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01화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발을 쉽게 뗄 수 없는 그림의 앞에서 넋을 놓고 보거나. 저도 모르게 웃고 있거나. 항거할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거나. 슬픔이나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당연히 그림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이 보러온 게 시작이었다.
하지만 첫날 전시회가 성황리에 끝나고 인터넷에 빠르게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모든 게 변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는 데 인터넷이 있는 현시대라면 천 리가 아니라 지구를 아주 수십 바퀴는 돌아버릴 만큼 소문은 빨리 퍼지기 마련이었다.
요란스러울 정도로 극찬을 남기며 평가하는 관람객들의 말에 호기심이 든 사람들이 하나둘 구경하러 왔다가 똑같이 극찬을 남기고 그것을 본 이들이 또 찾아간다.
놀라울 정도의 반복이 연달아 일어나더니 어느덧 뉴스에까지 퍼져나갈 정도에 알만한 사람들은 다 소문을 듣고 한 번씩은 찾아가 보는 일까지 벌어졌다.
마침 프랑스로 여행을 왔던 사람들은 물론, 근처 국가에서도 워낙에 소문이 자자한 전시회를 구경해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전시회가 무슨 시장바닥마냥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지는 광경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상황까지 되어버렸다.
당연히 이렇게 되면 더욱 유명해지는 건 에반젤린이었다.
다른 화백들의 그림도 굉장한 편이었지만 문제는 에반젤린의 그림을 보러 갔던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그녀의 그림이 대단하다는 평을 남겼다는 게 문제였다.
-바닷속에 인어 그림 봤음? 차가운데 따스하고, 몽환적인 느낌 때문에 진짜 한 30분은 발걸음도 못 뗐음.
-난 코즈믹호러 엄청 좋아하는데 그 그림은 보고 있으니 겁나서 오래 못 봤음. 반대로 좀 지루하다 느낀 평범한 주제에서 한동안 계속 바라본 거 같음.
-그거 앎? 사람이 너무 몰려들어서 못 들어가는 사람까지 생기고 하루에 파는 입장권 수를 늘렸는데도 죄다 싹 다 매진돼서 암표까지 돌아다님.
-암표 가격 어메이징 ㅋㅋㅋ
-아니 에반젤린 방송 보면서 가끔 본적은 있는데 실제로 보니까 진짜 와…… 눈물 날 거 같다.
-대단한 집안이긴 한 듯……. 생각해보니까 티오니스 성자 장녀가 빌보드 싹 쓸었던 거 생각하면 그 집안은 뭘 해도 월드클래스네.
-그러네?ㅋㅋㅋㅋㅋㅋ 초단이ㅋㅋㅋㅋ
-아니 그림에 마법 부려놓은 거 아님? 단순히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 걸 넘어 무슨 환각을 보는 기분임.
-바닷속 그림. 진짜 내가 바닷속에 들어온 기분까지 들었음.
-듣기로는 마법이 아니라 감정을 담아놓은 거라고 하더라. 이걸 그림이라고 해야 할지는 사실 학계에서도 말이 많음.
-무슨 상관임. 보고 진짜 감명받았으면 그걸로 된 거지. 밥그릇 싸움은 내 알 바가 아님.
-애초에 그림이지 그럼 그걸 뭐라 부름.
-사술을 부린 건 예술이 아니다 이거지.
-ㅋㅋㅋ 무슨 헛소리야. 그림이라는 게 원래 무언가 주제를 담아서 표현한 건데. 표현방법이 빡세다고 쳐내는 거 개웃기네 ㅋㅋㅋ
-그러게 ㅋㅋ 자기들은 못 하니까 바로 대못질하려는 거 보솤ㅋㅋ
다수의 커뮤니티에서 굉장히 시끌시끌한 주제인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그거 앎? 내가 관계자라 이름까지는 밝힐 수 없는데 이쪽 업계가 사실 굉장히 고이고 썩은 곳임. 처음에 에반젤린 올 라운이 그린 그림이 거기 올라간다고 게 거품 물던 인간들 한번 찾아가더니 싹 다 입 다물어 버림ㅋㅋㅋ
-그만큼 대단하셨다는 거지~
-솔직히 예술이냐 아니냐 평가하기 전에 진짜 대단하긴 했음.
-생각해보면 저건 위작도 절대 불가능한 거 아님?
-그러네? 그럼 에반젤린이 유명해지면 저거 그림 원본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겠구먼.
말 그대로였다.
에반젤린이 주변의 종용을 받아 몇 점 내놓은 그림들은 경매를 통해 원하는 사람이 얻어가곤 했다.
하지만 이번 전시회 이후 에반젤린의 그림의 가치가 경악스러울 정도의 우상향을 그리며 수십 배 가격이 점프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물론, 전시회에 잠시 들린 에반젤린은 이 상황에 대해 몰랐다.
애초에 돈을 벌고자 시작한 그림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전시회를 후원하던 쪽에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답니다.”
“왜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렸으니까요. 많이 와준 건 좋지만 반대로 너무 몰려서 소란스러워졌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빈덴 카푸하는 에반젤린에게 고급 과자와 커피를 내어주며 허허 웃었다.
“저기…… 빈덴 카푸하 님.”
“편하게 불러주세요. 당신은 어엿한 한 명의 거장입니다. 나이를 떠나 존중받을 가치는 충분히 있지요.”
“그럼 빈덴 할아버지.”
“하하하하! 어감이 괜찮군요. 말씀하세요.”
“할아버지가 보기에 제 그림은 사도인가요?”
이번 일이 있기 전부터 그녀도 생각을 하곤 하게 만든 주제였다.
“흐음. 사도인가 아닌가는 아마 쉽게 결정이 나지 않을 겁니다.”
“흐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요. 그 누구도 당신의 그림이 대단하지 않다고 말할 순 없을 겁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내건 에반젤린의 그림은 하나의 거대한 예술적 경로를 파헤쳐버렸다.
“적어도 나는 그 그림이 사도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에반젤린 양.”
“어째서죠?”
“처음에도 말했습니다. 그림이란 본디 무엇인가. 그림으로 예술을 표하는 자들은 대체 그 그림 안에서 무엇을 담고 싶어 했는가.”
그의 생각은 그러했다.
방식이 어떻건 사람을 현혹하는 게 아닌 감정까지 그림의 안료로써 사용한 것일 뿐이다.
그것으로 보는 이들에게 더 풍부한 감각을 심어주는 것은 비록 누군가가 따라 하지 못할지라도 예술이다.
그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축하합니다. 그림이 전시되면서 에반젤린 양은 엄청난 명성을 거머쥐게 되었네요.”
안 그래도 유명한 게 에반젤린이다.
그런데 그림까지 더해지니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경매에 올라가 있던 에반젤린 양의 그림이 수십 배의 가격에 경매가 진행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 보통사람이라면 평생을 벌어도 꿈도 못 꿀 가격으로 말이죠.”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닌 거 같네요.”
에반젤린이 시선을 살짝 내리깔며 답했다.
“예? 어째서입니까?”
“전 돈 때문에 그림을 그린 게 아니에요. 그저 그림은 그림으로만 봐줬으면 하는데. 그게 돈과 연관되니까 마치 자식을 돈 받고 파는 못된 부모가 된 기분이에요.”
그 말에 빈덴은 눈을 살짝 크게 뜨더니 멍한 얼굴로 말했다.
“아하하하하!!! 이거 한 방 먹었네요. 아직 어린데 그렇게까지 생각이 깊을 줄이야.”
그는 무엇이 그리 만족스러운지 한참 동안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진지하게 제안해왔다.
“에반젤린 올 라운 양. 진지하게 드리는 제안입니다.”
“네?”
“저희 대학에 특례 입학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대학이요?”
“네. 비록 최고라곤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쪽 그림 분야에서만큼은 세계 최정상급이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더 성장할 수 있어요.”
그는 에반젤린의 가능성을 크게 평가했다.
물론, 특례입학의 경우가 황당할 정도로 뜬금없지만, 그는 그렇게 만들 능력이 있었고 에반젤린은 그만한 가치가 존재하는 천재였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죄송하지만 거절할게요.”
“이유를 들어봐도 괜찮을까요?”
그 물음에 에반젤린은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아빠가 매번 하는 수업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려요. 전 초단이 언니와 달리 학교에서 뭘 배우면 지쳐서 뻗어버릴 게 틀림없어요. 으으 싫어요. 전 더 놀고 싶단 말이에요.”
뜬금없는 대답이었다.
명예, 더 많은 돈 욕심. 그 외에도 향상심.
그런 게 아니었다.
그저 저 나잇대의 아이가 놀고 싶어 하는 그 순수한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래. 그렇기에 그녀의 그림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다.
그녀의 그림에선 그토록 달콤한 감정이 묻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이 짧았군. 그녀에게 필요한 건 교육이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노력 따위가 아니다.’
그는 깔끔하게 그녀를 특례 입학시키려던 계획을 백지화시켰다.
그러던 중 에반젤린이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림을 훔치려 했던 그 사람은요?”
“으음…… 증거가 없어서 당장 어떻게 하기는 힘들 듯하지만, 조만간 그 응보를 받을 겁니다.”
백버드.
그의 제자였으나 이 업계의 어두운 부분을 빨아들이고 완전히 추락해버린 못난 놈.
그놈이 에반젤린의 그림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으면 좋으련만.
넋이 나간 얼굴로 돌아가던 그의 동료들과 달리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돌아가는 그를 생각하면 그리 쉽게 바뀌진 않을 듯싶었다.
“대단한 일을 한 겁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더 나아가기를 포기했으며 그 자리에 머물러 새싹을 짓밟고 자기들끼리의 리그를 만들어내던 이들을 초심으로 되돌렸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겠지요. 그놈은…… 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추락했던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비록 의미는 없겠지만…… 한때 제자였던 놈을 대신하여…….”
“괜찮아요. 신경을 안 쓰니까요.”
“그건…… 그렇군요. 의미 없는 걱정이었군요.”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에반젤린이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저기…… 빈덴 할아버지.”
“네. 에반젤린 양.”
“화실을 조금……빌려도 될까요?”
고집이 센 화백들은 자신들의 화실을 누가 쓴다고 하면 거품을 물며 화를 내는 이들이 많다.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빈덴 카푸하 본인도 제자들이 그의 화실에서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는걸 싫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흔쾌히 승낙했다.
“얼마든지 써도 됩니다. 저도 당신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싶네요.”
“헤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그놈…… 에게 말입니까?”
“네.”
에반젤린은 통통 튀듯 일어나 뒷짐을 쥐고 빙그르르 돌았다.
“아빠라면 절대 용서 안 하겠지만 말이에요. 사실 부끄러워서 어디 가서 말은 못 하는데…… 사실 제 어릴 적 꿈이 용사였거든요.”
해맑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빈덴은 오래 살았음에도 그녀의 순수함에 큰 깨달음을 얻는 그였다.
* * *
에반젤린은 조심스레 준비된 새하얀 캔버스 위에 붓을 올렸다.
이렇다 할 전문적인 자세도, 파지법도 없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그려나가는 그 모습은 사실 그가 봐도 조금 신기했다.
낙서에 가까운 채색이 하나둘 합쳐지며 하나의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점하나 찍고, 원하나 그리고 예술이라 우기는 것들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느낌.
빈덴은 문득 자신이 처음 그림을 그리는 아버지를 보며 느낀 어릴 적의 동심이 다시 살아난다는 착각을 받았다.
아…… 그렇구나. 그녀는 그림뿐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행동 자체에도 그런 감정이 묻어나는구나.
그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또 그녀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직접 보고 있으니 잊고 있던 것들이 계속해서 그를 뭉클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집중하며 그리는 에반젤린의 그림의 주제는 다름 아닌 한 아이의 그림이었다.
그 작디작은 소녀는 사람보다 수십 배는 큰 거대한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가는 한 소년의 모습을 시야에 담고 있었다.
“이건…….”
“아빠가 그림을 그리는걸 보고 있는 아이의 그림이에요. 잘 그리냐 아니냐를 따지면 글쎄요. 잘 모르겠지만. 아이는 그저 멍하니 그걸 봤다고 해요.”
에반젤린이 화룡점정으로 마지막 채색을 마치며 말했다.
“이건…… 에반젤린 올 라운 양. 본인의 이야기입니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새로이 그려낸 그림에는 유달리 짙은 감정이 묻어있었다.
그것은.
예쁜 그림을 보며 아이가 느낀 어떤 감정이 묻어나고 있었다.
“어? 하…… 할아버지 괜찮아요?!”
놀란 에반젤린이 허둥지둥하자 그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아, 에반젤린 양의 그림 덕분에. 오래전, 제가 그림을 처음 그리고 싶다고 느꼈던 때가 떠오르는군요…… 추태를 보였군요.”
“아. 아녜요…….”
그는 에반젤린의 그림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그림을 그에게 주실 생각입니까?”
“네.”
“솔직히 아쉽네요. 이 그림은 전시회에 걸린 것들과는 또 다른 감정을 묻어나게 합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봐온 그 어떤 그림보다 크게 와닿았어요. 경매에 내놓는다면. 엄청난 가치를 얻을 겁니다. 그래도 포기하겠습니까?”
“네.”
헤헤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그림이야 또 그리면 되는 거잖아요. 애초에 그 사람을 위해서 그려준 거잖아요.”
완전히 논파 당했다.
물론, 논리적이라곤 할 수 없지만, 그는 그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그림을 훔치고 파손하려 했던 그 못된 놈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준다니.
정말 이 아이의 마음씨는 너무 따뜻하구나……. 그리 생각하는 그였다.
* * *
함께 뜻을 모았던 작자들이 죄다 돌아섰다.
아니 배신이라고 하기엔 모호했다. 다들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의 화실에 처박혀버렸으니까.
백버드는 독한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는걸 왜 모르나. 자신의 자리를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결국 무너지는 것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세상은 냉정하다.
백버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에반젤린이라는 소녀는 정말로 위협적이기 그지없었다.
그때 절대로 걸려온 적도 없던 전 스승의 전화가 걸려온다.
“무슨 일입니까.”
-문이나 열 거라. 네게 건네줄 게 있다.
“당신과 내가 그렇게 무언가를 주고받을 사이였습니까?”
-내가 아니라 에반젤린 올 라운 양이 네게 주고 싶어 한 거다.
하. 노친네 노망이 들었는지 젖먹이처럼 어린 소녀의 시종이 다되었군.
속으로 비웃음을 던지며 문을 열자 깔끔한 정장에 페도라를 쓴 노신사가 담담한 얼굴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쯧쯧. 꼴이 말이 아니구나.”
“신경 끄시지요. 당신보다 관리는 더 잘 받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몸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그런 놈이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겠구나. 비키거라. 잠시 들어갈 터이니.”
“뻔뻔하기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그는 모자조차 벗지 않았다.
오래 있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시오.”
“받아라.”
그는 제 상체만 한 커다란 캔버스의 케이스를 건네주었다.
“이건?”
“그 아이가 네게 주고 싶어 했던 거다. 널 위해서 내 화실에서 그려낸 것이지.”
저 깐깐한 노친네가 화실을 다른 이에게 사용하게 했다고?
그것도 놀라운 일인데 그걸 본인이 직접 가져다 주러 왔다는 게 더 황당했다.
“그 아이…… 아아. 그 사기꾼 말입니까?”
“사기꾼이라……. 허허 네 눈에는 아직도 그리 보이느냐. 내 분명 말하지 않았느냐. 사기꾼이 아니라. 지금 네게 가장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는 아이라고.”
“관심 없으니 가져가시오. 나는 받을 생각이 없소.”
“네가 이번 일을 저지른 건 그 아이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너와 싸우기보다는 이걸 건네주길 바라더구나.”
“…….”
“나 또한 청렴하다고 말할 수 없다.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이번일 공론화시켜 너를 매장하는 수밖에.”
그 말에 백버드의 눈에 불이 튀었다.
“이 빌어먹을 영감이…….”
“해보겠느냐? 기회를 놓칠 정도로 어리석은 녀석이 아니거늘…….”
그는 씁쓸하게 말하고는 다시금 캔버스를 건넸다.
“선택은 네 몫이다. 다만 네가 이걸 거절하는 순간 나는 네게 남아있던 일말의 기대조차 버릴 것이다.”
즉. 그를 매장하기 위해 그동안 움직이지 않던 발을 떼겠다는 경고였다.
이에 백버드는 표정을 구기며 거칠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됐소?”
“그래. 그걸 받았으면 됐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적어도 이번 일로 더 이상 이쪽에서 왈가왈부하진 않을 거다.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멍청한 노인네 같으니.”
그의 축객령에 빈덴 카푸하는 돌아섰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난 듯 말했다.
“백버드.”
“또 뭐요.”
“넌 그림을 무엇 때문에 시작했느냐.”
“흥. 그딴 건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인가.”
“그래.”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갔다.
그가 간 이후 백버드는 그림을 거칠게 던져버리려다 멈췄다.
호기심은 있었다.
그 어린 소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걸 건넸는지는 모를 일이다.
자존심 때문에 처박아놓고 꺼내지도 않으려던 그는 거칠게 독한 술을 털어놓고는 캔버스를 감싼 천을 거칠게 벗겨냈다.
그러자 아름다운 채색이 된 그림 한 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말없이 그것을 거치대에 올렸고 흔들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차갑게 그림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그림은 마녀의 마법처럼 기이하고 사이하다.
사람의 감정을 들었다 놨다 하거나 조종하는듯한 불쾌함까지 든다.
무슨 그림이건 또 자신의 속내를 흔들려는 것이겠지. 다른 이들은 몰라도 나는 아니다.
백버드는 그리 생각하며 그림을 온전히 시야에 담았다.
그리고. 그 그림이 무엇인지 깨달은 그 순간.
그는 생각하던 것도 모조리 잊었고, 분노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뜬 채 멍하니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휘청 그림을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