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93화
비화가 도망쳐버린 뒤 에반젤린은 묘하게 신경이 쓰였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이건 비화의 계략이 분명하다. 자신의 심리를 역으로 이용하는 카운터. 자칫하면 또 그녀의 손에 놀아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비화는 에반젤린의 레어에도, 하인스 성에도 오지 않았다.
* * *
비화가 오지 않는 이유에 관해 묻고 다닐 순 없었다.
식사자리에서 물어봐도 잘 모르겠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던 만큼 에반젤린은 그렇게 자주 가던 레어조차 가지 않고 며칠째 하인스의 영주성에 머무르며 방향을 잃은 철새처럼 방황했다.
“에리니! 무슨 일 이써?”
“응? 아…… 아니야, 언니.”
그 모습을 걱정스레 보던 청단이의 질문에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에리니 왜 표정이 안 좋아?”
뒤이어 홍단이까지 다가와 위로하듯 그녀를 끌어안아 주지만 에반젤린의 마음은 편치않았다.
“저기…… 홍단이 청단이 언니, 비화 언니 못 봤어?”
“비하? 못 밨서!”
“요즘 안 놀러 와! 자주 놀아줬는데! 요즘 바쁜가 봐! 아빠가 그랬서!”
제 딴에는 열심히 위로한다고 끌어안아 주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홍단이나 청단이가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마음속을 가득 채운 비화의 그 울먹거리던 얼굴이 사라지지 않을 뿐이었다.
-방장. 무슨 일 있음? 표정이 안 좋은데.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안해요. 오늘 방송은 여기까지 할게요. 죄송한데 며칠간은 방송을 못할 거 같아요.”
억지웃음을 짓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에반젤린은 평소에 그렇게 재밌어하던 방송조차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힘없이 영주성으로 돌아온 그 날 에반젤린은 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늦은 시각이라 대부분은 잠에 빠져든 그 시간이다.
피곤하니 얼른 자야지 싶었던 에반젤린은 문득 비화의 방에 옅은 빛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음을 깨닫고 눈을 크게 떴다.
비화가 왔구나!
에반젤린은 자신도 모르게 허겁지겁 뛰어 그녀의 방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열려던 그 순간.
“흑…… 흐흑…….”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다름 아닌 울음소리였다.
그대로 굳어버린 채 얼어있던 그녀는 천천히 방문의 손을 잡았다.
확인하면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녀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소리도 들리지 않게 문이 살짝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내부를 본 에반젤린은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비화가 작은 인형 하나를 품에 꼭 안은 채 흐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잠든 조용한 영주성. 그곳에 돌아온 비화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품엔 에반젤린이 예전 선물했던 인형이 안겨있었다.
왜 저렇게 울고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표하진 않았다.
그걸 생각하는 순간 정말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때문이었다.
결국, 에반젤린은 한 발, 두 발 물러난 뒤 문을 조용히 닫았다.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누군가가 문을 열었던 사실조차 인지 못 하는 그녀의 모습이 계속해서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에반젤린은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뒷걸음질 치다 허겁지겁 그녀의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그리고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잠도 못 잔 채 날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 * *
아침이 밝았을 때 비화는 다시 사라진 후였다.
에반젤린은 전날보다 훨씬 퀭해진 얼굴로 비화의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저…… 아빠.”
“응?”
늘 하던 워밍업과 함께 수련을 진행하던 에반젤린은 트와일라잇에 피어 있던 오러 블레이드를 지우고는 물었다.
“저…… 비화 언니는 언제 와요?”
어제 왔었지만, 그녀를 제외한 대부분 사람은 그녀가 왔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데이비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글쎄?”
부드럽게 웃으며 에반젤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데이비의 미소에 에반젤린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 할까?”
“네…….”
늘 하던 일이기에 익숙하지만 어째서인지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죽하면 훈련 때만큼은 엄격하기 그지없는 데이비조차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다독여 줄 뿐이다.
“에린아.”
“네.”
“아빠는 우리 딸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어.”
그 말에 에반젤린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비화가 연기를 하고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아니, 어지간해선 완벽한 비화라면 반드시 그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마음 한쪽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정말 연기였을까.
그녀가 흐느끼던 모습이 정말로 연기였을까.
정말 연기였다면 소름 끼칠 정도로 치밀한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뭐지.”
홀로 고민하던 그녀는 그대로 연무장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땀으로 범벅이 된 훈련복이니 어차피 세탁해야 할 것들이었다.
“이대로는 안 돼. 직접 만나서 물어야겠어.”
연기라면 이런 악질 같은 장난은 당장 집어치우라고 진심으로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해야 하는 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빠. 비화 언니를 만나고 싶어요.”
“비화는 성역에 있을 텐데.”
“데려가 줘요.”
막무가내식으로 요구해본다.
물론 에반젤린도 그게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는 있다.
한때 페르세르크나 일리나도 신의 성역에 간 적이 있지만, 본래라면 그게 불가능해야 할 것들이다.
그렇기에 에반젤린도 딱히 그곳을 방문하려는 시도를 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이에 에이리아나 일리나가 데이비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데려가 주는 게 어때?”
“그래요. 서방님.”
“후우…… 그러곤 싶은데…….”
잠시 고민하던 데이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하지만 약속해.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안 돼. 알겠어?”
“네.”
단순히 귀찮거나 하는 문제가 아님을 알기에 에반젤린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후 데이비는 균열을 열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에반젤린.”
“네?”
“지금 성역에는 격류가 돌 시기야. 그러니까 절대. 절대 아빠 손 놓으면 안 된다?”
데이비가 웃으며 당부했다.
“놓치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
“격류? 전에는 그런 게 없었잖아요.”
그 물음에 데이비가 쓰게 웃었다.
“그래서 준비를 하는 건데 이번엔 조금 달라.”
준비 없이 진입하는 것이기에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에 데이비가 에반젤린의 손을 꼭 잡았다.
“아빠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 네가 정신을 똑바로 다잡지 못하면 아빠가 아무리 널 단단히 잡고있어도 놓치게 될 거야.”
성역은 일반적인 차원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늘빛의 균열 너머를 가리키며 데이비가 단단히 경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이 흔들리면 안 돼. 아빠가 반드시 찾아낼 테지만 시간이 꽤 걸릴 거야. 며칠간 홀로 격류에 떠밀려 다니고 싶진 않겠지?”
그 경고에 에반젤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데이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에린아?!”
하지만 에반젤린은 현재 비화가 울던 모습을 본 것 때문에 정신적으로 굉장히 심란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정신의 틈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했고, 균열에 진입하기가 무섭게 격류를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쓸려가 버렸다.
데이비가 멀리서 다급히 소리치는 게 보였지만 에반젤린은 어어? 하는 수간에 이미 멀리까지 떠밀려 가버렸다.
* * *
신의 성역은 차원의 개념이 아니다.
티오니스나 지구, 그 외에 차원이 일반적으로 차원의 영역이라면 신의 성역은 모든 법칙과 흐름이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절대공간이었다.
신경 쓰겠다 말한 지 몇 초나 되었다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격류 속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이 공간에서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완전한 신뿐이다. 넬타리드나 비화, 프리아 여신 같은 존재.
데이비는 휩쓸리지 않게 버틸 순 있지만, 에반젤린을 곧바로 지켜낼 순 없었다.
이 정도 수준의 격류일 줄 몰랐다. 자신의 억지에 데이비가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이 시기에 어떤 힘의 흐름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렇게 손 쓸 틈도 없이 격류에 떠밀려 내려간 것은 에반젤린의 심리가 불안정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데이비의 힘이 있기에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구조되려면 꽤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에반젤린은 더 이상 그녀를 떠밀지 않는 공간까지 와서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공동묘지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자욱하게 깔린 안개와 스산한 사기가 그녀의 감각을 예리하게 벼렸다.
그녀를 휩쓸던 격류는 사라졌다.
하지만 이곳의 공기는 고대룡인 에반젤린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스산했다.
“대체 여긴 어디야. 이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애초에 신의 성역은 기본적인 법칙으로 설명이 안 되는 특수한 공간이기에 명확한 무언가를 집어내기 어려웠다.
“아무것도 없네…….”
다만 생긴 건 언데드가 튀어나올 것처럼 생긴 묘지임에도 이렇다 할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묘비에는 어떤 글씨도 쓰여있지 않았다.
비석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쓸어내린 에반젤린은 천천히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묘비의 수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그렇게 한참을 들어갔을까.
에반젤린은 점점 싸늘해지는 공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기분 나쁜 곳이네, 여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어 나가던 찰나였다.
갑작스러운 섬뜩한 오한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에반젤린은 허공에서 튀어나온 기이할 정도로 긴 팔이 그녀를 낚아채려던 것을 눈치채고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긴 팔은 다시금 사라졌지만, 그 소름끼치는 새하얀 빛깔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부류의 무언가였다.
“취미 한번 끔찍하네.”
이곳을 만들어 낸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분명 싸이코가 틀림없으리라.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기척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이곳에선 외부의 힘이 차단되는 듯 보였다.
가르강티아 이상으로 완성된 정신계 드래곤인 에반젤린에겐 그리 좋은 흐름이 아니다.
이곳에선 추가적인 힘의 상승을 바라긴 어려울 테니 말이다.
스르르륵…….
한번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일까.
주기적으로 마치 에반젤린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처럼 옅은 소리와 기척이 느껴진다.
모르긴 몰라도 한가지는 분명히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저것들에게 잡히는 순간 좋은 꼴을 못 볼 거라는 것을 말이다.
한 손에 트와일라잇을 들고 당장이라도 반격을 할 듯 그녀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적의 위치가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건 상당한 피로를 불러온다.
스르륵…….
스카가가각!!
고요하다가 갑작스레 느껴지는 기척에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자 서너 개의 검흔이 순식간에 바닥에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미치겠네!”
동시에 에반젤린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황급히 뛰어나갔다.
동시에 그녀가 딛고 있던 대지가 모조리 갈라지며 그 안에서 정체 모를 흰 팔들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와 그녀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손의 해일이었다.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내달려보지만 마치 종말을 맞이한 것처럼 대지가 모조리 갈라지며 그녀를 맹렬하게 추적한다.
“하압!!”
빠르게 도망치면서도 에반젤린은 검기를 쉬지 않고 날렸다.
다만 그녀가 베어버리는 것보다 튀어나오는 팔의 수가 더 많았다.
“아니 성역에 뭐 이딴 공간이 다 있어!”
기겁한 얼굴로 허겁지겁 달려보지만 저건 생명체의 개념이 아니었다.
마치 자연현상이 이러할까.
재해에 가까운 스케일인 만큼 도망치는 것 말고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콰드드득!!
“으와앗!”
그때 에반젤린이 내딛던 대지까지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대지 아래로 거대한 블랙홀 같은 것이 닥치는 대로 빨아먹는 모습이 보인 것이다.
거대한 팔의 해일의 일부는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 뒤 입자처럼 잘게 부서지며 흩어졌다.
조금 전 느낀 끔찍한 감각은 저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저 팔에 잡히는 순간 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실제로 긴 팔은 손에 잡히는 것들을 움켜쥔 채 그대로 블랙홀로 떨어지듯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다급히 뛰던 찰나.
텁!!!
언제 튀어나온 것인지 모를 새하얀 팔 몇 개가 그녀의 다리와 팔을 휘감아 잡고 늘어졌다.
“꺅!”
온몸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류에 그녀가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저항보다 해일의 속도가 더욱 빨랐다.
팔밖에 없는 것은 순식간에 그녀를 휘감았고 이내 완전히 포박하듯 제압했다.
그리고 블랙홀 쪽으로 그녀를 당기기 시작했다.
“이거 놔!! 놓으라고!”
버둥거리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아귀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단순 물리력과는 다른 하나의 법칙이 된 것처럼 빠져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제야 에반젤린은 자신이 큰일 났음을 깨닫고 얼굴이 창백하게 질렷다.
“시…… 싫어……. 싫어…….”
서서히 가까워지는 검은색과 백색이 뒤섞인 기이한 블랙홀을 보며 그녀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싫어…… 싫어!! 살려줘!! 아빠!!!”
비명을 지르며 데이비를 불러보지만, 데이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빠 살려줘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거리가 가까운 거리까지 끌어당겨 졌을 때.
에반젤린은 눈을 꼭 감으며 소리 질렀다.
“언니!!!”
콰지지직!!
세상이 순간적으로 멈춘듯한 착각이 일었다.
동시에.
허공이 찢어지며 험악한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낸 비화가 그녀의 등 뒤에 돋아난 듯한 수많은 빛의 날개를 뻗어내 블랙홀을 휘감는다.
“내 동생한테서 손 떼 이 개자식아.”
비화의 목소리에 에반젤린은 어째서인지 눈물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언니!”
순식간에 흰 팔들을 찢어발겨 버리고는 에반젤린을 끌어안는 비화를 향해 에반젤린이 흐느끼며 소리쳤다.
“흐어어엉! 언니! 저 새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