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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494화 (1,494/1,559)

제 1494화

팔에 잡혔을 때 느낀 것은 지독한 내면의 몰골이었다.

에반젤린은 자신이 자존심 때문에 내지 못했던 모습을 고스란히 직면해야 했다.

간간이 그런 느낌은 있었다. 매번 싸우지만 그럼에도 가장 소중한 존재.

비화가 최근 살살 놀리거나 할 때도 짜증을 부리긴 했지만 남이 그녀의 행동에 시비를 걸면 그 어떤 경우보다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그런 비화와 싸웠다.

시작은 정말 사소하기 그지없었으나 하다 보니 감정이 상해버린 건 아닐까.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울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비화는 태생부터 참 외롭게 살아왔다.

물론 인제 와서는 그런 아픔도 거의 아물었지만 비화의 행동거지를 보면 관심을 받으려는 듯한 행동이 많을 때가 많다.

그걸 몰랐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겠지만 에반젤린은 어렴풋이나마 비화가 자신을 유달리 좋아해서 그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툴고 미숙한 비화가 그녀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방식.

그걸 알면서도 그녀의 마음에 대못을 꽂아버리지 않았던가.

비화가 잘했다곤 할 수 없지만 반대로 자신도 잘한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비화가 이렇게 바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언니.”

“괜찮아?! 다친 곳은! 잠깐만!”

비화는 에반젤린을 부서질 듯 끌어안았다가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품에 가두었다.

동시에 비화의 신력이 에반젤린의 몸을 휘감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에반젤린의 속을 자극하던 미묘한 힘들이 일제히 흩어진다.

“내 동생…… 다행이다.”

“언니이…….”

“…….”

비화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에반젤린의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이제 언니가 구해줄 테니까 아무 걱정 마.”

“나, 나는 언니한테 그런 못된 짓을 했는데.”

속에서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그녀가 흐느꼈다.

그러자 비화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언니가 잘못한 거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내 동생. 넌 내가 반드시 지켜줄게.”

속에서 응어리진 무언가가 울컥 터져 나왔다.

“흐윽…… 흐으윽…… 흐아아앙!!”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기 시작하는 에반젤린은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언니 내가 흐어어엉! 내가 미안한데……흐윽. 내가……내가.”

“괜찮아. 아무 걱정하지 마. 언니 멀쩡하잖아. 안 그래?”

그리 말하지만 비화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아직 그때의 일이 쉬이 떨어져 나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미안해…… 그런 못된 장난을 쳐서. 어떻게든 이겨보려다가…….”

“……괜찮아.”

끅끅거리며 흐느끼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비화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동시에 빛의 날개에 휘감겨진 기이한 블랙홀이 굉음을 내며 비틀어지고 짓이겨지기 시작했다.

비화는 극히 싸늘한 얼굴로 언어를 내뱉었다.

[짓이겨져라]

단순한 한마디가 아닌 글자 하나하나에 방대한 시력이 서린 하나의 물리력이었다.

거대한 질량의 에너지가 블랙홀을 잡아 비틀고 짓이기기 시작하자 블랙홀에선 정체 모를 비명 같은 것이 울려 퍼졌다.

필사적으로 새하얀 팔을 벋어 비화를 낚아채려 하지만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증발하듯 바스러지고 흩어졌다.

필사적으로 블랙홀이 저항해보지만 이내 얼마 가지 않아 순식간에 수축하며 분자 단위까지 일그러졌고 이내 사라져버렸다.

무너진 바닥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붕괴는 일어나지 않았다.

비화는 품에 안은 에반젤린을 살짝 떼어낸 뒤 물었다.

“에린아. 다친 곳은 없는 거 맞지?”

“으, 응.”

“그래. 다행이다……. 이제 돌아가자.”

그렇게 말한 비화는 다시금 허공을 찢어냈고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콰드드드드드득!!!

멈췄던 붕괴가 다시 일어나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에 비치는 모든 대지가 끝없는 나락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후 모습을 드러낸 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거대한 블랙홀이었고, 그 주변에는 정체 모를 고리들이 수천 개는 회전하고 있었다.

“…….”

“저, 저게 뭐야?”

“청소부.”

“청소부?”

“세상의 잔재를 잘게 부순 다음 다시 순환시키는 시스템이야. 본래 휴면상태이지만 오늘 하루 활동하는 날인데…….”

하필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프리아 여신을 제외한 그 어떤 존재도 함부로 제어할 수 없어. 더 늦기 전에 빠져나가야 해.”

“하지만…….”

“걱정 마. 에린이는 내가 꼭 지켜줄 테니.”

다른 말로 하면 비화의 힘으로도 저것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비화가 에반젤린을 데리고 다시 도망치려던 순간이었다.

고요하게 맥동하던 거대블랙홀이 다시금 주변 전체에 맥동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앙!!!

동시에 블랙홀은 에반젤린은 물론, 이 영역에 들어온 비화까지 불순물로 판단하고 그녀들을 끌어당기기 위해 엄청난 흡입력을 일으켰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파들이 뻗어져 나온다. 이에 비화가 빛의 날개를 퍼뜨려 그것들을 잘게 분해해버렸지만 이전과는 달리 꽤 힘에 부친듯한 모습이었다.

“으…… 으악!!”

그중 하나가 비화의 치맛자락을 휘어잡기가 무섭게 그녀의 치맛자락 끝부분 일부가 조각처럼 분해되어 흩어졌다.

“치, 치마가!”

“됐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힘의 일부일 뿐이야!”

단순한 옷이었으면 몰라도 그녀가 입고 있는 이 선녀의 옷같이 생긴 날개옷은 엄연히 그녀의 힘이며 일부였다.

즉, 비화는 에반젤린을 지키려다가 자신의 힘 일부를 분해 당한 것이다.

물론, 일시적인 경우겠지만 다른 말로 하면 저 팔에 모조리 잡히는 순간 비화도 소멸당할 수 있었다.

상위권능을 지닌 여신조차 위험할 정도의 분해력이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언니는 대단한 여신님이잖아……. 어떻게 저딴 게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거야?!”

“내가 아직 어리니까. 여신으로써 미숙하니까.”

비화는 에반젤린을 안은 채 빠르게 날아오르며 대답했다.

“조율의 여신이니 넬타리드의 선배이니 세상에 셋밖에 없는 신이니 뭐니 하지만 난 아직 풋내기라고.”

비록 프리아 여신이외에 제어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블랙홀에 분해 당할 정도로 신의 존재가 녹록할 리가 없다.

실제로 선대 넬타리드조차 이 분해능력에 어느 정도 저항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할까.

비화는 마치 날쌘 독수리처럼 공간을 넘고 날아오르며 새하얀 팔들을 피해내고 부서뜨렸다.

“공간을 다시 열려면 시간이 필요해.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넌 내가 반드시 지켜줄 테니.

비화의 말에 에반젤린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 아빠는?”

그 물음에 비화는 옅게 웃었다.

“아빠는 밖에서 돕고 있어. 설마 네가 이곳까지 떠밀려올 정도로 심리가 불안정한 상태일 거라곤 예상 못 하셨나 봐.”

덕분에 데이비의 표정이 아주 가관이라고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한참을 날았을까.

비화는 아직 부서지지 않은 대지, 검게 죽은 고목의 옹이 속에 내려선 뒤 숨을 짧게 골랐다.

“조금만 쉬자. 저 블랙홀 때문에 실시간으로 힘을 빼앗겨서 너무 지치는 거 같아.”

“괜찮아? 나 때문이지? 이거 때문에.”

에반젤린은 자신의 곁에 쳐진 반투명한 장막을 가리켰다.

“그만해. 이러다가 언니까지 죽어.”

“걱정하지 마. 이런 거 하나 해결 못 할 정도로 나는 무능력하지 않아.”

말은 그리하지만, 비화의 표정도 좋진 않았다.

이윽고 나무 옹이 속에 기대어 앉은 비화는 한 손을 뻗어 옅은 빛무리를 만든 뒤 내부를 환하게 비추었다.

“이곳은 말 그대로 잔재들이 모이는 곳이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분해된 것들을 다시 세상으로 순환시키는 장소이기도 하고.”

“차원의 틈에도 그런 게 있지 않았어?”

“이곳은 그 종점이나 마찬가지야. 네가 본 묘비들은 정리된 업이고.”

사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옅게 헐떡거리며 침묵하던 비화가 고개를 살짝 돌려 바깥을 본다.

“당장은 움직이지 않을 모양이네. 여기서 조금 쉬면서 힘을 회복한 뒤에 나가자.”

“응.”

결국, 기다리는수밖에 없었다.

그때 비화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에린아.”

“응. 언니.”

“화…… 난 거 아니지?”

불안했던 것일까. 비화의 질문에 에반젤린은 피식 웃다가 이내 아하하하! 하면서 웃었다.

“야.야! 웃지 마!”

“아니 아하하하! 이 와중에 그런 게 중요해?”

“그럼 중요하지!”

“화 안 났어. 난 언니를 싫어한 적도 미워한 적도 없고. 세상에서 엄마 아빠만큼 언니를 좋아해.”

그렇게 말하자 비화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그 상자는…….”

“상자?”

“상자…… 나는 보여주기 싫다면서.”

에반젤린이 차갑게 쏘아붙였던 그때의 일이 아직 마음속에서 털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거?”

에반젤린은 공간 주머니에 넣어둔 작은 상자를 꺼냈다.

“앗!”

“이게 뭔지 궁금해?”

그리 말하고는 망설임 없이 상자를 열었다.

다만 속에는 사진 몇 장만이 있었다.

“이건…… 내 사진이잖아?”

“맞아. 언니의 사진. 웃고 떠드는 사진들.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보물 같은 것들.”

그 말에 비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당하고 나서 분해서 장난을 쳤었어. 미안해. 정말 그렇게 슬퍼할 거라곤 생각 못 했어.”

“그럼, 정말로 그런 건 아니라는 거네?”

“내가 언니를 왜 미워해. 그냥 분했던 것뿐이야. 나야말로 미안해. 그날…… 방에서 우는 모습을 보고 바로 사과했었어야 했는데.”

그 말에 비화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시선을 피했다.

“잊어…….”

“싫은데? 헤헤.”

비실비실 웃으며 에반젤린이 그녀의 옆에 기대어 앉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렇게 잘 풀려서. 이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다음엔 그러지 마. 너도 너지만 아빠도 문제야. 이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함부로 성역에 데려오는 게 쉬운 일도 아닌데 널 데려오다니.”

“아빠도 나름대로 걱정하신 거지 뭐.”

두 자매는 그 후로도 자잘한 농담이나 따먹으며 키득거렸다.

그렇게 약 10분이 흘렀을까.

조용히 앉아 있던 비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충분해 가자.”

“그냥 문을 열면 되는 거 아니야?”

“문을 여는 순간 저것이 미친 듯이 방해할 거야. 그러니까 내 말 명심해. 절대 흔들리지 마. 저 블랙홀엔 시선도 주지 말고 내 손 절대 놓지 마.”

그 말에 에반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다, 내 동생. 그럼 나가자.”

이후 그녀가 망설임 없이 방대한 신력을 퍼뜨리기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초거대블랙홀의 고리들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와 에반젤린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대지가 부서지며 두 사람이 쉬던 나무와 지반까지 모조리 분해되어 흩어졌다.

수백 수천 개의 새하얗고 긴 팔이 둘을 잡기 위해 뻗어져 오자 비화는 다시금 대량의 신력을 터뜨리며 그것들을 일소해버렸다.

“달려!”

이윽고 균열을 완전히 열어낸 비화가 소리치자 에반젤린은 뒤도 보지 않은 채 균열 너머로 내달렸다.

균열 너머로 넘어가자마자 도착할 순 없었던 모양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통로를 타고 빠르게 달리던 두 사람을 쫓아 긴 팔들이 균열 너머까지 쫓아왔지만, 비화는 에반젤린의 팔을 꼭 잡은 채 앞장서서 쉬지 않고 달렸다.

부유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모든 힘을 방해받는 상황에서 에반젤린은 문득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듯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돌아보면 안된다. 절대 돌아보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였다.

-아가. 엄마야…….

처음 듣는 아름다운 미성이었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본능적으로 저 목소리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고대룡 이클립스. 고대룡의 장로였으며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던 존재.

그리고.

만날 수 없는 에반젤린의 친모.

순간적으로 발이 멈춰지고 고개가 돌려진다.

“안돼!!”

비화가 깜짝 놀라 그녀에게 소리쳤다.

“어…… 언니, 방금!”

“속지 마! 거대한 에너지 소용돌이일 뿐이야! 네가 뭘 듣고 뭘 봤든 거짓이야!”

비화의 외침에 에반젤린은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보고 싶은 깊은 충동이 있었지만, 비화를 믿고 달렸다.

그리고, 모든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에반젤린은 안도감을 느끼며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이제 다 왔어! 이곳부터는 내 성역이야, 저 틈만 넘어서면 더 이상 네게 어떤 간섭도 못할 거야.”

비화의 외침에 에반젤린은 다시 속도를 올렸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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