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17화
“으허어엉! 언니!”
블랙 슬라임 검둥이의 유품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에반젤린은 놀러 온 비화에게 매달려 통곡했다.
“빨리 찾아야 해…… 빨리이…….”
“진정해 응? 무슨 일인지 설명을 해줘야 알지.”
“흑…… 흐흑…….”
훌쩍거리던 에반젤린은 갑자기 붉은 보석이 목걸이에서 혼자 탈출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블랙 슬라임…… 분명 이전에도 제 맘대로 규율을 무시하고 세상을 멋대로 돌아다니는 힘이 있었지……. 이 새끼, 이거…… 죽은 척하고 있는 거 아니야? 진짜 번데기라도 되나?”
비화가 여신이라곤 하지만 블랙 슬라임은 그야말로 미스테리한 존재였다.
프리아 여신은 블랙 슬라임에 대해 어떤 간섭도 관심도 보이지 않았고, 직접 물어보아도 대답 따윈 하지 않았다.
해가 되는 존재는 아니지만 대체 그 존재의 기원은 무엇일까.
애초에 생명체가 맞긴 한 것일까.
“흐음…….”
미묘한 표정으로 블랙 슬라임이 사라져버렸다는 허공을 직시하던 비화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어긋났어.”
“흑흑…… 응?”
“예전과 달리. 틈을 열고 나가는 데에 흔적이 남았다고. 한번 쫓아가 볼까?”
“응! 가자! 나 준비됐어!”
순식간에 트와일라잇을 챙기고 외출복을 뒤집어쓴 에반젤린의 행동력에 비화는 빙그레 웃으며 손을 그어 내렸다.
그러자 균열이 열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옅은 스파크가 그녀의 진입을 방해했다.
“오호, 이것 봐라?”
“왜…… 왜? 무슨 일인데?”
“방화벽이 되어있네. 마치 스스로의 경로를 보호하는 것처럼 말이야.”
애벌레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쓰는 것처럼.
견고하게 막혀있다.
“용의주도하네…… 이대로 두면 흔적도 사라질 거야. 이렇다 할 문제가 발생하는 건 아니지만…….”
“뭐야……. 그럼 못 들어가는 거야? 우리 검둥이 못 찾는 거야?”
“언니가 누구야.”
빙그레 웃으며 비화가 허공에서 빛으로 된 종이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언니가 잘하는 거 있지?”
“어…… 응?”
척!
비화는 허공에 빛으로 된 종이를 붙인 뒤 소리쳤다.
“브리칭!!”
치이이이잉!!
동시에 회색빛 가느다란 줄기 같은 것들이 너울거리며 종이로 모여들었고 종이 전체가 회색빛으로 짙게 물들었다.
동시에 파랗게 질린 에반젤린이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눈을 감기가 무섭게.
쩌저적…… 콰차아아앙!!
유리창이 박살 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허공의 방화벽이 박살 났다.
“들어가자.”
“꼭, 굳이 그렇게 부숴야만 속이 시원해?”
“뭐래. 도어브리칭은 로망이야. 그걸 이해 못 하는 넌 바보야.”
“……어쩐지, 게임할 때도 벽이나 바닥 날려버리고 쓸어버리는 걸 좋아하더라니……. 저런 거 보면 진짜 아빠랑 똑같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에반젤린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방을 보다 비화를 따라 허공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그우어어어어어!!
마치 고고하고 성스러운 요정의 왕처럼 나타난 존재는 이성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이렇다 할 영혼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말 그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시스템 그 자체.
“그 힘으로 조정하면 안 되는 건가?”
“그게 되겠냐.”
어그러짐을 조율하는 그 행동 자체에도 엄청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인데 멀쩡한 시스템을 고치는 건 말해 무엇할까.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건가?”
“대신 그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겠지.”
멀쩡한 시스템이다. 시스템을 속일 순 있어도 대놓고 고치는 건 후에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알 수 없다.
특히 린디스 제국의 불여우 대공, 카트린느 카라벨라의 일이 있었던 이후 나는 절대 이쪽은 손대지 않는 편이었다.
“자칫하면 상상 이상의 대참사가 터질 수 있어. 그렇게까지 해줘야 할 의리도 없고.”
“그래서 동생이 죽었다 했을 때도 슬퍼했지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구나.”
바리스를 살리려다가 나머지를 모두 죽일 수도 있다면, 선택은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콰아앙!!
검은 원념은 시스템을 향해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시스템을 잠깐 셧다운 시키는 정도겠지.”
물론, 저 원념의 수준으론 어림도 없겠지만 그럼에도 버프를 빵빵하게 몰아넣어 준다.
“저건?”
“저쪽이 원하는 거 같아서. 이지도, 본능도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단 하나 맹목적으로 옥좌에 대한 분노만을 터뜨리고 있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듣기엔 저 포효소리가 울음소리로 들리는데, 기분 탓은 아니겠지.”
“…….”
타르 같은 끈적한 무언가를 뚝뚝 흘리며 마치 성난 킹콩마냥 덤벼드는 원념과 그 원념을 사정없이 몰아치는 새하얀 존재의 싸움 여파는 이쪽까지 날아왔다.
우우웅…….
허공이 비틀리더니 일순간 구현화된다.
눈먼 공격들이 바리스와 나오쪽으로 날아들었지만 마치 허공의 방향이 바뀐 것처럼 나무줄기들은 일제히 허공에서 직각으로 방향을 꺾어 지면에 처박혀버렸다.
이게 나비 여제 찬드라의 힘을 지니고 있던 점순이의 힘도 비슷한 경로지만 베르단데의 힘은 확실히 이질적이며 강했다.
“지금 저 페어리는 온전한 판단을 내릴 상황이 아니야. 시간을 끌면 저건 점점 강해지겠지.”
쾅!! 쾅!!
아무리 버프를 받았다 해도 근본적인 힘의 차이가 너무 거대했다.
원념은 마치 울부짖듯 공격해 들어갔지만, 옥좌에서 나온 현신체는 한 번의 반격 때마다 원념의 사지를 하나씩 날려버렸다.
-그우우우…….
이윽고 힘을 다했는지 원념이 무너져내리자 현신체는 빛으로 된 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현신체의 등 뒤에 돋아난 나무줄기들은 순식간에 재생하고 있는 원념의 몸을 포박했고 한 손에 나무줄기가 뭉쳐진 창을 만들어냈다.
-그우우우…….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것을 찔러넣는다.
어지간한 공격에도 재생하던 놈이었지만 저것에 찔리면 끝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카아아앙!!!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를 따라와 준 홍단이를 이용해 놈의 창을 베어버리자 녀석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방해가 되는 건 모두 적대하는 모습이 기계가 따로 없다.
“거. 약한 애 그만 괴롭히고 이쪽이랑 놀자고.”
카아아앙!!!
대답 대신 날아드는 나무줄기들이 허공에서 멈췄다.
베르단데의 조력이었다.
“굳이 나설 필요는 없는데.”
“여기서 저거 죽일 수 있어?”
“방법이야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최대한 조심해야겠지.”
녀석의 힘은 강하다. 하지만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저것을 무리하게 제거했을 때 생길 부작용이었다.
“다만, 죽일 필요는 없어.”
“죽일 필요는 없다?”
“그래. 네가 옥좌를 복구하려 했을 때 저게 나타났다는 걸 가정하면…….”
쩌어엉!!
“다시 잠깐이라도 재울 방법은 존재할 거야.”
그 후에 나오를 데리고 나가던 뭘 하던 해보자고.
“그 정도 조건이면 할만하네. 이쪽도 저런 티 하나 없는 존재를 보면 좀 거슬리니까.”
베르단데가 가죽표지의 책을 펼쳤다.
현신체는 나를 최우선 위험순위로 두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가 무력화되기 전엔 다른 이들은 안전하리라.
한 손에 홍단이와 한 손에 청단이를 들고 나는 숨을 골랐다.
- 빠아!
홍단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홍단이 청단이, 아빠랑 같이 노는 거 오랜만이지?”
-응! 어~엄청 오랜만이다아!
-청다니도 엄청 오랜만이야…….
“그럼 오랜만에, 신나게 뛰어다녀보자.”
-할래! 홍다니 할래!
환영처럼 나타난 홍단이가 내 등에 업히듯 매달렸다가 사라진다.
그새 또 진화를 한 건지 홍단이나 청단이로부터 느껴지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힘 조절이 되나 모르겠네.”
한 발 내딛기가 무섭게 위기를 감지한 듯 녀석의 등 쪽에서 방대한 수의 줄기와 가지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일부는 거대한 봉오리를 맺기 시작한다.
지이이잉…….
쩌어엉!!!
일부 나뭇가지들이 갈라지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입자포들이 나를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정체 모를 에너지, 간을 보는 것 정도라면.
우웅…….
쩌억!!
순식간에 날아드는 입자포들을 슬쩍 피해낸 뒤 청단이를 그어 올렸다.
그런데…….
‘이거 좀 많이 센데?’
뭐야. 이거
쩌적…… 쩍!!
공간 안에 들어온 나무줄기들이 힘을 잃고 무너져내리는 걸 보며 내가 놀란 눈으로 청단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검……. 전보다 훨씬 강해졌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검에…….”
“나도 모르겠다…….”
이 아이들이 한 거라곤 초단이로 융합한 뒤 학교를 다닌 것밖에 없다.
홍단이 청단이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질 수 있다지만 이건 엄연히 예상범위의 밖이었다.
물론, 이성도 없는 현신체가 이것을 보고 이상 반응을 보일 리는 없었다.
녀석은 곧바로 다음 수단을 준비하듯 내게서 거리를 벌린 뒤 방대한 에너지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 목적지는 가지의 끝에 맺힌 꽃봉오리 3개.
뭔진 몰라도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은 아니었다.
쉬리리릭!!!
단순한 비 물리력으로 감당이 안 된다고 판단한 듯 녀석이 직접 육탄전을 시도하듯 파고들어 왔다.
퍽!! 파바바바박!!
찰나의 순간 엄청난 횟수의 공격이 파고들어 오기가 무섭게 손을 유연하게 움직여 그것들을 빗겨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약한데?
느껴지는 힘에 비해 출력이 떨어진다.
거대한 탱크가 있으나 물줄기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의미하는 게 저 꽃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불완전하기 때문인지는 판단을 해봐야 할 터였다.
“그럼 어디…….”
맹렬한 속도로 파고드는 공격을 한 걸음, 두 걸음 내딛거나 몸을 슬쩍슬쩍 옮기며 피해내기를 잠시. 순간적으로 엄청난 힘을 가하여 녀석의 뒤를 잡았다.
쉬리리릭!! 카아앙!!!
내가 뻗은 홍단이의 검날이 녀석의 어깻죽지 뒤쪽을 크게 베어냈음에도 녀석의 반격은 한결같았다.
힘이 강한 건 알겠는데. 이 정도면…….
쉬리릭!! 카가가각!!
생각에 빠져있다 보니 녀석의 공격이 내가 펼쳐둔 방어 역장에 긁히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멀리서 보면 녀석의 공격이 내게 적중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지만 이렇다 할 타격은 없었다.
쩌적!!! 쿵!!
뒤이어 베르단데의 힘이 현신체를 튕겨내며 나와 현신체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
“집중해.”
“형님…….”
갑작스러운 싸움에 바리스가 걱정스레 나를 불렀다.
“바리스. 네 형이 싸우는 걸 제대로 본 적은 없지?”
돌아보는 내 미소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랬던가요.”
“잘 봐둬. 네 형은 어디 가서 약하단 소리 들을 인간은 아니니까.
“잠깐!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는 마당에……!”
베르단데가 황급히 내 급발진을 막으려 들었지만 나는 조금 전의 공수교환 몇 번으로 놈의 상황진단을 끝마친 지 오래였다.
그동안 놀고 있었던 게 아닌 만큼 시험해보자.
* * *
우우웅!!!
전신에 신력이 퍼져나가며 데이비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그리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가느다란 안광이 일렁였다.
“저게 무슨…….”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데이비를 보던 바리스가 물었다.
“형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보통 정신 나간 스케일이 아니네.”
쩌적!!
이윽고 데이비의 등 뒤로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한 쌍 돋아났다.
정확히는 날개같이 뻗어져 나온 빛의 에너지 덩어리에 가까웠다.
더욱 소름 끼치게 놀라운 것은 날개에 뭉쳐지는 에너지의 잔향이었다.
신력. 신격에 든 존재가 사용하는 힘으로 신의 힘은 위계와 존재, 그리고 그 원천적인 힘을 기반으로 한다.
비화와는 다르지만, 데이비의 신력은 일반적인 신과 흡사하지만, 확연히 달랐다.
[신화]
이윽고 데이비의 목소리가 신비스럽게 울려 퍼졌다.
“신격을 온전히 다루려면 신체화가 필요할 텐데…… 설마, 이제는 신체화 없이도 다룰 수 있게 된 건가?”
“예? 그게 무슨…….”
새하얀 날개에 형체는 없었다.
하지만 데이비에게서 느껴지는 기세는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쿠웅!!
이윽고 데이비가 홍단이와 청단이를 내리 세우고는 한걸음 내디뎠다.
묵직한 기류가 주변 전부를 짓누르자 현신체가 이전과 같은 속도로 날아들어 데이비를 향해 나무줄기로 만들어진 창을 찔러넣었다.
원념을 일거에 소멸시킬 것 같다는 느낌이 듣던 그 창이었다.
카가가각!!!!
하지만, 창은 데이비의 몸에 닿아도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동시에 데이비의 손이 현신체의 목을 빠르게 낚아챘다.
순식간에 도망치려 하지만 데이비의 손은 그보다 빠르게 날아들었다.
“손은 눈보다 빨라.”
[신성]
쩌저적.
데이비의 등 뒤로 공간이 찢어지며 빛으로 된 날개형상이 또 한 번 나타났다.
두 쌍에서 네 쌍의 날개가 되며 데이비의 손에서 막대한 신력이 녀석의 존재를 어그러뜨리기 시작했다.
“포…… 식? 아니야. 비슷한데 조금 달라…….”
포식과 신력, 여러 면에서 데이비에게 장단점을 안겨준 힘 중 일부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전과는 달랐다.
마치 오랜 시간 준비해서 융화에 성공한 것처럼 말이다.
뿌드득…….
단순히 낚아챈 것만으로도 현신체의 현신을 서서히 무력화시키는 모습에 바리스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저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몰라……. 저건 괴물이라.”
베르단데도 혼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
그리고, 나오는 그저 말없이 데이비를 바라보았다.
마치 노이즈가 낀 것처럼 지직 소리를 내며 경련하던 현신체가 수차례 반격을 가하지만, 데이비가 발을 지면에 닿고 있는 이상 그 어떤 충격도 데미지도 가하지 못했다.
“이걸로 확실해졌네.”
이놈은 강대한 힘을 가졌으나 아직 불완전하다.
“그렇지않고서야 그 힘을 지니고 이렇게 타격하나 못 주는 건 이상하지.”
우우우웅!!!
도발 때문은 아닐 것이다.
데이비가 서서히 그 존재의 현신을 되돌리려 들자 녀석의 힘이 급속도로 봉오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에 데이비는 망설임 없이 현신체를 허공으로 날리듯 던져버렸다.
그 와중에도 그의 발은 대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발을 땅에 닿는 것으로 신체화의 힘과 다른 힘들을 융합한 건가? 대체 어떻게?”
베르단데의 의문 어린 목소리도 무시한 채 데이비는 하늘로 튕겨 올라간 현신체를 똑바로 직시했다.
이윽고, 현신체의 봉오리가 서서히 맺히기 시작하며 엄청난 에너지가 모여들었다.
마치 태양 에너지를 쏘아내는 것 같은 막대한 에너지를 보며 데이비가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동시에 등 뒤의 공간이 또다시 깨지며 3쌍째의 날개가 돋아났다.
동시에 베르단데는 눈을 부릅 뜨고 곧바로 바리스의 곁으로 접근했다.
“저…… 저 미친 새끼!!”
동시에 그녀가 가진 힘을 최대한 발휘해 바리스와 나오,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공간 주변을 그녀가 생각하는 이치를 현실화시켜 비틀어냈다.
그리고, 봉오리에서 쏟아진 막대한 에너지를 피하지도 않은 채 데이비가 청단이와 홍단이를 융합시켜 초단이로 만든 뒤 자세를 잡았다.
이후 그의 입에서 짧고 무서우리만치 낮은 선고가 울려 퍼졌다.
신력 대 만개.
[신격]
신체화하지 않은 채로 융합시킨 초월의 육신을 몸에 강림시키고.
[그것이 존재일지니.]
신성을 펼쳐 전신의 격을 올린다.
[그것이 위계로다.]
위기를 감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신체는 그 공격을 막기 위해 추가적인 힘을 발현하려 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베르단데의 힘이 현신체의 움직임을 한순간 틀어막았다.
“후우…… 누구 마음대로.”
길게 저지하진 못할지라도 그 짧은 틈은 아주 치명적이었다.
마지막으로, 그 의지와 기반되는 에너지가 융합되며 터져 나오며 세상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새하얀 빛의 종말이 봉오리에서 쏟아진 빛까지 모조리 쏟아내며 일대 전체를 완전히 전소시켜버렸다.
* * *
완전히 전소시킬 작정으로 내지른 힘이었다곤 하지만 여전히 이 공간은 조각난 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일부 잔해는 박살 났는지 베르단데가 흙을 뒤집어쓴 몰골로 짜증을 부렸다.
“콜록…… 콜록……. 이런 콜록!!! 진짜 미쳤어?!”
뒤이어 그녀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 질렀다.
“미안, 나도 성공해보긴 처음이라.”
신체화하지 않고 신력의 모든 근간을 조작하여 완전히 융화시키는 건 보통 미친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화를 달랠 때 보낸 시간이나 그동안 구상만 해둔 것들을 조금씩 체득한 효과는 있었다.
“그래도, 효과가 없진 않았네. 얼마나 될진 모르겠지만 제법 시간은 벌었어.”
죽이진 못했지만 불완전한 현신체를 다시 동면시키는 데엔 성공한 듯 보였다.
녀석과 두어 차례 충돌하며 확인하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를 빠르게 내지 못했으리라.
물론, 녀석이 다시 현신할 때까지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며, 아직 녀석의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지만 말이다.
“쿨럭…… 쿨럭……. 형님…… 괜찮으십니까아…….”
“이 와중에 내 걱정이나 하고 있네. 네 몸이나 챙겨라. 바리스.”
“…….”
“그보다…… 이건 뭐지?”
데이비는 파괴된 조각 안에 글귀가 새겨진 작은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요정의 언어인가? 이봐 나오.”
이에 데이비가 나오를 부르자 멍하니 있던 나오가 겁을 먹은 얼굴로 조심스레 날아왔다.
“네…… 네. 찾으셨어요?”
“갑자기 무슨 존대?”
“그…… 그래야 할 거 같아서요.”
잔뜩 겁을 먹은 듯 그녀가 조심스레 답했다.
“이거 읽을 수 있어?”
이에 그녀가 조용히 묻자 나오는 말 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멍한 얼굴을 하더니 눈을 부릅 떴다.
“이……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음?”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그녀는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리며 휘청거렸다.
“뭔데. 설명을 해줘야 알지.”
“달의 축복을…… 이 펜던트는 요정 중 일부가 태어날 때 목에 걸고 태어나는 축복 서린 물건이 분명해…….”
“선대 요정 여왕의 물건인가? 그런데 그게 왜?”
“요정들의 목걸이는 각기 모두 형태가 달라. 같은 건 단 하나도 없어…….”
지문 같은 거란 소리였다.
“그런데?”
나오는 자신의 손을 펼쳤고, 작디작은 펜던트를 꺼내 들었다.
“그건?”
놀랍게도 그녀가 꺼낸 것은 선대여왕의 것과 같았다.
세밀한 차이가 있을 순 있겠지만 문양 자체가 같을 수 없다고 했거늘.
지금 보이는 펜던트는 명확하게 같은 것이었다.
“뭐야. 그럼 동일인물이라고? 너랑? 선대여왕이?”
“아냐……. 이건 넨릴이 죽기 전 내게 준거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가장 소중한 물건이라고…….”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 성공한 요정 여왕.
그녀가 남긴 펜던트는 같은 영혼을 뿌리로 두지 않는 이상 절대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같은 모습이었다.
“저기 말이야. 정말 기분 나쁜 추측이긴 한데…….”
베르단데가 중얼거렸다.
“선대여왕은 혼이 갈기갈기 찢어졌잖아.”
“그렇지?”
“그 넨릴이라는 친구, 본능적으로 자신을 대신해 희생할 존재를 찾아다닌 게 아닐까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닥치지 못해?!”
“세상을 증오하고 저주하며 죽어갔지. 이 끔찍한 굴레 속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희생자를 찾아 다닌 건지도 모르지. 이름도 나오라고 지어준 건, 자신을 대신해 네가 여왕이 되어 자신은 해방되길 바란 것일지도 모르고.”
참지 못한 나오가 베르단데의 멱살을 잡았다.
“너…… 너어!! 조용히 하란 말이야!”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야.”
베르단데는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억측의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로 넨릴은 본능적으로 나오를 속인 것일까.
* * *
같은 시각.
비화와 함께 공간을 넘은 에반젤린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부유하고 있는 붉은 보석을 향해 소리쳤다.
“야!! 그거 먹지 마! 먹지 말라고!!!”
정체 모를 공간에서 방대한 에너지를 무분별하게 먹어치우는 붉은 보석을 말리려 애쓰고 있었다.
“저건 죽으나 사나 먹성은 똑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