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91화
미묘하고도 차가운 공기가 감돈다.
비화는 고개만 돌려 조용히 에반젤린을 노려보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 분위기 보소 ㅋㅋㅋ
-방장 조졌네 ㅋㅋ
“미안한데 검색 한 번만 할게.”
이후 비화는 곧바로 인터넷을 켜고는 빠르게 무언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위쪽에 대문짝만하게 나타나는 게임 영상이 보인다.
비화를 닮은 2D 캐릭터가 비웃고 있는 듯한 섬네일을 지닌 것을 떨리는 손으로 클릭한 그녀는 영상 대부분을 빠르게 스킵하듯 확인했다.
“저…… 언니?”
말없이 에반젤린을 바라보는 그 무표정이 견딜 수가 없는지 에반젤린이 와들와들 떨며 물러났다.
“그, 그게 내가 다 설명할 수 있어.”
그럼에도 비화는 말없이 에반젤린을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이내 컴퓨터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송 중이니 게스트는 슬슬 퇴장해야겠네. 에린아.”
“어…… 응?”
“끝나고 집으로 와. 안 오면 어떻게 될지 몰라.”
스팡!!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는 비화를 뒤로한 채 에반젤린은 창백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여러분, 어떻게 해요?”
-ㅋㅋㅋ 겸허히 받아들여라.
-끝남 ㅋㅋㅋ 비화 극대노 ㅋㅋㅋ
-아니 근데 왜 화내는 거임?
-누가 님 게임하면서 말하는 걸 영상으로 만들어서 허락도 안 받고 올리면 좋아하겠음?
-비화는 그거 꽤 싫어했던 거 같기도 함. 그래서 비화 레전설 플레이짤들 잘 안 보이는 거.
-방송에는 출현했는데?
-저건 허락 안 받고 만든 거잖아.
-인정. 방장이 잘못했네.
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책상에 처박은 에반젤린이 중얼거렸다.
“아니 잘못한 건 아는데…… 솔직히 쩔잖아요…….”
-응 그래도 방장 잘못.
이때다 싶었는지 아주 신나게 물어뜯는 시청자들을 보며 에반젤린은 극심한 허탈함을 느꼈다.
“방송 여기까지.”
-어어?
-선 씨게 넘네.
“후우…… 그래. 방송 끝나면 집으로 가야 하니까…… 여러분 오늘 그냥 24시간 풀 방송할까요.”
-콜
-크 풀버전 가즈아.
역시 시청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오로지 재미일 뿐이었다.
“장난이고 평소처럼 할거에요. 가서 사과도 해야지.”
이후 에반젤린은 평소의 페이스대로 방송을 마치고는 곧바로 하인스로 향했다.
사실상 레어에 장기 체류하지만 어지간하면 늦은 시각엔 돌아오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장소였다.
“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
시종장 베르닐이 정중하게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시종장, 어…… 언니는 어디 있어요?”
“아.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마워요.”
발걸음이 돌덩이처럼 무겁게만 느껴진다.
천천히 방으로 들어서자 말없이 차를 음미한 채 우아하게 앉아있는 비화가 보였다.
“헤헤…… 언니. 내가 나쁜 의미로 그런 건 아니고…….”
우선은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그녀가 입을 연 그 순간.
비화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담담하게 에반젤린의 말을 틀어막았다.
“에반젤린.”
“네…….”
“왜 그렇게 겁먹었어. 내가 너 패기라도 할까 봐?”
빙그레 웃는 미소가 차라리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 나는 언니 플레이 영상이 너무 쩔어서. 나만 보기 아깝기도 하고 해서…….”
“그래? 잘못했다는 거네?”
“응 미안해.”
“왜 그랬어?”
“아니…… 언니 가끔 게스트로 출현하잖아……. 그래서…….”
“그래서?”
비화가 차를 호로록 마신다.
분위기가 냉각되는 기분이었다.
“이번에도 게스트식으로, 아니 이게 이렇게 화를 낼 문제야? 언니가 방송에 많이 노출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게스트로 간간이 참여했잖아.”
“계속해봐.”
“정말로 싫었으면 게스트도 안 나왔어야 하는 거 아니야?”
비화가 단순 기호 때문에 방송에 참여하지 않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에반젤린은 유일한 동아줄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솔직히 이랬다가 저랬다가 뭐야? 난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 거야. 정말로 싫었으면 아예 출연 자체를 안 하는 게 맞는 거잖아.”
“에린아. 내가 화를 내는 게 방송에 나갔기 때문이라 생각해?”
“어?”
“네 말대로 게스트로 간간이 나가기도 했지. 별로 달갑진 않지만 이렇게 화를 낼 문제도 아니거든.”
“응.”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왜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멋대로 일을 진행했냐는 거야. 내가 아니라 남이었으면 이렇게 말하는 거로 안 넘어가.”
비화의 침착한 타박에 에반젤린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너 엿먹이려고. 라고 했다간 머리를 다 쥐어뜯길 것 같은 불안함이 앞섰다.
“미……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래 알았어. 용서해줄게.”
차분하게 복숭아 차를 음미한 그녀가 고개를 들어 에반젤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진짜루?”
“뻥이야.”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언니! 살려주세요!”
“살려는 줄게.”
“시…… 시작은 언니가 잘못한 거잖아!”
“그럼 실력으로 이겼어야지!”
“순 억지야!! 여신의 힘으로 동생 이겨 먹으니까 좋아?!”
“미안한데 순수 피지컬이야.”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그 후 고요하던 에반젤린의 방 창문이 벌컥 열리며 에반젤린이 창밖으로 도망치듯 튀어나왔다.
뒤이어 스산한 여신의 힘이 방안에서 흘러넘치기 시작했지만 에반젤린에겐 그런 걸 확인할 겨를이 없었다.
“으아아아!!”
에반젤린의 입장에선 할 말이 없었다.
비화가 방송에 나오는걸 달가워하지 않기에 그녀가 방송을 하지 않는 건 맞았다.
하지만 그게 트라우마급으로 절대 하면 안 된다 수준은 아니었기에 비화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에 비화가 걸고넘어진 것은 다름 아닌 왜 허락도 받지 않고 올렸냐는 것이었다.
당연히 너 엿먹이려고. 라고는 할 수 없기에 에반젤린은 입을 다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본래라면 당황한 비화가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며 키득거리려 했건만.
이게 알고 보니 자충수가 아니었던가.
스산한 기세를 풍기며 쫓아오는 비화에게서 도망칠 곳이 어디 있을까.
온천지대? 하인스 아카데미? 아니면 게이트를 타고 황색바위부족이나 달의 숲으로 갈까.
머릿속에 탈출로에 관한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에린아. 어디가. 대화 좀 하자니까?”
거짓말이 분명하다. 비화의 성격상 잡히면 어딘가에 매달리게 된다.
단순히 매달리는 게 뭐가 쪽팔리냐 할 수 있는데. 이게 상상 이상으로 구경거리가 되면 엄청나게 부끄러운 건 당해봐야 아는 일이었다.
도망칠 수도 없다는 건 치욕 그 자체였으니까.
어떻게든 비화가 김이 새서 기분이 풀릴 때까지 몸을 숨겨야 했다.
“아빠한테 갈까. 아니야. 혼날 거야.”
빠르게 판단을 마친 그녀는 아카데미 쪽으로 내달렸다.
방송을 하고 돌아온 덕에 주변은 어두컴컴하다.
이 어둠을 잘 이용하면 숨을 수 있지 않을까.
타앗.
멀지 않은 곳에서 안광을 번뜩이며 담장에 내려서는 비화를 보자마자 그녀는 생각을 멈추고 다시 미친 듯이 도망쳤다.
“미친!”
허겁지겁 도망치지만, 비화를 좀처럼 쉽게 따돌릴 수가 없었다.
죽음의 술래잡기는 계속되었다.
잡히면 매달린다!
누구 딸인지 아주 제 아빠를 쏙 빼닮은 비화의 행동 패턴은 너무도 확연했다.
‘잡혔네? 어디가 좋아? 아카데미 본관? 라운의 수도? 아니지, 지구가 좋지? 그럼 자유의 여신상이나 광화문에 매달리는 건 어때?’
잡혔을 경우 벌어질 일을 잘 알고 있는 에반젤린은 발을 쉬지 않고 내디디며 소리쳤다.
“언니! 협상! 협상을 요청한다!”
“무조건 항복. 그 외에는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
뒤따라오는 비화의 서늘한 목소리에 에반젤린은 울음을 삼켰다.
급기야 본체로 현신해 날아오른 그녀가 속도를 올린다.
하지만 비화는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오르며 그녀를 맹렬하게 추적했다.
“걱정 마 에린아. 언니가 정말로 널 어떻게 하겠어? 이런 사소한 일로?”
“정말?”
“뻥이야.”
“꺄아아악!!!”
비화의 날개옷에서 하늘거리는 빛무리들이 쏘아져 나와 그대로 에반젤린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한다.
신성한 힘이 에반젤린의 힘을 억누르며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에반젤린이 황급히 벗어나려 하지만, 비화의 신성력은 그녀를 더욱 옭아맸다.
“잡았다 이년.”
순식간에 제압당한 에반젤린이 소리쳤다.
“제…… 제노지 협약!!”
“틀렸어. 다른 거야.”
“살려줘!”
비화는 에반젤린을 휘감은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음산하기 그지없는 눈빛이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비화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손으로 에반젤린의 머리를 푹푹 눌러 쓰다듬었다.
“장난이야.”
“어?”
“설마. 그런 거 하나로 정말 화낼까 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상찮은 기세를 내뿜던 그녀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비화는 에반젤린을 끌어안았다.
“다만, 동의를 구하지 않고 그렇게 멋대로 하는 건 나쁜 짓이야.”
“언니이…….”
“다음부터는 물어보고 해. 물 먹이고 싶으면 다른 거로. 많은 이들이 착각하는데, 가족이기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 거야.”
친할수록 조심해야 한다.
그 말에 에반젤린은 크게 속에서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미안해…….”
평소답지 않게 감정적이게 된 에반젤린이 울먹거리더니 이내 급기야 비화의 품에 완전히 안겨들었다.
“언니 내가 잘못했어!”
엉엉 울며 안겨드는 에반젤린을 다독이며 비화는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동생 안아보자.”
“흐어엉!”
그녀를 꼭 끌어안는 모습만 보면 사이좋은 자매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비화의 미소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따스한 미소에서 사악한 미소로 바뀌어있었다.
달그락.
동시에 무언가 팻말 같은 것이 목걸이 형태로 에반젤린의 목에 걸렸다.
“저…… 언니? 이게 뭐야?”
“언니 선물이야. 설마 거절하진 않겠지?”
“언니? 언니?!”
에반젤린은 자신의 목에 걸린 팻말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 걸린 목걸이는 풀리지 않았다.
마치 팻말같이 늘어진 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나는 언니에게 까분 멍청이입니다.]
너무도 직관적인 한마디. 에반젤린이 고개를 들어 비화를 바라본다.
“이거 뭐야?!”
“내일 방송할 때 그거 차고 해. 그럼 풀릴 거야.”
“시…… 싫어!”
“뭐 안 해도 상관은 없어.”
비화가 생긋 웃으며 물러났다.
“방송 5시간 안 채우면 안 풀어줄 거야. 걱정 마. 언니가 시간 확실하게 재서 칼같이 풀어줄 테니까.”
그녀의 미소에 에반젤린의 얼굴이 거뭇하게 죽어간다.
“모…… 모.”
“음?”
“못된 년!”
“이게 언니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비화의 응징이 떨어졌지만, 이번엔 에반젤린도 지고 있지 않았다.
순식간에 서로 달려들어 깍지끼듯 서로의 손을 잡고 힘겨루기를 시작하자 비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꺅! 이 무식한 게 무슨 힘이 이렇게 세!”
“풀어! 빨리 풀어!”
아득바득 소리치며 싸우는 두 자매는 결국 힘의 파동을 느끼고 찾아온 페르세르크의 한마디에 강제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서로 으르렁거리는 건 변치 않았다.
페르세르크는 에반젤린에게 비화가 했던 말을 그대로 다시 들려주었고 비화에겐 쪼잔하게 동생에게 뭐 하는 짓이냐며 타박했다.
물론 그녀의 앞에선 죄송합니다. 라고 했지만, 에반젤린의 목에 걸린 팻말이 풀리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둘의 전쟁은 휴전상태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반가…… 워요.”
이를 빠득갈며 방송을 켠 에반젤린이 반쯤 죽은 눈동자로 화면을 응시한다.
-?? 저거 뭐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잡혀서 벌 받는 거?ㅋㅋ 악ㅋㅋㅋ 클립따 ㅋㅋㅋ
당연히 시청자들의 반응은 확실했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