 건 내버려 두고…….”

“시시해요? 게이트 규모만 보면 상당히 방대해요. 당신이 말하는 게이트가 잘못되면 참사가 벌어질 수 있는 걸 모르십니까?”

또각또각 소리와 함께 정장을 입은 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크리스의 담당자예요. 당신은?”

“아…… 스텔라라고 해요.”

그녀는 조용히 현아를 발끝부터 머리까지 빠르게 훑었다. 현아를 못 알아보는 것일까.

이상할 것은 없었다.

동얀인이 서양인을 보면 얼굴을 구분하기 힘든 것처럼 서양인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스텔라는 크리스에게 더욱 엉겨 붙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크리스. 당신은 신성에 묶여있을 재목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아니더라도 일할 사람은 많아요.”

“지금 장난해요? 행패는 다른 데 가서 피우세요. 가드, 이분 끌어내세요.”

현아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그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짜증 나게 구네. 진짜 원숭이 같은 게.”

“뭐?”

스텔라는 현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틀린 말 했어요? 아 실례되는 발언인가? 미안해요. 자꾸 질척대서 그만.”

스텔라는 크리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크리스. 우리 이전에 같이 보낸 뜨거운 밤을 떠올려봐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신성에 있는 건 뭐라 안 하지만 당신을 사랑해주고 당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건 나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현아가 씩씩거리며 사자후를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팍!!

꽤 강렬한 손아귀 힘에 스텔라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크리…… 흡?!”

깜짝 놀란 그녀가 크리스에게 화를 내려던 순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크리스가 지금껏 보여준 적 없던 섬뜩하리만치 차가운 시선을 보낸 것을 말이다.

“스텔라. 당장 사과해라.”

“뭐…… 뭐라고요?”

“당장 내 담당자에게 한 말을 사과하라고.”

그의 말에 스텔라는 허! 하며 헛숨을 내뱉었다.

“크리스. 지금 내게 화를 내는 거예요? 당신과 한때 사귀었던 나를?”

“너와 사귄다고 공표한 건 반쯤은 너희 아버지와 맺은 계약 때문이었다. 넌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지만 나는 그 어떤 정도 준 적 없어.”

“크리스!”

“두 번 경고 안 해. 당장 사과해라.”

그 말에 스텔라는 씩씩거리며 현아를 보더니 자신의 양 검지로 자신의 눈 끝을 쭉 당겼다.

“별것도 아닌 거지 같은 게 크리스에게 꼬리를 쳐?! 크리스 정도 되는 남자의 담당자라도 되니 뭐라도 된 거 같아?!”

“하아…….”

이에 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아가 유명한 인물이라고 하지만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스텔라는 그녀를 단순 일개 직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크리스! 이 년인가요?! 당신이 마음을 주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그래. 아니까 다행이군. 스텔라.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해. 그러니까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해버릴지도 몰라.”

크리스의 낮은 경고에 스텔라는 겁을 먹은 듯 부들부들 떨었다.

“나…… 날 해치면 우리 아빠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크리스. 일개 직원과 나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누가 일개 직원이라는 거지?”

크리스는 그대로 스텔라를 짐짝마냥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녀는 이 신성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야. 차기 총수감이라고. 단순 개인 능력만 봐도 약이나 하고 술을 좋아하며 몸을 헤프게 굴리는 당신과 달리 숭고하고 예쁘고, 정결하지.”

화를 내던 현아가 당황하며 얼굴을 붉히든지 말든지 크리스가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창문을 벌컥 열었다.

“크, 크리스?! 여기 30층이에요!!”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 모르겠지만 불법 침입자 아닌가? 걱정 마. 스텔라. 내 손으로 직접 박살 내진 않을 테니.”

그리 말하며 크리스는 조용히 말했다.

“지금 당신!! 동양 원숭이와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크리스는 미련 없이 창밖으로 그녀를 내민다.

“어…….”

설마 정말로 창문밖으로, 크리스의 손에 매달릴지는 몰랐는지 그녀의 눈이 쟁반마냥 크게 뜨여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리스는 스텔라가 처음 보는 아니, 대부분의 사람이 처음 보는 너무도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미합중국에 너 같은 인종차별주의자는 필요 없다.”

그리고, 현아에게 함부로 말한 이상 널 곱게 둘 생각도 없고.

뒤이어 흘러나오는 크리스의 작은 경고와 함께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당연히 거품을 물며 기절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B급 각성자라 하여 몸이 모두가 튼튼한 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스텔라는 B급이라곤 하지만 그 실력은 2단계 아래에 머물 정도로 비리의 온상이라는 걸 크리스는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크리스는 가볍게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엄청난 속도로 낙하했고 이내 기절해버린 스텔라를 낚아챈 뒤 지상에 착지했다.

엄청난 충격이 전해져야 하건만 마치 깃털이 내려앉은 것처럼 가볍기 그지없었다.

“끝까지 추하군, 당신은 처음부터.”

기절해버린 스텔라는 듣지 못했다.

그는 밑에서 대기 중이던 사람들에게 그녀를 떠넘겼다. 다름 아닌 크리스와 함께 파견을 준비하고 있던 각국의 스페셜리스트이자 크리스의 팀원들이었다.

“공항으로 데려가. 미국으로 가면서 같이 보내버려.”

“그걸로 됩니까 팀장?”

“미안. 개인적인 부탁이네.”

그가 피식 웃자 어두운 톤의 피부를 지닌 근육질의 흑인 사내가 낄낄 웃었다.

“내가 말했지. 팀장 언젠가 저 여자 때문에 문제 생길 거라고.”

“나는 우리 공주님에게 그런 제스처를 보일 줄 몰랐지. 겁이 얼마나 없는 거야.”

다른 이도 아니고 국제연합기구나 다름없는 입지를 지닌 신성의 차기 총수감에 인종차별 재스쳐를 취한 것이다.

이것은 현아가 나서지 않겠다 해도 신성의 차원에서 보복이 들어갈 수준이었다.

“위로 가서 준비하고 올 테니까 공항에서 보자.”

크리스가 그리 말하자 팀원들이 서로 바라본다.

“에이 팀장. 이건 안되지.”

“음?”

“안 그래도 문제 소지가 있는 여자와 함께 돌아간다고? 내부 상황이 어떻건 외부에서 보면 팀장이 그녀에게 놀아나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걸?”

“그게 무슨 상관이야.”

“됐수다. 이번 일에 팀장은 빠지셔.”

흑인 남성이 크리스의 등을 가볍게 후려치고는 기절한 스텔라를 집어 들어 차량에 던지듯 실어버렸다.

“그리고. 우리 공주님이 다른 생각이 있어 보여서.”

고개를 돌리니 현아가 복잡한 얼굴로 크리스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헤이 공주님, 미안한데 이번 일은 우리끼리 다녀올게.”

“같이 가야죠.”

“아니지 아니지. 별일도 아니고 이 정도로 직접 행차하기엔 바쁘지 않나? 적당히 휴가도 즐길 겸 다녀올 테니 우리 팀장이나 케어해주라고.”

멍하니 있는 크리스를 밀어내며 그의 팀원들은 차량에 올라 공항 쪽으로 떠나버렸다.

이후 1층에 남게 된 현아는 멍하니 크리스를 보았다.

“크리스.”

“어…… 음?”

“할 일 없으면 따라와요.”

한참을 생각하던 현아가 중얼거렸다.

“그 망할 여자 대체 뭐예요?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인종차별 제스처라니.”

“그게 인종 차별 제스처라는 걸 모르는 이도 있어. 물론, 그녀는 타 인종에 그리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한국에도 있잖아? 그런 사람들.”

서구권에 이유 없이 적의감을 드러내는 사람은 분명 있다.

사람 하나를 가지고 그 나라의 풍조를 짐작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씩씩거리는 건 덤이었다.

“뭔데 신성 본사에 멋대로 들어와서 당신한테 엉겨 붙는데.”

“오…… 지금 질투하는 거야?”

“헛소리 말고! 분명 가드가 있었는데 외부인이 어떻게 30층까지 왔냐는 거지.”

“예전에…… 잠깐 연이 닿았던 여자야. 조금 독특한 각성자거든. 나를 플레이보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었던 당시에 여러 여자와 엮인 건 알고 있지?”

“…….”

“사실 대부분은 계약관계였지만 그녀는 뭐랄까…… 조금 다른 입장이기도 했고.”

현아는 뭔가 기분이 상했는지 쿵쿵 소리 내며 지하 차고로 향했다.

그녀의 개인용으로 준비된 스포츠카에 오른다.

“내가 운전할까?”

“됐어요. 사고 나면 제일 위험한 게 보조석인 거 몰라요?”

“그거야 일반인의 경우지.”

“인간은 본능적으로 핸들을 왼쪽으로 틀거든요?”

“에이 화내지 말고.”

“데이비 그 꼴뚜기는 대체 이런 인간을 보고 왜 순정파니 헛소리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사실인데? 내가 지금까지 정말로 좋아한 사람은 둘뿐이야…….”

“하나는 아니라는 거네?”

“이전에…… 옆집살던 누나를 사랑했던 적이 있어……. 배신당했지만 말이야. 캠핑을 갔는데 빌어먹을 선배 놈과 기류가 이상한 걸 봐버렸거든.”

“…….”

“내가 취향 아니라고 했잖아요.”

현아가 얼굴을 돌려버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당연 크리스가 못 들었을 리 없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지루하고 흥미없던 로맨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가 이렇게 펼쳐지는 걸 보면. 상식이 개변당한 느낌이라고 할까.”

크리스가 운전대를 잡고 있던 현아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딪쳤다.

현아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홀리 갓, 빌어먹을. 대체 왜 이렇게 매력적인거야. 누구 미치는 꼴 보고싶어서 그래? 난 망할 성범죄로 쇠고랑 차고 싶지 않다고.”

그의 능글거리는 미소에 현아는 숨을 거칠 게 몰아쉬더니 그대로 그의 가슴을 퍽! 하고 때렸다.

“내 입술 돌려내. 이 개x끼야! 모가지 잘리고 싶어?!”

“워우. 거친 욕설도 좋군. 신성에서 짤리면 개인적으로 당신을 돕지뭐. 원래 히어로는 고독한 법이거든…… 고독한 히어로가 히로인을 구해준다. 매력적인 소재 아닌가?”

“됐거든!! 별꼴이야, 진짜!!”

현아는 씩씩거리며 그대로 엑셀을 밟아 스포츠카를 급발진시켰다. 동시에 크리스의 신형이 의자 뒤쪽으로 순간 밀렸다.

“워우.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그의 물음에 현아는 조금 전의 일로부터 도피하듯 소리 질렀다.

“유원지!! 이 빌어먹을 바람둥이야!!”

“유원지 데이트라. 좋네. 알프랜드?”

“관리 차원에서 가는거라고!!”

그리 말하면서도 현아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빨개져 있었다.

관리 차원?

정말로?

크리스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라고 말이다.

현재 본사 내에 있는사람들 사이에서 크리스와 현아 사이에 생긴 묘한 기류에 편승해 이걸 도우려는 이들도 제법 있다곤 들었지만 그 스케일이 제법인 듯 보였다.

크리스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얼마 전 데이비가 그를 만나 도와주겠다 말한 뒤 했던 말이 떠올랐다.

-크리스. 노파심에 하는말이지만, 내 동생 눈에서 눈물 나면 당신 눈에서 피 눈물 흐른다는 것만 기억하세요.

겉으로 보면 매번 싸우는 것같은 두 사람이다. 하지만. 크리스는 진실을 아는 지구에서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데이비가 어떤 인물인지 말이다.

그렇기에 데이비를 향한 질투는 거의 없는 편이었다.

“현아. 티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벤트용 머리띠에 츄러스를 손에 쥐고 걷는 게 좋지 않을까?”

“누가 놀러 간다는거야! 이 인간이 진짜!”

“이건 뭔데?”

차 안쪽에 끼여 있던 유원지의 관광 가이드를 꺼내며 피식 웃자 현아가 당황한 듯 소리 질렀다.

“그…… 그건 그냥 고객 차원에서 잘 전달이 되는지 확인하러 가는 거야!”

보통은 본인이 직접 가진 않는다. 그런데도 직접 간다며 우기는 꼴을 보니 크리스는 참을 수 없이 그녀가 사랑스러워졌다.

“그…… 그리고 그때 그 고백은 거절이야 이 미친 인간아. 어느 정신 나간 인간이 사귀지도 않고 결혼부터 해.”

“선 결혼, 후 연애. 몰라? 현아가 좋아하는 연애 소설에도 그런 게 있던데.”

“꺅! 이 미친 새끼! 남의 사생활도 들여다 봐?! 그거 야설이야, 이 개새끼야! 생각해 보니 그 이상한 프로포즈 설마…… 그거 보고 따라한 거야?! 뭐 이런 또라이가 다 있어?!

연희가 실수한 모양이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러다가 안 맞으면?!”

현아의 외침에 크리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 무슨 헛소리야. 현아 당신과 내가 왜 안 맞아.”

“뭐?”

“안 맞는다고? 그건 우리가 대화가 부족한 게 아닌가 고민해야 할 문제일 뿐. 절대 안 맞는 게 아니야.”

그가 컵홀더에 끼인 아메리카노를 가리켰다.

“이거봐 커피 취향도 똑같은데 어떻게 노이즈가 나겠어.”

사소한 것 하나가 생각보다 잘 맞는데 말이야.

그의 말에 현아는 결국 터질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애꿎은 차량만이 그녀의 심란한 마음을 대신하며 배기음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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