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12화
바리스의 사건이후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다.
늘 그렇듯 영지의 일을 처리하던 찰나.
바리스로부터 호출이 왔다.
국왕의 호출을 무시할 정도의 권세는 있으나 내가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지금의 위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폐하. 찾으셨습니까.”
정중하게 무릎을 꿇으며 아뢰자 바리스가 쓰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형님.”
바리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과를 건넸다.
“실은 형님과 간단한 이야기나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가 찾아가고 싶었습니다만…… 당분간은 왕성을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요.”
그의 말에 나는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폐하. 조금 편하게 말해도 괜찮을지요.”
“예. 그리하시지요.”
“원하는 걸 말해 임마. 널 하루 이틀 봐온 줄 알아?”
“하하하.”
녀석이 쓰게 웃었다.
“역시 형님은 속일 수가 없겠네요. 나오.”
바리스의 말에 허공에서 빛으로 된 나오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게 변질되었던 부분은 다시금 황금빛을 되찾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단순한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형님. 그녀에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음?”
“혹. 그녀에게 유예된 시간을 조금 늘려줄 방법은 없을까요.”
“유예된 시간이라…… 비슷한 케이스는 많은데…….”
나는 짧게 침음을 흘렸다.
영혼과 관련된 일은 많았다.
알베르타의 재상 튜나의 부친도 그러했고, 점순이 때도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비슷했다.
그 외에도 바사스 황자의 친모 또한 비슷한 혼의 문제이지 않았던가.
그 외에도 영혼이 문제가 된 케이스는 많았다.
“저승아. 알아본 건 어떻게 됐어.”
내가 허공에 대고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 우치가 나타났다.
퀭한 다크서클. 평소보다 마른 것 같은 몸이 드러난다.
저승이가 아닌 우치의 등장은 조금 뜬금없었다.
“어?”
“나다 이 x새야.”
그는 나를 보자마자 손에 쥐고 있던 장대로 그대로 달려들었다.
“으억!”
“죽어! 죽어 이 개자식아!”
그는 한참이나 나를 죽일 듯 공격해왔다.
하지만 완전히 날뛸 생각은 없었는지 다행히 주변 기물까지 파괴하진 않았다.
“후우…… 어떻게 온 겁니까. 본래라면 내려올 수 없을 텐데요.”
“어째서긴. 신의 사도로써 명을 받고 내려온 거지.”
실제로 우치는 영혼의 강을 조율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말인즉슨…….”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특한 체질을 지닌 저 녀석을 정화하려고 왔다.”
그는 장대의 끝으로 나오를 가리켰다.
“다…… 당신은 대체…….”
우치에게서 느껴지는 짙은 신의 기운에 나오가 떨리는 목소리로 주춤거리듯 물러났다.
“겁먹지 마라. 태어날 때부터 망자와 생자의 특성을 모두 지닌 네 상황은 이미 확인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넌 악령의 특성을 지녔지만 악령이 아니야. 그러니 미칠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담담하게 말하고는 그녀에게 다가간 뒤 말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뭣부터 들을 테냐.”
자연스러운 하대. 갑작스러운 난입에 바리스가 뭐라 말할 법도 하건만.
바리스는 바짝 굳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우치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심상찮았다.
“비연에게 빨릴 만큼 빨린 주제에 폼 잡기는.”
“안 닥쳐?”
우치는 장대를 그대로 내게 휘둘러왔다.
물론, 내 손에 잡혔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조…… 좋은 소식부터…….”
“데이비는 네가 악령이고 네 안이 썩어 문드러졌으며 시간이 지나면 네가 미쳐서 재앙이 될 거라 말했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그렇기에 네 문제를 해결하는 건 어렵지 않아.”
“…….”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럼 나쁜 소식은…….”
“흐음…….”
짧게 침묵한 그는 조용히 나오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네가 찾는 황혼과 여명의 정원은…… 찾기 힘들 거다. 현재 이 세상에 그런 낙원 따윈 없으니까.”
“거…… 거짓말! 당신이 뭔데 그런 말을 해!!”
“적어도 네 이상으로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로 보이나? 그 어떤 거짓도 없는 진실이야.”
“아니야…… 아니야!”
“영혼의 강을 관장하는 나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아니라고!!!!”
그는 그리 말했고,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오는 그가 떠나갈 때까지 거짓말 말라며 악다구니를 쓰며 절규했다.
* * *
“그걸 그렇게 확신해도 됩니까?”
“없는 건 없는 거야. 장담컨대 절대 존재할 수 없어.”
“그럼 고서에 있던 그것들이 전부 거짓이라는 겁니까?”
“아니.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담담하게 말한 그가 조용히 나를 직시했다.
“진실은 가혹한 법이거든.”
본인은 더 존재하길 바라지만 우치가 저리 말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앞으로 그녀가 맞이할 결말은 절대 좋은 결말은 아닐 거다. 무의미한 발버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난 티오니스의 페어리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렇겠지. 오래전 멸종한 종족이니까.”
아는 바라면 드워프 이상으로 정교한 작업에 능숙한 존재라는 것 정도일까.
냉정하게 말해서 이제 세상에 남은 페어리는 나오가 전부였다.
“애초에 그녀는 뭡니까. 일반적인 악령과 많이 다른 대접인데요.”
“맞아. 그녀는 악령으로 보이지. 하지만 겉으론 그리 보일 뿐 실제는 아니야.”
“무슨 말입니까.”
“데이비. 페어리가 정확히 어떤 종족인지 알고 있나?”
“섬세한 작업이 특기인 작은 요정들?”
“뭐, 그것도 틀린 건 아니지. 하지만 티오니스의 페어리. 그중에서 생자와 망자의 특성을 모두 지니고 있는 조화의 존재는 역사에 단 둘뿐이었다.”
하나는 나오일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게 누굽니까?”
“최초이자 최후의 요정 여왕. 페어리는 그녀가 소멸한 후 자연스레 세가 약해졌다.”
“…….”
다른 말로 하면 나오는 요정 여왕의 자질을 지닌 페어리라는 소리였다.
“물론, 페어리 사이에서도 거의 사장된 전설이기에 동족들 사이에선 기이한 특성을 지닌 그녀를 이단 취급하고 봉인했겠지. 페어리가 보기에 그녀는 극히 이질적인 존재였을 테니.”
예를 들면 사람이 태어났는데 반쪽은 시체고 반쪽은 인간인 느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생자와 망자의 특성을 모두 지닌 극히 드문 케이스는 반대로 요정 여왕이 될 수 있는 전제조건이기도 했다.
못생긴 새가 커서 우아한 새가 되는 케이스처럼 말이다.
“물론, 그녀는 온전한 대관식을 치르지 못했고, 요정 여왕으로서의 조건도 못 맞췄다. 그렇게 오랜 시간 봉인되면서 망가졌지.”
그렇기에 치유가 가능했다.
“본래 악령이라면 정화 후에 윤회의 고리에 던져야 하지만…… 요정 여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거든.”
“잠깐만요. 그럼 황혼과 여명의 정원은 설마…….”
“맞아. 요정 여왕의 본질이며, 그녀가 대관식을 벌이는 곳이 그곳이다.”
즉, 황혼(죽음)과 여명(생자)의 정원은 요정 여왕의 영역이자 그녀의 거처라는 소리였다.
“어이가 없네, 진짜.”
헛웃음이 나왔다.
즉, 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걸 지금까지 알아보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그럼 그걸 말해주던지요. 그녀가 있는 곳이 황혼과 여명의 정원이라고. 굳이 존재하지 않느니 절대 못 찾느니 할 필요 있었습니까?”
“아니. 여신님은 그녀가 요정 여왕이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그 자리는…… 고독한 자리야. 데이비, 선대 요정 여왕이 소멸하기 전 그녀는 세상을 저주하면서 죽었다.”
페어리의 낙원.
그 단어는 페어리에겐 맞을지 몰라도 요정 여왕에게는 완전히 정반대의 의미였다.
“그 장소는 세계와 격리된 요정 여왕의 무덤이기도 해.”
그곳에서 홀로 고독하게 존재하다 죽어야 하는 존재.
그것이 페어리였다.
“그래서 말하는 거다. 그녀를 정화하면 언젠가 그녀는 요정 여왕으로서 각성할 수 있다. 그리되면 태초의 봉오리에서 페어리들이 다시 나타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에겐 지옥의 시작이라는 소리네요.”
그 어떤 존재도 도달할 수 없는 전설의 낙원, 아니 무덤 속에서 그녀는 영원히 고독을 씹어야 한다.
“과거의 여신님은 실용성을 중시했기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의 여신님은 그녀를 가엽게 여기고 계셔. 그녀가 미래에 어떤 고통을 겪을지 아시기에 원치 않으시겠지.”
우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요정 여왕의 자질을 지닌 페어리가 또 나올지는 몰랐겠지. 데이비. 그녀가 이대로 조용히 죽으면 페어리는 영원히 사멸하겠지만 그녀는 구할 수 있다.”
그녀가 겪어야 할 지옥에 비하면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하고 죽는다는 차라리 희소식일 테니까.
반대로 그녀가 진실을 알면 페어리는 다시 나타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녀에겐 지옥의 시작이었다.
“이 진실을 어찌할지는 네가 정해라.”
“정하라고요?”
“여신께선 네가 정하길 원하신다.”
그럴 리가. 여신님이 정말로 결정했다면, 그런 여지는 남기지 않을 것이다. 이건 마치…… 어떻게 될지 지켜보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다만 이 사실을 그녀에게 곧바로 전하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후 다시 바리스를 만난 나는 그의 곁에 공허한 기색을 풍기며 추욱 늘어져 있는 빛의 존재를 보았다.
황금빛으로 휩싸여 인영만이 그러나 있는 존재.
세계에서 남은 마지막 페어리 나오.
이대로 두면 그녀는 고요하게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가장 거부하는 미래이기도 하다.
“형님…….”
“쟤는 어때.”
“완전히 마음이 꺾이고 있습니다. 솔직히 달갑진 않네요.”
그래. 살아남는다 해도 목적지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면 마음이 꺾일 만도 하다.
이에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그걸 왜 그렇게까지 찾으려 하는 거야.”
내 질문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전설이잖아.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낙원 같은 게 없다고 그렇게까지 절망할 일인가?”
“닥쳐…….”
“내가 틀린 말을 했나?
“그 입 닥치라고 했어!!”
그녀가 그대로 내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네가 뭘 알아!! 넨릴은 낙원을 평생을 바쳐 찾아 헤맸어! 조금만 시간이 있었으면 그녀는 정말로 찾아냈을 거라고!! 그녀는 선대부터 이어져 온 끔찍한 저주 때문에 자신의 몸이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멈추지 않았어!”
“끔찍한 저주?”
페어리는 고대부터 존재해온 종족이다.
고대 종족전쟁을 생각하면 이것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루하루 그녀가 낙원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 이야기는 내 모든 것이 되었어.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체 누가 멋대로 정해!! 내 안에는 아직 진실이야!!”
낙원은 참 잔인한 단어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의 끝. 더 이상의 목적이 없는 완벽한 이상향이기에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다 할지라도 절대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이상향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낙원을 찾는다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아 헤매는 미련한 짓이 된다.
그녀의 발작 같은 외침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낙원의 끝에서 절망하게 될지라도?”
“그래.”
“그럼 됐어.”
나는 손을 들어 신력을 그녀에게 흩뿌렸다.
그녀가 그대로 소멸할 수 있어서 하지 않았던 정화의 힘이 그녀를 휘감는다.
“지금부터 난 네 부패를 정화할 거다. 본래라면 비화가 해야 할 일이지만 이 정도는 나도 어느 정도 가능해.”
정확히는 정화의 힘을 밀어 넣는 척 그녀의 힘을 조금 각성시킨다.
그녀는 정화를 받는 줄 알겠지만, 그녀의 부패는 내면에 있는 그녀의 힘이 스스로 치유하게 될 터.
하지만 나오는 그런 진실을 아직 알 필요가 없었다.
“너…….”
“낙원을 찾게 도와주마. 조금 전 우치가 떠나기 전 낙원의 흔적에 대해 말해줬다. 그곳에 낙원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아니 없을 가능성이 크겠지.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낙원일 가능성이 큰 공간이다. 그래도 갈 테냐?”
내 질문에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갈 거야.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미련한 년, 후우, 바리스. 며칠만 형이랑 놀러 가자.”
본래라면 불가능한 변화. 내 정화에 그녀는 마치 새살이 솟는 것처럼 부패한 내면이 다시 빛을 되찾기 시작한다.
직접 듣고 정화해보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지만. 그녀의 정체를, 또 본질을 생각하면 마냥 이상하지도 않았다.
“며칠이요?”
“그래. 가능하지? 네 친구니까 도와주는 거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 그게 가능할 거 같진 않습니다만…….”
바리스는 고민 끝에 대신들과 이야기하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황혼과 여명의 정원, 고서에 적힌 전설에 따르면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황혼(죽음)과 여명(생명)의 단어를 다른 의미로 해석한다면…… 다른 단서를 종합할 때 선대 요정 여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허상의 공간이 아니게 된다.
우치는 여신의 명에 따라 그녀가 페어리의 낙원의 터에 도달하길 원치 않는 만큼 그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지만 찾아내면 그만인 일이다.
나도 우치의 생각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가 선대여왕의 무덤, 즉 페어리의 낙원에서 마음을 바꿔먹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