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92화
“이상이 전날 있었던 소란의 전말이라 보고.”
륀느의 말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비화와 에반젤린이 야밤에 하인스 곳곳을 뛰어다니며 투덕거렸다는 소식에 머리가 아파져 왔다.
“사이 좀 좋게 지내면 좋으련만…….”
“사이 좋은 편이지.”
일리나가 짧게 일축했다.
“사이가 좋다고? 저렇게 푸닥거리를 하는데? 비화는 그래도 에반젤린을 엄청 아끼는 편이었잖아.”
“맞아. 비화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 에린이니까.”
일리나는 내 몸에 제 등을 기댄 채 산딸기를 오물거리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데이비. 비화가 여신인 건 맞지만 아직 어린애야. 에린이도 어린애고.”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겉보기에 다 큰 것처럼 보이지 비화나 에반젤린이나 조금만 차이 날 뿐 둘 다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어린애들은 원래 서로 싸우면서 크는 거야. 우리는 그걸 잘 조율해주면 되는 거지.”
“그렇긴 하네. 아직 둘 다 어린애지.”
“저러고도 혹시라도 둘 중 하나가 다치면 어쩔 줄 몰라할걸.”
단순히 인간의 기준으로 볼 정도로 어린애는 아니지만, 비화나 에반젤린이나 상식만 가지고 있을 뿐 경험은 부족했다.
그렇기에 이런 푸닥거리도 생겨나는 것이리라.
하면 안되는걸 알면서도, 아이의 고집은 그것을 마비시킬 때가 있다.
“보니까 분위기가 심상찮던데. 또 싸우진 않겠지?”
“글쎄.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게 맞지 않을까? 아마 또 투덕거릴 가능성이 크겠지.”
일리나나 나나 서로를 죽도록 미워하는 형제자매가 어떤 느낌을 주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칼루스 올 라운.
오래전 내 등에 화살을 박아넣었던 놈.
배다른 형제긴 하지만 일단은 형제였던 놈은 나와 완전히 어긋났었던 녀석이다.
그와 내 관계, 그가 했던 짓과 내가 했던 짓을 떠올려보면 에반젤린과 비화의 투덕거림은 정말 애교 수준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형제자매간의 싸움 정도.
물론, 일반인을 아득히 초월한 존재들이니 그 스케일이 크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리나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팔란 황실의 황족 중에서도 그녀를 미워하는 존재는 있었을 테니까.
“얼마든지 싸워도 돼.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게야. 하지만. 그렇게 싸우면서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가르쳐야 할 터.”
조금 전까지 흔들의자에 앉아 곤히 잠든 아벨을 끌어안고 있던 페르세르크가 말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가족이라는 사실.”
“판 짤 거야?”
“아니. 그냥 두자.”
그 답변에 일리나는 의외라고 여겼는지 눈동자가 살짝 동그래졌다.
“언젠가 자연스레 겪을 일들이야. 필요하면 해야겠지만 굳이 우리가 걱정한다는 이유로 애들을 고생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비록 레어를 얻게 하기 위해서라던지 에반젤린의 성장을 위해서라던지 필요 이상의 고생을 시키긴 했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잘 해냈으니 더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 자식들 꽃길만 걷게.”
그 말에 일리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 * *
굴욕의 방송은 두고두고 에반젤린의 분노를 끓어오르게 했다.
“복수할 거야.”
비화가 목에 팻말을 걸어준 덕분에 방송 내내 조리돌림을 당했다.
시청자들은 아주 물 만난 고기처럼 툭하면 팻말을 걸고넘어지며 그녀를 괴롭히기 일쑤였고 심지어 아군이 되어줘야 할 시우나 [절제] 박승현도 작정하고 그녀의 속을 박박 긁어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의 그 모습을 카툰처럼 만들어 하나의 짤을 만들었고, 고작 하루 만에 여러 커뮤니티에서 밈으로 쓰이는 기염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에반젤린의 방송이 재미있는가 하면 객관적으로 재미있는 편이었다.
여러 면에서 시청자들이 원하는 니즈를 아무렇지도 않게 맞추는 편이며 종합게임 스트리머로써 놓고 봐도 상당히 고평가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재밌어하는 콘텐츠 중 하나가 바로 에반젤린이 울상을 짓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대부분의 스트리머들이 그런 식이긴 하지만 시청자들로선 에반젤린은 엄청나게 유명한 이의 금지옥엽이며 재능만 봐도 심상찮은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아직 어림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방송을 이어나가다가 사고를 쳤을 때 파랗게 질리는 얼굴을 하는 걸 보면 하나의 가까운 거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쪽이란 쪽은 다 당해버린 그녀는 비화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웠다.
물론, 이깟 일로 증오를 불태울 생각은 없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하지만 이미 한차례 복수했다가 무슨 꼴을 당했던가.
비화에게 [억울하면 먼저 태어났어야지]를 제대로 직격당한 에반젤린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여신이면 뭐하나, 하는 짓만 보면 아직 태어난 지 오래되지도 않은 어린애가 틀림없다!
그녀는 종이를 펴놓고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꺼냈다.
“생각보다 언니라는 포지션이 너무 사기적이야.”
까불어도 이기기가 힘들다.
왜? 언니니까. 그럴듯한 구실만 있으면 비화는 에반젤린을 혼낼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둘째. 무력 면에서 비화의 힘이 생각보다 강하다. 정말 사생결단을 낼 작정으로 어그로를 끌어 정신 에너지를 흡수한다면 아직 어린 비화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폐기해야 할 흐름이기도 했다.
“아니 게임도 잘해! 그림도 잘 그려! 대체 못하는 게 뭐야?!”
가장 충격이었던 건 우위라고 생각했던 분야인 그림조차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시청자들은 비화의 그림이 극히 사실적이긴 하지만 감성만큼은 에반젤린이 앞선다 말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비화가 꺼리거나 못하는걸 찾아야 했다.
그러던 중 에반젤린은 한가지 자신이 앞서는 것을 기억해냈다.
“그러고 보니 완력은 내가 더 좋았던 거 같은데.”
가서 팔씨름이라도 하자고 해볼까.
당연 눈치 빠른 비화는 절대 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찰나.
늘 그렇듯 비화가 그녀의 레어에 놀러 왔다.
“언니. 바쁜 거 아니야?”
“응? 아아 응, 오늘은 한가해.”
늘 그렇듯 에반젤린의 침대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 이불로 몸을 휘감고는 추욱 늘어지는 그녀를 보며 에반젤린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흥. 나는 바쁘니까 다음에 놀아.”
“바빠? 방송해?”
“아니.”
“아닌데 바빠?”
“응.”
이렇다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곤 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에반젤린은 아이가 투정 부리는 것처럼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에 비화는 잠시 그녀를 보다 천천히 말했다.
“그래? 고생해.”
“돌아가. 나 바빠.”
“나 그냥 여기 있을래.”
“싫어.”
단호한 대답에 비화가 입을 삐쭉였다.
“설마 그 판떼기 때문에 아직 삐진 건 아니지?”
도발이다! 여기서 걸려 넘어가면 그녀는 분명 묘한 웃음을 지으며 속을 긁어놓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놀아나는 건 전혀 상관없지만, 에반젤린은 투정을 이어나갔다.
“삐진 거 맞아. 나 언니 이제 싫어.”
“어?”
비화가 잠시 멈칫한다.
“그러니까 언니 꼴도 보기 싫어. 나가.”
에반젤린은 방문을 가리키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러자 비화는 멍하니 에반젤린을 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진짜로 가?”
“응.”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멍하니 있던 비화는 이내 여유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우리 동생 아직 화가 났다는데 어쩔 수 없지. 언니는 가 볼게.”
그리고는 스팡! 소리를 내며 사라져버렸다.
이후로도 에반젤린은 절대 화를 풀지 않았다.
“에린아! 같이 게임…….”
“안 해. 돌아가.”
“얘는? 아직도 삐진 거야?”
“응? 아니. 이제 안 삐졌어.”
에반젤린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친구만 날아갈 거야. 따라오지 마.”
“어…… 어?”
그러자 비화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린이 너 친구도 있어? 아 그 두 사람?”
“신경 끄지?”
차갑게 일갈하고는 가버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비화는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무엇 때문이었을까.
비화는 그날 이후로 틈만 나면 에린이를 찾아왔다.
“에린아. 이게 뭔지 알아? 후후. 원한다면 알려줄 수도 있는데.”
“관심 없어.”
“어?”
차갑게 쳐내버리고는 비화를 노려본다.
“볼일 다 봤어? 나 바쁘니까 돌아가.”
담담하게 말하며 만화를 그리는 데에 몰두하는 에반젤린을 보며 비화는 굳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명백히 당혹스러움이 서려 있는 그 시선을 내비치며 비화가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하지만 비화는 애써 괜찮은 척 웃었다.
“그…… 그래. 바쁘다면 어쩔 수 없지.”
이후로도 같은 패턴이 점점 반복될수록 에반젤린은 모종의 승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비화의 표정이 밝지 않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이 승리감에 에반젤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반면 비화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눈이 새빨개져 있었다.
“아직도 있었어? 언니. 이제 레어에 찾아오는 것도 적당히 해. 여기 내 개인 공간이야.”
“어…… 어?”
평소라면 강하게 나왔을 비화였지만 어째서인지 비화는 우물쭈물하더니 한발 물러난다.
“으. 응.”
“그럼 돌아가.”
블랙 슬라임을 품에 안은 채 고개를 돌려버린 에반젤린은 비화가 조용하자 불안함을 느꼈다.
혹시 또 화난다고 성질을 부리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 그러진 않았다지만 에반젤린이 아는 비화라면 그런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비화는 화를 내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며 어찌할 줄 몰라 할 뿐이다.
그러던 중 에반젤린은 자신의 보물상자에 중요한 물건들을 담았다.
“그…… 그게 뭐야?”
처음에 비하면 굉장히 약해진 듯한 질문이었다.
“내가 오지 말랬잖아.”
“도…… 동생이 잘 지내는지 보러 온 것뿐이야.”
“그래? 봤으면 돌아가.”
담담하게 말하며 상자의 내용물이 들키지 않게 조심스레 숨긴 에반젤린이 씨익 웃으며 자물쇠를 채웠다.
그러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비화가 다시 물었다.
“저…… 에린아. 그…… 뭘 넣은 거야?”
“이거? 내 소중한 물건. 초단이 언니나 홍단이 청단이 언니만 알고 있는 거야.”
“나…… 나는?”
“언니? 언니는 왜?”
“나…… 나도 보여줘!”
당황한 비화가 소리치자 에반젤린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상자를 숨겼다.
호기심일까. 혼자 따돌려졌다는 사실 때문일까. 급기야 비화는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충혈된 눈을 넘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싫어.”
“에…… 에린아? 에린이 평소에 바나나 아이스크림 좋아했지? 언니가 많이 사줄게!”
“싫어.”
“게…… 게임도 같이하자! 응? 너 최근에 어려워했던 게임 있잖아. 우리가 힘을 합치면…….”
“어차피 언니 혼자 하면 금방 깨잖아.”
“아니면 랭크게임 듀오라도…….”
“질렸어.”
담담한 한마디가 흘러나간다.
에반젤린은 비화가 당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러게 속을 박박 긁으랬나. 이제 슬슬 사자후가 터져 나올 때가 됐는데.
에반젤린이 고개를 돌려 비화를 바라보았다.
보물상자는 사실 별거 없었다. 자매들의 사진을 모아둔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비화가 눈에서 투명한 눈물을 똑똑 떨어뜨리며 에반젤린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그…… 그래! 나, 난 괜찮거든? 전혀 문제없거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시선을 억지로 돌린 비화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공간을 열고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에반젤린은 직감했다.
“내가…… 좀 심했나?”
설마 비화가 울어버릴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완벽한 비화가 울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분명 이것도 연기가 분명하다.
여기서 놀아나면 또 키득키득 대며 놀려댈 게 분명했다.
적어도 다른 이들이 봤다면 절대 그렇지않다 말했을 테지만 에반젤린은 이런 점에서 굉장히 서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