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98화
살면서 이런 일을 겪을 일이 있을까.
에반젤린은 검둥이의 죽음 이후로 더욱 다른 일에 몰두했다.
마음이 풀어지면 괜히 또 검둥이가 죽던 순간이 떠올라 슬퍼졌기 때문이었다.
검둥이의 죽음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한가 하면 사실 그건 아니었다.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지만, 녀석의 죽음으로 인해 정말 많이 울면서 그 울컥함을 많이 털어낸 것도 사실이었다.
시간과 감정이란 이토록 얄팍한 것을.
에반젤린은 그게 싫었다.
자신이 조금씩 익숙해지는 이 기묘한 감각이 싫어 더더욱 매진했다.
물론, 준비라고 할 건 없었다.
어차피 전시회에 내놓을 그림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지금 하는 것은 뭐든 집중하기 위해 만든 그림이니까.
하지만 복잡한 심경으로 그리는 그림들은 대부분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쫘아악!! 쫘악!!
칼로 캔버스를 그어 찢어버리고는 에반젤린은 안마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늘어졌다.
“하아…….”
방송이 아닌 상황. 그만큼 집중하기도 좋은데. 어째서인지 만족스러운 그림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벌써 찢어버린 캔버스만 수십 장이었다.
“그만두자…….”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도 도저히 붓을 쥘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그녀는 한쪽 테이블에 놓인 보석을 바라보았다.
블랙 슬라임 검둥이가 죽으면서 남긴 보석이다.
데이비는 더 이상 이것만으론 상황을 파악할 수 없으니 차라리 에반젤린이 지니고 있으라 말했다.
비록 보석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오지만 이건 나름대로 소중한 녀석의 유품이 아니던가.
그래서 블랙 슬라임의 보석을 케이스에 담아 목걸이로 만들어놓은 상황이었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한창 여신으로써의 의무를 다하고 잠시 내려온 비화가 깜짝 놀란 얼굴로 사방에 널린 캔버스들을 바라보았다.
“너…… 무슨 예술 병 걸렸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마음에 안 들어서…….”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찢어진 그림들을 보던 비화가 아쉬운 탄성을 흘렸다.
“아깝다……. 다 예쁜 그림인데.”
“집중이 안 돼…….”
“그럴 땐 일단 붓부터 내려놔. 지금 네게 필요한 건 다른데 집중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비화는 서류 한 장을 건넸다.
“한번 읽어봐. 네 그림이 전시될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회니까.”
물론, 에반젤린의 그림이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과 유명한 화가인 빈덴 카푸하가 개최하는 그림 전시회에 대한 홍보지였다.
“박물관…….”
“박물관에서 지원하는 거야. 뭐. 박물관 부지 내의 건물을 빌려서 전시한다는데. 세계의 유명한 거장들의 그림들이 다 모인데.”
“그래?”
“우리 동생 대단한데? 거장들 사이에서 너도 자리 잡은 거잖아. 이거 보여? 에린이 네 전용 화실도 있어.”
작은 한 룸을 통틀어 에반젤린의 그림만 걸리는 장소도 있다는 것이었다.
“부담스럽지 않을까…… 이건.”
“그만큼 그 사람이 네 그림에 큰 영감을 받은 거지. 그거 알아? 네가 예전에 내놓은 그림 대부분을 저 사람이 낙찰받은 거.”
“그…… 그랬어?”
“그래. 저 사람 완전 네 그림 팬이야. 어쨌든 이제 곧 네 그림 인계받으러 한국으로 올 텐데. 준비는 해놨어?”
“응. 저기. 아빠가 봉인해줬어.”
바퀴가 달린 커다란 상자 두 개를 가리킨다.
“이야……. 제대로 방비해놨네. 탄도미사일에 직격해도 흠집도 안 나겠다.”
“헤헤.”
비화는 씁쓸하게 웃는 동생을 품에 안고 그대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가는 길까지 도와줄게.”
* * *
한국의 공항으로 한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 중의 거장이며 이름만 들어도 모를 이가 없을 정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무수히 만들어낸 존재.
다름 아닌 빈덴 카푸하였다.
물론, 그것이 그의 본명인지 아닌지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반갑습니다. 에반젤린 올 라운 양.”
“아…… 네. 반가워요.”
듣기로는 정말로 무시무시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라고 하던데. 지금 보니 굉장히 너그러워 보이는 할아버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괴리감에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아닙니다. 이토록 대단한 그림을 흔쾌히 기증해주신다는데 어찌 직접 오지 않겠습니까.”
“제 그림을 높게 봐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아닙니다. 당신의 그림은 가치가 있어요. 그건 제가 보장합니다.”
“고작 화면 너머로 본 그림인데요?”
에반젤린의 질문에 그는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그림은 이미 몇 점 소유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서 당신의 그림을 보고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곤 합니다. 가히 악마의 마약과도 같지요.”
그의 말에 에반젤린은 자신의 그림이 그에게 낙찰되었다는 말을 기억해냈다.
“그래도 존대는 조금 부담스럽네요.”
“나는 실력으로 상대를 판단합니다. 당신은 어리지만, 당신의 그림은 존중받을 가치가 넘치도록 충분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 부담스러워졌다.
그때 대여섯 명의 수행원들이 조심스레 다가와 물어온다.
“대화백님. 물건을 옮길까요?”
“조심히 옮기게.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물건이니. 어허! 조심히 옮기라 하지 않았나! 자네 평생 연봉보다 귀한 물건일세!!”
“죄…… 죄송합니다…….”
과한 게 아닌가 싶어도 그들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물건은 확실히 옮기겠습니다.”
“여기 이거 받으세요. 이게 없으면 저거 못 열어요.”
에반젤린은 작은 카드 같은 금속판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아빠가 보호 마법을 걸어둔 거라서요.”
“다행이군요. 마음 같아선 같이 프랑스로 날아가고 싶지만…….”
“죄송해요. 저는 전시회 당일 참석할게요……. 지금 그렇게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라서…….”
“이해합니다. 반려동물의 일은 아쉽게 되었군요.”
생각해보니 이 양반도 에반젤린의 시청자가 아니던가.
묘한 부끄러움에 그녀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식사 대접이라도 해드려야 하는데…….”
“아닙니다. 당신의 그림을 조금이라도 빨리 보고 싶어 이리 급하게 온 제 탓이지요. 그럼, 당일 뵙도록 하겠습니다.”
정중하게 악수를 권하고는 콧수염을 쓸어내리고 돌아서는 그를 보며 에반젤린은 고작 이런 일에 그가 직접 왔어야 했나? 라는 의문이 들었다.
프랑스에서 이곳까지 날아오는 시간이 제법 길다는 것은 알고 있다.
물론, 최근엔 신성 그룹에서 만든 마석 보호 에너지 덕분에 비행기에 순간 가속을 가할 수 있게 되면서 편도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치는 건 매한가지일 터였다.
“아 참. 잠시만요…….”
그때 생각난 에반젤린이 조금 고심하더니 돌아서서 가는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건…… 선물이에요. 큰 그림은 아니지만…….”
에반젤린이 건넨 것은 팔뚝 길이만 한 크기의 작은 그림 한 장이었다.
“오…… 오오오…….”
비화가 빈덴에게 선물로 한 장 건네주면 어떻냐며 추천하기에 챙기긴 했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좋다.
그림의 주제는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다른 세계의 동물들이 풀숲에서 뛰어노는 그림이었지만 그 그림 안에 서린 포근한 감정이 보는 이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아아…… 이토록 선명한 감각이라니……. 그림에 감정을 담는다는 말은 여럿 존재해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철학적이며 어려운 주제이지요.”
“제가 한 건 편법 같은 건데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당신의 감정을 담아냈고, 그걸 표현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것만으로 이미 훌륭한 예술이지요.”
“어렵네요…….”
“근본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림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림으로 예술을 하는 자는 무엇을 초기이자 마지막 목표로 잡는가. 그림쟁이는 그림으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어떤 감정인지, 어떤 생각인지. 다만 자신의 생각만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실패작이지요.”
그는 에반젤린이 알아들을 수 없는 철학을 늘어놓았다.
“다만. 제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것은 이 그림의 순수함입니다.”
“순…… 수함이요?”
“당신의 그림은…… 온전히 이 그림과 그 주제를 담고 있어요. 명예나 금전, 다른 그 어떤 요소도 전혀 묻어나지 않는. 불순물 하나 없는 너무도 말끔한 감정. 그것들이 바로 당신의 최고의 강점이며 당신이 그 누구도 따라 하지 못할 예술을 하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다른 이들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을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
에반젤린은 어떤 고찰에 빠졌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벌써부터 마음이 포근해지는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감사드려요. 그리고 매번 후원도 감사드리고요.”
“허허. 그럼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전시 당일이 기대되는군요. 고여있는 업계 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헤헤…….”
쓰게 웃으며 에반젤린은 그를 배웅했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서 그림만 회수하고 다시 돌아간다니 근성도 대단한 양반이 아닐 수 없다.
“그림 전해줬어?”
“응.”
“제법 크기가 큰데 용케 가져갔네.”
“그러게…… 나는 잘 모르니까.”
그녀가 보낸 그림은 고작 20개 정도였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양이지만 빈덴 카푸하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몰라도 전시회가 끝나면 그녀의 그림 가치는 천정부지로 점프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도. 네 그림을 보고 사도라고 매도하는 놈들도 나올 거야.”
“그럴까?”
“네가 정신계드래곤이라 그 감정을 담아낸다는 걸 물고 늘어지겠지.”
정확히는 에반젤린이 그림을 그리면서 그 그림에 담긴 감정들을 고스란히 묻어내는 것이지만 다른 이들이 보면 그녀가 특수한 힘을 이용해 보는 이를 현혹한다고 느낄 터였다.
“아마 빈덴 카푸하 그 사람처럼 본질을 눈치채는 사람은 적을 테니까.”
비화의 말에 에반젤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자, 일들 하자고.”
프랑스 내에 있는 한 공단지대의 폐공장. 그곳에 네 명의 남성이 모여들었다.
“이번엔 무슨 의뢰래.”
“뭐, 그림 몇 점 훔쳐오라는데. 잘은 모르겠네. 여의찮으면 파손시켜도 된다는 걸 보니. 늘 그렇듯 서로 물고 뜯는 거지. 클라이언트는 또 그놈이다.”
“백버드?”
“실명을 거론하지 마라. 오울이라는 이름이 따로 있다.”
“제 딴에는 숨긴다고 숨긴 모양인데 꼬리가 워낙에 길었어야지, 해킹해달라고 그냥 아우성을 치는데 그냥 둘 수야 있나, 뭐 아무래도 좋아, 그래서? 자세한 브리핑은?”
“오늘 오후에 도착하는 712 비행기에서 그림을 담은 케이스 두 개가 나올 거야. 박물관 측에서 사람을 보내 엄격하게 통제하는 선에서 그림을 옮기겠지만 중간에 틈이 있다.”
그 설명에 네 명의 사내들이 서로를 바라본다.
“한번 도착하면 쉽게 처리할 수 없어, 우리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그림을 탈취. 혹은 파괴하고 도망친다. 그 과정에서 딥웹의 용병들을 조금 동원할 거야, 이해했나?”
“보수는?”
“500만 유로.”
“워후.”
“통도 크군.”
한화로 무려 60억이 넘는 돈을 보수로 내걸었다는 말에 두 명의 팀원들이 기뻐했지만, 나머지 한 명은 그렇지 못했다.
“이봐. 그 정도로 큰 보상이라면…….”
“그래. 엄청나게 일의 난이도가 높다는 소리일 거다.”
“수지타산에 안 맞는군.”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보고 일 했나. 시작하자. 장비 챙기고 플랜 짜둬. 정확히 5분 안에 모든 걸 처리하고 그 장소를 떠야 하니까.”
“롸저.”
네 명의 사내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