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02화
경찰서에 한 사내가 들어섰다.
그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민원 접수를 받고 있던 사내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업무는 저쪽에…….”
“테러 혐의 자수를 하러 왔소.”
“예?”
귀찮다는 듯 대답하려던 경찰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이시죠? 장난이라면…….”
“나는 이런 사람이오.”
그는 이내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고 동시에 경찰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장난을 치기엔 너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자…… 잠깐만 기다리세요. 아니 그보다 자수…… 입니까?”
“그렇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업을 청산하기 전엔 붓을 쥘 수 없을 거 같소.”
백버드. 그는 현재 경찰서에 자수를 하러 나타났다.
당연 갑작스러운 소식은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인적이 드문 폐공장지에서 일어난 폭발이 오리무중인 상태 속에서 이 일이 알려지니 순식간에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연일 뉴스에 떠들썩하게 퍼져나가면서 관련된 일에 대한 소문은 더욱 무성하게 퍼져나갔다.
질투로 인해 에반젤린이 전시회를 열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고 자백한 그는 자신의 죄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청산하겠다 말했고, 경찰의 조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조사가 진행되는 도중 빈덴 카푸하는 자신의 전 제자를 다시금 만났다.
양손에 수갑을 찬 채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설마 했지만 네가 스스로 자수할 줄은 몰랐구나. 무슨 바람이라도 분 것이냐?”
그 질문에 그는 곁에 놓아둔 작은 그림 하나를 꺼냈다.
“그건?”
“모든 것을 털어놓는 대가로 요청한 것이오. 이 그림만큼은 곁에 두게 해달라고.”
본래라면 불가능했을 테지만 어떤 방법을 썼는지 그는 허락을 받아 냈다.
“너는 그 그림을 보며 무엇을 느꼈느냐.”
그 질문에 백버드는 눈을 감은채 조용히 대답했다.
“영감, 내 인생을 보았소.”
스승이라 부르진 않았다.
“인생이라…….”
그가 말했다.
“그 아이. 에반젤린 올 라운이라 했소?”
“그래.”
“아직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어리고 순수한 아이. 그렇기에 이런걸 보여 줄 수 있었겠지. 왜 그리 보시오. 놀라기라도 했소?”
“부정하진 않겠다.”
“끌끌. 언제부터였을지…….”
잠시 침묵한 그가 그림을 쓸어내렸다.
“다른 건 모르오. 하지만 저 그림을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것은…….”
“지금의 너에 대한 후회더냐?”
“…….”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빈덴이 제자로서 백버드를 받아들였을 때. 그는 지금 같지 않았다.
그림에 대한 열정이 있었고 예술을 하는 자의 자존심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세상에 물들면서 그런 것들을 잃어버렸던 그가.
그림 한 폭에 모든 것을 떠올려냈다.
“나는 아직도 당신을 이해 못 하오. 그렇기에 당신과 같은 이가 될 생각은 없소. 하지만. 적어도 내가 해온 일들을 청산하지 않는 이상 붓을 쥘 수 없다 여겼을 뿐이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조용히 일어나 그림을 소중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걸어갔다.
“백버드.”
“…….”
“그 확고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나와 같아질 필요는 없다. 예술가란 자신의 확고한 이념을 그려내는 자들이니.”
같을 필요 없다. 본인의 길을 걸어가되. 후에 후회할 짓을 하지 말아라.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면회는 끝이 났다.
에반젤린의 그림이 전시된 전시회는 마지막 날까지도 수많은 인파가 북적거렸다.
다만 이번 일로 인해 다른 국가에서도 에반젤린의 그림을 조금 더 큰 규모로 전시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오기 시작했다.
본 사람들이 많다곤 하지만 아직 그 그림을 직접 보지 못한 이들도 많았으니까.
에반젤린의 입장에선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초단이나 비화와 다르게 에반젤린은 방송으로 다져진 짬이 존재했다.
다른 말로 하면 부담 자체는 덜한 편이었다.
다만 다른 이유로 그녀는 현재 짜증이 나 있었다.
“아이고! 동네 사람들! 우리 에린이가 이렇게 대단합니다!”
양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높이 들어 올리고는 동네방네 소문낼 기세로 기뻐하는 데이비를 보며 에반젤린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쪽팔리게 뭐 하는 짓이에요!”
그대로 데이비를 퍽퍽 걷어차 보지만 거대한 고목에 딱 붙들린 것마냥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높이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는 몰골이었다.
“엄마아…….”
결국, 도움을 요청하고 나서야 페르세르크가 데이비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모든 것이 해결되었지만 에반젤린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고양이마냥 하악질을 하며 페르세르크의 뒤에 숨어버렸다.
“아빠 진짜 싫어!”
“흡?!”
충격을 받은 얼굴로 무너지지만 저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 저러고 나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일어날 것이다.
“그래. 네 생각은 어때.”
저 봐라.
에반젤린은 질린 얼굴로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데이비 올 라운.
싫다 밉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가족 중 하나며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든든한 존재.
간혹 과보호가 있긴 하지만 그가 과보호한 것 중에 위험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데이비는 그녀에게 있어서 최고의 방파제였다.
“잘 모르겠어요. 한 번이야 모르지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전시 당하는 것도 영 기분이 꺼림칙하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그렇게 일에 치이듯이 떠밀려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피곤하잖아요.”
에반젤린의 말에 데이비는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였다.
“그래. 네가 바라면 그렇게 해.”
“정말 괜찮아요?”
“무슨 상관이야. 네가 그림의 작자인데. 네가 싫으면 안 하면 되는 거야. 누구도 네 인생을 멋대로 바꿀 순 없어.”
“그런 것치고 아빠는 엄청 빡세게 공부시키잖아요.”
물론, 지루하고 대체 이걸 왜 알아야 하는지 모를 일반적인 학교 수업에 비교하면야 유익하다지만 지루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데이비도 그것을 잘 조율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에린아.”
데이비가 진지하게 몸을 살짝 숙이고 에반젤린과 시선을 맞춘다.
“네.”
“각박한 세상에 호구 잡히지 않고 우습게 안보이려면 사람은 아는 게 많아야 해.”
“그래도 지루한데…….”
“걱정 마. 시간은 많으니까. 정말 네가 힘들다 싶으면, 나중에 하자.”
당장은 필요하지 않다.
에반젤린의 수명은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까.
데이비에게 소식을 전하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에반젤린은 이 분야의 전문가나 다름없는 빈덴을 만났다.
“할아버지.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음이 가는 대로 하면 됩니다. 에반젤린 양. 에반젤린 양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그 누구도 비난하지 못합니다.”
“사실 지금도 엄청 인터뷰 요청 들어오는데…… 더 귀찮아지겠죠?”
“그렇겠지요.”
“으음…….”
막상 끌리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귀찮은 점을 생각하면 고민이 되는지 에반젤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해 본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에반젤린 양.”
“네?”
“백버드에게 그림을 건네준 것.”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빈덴이 옅게 웃었다.
“과거의 스승으로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 감사를 받으려고 한 건 아닌데요오…….”
“에반젤린 양 덕분에 그놈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제가 수년간 노력해도 안 되던 것을 해낸 셈이지요. 비록 이제 그놈과 사제관계는 아니지만…… 한때 열정으로 가득하던 녀석을 가르쳤던 몸입니다.”
그는 한참 어린 에반젤린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숙였다.
깐깐하고 매사에 호통이 패시브로 따라붙는 빈덴을 알고 있는 다른 이들이 봤다면 경악을 했을 모습이었다.
“이러지 마세요. 부담스러워요.”
“꼭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으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빚을 진만큼 언젠가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더 있다간 부담감이 가중될까 싶었던 에반젤린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 인사하고 빠져 나와버렸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전시회에서 에반젤린의 이름이 퍼져나가면서 그녀의 독자적인 전시회를 열고 싶다 말한 이들의 요청이 계속해서 날아들게 되자 귀찮아져 버린 에반젤린은 이 일을 알하자드의 비서인 안토니오에게 떠넘겨버렸다.
이후 협상을 마치고 온 안토니오가 그녀에게 수량을 더 늘릴 수 있느냐 물어왔고 에반젤린은 망설임 없이 홀로 그렸던 그림 30점을 더 내놓았다.
단 한 번으로 에반젤린의 그림에 매료된 일부 사람들은 그녀가 훨씬 많은 양의 그림을 내놓았다는 말에 폭발적인 관심을 표했다.
다만 일부에서는 여러 국가를 이동하면서 분실하거나 파손될 경우에 대해서도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림의 주인은 에반젤린인데 왜 저들이 난리인지 모르겠다며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지만 그만큼 걱정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급기야 일부에서는 그녀에게 직접 찾아와 강의를 해줄 수 없느냐는 제의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연 그림이라는 것에 이렇다 할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에반젤린에겐 매력이라곤 전혀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의 그림이 엄중한 보안절차를 밟고 타국으로 날아가는 동안 에반젤린은 늘 그렇듯 방송에서 시청자들과 농담 따먹기나 해댔다.
“아니 그런데 오늘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요?”
-왜긴. 니가 프랑스에서 저지른 일을 생각하세요 ㅋㅋㅋㅋ
-ㅋㅋㅋㅋ 아무것도 모른 척하는 거 개 킹받네 ㅋㅋㅋ
-방송 안 보던 내 부모님 어쩌다가 전시회 한번 들리시고 곧바로 방송에 구독 박으셨음. 진짜 전시회 직접 가 본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만 방송에서 보는 거 하곤 차원이 다른 느낌임.
“아니 뭔…….그림하고 이게 무슨 상관이라고.”
-님이 그리는 그림 원본이 영상 타고 보이니까 문제죠.
전시회를 제외하고 에반젤린의 독특한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는 건 사실상 생방송뿐이었다.
그녀의 그림을 영상으로 담아서 다른 곳으로 보낸다 한들 그곳에는 감정의 전달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만큼 현재 그녀의 시청자 수는 평소의 수배에 달하고 있었다.
“부담스러운데…… 그리고 오늘은 그림 안 그려요……. 게임할 거란 말이에요.”
그 말과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비화가 들어섰다.
“에반젤린! 게임 하자!”
그녀는 가상현실 접속장치를 에반젤린에게 던지며 말했다.
“나 방송 중이잖아.”
“방송으로 쓰든지 해. 제법 구미가 당길걸?”
“어?”
빠꾸 없이 돌직구를 던지는 그녀의 모습에 비화가 싱긋 웃었다.
“언니가 만든 게임인데 같이하자고.”
그 말에 시청자들의 반응이 맹렬하게 피어오른다.
이전 알프랜드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하지만 엄청난 속도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만큼 다시금 유저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비화가 뭔가 새로운 걸 만들었다는 말에 에반젤린은 고민에 빠졌다.
그렇지않아도 요즘엔 PC 게임이 거의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오죽하면 프로게이머였던 시우조차 절반 이상을 가상현실로 방송하겠는가.
“그래? 언니가 괜찮다면 상관없는데…… 방송 나와도 괜찮아?”
“응, 광고 겸.”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닌 조율의 권능을 위해 만든 게 틀림없다.
애초에 그녀가 가상현실을 되살린 것도 그런 이유였으니 말이다.
비화의 말에 에반젤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광고비는? 참고로 나 엄청 비싸다?”
“그래서, 안 할 거야?”
“하긴 할 건데…… 시청자들의 의견은…….”
-??? 빨리 안 하고 뭐함?
-아니 피지컬 괴물 비화 느님이 캐리해준다는데 이걸 안 해?
-신작! 빨리! 빨리!!
-됐고 빨리 ㄱㄱ!
시청자들은 대부분 빨리 하라는 입장이었다.
에반젤린은 적당히 여론을 확인한 뒤 가상현실 접속장치를 컴퓨터와 연동시키고 빠르게 조작했다.
그러자 방송 화면 너머로 에반젤린이 접속한 가상공간이 드러난다.
“으음…… 그런데 무슨 게임인지…….”
급작스럽게 게임을 요청한 덕분에 아직 어떤 건지도 모른다. 설마 잘못해서 영상 정지 각을 세워버리면 머리가 아파질 터였다.
“어쨌든…… 저 잘 보여요?”
그녀가 허공에 뜬 카메라를 자동조정 모드로 두고 말을 걸자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ㅇㅇ 잘 보임.
-전보다 그래픽 더 좋아진 거 같네.
-ㄹㅇ ㅋㅋ
“그나저나 나보고 들어오라 해 놓고 본인은 어디로 간 거야.”
그렇게 잠시 기다리던 중 에반젤린에게 미션이 도착했다.
-방장. 요즘 핫한 해피캣 춤 춰주셈.
“싫어요. 춤은 무슨 춤이야.”
-어어? 전에 미션 내기한 거 이렇게 해 먹는다고?
-이걸 이렇게?
그 말과 동시에 에반젤린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 그……. 혀…… 협상테이블! 협상테이블을!”
-응 안돼.
-약속은 약속이야. 지켜.
“아니 이 변태들아! 그런 게 보고 싶어?!”
-응. 방장이 괴로워하는 거 보면 개꿀잼임.
-밥 한 그릇 뚝딱
“와…… 이 양반들…….”
평소라면 헛소리 말라며 일축했을 테지만 얼마 전 방송에서 그녀는 시청자와 내기를 했고 장렬하게 패배해버린 전례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에반젤린에게 춤을 요청한 시청자는 그녀를 이겨 소원권을 획득한 이이기도 했다.
“이익!”
-약속 안 지켜? 약속 안 지켜?
-엄마. 방장이 약속 안 지켜요.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건가요?
“아 해줄게. 해주면 되잖아!”
비명을 지르며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는 허공에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노래를 틀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으윽…… 윽…….”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꿀잼 ㅋㅋㅋㅋㅋ
-이걸 이렇게 써먹네 ㅋㅋㅋㅋ
“니들…… 언젠가 복수할 거야.”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 된 방장이 방송에선 웃음 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시청자들은 좋아죽지만 정작 에반젤린은 이가 바득바득 갈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춤이라기보다는 기묘한 몸동작에 가까운 행위예술을 하고 있던 찰나…….
“에린아…… 너 그림을 넘어 이제는 행위예술도 하는 거야?”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비화가 말을 걸자 에반젤린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아버렸다.
“끼아아아악!!”
“괜찮아…… 처음엔 다 힘든 거야. 언니가 도와줄게…….”
“아니야!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