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00화
이전까지는 사적으로 진행이 가능했다면 폭발이 일어난 시점에서 더 이상 사적으로 진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뉴스에 뜨고. 경찰이 들이닥치고.
다만 신고를 받고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이 일의 원흉이자 지명수배범인 도둑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대신 터질듯한 근육을 지닌 새하얀 토끼들이 나타나 에반젤린의 그림 케이스를 건네주고 사라지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요란스럽다곤 하지만 폐공장 내부였던 탓인지 주변엔 거의 피해가 퍼지지 않은 신기한 모습이었다.
현장에는 거대한 폭발의 흔적으로 검정이 잔뜩 묻어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무언가가 질질 끌려간 듯한 흔적들은 많이 남아있었다.
조사를 진행했어야 할 경찰의 입장에선 터질듯한 근육을 꿈틀거리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토끼들을 심문하기도 애매했다.
“저…….”
-뀨?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묵직한 저음에 경찰 하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에서 있던 자들은…… 어찌 한 겁니까?”
-뀨.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본래라면 직업정신을 발휘해 저들을 취조하려 했겠지만, 이놈의 토끼들은 뚜둑뚜둑 소리를 내며 몸을 풀고는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버렸다.
가히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으나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 사태의 원흉인 도둑들이 돌아온 것은 고작 하루 뒤였다.
그들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제발 그만…….] 혹은 [이제 더는 못해…….]
라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좋지 않은 일을 당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지만 취조해도 돌아오는 것은 스쿼트가 싫다느니 데드리프트가 끔찍하다느니 하는 말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림을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게 된 빈덴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지원해준 공간에 그동안 준비해둔 그림들을 하나둘씩 조심스레 전시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그림들이 그러하지만 하나같이 고가의 그림들이 많다.
에반젤린의 그림을 제외하고도 이름이 쟁쟁한 이들의 예술작품들이 많았으니까.
다만 빈덴 카푸하는 그중에서도 에반젤린의 그림을 더욱더 비밀리에 준비했다.
“아아…… 대단하구나……. 컨셉이 확고하기 그지없어.”
본래라면 에반젤린의 그림도 다른 화백의 그림처럼 주욱 나열하듯 전시해둘 생각이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파티션을 이용해 구역을 나눈 뒤 컨셉이 동일한 그림끼리 모아서 전시한다.
“전시회가 시작되면 아마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올 게야.”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하고 식은땀이 흐르는 코즈믹 호러풍의 크리처 그림을 보며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어떤 그림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즐거웠고, 어떤 그림은 보고 있으면 두려움을 느끼게 만든다.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림의 원론적인 목표를 이루어낸 궁극의 진화 표상이 아닐까.
그는 며칠 뒤에 있을 전시회가 매우 기대가 되는 입장이었다.
반면 이 그림을 몰래 탈취해 파손하려 했던 존재에 대한 분노도 일었다.
그 도둑들은 의뢰를 받은 게 틀림없다.
에반젤린의 그림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그에게도 원한이 있는 자.
“백버드…… 그놈이로구나…….”
한때 그를 따르던 제자 중 하나였으나 이 업계의 고질적인 뻔뻔함에 물들어 현실에 안주하고 사기행각을 벌이기 시작한 못난 놈이다.
자신들끼리 서로 함함하며 서로의 작품을 띄워주고 이 업계를 그들만의 리그라는 끔찍한 굴레로 만드는데 일조한 못난 놈이기도 했다.
당연히 빈덴과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지만, 그는 유별날 정도로 스승인 빈덴에게 반감을 크게 가지고 있는 이이기도 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지…….”
도둑들의 증언만으로는 증거 없이 의뢰를 지시한 백버드 놈을 잡을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놈을 잡는답시고 난동을 부려봐야 곧 있을 전시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이에 그는 분하더라도 그놈을 잡는 건 뒤로 미뤄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장 이런 일이 터지며 뉴스에도 나갈 정도였으니 당분간은 조용할 터였다.
그는 스마트폰을 들어 이번 전시회에 대한 여론들을 확인했다.
당연 현시점에서 그림업계를 쥐고 있는 화백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대화백들의 그림을 모아 전시회를 연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이도 있었지만, 일부는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나 다름없는 에반젤린의 그림이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20점이나 자리를 차지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불만을 드러냈다.
-저런 기법은 눈으로 보기에만 화려할 뿐 흔해 빠진 예술이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은 신성. 재능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세계 정상급을 제치고 나설 정도로 대단하진 않다고 본다.
-예술이 뭔지 모른다. 자고로 예술이란 단순히 눈에 보기에 대단해 보이는듯한 그림만을 그리는 게 아니다.
“끌끌 네놈들이 말하는 예술은 정치겠지. 점하나만 찍어도 의미를 부여해주는 미친놈들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모래 위의 성.”
에반젤린의 그림을 직접 보지 않았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일 테지.
단순히 영상이나 사진 속에 남아있는 에반젤린의 그림은 감정의 전달이 거의 없으니까.
그들의 가장 큰 원동력은 지독하고 추악한 질투심이리라.
문득 빈덴은 웃음이 나왔다. 저 제 잘난 맛에 사는 정치꾼 놈들이 그림의 원론적인 목적을 담고 있는 에반젤린의 그림을 보았을 때.
그때도 혹평이나 질투를 남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말이다.
“나일세.”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말했다.
“이름 몇몇을 알려줄 터이니 그들에게 전시회 초대장을 보내주게나.”
대상은 다름 아닌 에반젤린이 자리를 꿰찼다며 혹평을 아끼지 않고 쏟아내던 이들이었다.
* * *
박물관의 한쪽 부지에서 진행된 세계 화백들의 그림을 모아놓은 전시회가 열렸다.
동원된 인원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빈덴 카푸하는 입소문을 탄 사람들이 서서히 하나둘씩 모여들 거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첫날의 동원 수가 어떻건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대단한 작품은 숨기려고 해도 드러나는 법일 테니.
“허허. 제 언니는 세계적인 가수였었고, 동생은 거장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그림의 천재라……. 티오니스 성자도 참 자식 복이 대단한 거 같군.”
“선생님?”
빈덴의 젊은 제자는 엄하기 그지없는 제 스승이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보며 놀란 얼굴을 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있다마다, 말리오.”
그동안 열심히 준비하셨던 탓일까. 제 스승의 보기 드문 너그러운 모습에 말리오는 조금 더 용기를 내 스승에게 물었다.
“무엇이 그리 좋으십니까?”
“말리오. 취미로 소설을 읽는다지?”
“예? 아…… 예.”
“하면 네가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을 남에게 추천해줄 때는 어떠하더냐.”
“글쎄요. 당연히 기분이 좋지요.”
“그런 것이다.”
“예?”
“현실에 안주하고 자신들만의 예술이 진짜 예술이라 생각하는 놈들, 그 틀에 꽉 막힌 꼰대 놈들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지 않으냐. 끌끌.”
그는 한쪽에 놓인 기괴한 그림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캔버스 위에 물감을 기이하게 흩뿌려놓고 희대의 예술이라 말하는 것들에게 그림, 예술이라는 것의 원론적인 질문을 던져본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부터 궁금해졌다.
자신의 그림이 아닌데도 이렇게 뿌듯한 걸 보면 이게 그 말로만 듣던 팬심이 아닐까.
알게 모르게 세계적인 화백이자 대 거장이라 불리는 빈덴은 에반젤린의 그림에 완전히 팬이 되어있었다.
* * *
전시회가 열리고 뉴스에도 뜬 탓일까. 초기 예상보다는 많은 이들이 전시회의 그림을 보러 와주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일반인의 입장에서 볼 때 와! 잘 그렸다! 혹은 신기한 그림이라는 느낌을 부는 이전과 달리 에반젤린의 그림이 있는 전시룸에 들어선 이들은 그곳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홀린 것처럼 그림을 직접 보고 있을 뿐이었다.
빈덴도 그랬다 처음 에반젤린의 그림을 영상으로 직접 봤을 때보다 그 원본을 직접 보았을 때 느낀 놀라움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으니 말이다.
다른 화백들의 그림을 보며 적당히 감탄만 하던 사람들이 에반젤린의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참 우스우면서도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물론 그것은 전시회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자네가 말하던 게 이런 뜻이었나…….”
빈덴과 비슷한 급의 거장이라 불리는 한 노령의 사내가 벽에 전시된 에반젤린의 그림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전시회의 한켠을 장식한 화백이자 친구는 빈덴의 초대를 받아 직접 전시회를 구경하러 왔다가 놀란 기색을 내보였다.
“가히 악마적인 그림이로구나…….”
“내 말하지 않았나. 절대 부족하지 않을 거라고.”
“허허…… 내 오랜 시간 이 업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지만 이런 건 처음일세. 마치…….”
“붓을 쥐고 싶어 미치겠지?”
“잘 아는군. 그뿐만 아니라 저쪽에 걸린 내 그림들을 모조리 내려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드는구만.”
에반젤린의 그림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정도로 매력이 넘쳤다.
“내가 빠져든 게 그런 것일세.”
“허허…… 이런 걸 그 협회의 모지리 꼰대 놈들이 봤으면 좋으련만…….”
빈덴의 옛 제자. 백버드가 몸담은 협회 쪽의 꼰대들이 이것을 보러오겠는가.
그의 질문에 빈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나타날걸세.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았으니까. 와서 기자들을 대동해놓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혹평을 가할 생각들이겠지.”
“괜찮겠는가. 그놈들은 별의별 이유를 다 가져다 붙이는 놈들이네. 마음에 안 드는 신성들을 그렇게 몇 차례 밟았을 텐데?”
“장담하지.”
빈덴은 곧 전시회장으로 기자들을 일부 대동한 채 들어오는 놈들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쉽게 입을 열지 못할 게야.”
인터넷에서야 함부로 말했을 테지. 에반젤린의 그림을 직접 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림을 직접 보고 난 이후 그들의 생각이 같을지는 그도 궁금해지던 참이었다.
거만하게 들어서는 자칭 예술가라 말하는 정치꾼 놈들은 탐탁잖은 얼굴로 걸어 나간다.
빈덴은 저 멀리 몰려다니는 일행 중 에반젤린의 그림을 훔치고 파손하려 했던 뻔뻔한 ‘전’ 제자 백버드 놈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뻔뻔하기는.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린다.
이윽고 그들은 에반젤린의 전시된 그림을 보기 전 빈덴을 찾아와 이죽거렸다.
“이어, 빈덴 카푸하, 거장님이 아닙니까.”
“저희가 추천한 화백들을 모두 내치시더니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 화가를 위해 전시회에 자리를 내셨더군요.”
“허어. 자네들 눈에는 그리 보였는가.”
“예. 뭐, 저희를 보고 예술가가 아니라느니 정치인들이라느니 하시더니 이래서야 원. 거장께서도 다를 바가 없군요.”
이죽거리는 그들의 말에 평소라면 차갑게 일축했을 테지만 지금 그는 여유로운 미소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사람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그가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 느낀다면 어디 한번 가서 보고 오게나. 그 후에 이야기를 듣도록 하지.”
* * *
“영감탱이가 노망이 난 게 틀림없습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웃음은 조금 걸리더군요. 공적인 자리에서 함부로 웃지 않는 작자인데 말입니다.”
“말년에 노망이 들어서 그런 게지요. 최근 인터넷 방송 같은 거나 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속으로 빈덴 카푸하를 비웃으며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대단한 이름을 남긴 거장들답게 그림 자체는 우수한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곳에 전시를 한 화가 중 상당수가 협회와 사이가 안 좋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 좋은 호평을 남겨줄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이번의 목표는 이들이 아니었다.
사이는 안 좋아도 이곳에 그림을 전시한 이들은 모두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다.
어느 정도는 참작해줄 수 있지만 단 한 명은 그렇지않았다.
완전히 굴러들어온 돌인 에반젤린 올 라운.
티오니스 성자의 어린 딸.
아직 어린 애송이가 이런 대단한 자리에 20점이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게 그들은 참을 수없이 모욕적으로 다가왔다.
“그래. 뭐 얼마나 대단한 그림인지 한번 봅시다.”
그리 말하며 에반젤린의 그림이 있는 전시회룸으로 들어선다.
누구는 기법에 관해서, 누군 채색에 관해서. 누군 드로잉 자체만으로. 누군가는 감성적인 예술 측면에서 쓰디쓴 혹평을 어떻게 남길까 생각하며 그림을 시야에 담았다.
그리고.
그들 전원 모두가 에반젤린의 그림을 보고 머릿속의 생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무슨…….”
“허어…….”
“세상에…….”
에반젤린의 전시실 가장 처음 전시된 그림은 정말로 행복해 보이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오는 따스한 그림이었다.
주제 자체는 흔했다. 채색방법이 독특하긴 하지만 그것까지도 괜찮았다.
하지만.
완성된 그림을 눈에 담았을 때. 그들은 그림에서 전달되어오는 너무도 행복하고 따스한 감정이 전달되어오자 눈을 크게 뜬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당연히 그들을 따라온 기자들 또한 같은 생각이었는지 멍하니 중얼거린다.
“와…… 대단하다…….”
예술에 대해 잘 모르는 기자들조차 그저 대단하다고 표현할 정도의 평가.
협회의 꼰대들은 멍하니 그것을 보더니 마치 홀린 것처럼 다음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
에반젤린의 그림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거나 고저가 다른 감정들을 전달해왔다.
어떤 것은 슬픔을. 어떤 것은 그리움을, 어떤 것은 행복함을. 어떤 것은 기쁨이나 우스움을.
그들은 마치 그림을 처음 보았던 아이처럼 홀린 얼굴로 에반젤린의 그림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코즈믹 호러풍 크리처가 그려진 곳에서 저도 모르게 두려움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고.
한 소녀가 검을 들고 괴물에게서 승리를 거머쥔 그림에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환희에 찬 표정을 짓기도 했다.
그림의 상당수는 에반젤린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았다.
그녀가 그 당시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온 탓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그림에 이입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그림 하나하나 뜯어보며 가차 없이 혹평을 남길 생각이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넋이 나간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감상 후에 다음 그림을 감상하는 식으로 넘어갔다.
이미 그림을 구경하러 왔다가 에반젤린의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은 일반 관람객들이 SNS를 통해 극찬을 남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그저 멍하니 바라본다.
그리고.
마지막 그림인 블랙 슬라임 검둥이를 품에 안은 채 잠들어있는 비화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는 떠나간 블랙 슬라임 검둥이에 대한 지독하고 아련한 슬픔이 고스란히 전달된 탓이다.
“흐…… 흐흡…….”
훌쩍거리던 기자가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애써 울음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하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지독한 여운을 남기는 그림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만을 할 뿐이었다.
이렇게 현실에 안주하기 전 자신들이 그림을 처음 시작했을 때의 열정을 강제로 일깨워주는 듯한 그림.
빈덴과 그의 친구가 말했던 것처럼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붓을 잡고 싶어 미치게 만드는듯한 충동까지.
그들은 마지막 그림을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유일하게 이 와중에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건 빈덴과 가장 큰 충돌을 일으켰던 ‘전’ 제자인 백버드 혼자뿐이었다.
백버드는 애써 자신의 목적을 더 올리며 다른 이들에게 눈치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모여서 발걸음을 뗄 줄 모르는 에반젤린의 첫 그림 쪽으로 다시 향했다.
“이…… 이보시게들!”
백버드의 외침에도 그들은 멍하니 에반젤린의 그림들을 다시 관람하기 시작했다.
웃긴 점은 에반젤린에 대한 질투심으로 눈이 먼 백버드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런 행동을 제지하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홀린 것처럼 수차례 그림을 보던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말이오.”
그는 평소 그가 그림을 그리면서 보이던 손버릇을 마치 마약중독자처럼 보이며 돌아섰다.
“빨리 돌아가서 붓을 쥐고 싶습니다.”
정치만 일삼던 이들을 단번에 바꿀 정도로 그림의 여파는 거대했다.
“이…… 이게 무슨…….”
그제야 기자 중 하나가 화들짝 놀라며 그들에게 말했다.
“코멘트를 남기실 게 있으십니까?”
“이 그림들은…….”
본래라면 가차 없이 혹평을 남기려 했다.
하지만.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오. 당장이라도 예술에 심취하고 싶게 만드는 가히 악마와 같은 재능…… 감히 말하건대. 이 전시회에서 가장 대단한 예술일 것이오.”
아무도 혹평 따위를 남기지 못했다.
그들의 코멘트와 SNS에 퍼져나가는 무수한 소문들은 그림에 별로 관심 없던 이들마저 시선을 보내 궁금증이 들게 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정도는 빈덴 카푸하가 예상한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