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527화 (1,526/1,559)

제 1527화

“어어? 자꾸 그러시네? 이거 보내요? 우리 서로 상호 확증 파괴 해 봐요?”

“아이고, 딸자식이라고 있는 게 아빠 협박이나 하고! 아이고! 내가 제 명에 못 살겠네!”

“그러니까 그거 당장 삭제해 줘요.”

“그건 안 될 말이지. 네가 또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켕기는 게 있는 만큼 이쪽에선 영상을 다른 이에게 보여 주지 않기로. 에린과 비화 쪽에선 흑역사가 담긴 아티펙트나 앨범을 돌려주고 함구하겠다는 협의점을 만들어 냈다.

결국 남한테 보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네?

개인 소장용으로 몰래 보관하고 남에게 보이지만 않으면 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앙큼하고 영리한 딸아이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동작 그만, 아빠. 세간에선 그걸 개수작이라고 불러요. 당장. 내 눈앞에서. 그거. 지워요.

한마디 한마디 뚝뚝 끊어가며 요구하는 귀기 어린 모습을 보며 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영상 자체는 귀엽기 그지없다.

추억으로 남기고 싶은 욕망은 둘째 치더라도 비화와 에반젤린은 툭하면 사고를 치는 사고뭉치들이기에 이 녀석들을 조금 얌전하게 만들 건덕지는 남겨놔야 했다.

다만 남긴다는 선택지 자체를 결사 거부하는 저 모습을 보니 그냥 남겨 놓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리라.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협상이었다.

문제는 비화가 삭제 이외에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증거로 그녀는 조금 전 협상했던 페르세르크의 흑역사를 다시 들이밀며 그녀에게 일러바치겠다는 결사의 각오를 내비쳤다.

“아니 아빠는 양심이 있어요?! 우리가 이걸 두고 가겠다는데 그걸 안 지워 줘?!”

“흐음…….”

“아 몰라! 배 째! 아빠가 그거 여기서 당장 안 지우면 나도! 절대! 이거 포기 안 해!”

비화가 아티펙트를 꽉 쥐고 소리쳤다.

“끄응…… 어쩔 수 없지. 그래. 지우자.”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영상이 담긴 아티펙트를 부숴버렸다.

“이제 됐지?”

내 물음에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복사본.”

“……쯧. 눈치 빠르긴.”

“흥, 아빠를 내가 하루 이틀 봐 온 줄 알아요? 대체 그걸 왜 보관하려는 건데요?!”

“지금 이 모습들은 나중에 다시 볼 수 없으니까. 아빠 머릿속엔 기억이 남겠지만, 그 외엔 볼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지 않을까?”

비화는 나를 많이 닮았다.

정확히는 내 행동거지를 많이 닮은 편이다.

실제로 그녀가 브리칭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이유도 과거 내가 바리에타 공작가를 필두로 한 반란군을 족칠 때 성벽을 브리칭했던 것을 기억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은근히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복사본은 지워 줄게.”

“그뿐만이 아니에요. 아빠가 기억을 추출하는 것도 하지 않게 확실한 맹세도 해 주세요.”

“저기 언니, 이렇게까지 해야 돼?”

“넌 가만히 있어! 여기서 물러나면 우리는 이제 아작 나는 거야!”

“아니 그렇게까지 될 리가…….”

에반젤린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나는 영지개발부서를 정리 하고 있는 티아라에게 연락해 관련 영상들을 전부 지우라고 전달했다.

“이제 됐지?”

“……여기요.”

그제야 비화는 페르세르크와 일리나 그리고 에이리아의 모습이 담겨 있는 아티펙트를 건네주었다.

누가 가져갈세라 곧바로 아공간에 던져넣는다.

아공간을 편하게 관리하려고 일부러 보관소를 만들어 두었는데 이번 기회에 시스템 자체를 손봐야 할 듯싶었다.

“그보다…… 그 상자가 대체 뭐 때문에 제 레어까지 온 거예요?”

말없이 지켜만 보던 에반젤린이 묻자 나는 쓰게 웃었다.

“네 고모님이 과로로 실수한 모양이더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가서 괜한 말은 하지 마.”

“안 해요.”

에오니샤의 지독한 워커홀릭은 비화나 에반젤린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언제 한번 사달이 날 것 같았는데 그게 지금일 뿐이라 생각한 듯 보였다.

“몸에 좋은 거라도 좀 구해 볼까요?”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아빠가 신경 쓸 테니 너희는 평소처럼 대하면 돼.”

“흐음…….”

비화는 묘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내 경험상. 저건 뭔가 작당모의를 할 때 짓는 표정이 분명했다.

“어? 아빠 어디 가요?”

“어디 가긴. 몸보신시켜준답시고 네 고모 놀려먹은 것들 혼내주러 간다.”

“하여튼 그 맑은 눈의 광기들…… 조용할 날이 없네.”

* * *

시각적인 땀내가 느껴지는 지옥의 한복판.

물론, 정말 지옥판이냐 묻는다면 그 내부에 있는 존재들에겐 헛소리라 치부될 것이다.

온몸에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아 놓은 듯 별빛이 가득한 미노타우로스 형태를 지닌 존재. 금우궁 타우르스가 엄청난 중량의 덤벨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한 켠에는 터질 듯한 근육을 지닌 새하얀 토끼가 거울 앞에서 특유의 머스큘러 자세를 취하며 제 근육을 과시하고 있다.

“……이건 뭐. 내가 손대기도 전에 끝났네.”

바닥에 추욱 늘어져 있는 세 인영은 미식연구부서…… 였던 것이 되어 있었다.

듣기로는 륀느와 점순이가 유리아를 순식간에 배신했다고 들었는데. 이것들은 왜 휩쓸려 있는 건지 모를 일이다.

아마 그 과정에서 유리아가 함정을 판 게 틀림없다.

사방에 깔린 헬스 장비들을 지나치며 들어가자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만들고 있던 보팔레빗 중 하나가 다가왔다.

[어머나, 자기. 무슨 일로?]

“……저것들 데리러 왔지.”

바닥에 추욱 늘어진 세 명의 미식연구부서였던 것들을 가리키자 보팔레빗은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다.

[하나를 제외하곤 기본 체력이 영 엉망이라 좀 더 교정해 주고 싶었는데…….]

“그건 영지를 지키는 근위병들이나 신경 써 주고. 저것들 데려갈게.”

[그렇게 해.]

딱히 미련은 없는지 보팔레빗은 이렇다 할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후끈거리는 공기를 가로질러 반쯤 시체가 되어버린 셋을 질질 끌고 나오자 녀석들이 부르르 떨며 생존 신고를 한다.

“으윽…… 공기…… 맑은 공기…….”

“륀느가…… 호흡의 중요성을 높게 평가…….”

“저긴 지옥이야…… 코가 마비됐어…… 이 미친놈들…….”

하나같이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거리는 그들을 보며 나는 몸을 살짝 쪼그려 앉은 뒤 빙그레 웃었다.

“유리아.”

“윽…… 은공.”

“에오니샤가 기절했다면서?”

“…….”

시선을 피한 채 어색한 웃음을 짓는 그녀였다.

“변명해 봐.”

“그…… 편식은 좋지 않으니 일단 먹어 보고 그 편견을 깨보려고…….”

“본심을 말해야지.”

“평소에 저희를 두고 미친 또라이라고 하시는 우리 연구부장님이 얄미워서 장난을 좀…….”

“잘못했지?”

빙그레 웃으며 묻자 그녀도 해맑게 웃었다.

“저희…… 이번에도 매달리나요?”

“아니. 뭐 매달 정도로 잘못한 것도 아니고, 에오니샤를 생각해서 준비한 것도 있으니 그러진 않을 거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비록 장난이 있긴 했지만 유리아가 에오니샤를 위해 준비한 죽은, 당장 골드로 치면 어지간히 부유한 상위 귀족가가 1년간 쓰는 식재료 값을 전부 합친 것보다 비싼 가치였으니 말이다.

물론, 부서의 자금을 쓴 게 아닌 유리아가 개인적으로 재배하거나 채집한 재료들이 들어간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 태도에 유리아와 륀느 점순이는 서로의 시선을 살폈다.

그러고는 옅게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저도 매달리고 있으면 피가 쏠려서 여간 힘든 게 아니랍니다.”

“그래. 그런 의미에서 뭐라도 먹으러 가자.”

내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온 탓인지 셋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은공?”

“데이비 님이 미쳤다고 분석. 륀느가 현 상황을 매우 낮게 평가.”

“쟤 미쳤나 봐…….”

유리아는 혼란스러운 시선을 보냈고 륀느와 점순이는 겁도 없이 입을 함부로 놀렸다.

“걱정 마. 니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니까.”

담담하게 대답한 나는 셋을 데리고 영지가 내려다보이는 개인 정원으로 향했다.

과거 이곳에서 율리스의 스승인 대현자 헬리슨 발레스티아를 만났던가.

“은공? 여기서 식사를 하는 건가요?”

“맞아.”

담담하게 대답한 나는 아공간에서 돗자리를 꺼내 펼쳤다.

그리고 아공간에 속에 고이 보관해 둔 열매들을 하나씩 꺼냈다.

동시에 그 열매를 본 셋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저…… 은공? 그걸 먹으라는 말인가요?”

“맞는데?”

“아…… 아하하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그거…….”

블랙스코빌이잖아요…….

새까만 광택이 드러나는 사과 같은 과일은 겉보기엔 그저 검은 사과였다.

유리아가 입을 뻐끔거렸다.

블랙스코빌.

열매 중에 유별날 정도로 독특한 열매로 대륙에서도 유명한 것이다.

그리고.

미식연구부서의 유리아가 저건 식재료가 아니다 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정말 지독할 정도로 맵기 때문.

미식연구부서인 셋의 입장에서 저것처럼 쓸데없이 더럽게 맵기만 한 과일은 꺼려질 수밖에 없다.

“하나씩 먹어.”

“아하하하. 은공. 농담도 참.”

손사래를 치며 훈훈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미소로 화답했다.

“하하하.”

“오호호호.”

그렇게 한참을 웃었을까.

나는 미소를 싹 지우고 말했다.

“에린이가 만든 떡볶이 입안에 쑤셔 넣기 전에 곱게 먹지?”

“크흣!? 은공! 협상을 요청합니다!”

“협상은 얼어 죽을. 그 여린 애에게 지네를 먹였다고 속이면 애가 경기를 일으키지 않을까?”

“그…… 그것은?!”

“삐익! 에러! 에러!”

륀느는 고장이라도 난 듯 기이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서 빙빙 돌았고 점순이는 멍한 얼굴로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하하…… 망할…….”

“은공! 이걸 먹으면 저희 정말로 죽어요오!!”

“안 죽어. 그렇게 쉽게 죽겠냐. 적당히 개량했으니 먹어 봐.”

“개…… 개량이요?”

“세계수 [알]에게 부탁해서 개량한 거야. 죽을 일은 없어.”

다만 일반 블랙스코빌보다 더 매울 거다.

내 미소에 유리아와 륀느, 그리고 점순이는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튀어요! 산개합니다!”

“으…… 으아악! 알아서 살아남아!”

“에러!에러!에러!”

순식간에 사방으로 튀어버리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환하게 웃었다.

“이것들이 튈 수 있을 거 같아?”

매달리는 것이 이것들에게 큰 효과가 없음을 깨달았으니 다음 걸 준비해 줬는데 이렇게 튄다고?

유리아는 정령을 불러내 도망쳤고 륀느는 세피로스화 하여 도망쳤다.

점순이는 나비여제 찬드라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내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잡히는 데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다만 유리아가 10초 만에 잡히고 점순이가 30초대에 잡혔음에도 륀느는 세피로스의 힘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가장 오래 버텨냈다.

정확히는 아직 잡히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긴장감과 패닉이 가득한 움직임으로 륀느는 영주성에 설치된 고정균열을 통해 에반젤린의 레어로 도망쳤다.

매달리는 것으론 더 이상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데이비가 초강수를 두기 시작한 이상 제아무리 뻔뻔하기 짝이 없는 륀느라도 긴장 상태에 돌입해야 했다.

잡히면 절대 좋은 꼴은 보지 못하리라.

아마 미각 센서가 한동안 오류를 일으키지 않을까.

륀느의 입장에선 그것만큼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초조하게 숨을 죽이고 숨을 장소를 찾으려던 도중이었다.

꿀럭!꿀럭!꿀럭!꿀럭!

어디선가 고양이가 토하는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륀느는 호기심에 못 이겨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소리가 들린 곳은 레어의 욕실 쪽이었다.

“음?”

그곳에 도착한 그녀는 기묘한 것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 보석?”

분명 에반젤린이 소중하게 가지고 다니던 보석이다.

아마 샤워라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목걸이를 밖에 둔 것이리라.

“륀느. 청각 데이터를 정리.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라 분석.”

륀느가 눈을 가늘게 뜨며 고요하게 놓여 있는 붉은 보석을 바라보았다.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붉은 보석을 바라본다.

미동도 없이 보석을 한참 노려보았을까. 눈도 없는 보석이 마치 륀느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생명체가 아닌 보석, 하지만 보석이 대량의 에너지를 흡수. 방대한 에너지는 질량을 보존하기 위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명시.”

저 보석은 페어리 여왕의 낙원에서도 막대한 에너지를 먹었다고 했던가. 륀느가 가진 정보대로라면 저 안에는 방대한 에너지가 있을 텐데. 그 방대한 에너지들은 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 중얼거린 륀느는 대뜸 욕실의 문을 두드렸다.

툭툭툭.

“어? 누구야!”

놀란 에반젤린의 외침이 들려온다.

“륀느?”

그리고 뒤이어 비화의 목소리도 들렸다.

“에반젤린, 그리고 비화. 륀느가 생존보장을 요청.”

륀느는 현재로서 가장 자신을 살려 줄 수 있는 존재를 찾았다.

“륀느? 무슨 일로?”

“데이비 님이 미식연구부서를 암살하기 시작했다고 보고.”

담담하게 상황을 토로하는 륀느를 보며 비화와 에반젤린은 서로를 흘끗 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쫓아오고 있으니 아빠가 들어오지 못하는 여기까지 도망쳤다 이거지?”

“…….”

데이비의 무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그렇기에 물리적으로 그에게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스팡!!!

“아 망할…… 륀느 이 자식이 머리를 굴려?”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데이비의 목소리가 륀느의 귓가에 감지되자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딸아이의 욕실까지 밀고 들어와 자신을 잡아가진 않겠구나.

“뭐…… 잠깐이라도 좋으면 들어와. 그동안 아빠도 지쳐서 돌아갈 수도 있고.”

비화는 내부에 있는 탕에 몸을 담근 채 느긋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바로 잡아서 내보냈겠지만, 아빠랑 한바탕 싸운 터라 오늘은 좀 말 안 듣는 딸 행세 해 보고 싶네.”

“언니도 그래? 나도 그래.”

생각보다 죽이 잘 맞는지 비화와 에반젤린이 키득거렸다.

그리고 한 켠에는 한창 늘어진 홍단이와 청단이가 미지근한 탕에서 반쯤 잠든 듯한 얼굴로 늘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륀느는 직감했다.

데이비가 절대 들어오지 않을 장소가 확실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