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24화
초단이를 한참 동안 응징한 후에야 화가 어느 정도 풀렸는지 비화와 에반젤린은 인형들 품 안에 추욱 늘어져 있는 그녀를 두고 주변을 탐색했다.
“우와…… 이거 아빠가 보관하고 있는 거 알면 엄마가 아빠를 반으로 찢어버릴 거야.”
잔뜩 취한 페르세르크가 토끼 잠옷을 입고 귀엽게 애교를 피우는 장면이다. 대체 언제 이런 모습을 찍었단 말인가.
데이비의 딴에는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을 모두 저장해두고 싶다는 이유로 시작한 일일 것이다.
“저기…… 얘들아……. 그거 가져가면 정말로 큰일 날 것 같은데…….”
그때 초단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용히 해 넌.”
“얘들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화가 안 풀려.”
“잘못하면 정말 큰일 날 수 있는데…….”
“그럴 거면 처음부터 말렸어야지!”
에반젤린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초단이도 이 상황을 예측한 것은 아니었다.
“그치만, 재미있었잖아.”
“재미? 재미이이?!”
“흐약?!”
비화가 씩씩거리지만 사실 부정할 순 없었다.
위험한 것은 없었고 실제로 비화는 에반젤린이 시뻘게진 얼굴로 춤을 추는 것을 보며 낄낄거린 것도 사실이니까.
초단이도 데이비의 비상금 보관소라는 것을 깨달은 뒤 두 사람에게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만 전달한 뒤 중요한 물품이 보관된 장소인 이곳까지 오게만 만들었다.
비화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아빠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남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던 물건을 가져가는 게 좋은 일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비화가 이런 행동을 하는 건 데이비가 이 상자를 이쪽으로 날려 보낸 게 아닌가 하는 판단 때문이었다.
“아빠가 자초한 거잖아 이거.”
“뭐…… 관련 권한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게 맞지만…… 아버지는 이 물건만큼은 어머니에게도 보여주지 않아.”
“보여줬으면 아빠가 반으로 찢어졌겠지.”
비화와 에반젤린은 인상을 찡그린 채 데이비가 고이 모아놓은 앨범을 바라보았다.
비상금이니 뭐니 했지만, 아직 발견한 물건들 대부분이 영상 아티펙트이거나 사진들이었다.
완전 기억능력을 지니고 있는 주제에. 이런 것을 남기고, 이게 가장 소중하다고 말하는 걸 보면 묘한 기분이었다.
“저기 그러니까 얘들아. 그건 두고 가자.”
“…….”
“맞는 말이긴 해.”
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맞는 말?”
“처맞는 말!”
“끼야야약?!”
비화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초단이의 뺨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겼다.
그렇게 한참을 응징했을까.
비화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얼굴로 초단이를 쳐다본다.
“저…… 저 비화야?”
“야.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이럴 필요가 없잖아.”
에반젤린과 초단이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우리가 당한 거, 얘도 똑같이 하면 되는 거 아냐.”
“오.”
에반젤린은 탄성을 흘렸고 초단이는 파랗게 질렸다.
“저…… 저기 얘들아?”
“우린 그거 구경하고.”
“아, 우리 협상을…….”
“협상 같은 소리하네. 경고하는데. 홍단이 청단이로 나뉘어서 도망치면 나 다시는 너 안 볼 거야.”
“읏…….”
퇴로를 봉인 당한 초단이는 결국 저항을 멈추었다.
그리고, 에반젤린과 초단이가 가장 먼저 겪었던 수치심 가득한 스테이지에 도착했을 때 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정말로 해야 해?”
“응. 해야 해.”
“언니.”
에반젤린이 화사하게 웃었다. 이에 초단이는 희망을 품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뭐해. 빨리 안 하고.”
하지만 그 희망이 박살 나는 데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던 초단이가 급히 움직인다.
“에잇!!”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비화가 퇴로를 막고 에반젤린이 테이크다운을 하듯 초단이를 낚아챈다.
“어딜 튀려고!”
“으아앙! 용서해줘 제발!”
“우리도 했거든?! 너도 안 하면 분이 안 풀려! 기다려! 너 조져놓고 아빠한테도 따질 거니까!”
* * *
영지개발부서는 상당히 바쁜 편이다. 사고를 많이 치긴 해도 실제 영지의 기여 순위는 미식연구회나 다른 부서와는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 있을 정도로 갈려 나가는 곳이기도 했다.
문제는 요구사항을 만족하기 위해서 예산과 시간이 필수로 따라붙는다는 사실이다.
“크으…… 내가 현실과 타협하게 될 줄은…….”
“워낙에 예능감 넘치는 아이들이라…… 따로 편집할 것도 없겠는데요.”
비상금 보관소가 에린의 레어로 날아간 건 조금 우연이었다.
상대적으로 초상권개념이 옅은 티오니스 출신인 에오니샤는 비록 지구의 문화를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도 크게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맞다. 조금 전에 영주성에서 연락이 왔어요. 공간 아티펙트 관련 실적 서류 보내라고.”
“흐으아아…… 시간…… 시간이 부족하다아…….”
에오니샤가 울적한 얼굴로 추욱 늘어졌다.
지금 그 공간 아티펙트 연구를 하다가 이 난리가 났는데. 오라버니는 비상금 보관소까지 잃어버려서 당황하고 있으면서 예산과 시간을 좀 더 주지 않는단 말인가.
실적을 내기 위해 조금 과감한 시도를 하다가 연구소 상당량을 셧다운 시켜버리긴 했지만,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고 에오니샤도 그것으로 책임을 져 예산이 삭감된 바 있었다.
특히 이번 연구는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게 아닌 연구 관련이었기에 에오니샤가 직접 주관해야 했다.
데이비나 페르세르크의 입장에선 예산도 삭감됐으니 적당히 쉬어가며 하라는 소리였지만 결과주의, 그리고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있는 에오니샤는 그 삭감된 예산을 가지고 자신을 불살랐다.
고민 끝에 아주 최소한의 타협을 결정하는 그녀들이었다.
“가서 말해야겠네요.”
“예산과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이라고 하면 정말 모양 빠지는데 말이에요.”
“어쩌겠어요. 우리가 가는 길이 예산 먹는 고래 밭인데. 사실 제가 조금 더 계산을 완벽하게 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에요.”
“그래서 이거 하는 거 아니에요?”
솔직히 저걸로 예산을 얼마나 충당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눈 밑에 난 퀭한 다크서클과 초점이 반쯤 나간 상태의 에오니샤에게는 실적을 이루어 데이비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헤헤…… 헤헤……. 결과…… 결과만이 중요…….”
거의 반쯤 넋을 놓고 편집을 진행하는 에오니샤를 보며 티아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로망이니 낭만이니 했지만 지금 보니 에오니샤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평소라면 실수하지 않을 그녀가 어째서인지 실수를 하기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구나 싶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에오니샤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대륙에서 최고봉으로 치는 연구소의 수장으로 있으니 멘탈이 멀쩡할 리가 있나.
특히 에오니샤의 독특한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때 에오니샤가 흐물거리더니 꾸벅거리기 시작했다.
“음…… 이거 느낌이 안 좋은데.”
“아.”
공허하게 웃으며 작업하던 에오니샤가 그때 움찔한다. 이에 티아라가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본 그 순간.
에오니샤가 기절하듯 풀썩 쓰러져버렸다.
“왕녀님?”
그대로 잠들 듯 쓰러져버리는 모습에 티아라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리고는 황급히 에오니샤에게 다가가 손을 대보고는 흠칫 놀랐다.
그녀의 몸이 불덩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와. 이건 진짜 이 지경이면서 연구한 거야?”
독종인 건 알았지만 상상을 초월한다.
결국, 티아라는 우선 하던 작업을 모두 멈추고 에오니샤를 품에 안아 휴게실로 옮겨야 했다.
그리고, 이 행동은 에오니샤와 티아라에게 있어서 천운이나 다름없었다.
* * *
“에오니샤!!”
비상금 보관소라는 게 정말로 중요한 건 사실이다. 그 안의 내용물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들이었고, 혹여나 페르세르크가 알면 수치심에 못 이겨 그를 반으로 찢어버리려 들었을 테니까.
물론, 흑역사는 일부일 뿐이고 대부분 다른 소중한 물건들이거나 페르세르크에게 비밀로 하고 개인적인 취미를 이룬 것들이 많지만 누군가에게 들켜서 좋을 게 없기도 했었다.
그래서 이 비상금 보관소를 만드는 데 일조했고, 어느 정도 관리도 동시에 해주고 있는 에오니샤에게 맡긴 것이었다.
차원의 틈 안에 공간을 확보한 뒤 여신의 힘을 빌려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특수한 조건을 걸어두었다.
그리고 외부와 연결시킨 뒤 영지개발부에 설치해둔 특수한 마법 아티펙트로 내부의 상황에 대해 정보를 받는 식이었다.
그렇다면 보관소에 이변이 생기면 영지개발부서가 제일 먼저 눈치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에 에오니샤에게 비상금 보관소에 대해 부탁을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
티아라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닿았다.
에오니샤가 과로로 쓰러져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이에 데이비는 하던 것을 모조리 멈추고는 황급히 영지개발부서로 향했다.
에오니샤 올 라운. 그녀는 한때 원수나 다름없던 리네스 바리에타의 막내딸이다.
바리에타 공작가는 멸문되었으나 홀로 방안에서 책을 읽기만을 좋아했던 어린 소녀는 살기 위해 나를 찾아와서 빌었다.
애초에 그의 혼수상태나 레니 알리샤드 왕비의 죽음에 그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비록 화가 나는 존재의 딸이긴 하지만 연좌제를 물리지 않겠다 판단한 이상 그녀는 피의 반이 같은 이복동생일 뿐이었다.
처음 그녀는 그를 두려워했었다.
시간이 지나며 어느 정도 그 사실이 수그러들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다른 쪽으로 넘어간 게 아니었을까.
에오니샤의 이마에 젖은 수건을 올려다 주며 골다 장로가 조용히 말했다.
“며칠 동안 거의 잠도 못 자고 연구만 했다고 했소. 결과를 내지 못하는 노력은 의미 없다고 하면서.”
“내가 발의하고 페르세르크가 승인한 예산삭감안을 받아들였으면 내 말뜻을 이해했을 줄 알았는데.”
“……적어도 에오니샤 왕녀에게 그건 중요하지 않았을 테지. 낮은 예산을 가지고 실적을 내야 한다고 바뀌었을 테니까.”
쉬라고 돈을 깎았더니 그 좁아진 예산을 어떻게든 굴려서 연구 실적을 내려한다라. 그 독기만큼은 제 어미를 닮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실제로 삭감된 예산으로는 추가연구가 힘든 지경이었다.
“게다가 공간 아티펙트 관련 연구 실적도…….”
“그것도 내가 적당히 보고하라고 보냈을 텐데. 후우…… 이 고집불통을 어쩌면 좋냐.”
언제는 쉬라고 게임을 시켰더니 두문불출하고 게임만 하더니.
그녀의 고질적인 성격을 고치는 게 옳은 건지 모를 지경이다.
실적을 보고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중간에서 전달이 잘못된 듯 보였다.
“후우…… 죄송하오. 은사. 내 이리될 줄 알았다면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우리 부서장이 이리 옹고집일지 누가 알았는가.”
“상태를 보니 단순 과로 같으니 당분간 영지개발부 활동에서 이 녀석을 빼주세요. 강제로라도.”
“하지만 명분이 없으면…….”
“음…….”
고민하고 있던 찰나. 한쪽에서 에디손 기술고문에게 등짝 스매싱을 맞고 있는 티아라가 보인다.
“어이구! 이년아! 아주 허구한 날 사고를 치는구나!”
“악! 악! 아파! 할배!”
“아프라고 때리는 게다!”
“뭐가 문제야! 난 왕녀님 도와준 죄밖에 없다고!”
“정신 좀 차려라. 이것아! 저걸 동영상으로 올린다고?! 아주 미쳤지!”
“아니 뭐가 문제야?! 음유시인들이 하는 것과 다를 바가…….”
“다르다 이년아! 후우, 안 되겠구나! 넌 며칠 동안 이 할애비와 함께 윤리교육을 좀 받아야겠다.”
“으아아아…….”
“무슨 일입니까?”
에디손 기술고문에게 다가가 묻자 그가 시선을 슬쩍 피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사태의 전말을 이야기해주었다.
“이건…….”
영상에는 에반젤린과 비화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
데이비는 침묵했다.
“미안하오, 내 당장 이쪽 영상들은 다 지우게…….”
“귀엽네. 하하.”
피식 웃으며 데이비가 말했다.
“저거 영상 따로 빼서 저장 좀 해주실래요?”
“으잉?”
“저런 거 하나하나가 언젠가는 돌아볼 추억이 될 겁니다. 지구 쪽 동영상 사이트에 투고하는 건 에린이가 원하지 않는 이상 해선 안 될 일이지만. 그래도 명분은 되겠네요.”
“명분?”
“에오니샤를 강제로 쉬게 하는 방법.”
보아하니 비상금 보관소가 폭주한 이유도 무리하게 몸을 혹사시키다가 실수한 것일 테지.
본인은 자신이 실수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옆에서 보면 실수를 안 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에오니샤가 영지개발부에서 치는 사고 대부분은 과도한 열정과 무리함으로 인해 생긴 실수들이 대부분이니까.
아마 큰 효과는 없을 것이다. 에오니샤는 지독한 워커홀릭이었으니 말이다.
“좀 제 나잇대 애들처럼 귀여운 것도 보고 꺅꺅거리면서 잘생긴 남자와 데이트하는 꿈도 꾸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이런 식이면 에오니샤는 평생에 걸쳐서 결혼도 못 할 가능성이 컸다.
비록 에오니샤가 예전보단 뻔뻔해졌다지만 중요한 건 그녀의 강박증이었다.
“에오니샤가 깨면 전해주세요. 이거 내가 막았다고. 그리고, 이거 빌미로 예산동결. 연구 실적은 안내도 좋으니까 당분간 푹 쉬라고.”
지금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걸 해야 했다.
“어디 가시오?”
“에린이 레어로 가야겠습니다. 저 안에 페르세르크에게 들키면 진짜 큰일 나는 게 있어요.”
페르세르크뿐일까. 에이리아나 일리나의 것도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진실을 알고나면 내게 이를 부득부득 갈 텐데. 협상이라도 해야 불상사가 안 터지겠죠.”
우연과 우연이 겹쳤다.
영주성에서는 이제 좀 쉬라고 예산을 삭감했더니 줄어든 예산으로 어떻게든 실적을 내려다가 실수를 저질렀고. 하필 그게 에린의 레어로 날아갔다.
이후 비화와 에반젤린이 거기 휘말렸다.
누가 의도한 잘못이라고 하긴 모호했지만 저 아이들이 방의 끝에 숨겨놓은 것들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꿀꺽.
“골 때리네. 우선은 깨어나면…….”
데이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물론 이 사실을 모르는 초단이가 그 문을 열어줘 버렸고 두 딸이 이미 발견해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