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28화
갑작스러운 에너지 반응 현상이 그녀의 감지에 걸려든다.
십중팔구 데이비가 분명했다.
이에 륀느는 숨을 죽이고 빠르게 더 깊이 들어갔다.
옅은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로 들어선 륀느는 데이비가 들어오지 못하는 장소임을 확신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륀느. 옷은?”
“륀느, 은신을 요청. 샤워는 필요하지 않다고 보고.”
“여기저기 흙투성이면서 무슨 소리를. 빨리 그거 벗기나 해. 그리고 우리 나가면 아빠가 잡으러 올 텐데? 못 들어오게 할 최소한의 방어는 해놔야 하지 않아?”
그래, 이곳은 그래도 당장은 안전할 것이다.
륀느는 잠시 침묵하더니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고는 입자를 모아 수건으로 만든 뒤 몸에 감았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비화와 에반젤린이 몸을 담그고 있는 커다란 탕에 몸을 날리듯 들어가 버렸다.
노곤한 기분이 륀느의 전신을 찌르르하게 자극해서 기분이 좋지만, 데이비에 대한 경계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그가 만약 정말로 무식하게 이곳까지 밀고 들어온다면…… 그땐 미리 준비해둔 비명을 발사해서라도 농성할 작정이었다.
물론, 이곳의 온천수가 마음에 드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매우 좋은 곳. 륀느가 하인스 온천수를 높게 평가.”
실제로 이곳은 하인스의 온천수를 이어붙인 장소이기도 했다.
“뭐, 온천수 효과가 상당해서 타국에서도 놀러 오곤 하지.”
관광지로 이제 자리를 잡은 덕인지 사업 자체는 잘되어가는 모양이었다.
이것이 여유인가. 이것이 탈출에 성공한 자의 달콤함인가.
홀로 그런 생각에 빠져있자니 에반젤린과 비화가 서로의 발육상태를 놓고 언쟁을 벌이는 게 천천히 들렸다.
둘에겐 애초에 륀느의 상황 같은 건 별로 관심 없는 부류의 문제인 듯 보였다.
“아니 쥐방울만 한 게 뭐 벌써 그런 걸 따져.”
“너무 빈약하잖아!”
“누굴 탓하겠어. 유전자를 탓해야지. 운 좋은 줄 알아. 이클립스는 너보다 훨씬 작았어. 헤라클래스의 체격이 커서 넌 그 정도에 그친 거야.”
이클립스라.
생각해보면 정말 경악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심연의 신 타나토스조차 잠식은 시키되 제어할 수 없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세피로스의 기억을 읽어봐도 그녀는 공포의 존재 그 자체였다.
그때였다.
곁에 설치된 통신 아티펙트가 우우웅! 소리를 내며 울렸고 륀느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았다.
동시에 욕탕의 안에서 데이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화야 에린아.
동시에 고롱고롱 잠들어있던 홍단이와 청단이가 눈을 반짝 뜨더니 벌떡 일어나 도도도! 소리를 내며 뛰어왔다.
“아빠!”
“아부아!”
-어…… 홍단이 청단이도 있었어?
“응! 비하랑 에리니랑! 가치 목욕하고 있섰서!”
“호…… 홍다니는 잠만 잤서…….”
“청다니도 잤자나!”
어눌한 발음으로 투닥거리는 두 아이가 귀여웠는지 데이비의 목소리가 한껏 누그러졌다.
바깥에서 내부와 연락을 위해 만들어놓은 통신장치였다.
“무슨 일이에요 아빠? 밖에 무슨 일 있어요?”
-별건 아니고, 륀느, 그 안에 있지? 걔 내 보내줄래? 그 녀석 데리러 온 거거든.
비화가 고개를 슬쩍 돌리며 음산하게 웃자 륀느가 사색이 된 얼굴로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데이비는 최대한 다정하게 두 딸을 설득하려 들었다.
-아빠가 거기 들어가긴 좀 그렇잖아?
“아빠 홍다니랑 같이 목욕해!”
“청다니도 좋아여!”
해맑기 그지없는 홍단이 청단이는 그저 좋은 모양이다.
물론, 비화나 에반젤린 홍단이 청단이까지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가정이었다면 아빠가 5살도 채 되지 않은 자식들 목욕시켜주는 데에 문제 삼는 이는 많지 않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홍단이나 청단이와 달리 다른 이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흐응. 아빠. 그럼 륀느 잡으러 온 거네요?”
-그래. 그 녀석 사고치고 그리로 도망간 거거든? 그러니까 내 보내줄래?
데이비가 웃는 목소리로 말하자 비화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상한데? 여긴 에린이나 홍단이 청단이 밖에 없는데.”
누가 봐도 속지 않을 거짓말이었다.
-비화야.
“히히. 장난이에요. 안에 있는데. 데려가실래요?”
-네가 좀 내 보내줄래?
“그러고는 싶은데에……. 지금 몸이 영 뻐근해서어~”
-야…… 야 임마!
비화가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대답하자 데이비가 한숨을 내쉰다.
-그래. 알았어. 륀느, 듣고 있지.
“…….”
-나오면 죽었다 너는.
륀느의 무표정은 그대로였으나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후 륀느는 몸을 공처럼 둥글게 말아 뜨거운 온수 속으로 꼬르륵 소리를 내며 잠겨버렸다.
이에 홍단이와 청단이가 쪼르르 달려가 물속에 잠겨버린 륀느를 따라서 잠수하더니 그녀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물론 반응 따윈 하지 않는다.
뽀글거리는 것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모양이다.
“안 나가고 버티려나?”
“알아서 하겠지~ 여기서 아빠 말 더 안 들으면 우리 혼날걸?”
장난은 거기까지였다.
그때였다. 비화가 뭔가를 느낀 듯 눈가를 꿈틀하더니 짜증을 부렸다.
“아씨…… 또 무슨 일이야.”
“나가게?”
“기도가 들려서, 이렇게까지 절박하고 강렬한 기도는 처음인데…… 아무래도 거품 세계 쪽에 문제가 생긴 거 같거든, 가봐야 할 거 같아. 나중에 또 올게.”
“어? 어어? 약속은!? 같이 게임을 하자고 했잖아.”
“미안, 다음에 하자.”
그리 말한 비화는 씩씩거리며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이후 홍단이와 청단이도 더워졌는지 쪼르르 뛰어나가 버렸고 에반젤린은 물속에 잠긴 채 계속 뽀그르륵 소리를 내는 륀느를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조용한 날이 없어요.”
홀로 남은 륀느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빠르게 머릿속을 굴렸다.
당장 데이비가 들이닥치지 않는 것은 좋지만 이대로 잡혀가면 블랙 스코빌 형에 처할 것은 자명했다.
어쩌면 괘씸죄를 들먹이며 두 개를 먹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륀느는 온몸에 경기가 돋는 기분이 들었다.
미각 데이터에 집착하는 그녀지만 블랙 스코빌은 애초에 식재료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과일이 아닌가.
차라리 예전처럼 육체 감각 일부를 완전히 차단해버릴 수 있다면 문제가 되진 않을 텐데.
육체는 생체 골렘이기에 과거엔 이런 경험이 적었지만 세피로스로 각성하면서 육신에 일부 변화가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륀느는 기척을 하나 느껴지지 않는 바깥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데이비가 이렇게 포기할 인간군상이 아닌데.
밖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뭐 이런 변태가 다 있나 싶은 느낌도 들 지경이다.
그렇기에 의심스러웠다. 정말로 있긴 한 걸까. 이미 돌아간 건 아닐까.
느긋하게 탕을 즐기는 것도 잠시뿐이지 아무것도 없는 이 고요한 온천에 계속 있는 것도 륀느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이에 륀느는 조용히 입자를 구현해 그녀의 눈을 대신해줄 소형 드론 같은 것을 구현해냈다.
그리고는 바깥으로 슬쩍 내밀어 보냈다.
치익…… 치잉…….
작은 소리가 울리며 주변 모습을 담는다.
하지만 데이비는 보이지 않았다.
돌아간 것인가.
아니, 쉽게 속단하기엔 이르다.
그녀는 최대한 경계태세를 올린 채로 주변을 둘러보며 조심스레 나갔다.
하지만 데이비는 보이지 않았고 그의 기척, 마나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호재나 다름없었다. 데이비가 없는 틈을 타 지금 흔적을 세심하게 지우고 도망친다면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에 적잖이 안도한 륀느는 조심스레 탈의실에 놓인 옷가지를 바라보았다.
에반젤린이 입으라며 가져다 놓은 옷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준비해둔 것인데 안 입을 순 없는 노릇. 륀느는 담담하게 옷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스팡!!!
동시에 주변 풍경이 변한다.
“…….”
강렬한 빛 끝의 끝에서, 그녀의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다소곳이 앉아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고 있는 유리아와 점순이였다.
“어머. 륀느 양. 왜 그런 차림으로?”
“뭐야. 설마 잠입하려고 그 꼴로 나타난 건가? 역시 또X이답네, 우릴 구하러 온 거지? 그렇지? 나 지금 손 떨리거든? 블랙 스코빌은 진짜 아니야.”
놀란 두 사람을 본 륀느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깔끔한 방이지만 창문 하나 없다.
실제로 이런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 알고 있다. 유폐실. 혹은 반성실.
그 외에 신전에선 참회소로 이용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데이비가 애용하진 않지만, 탈옥을 막아둔 건 분명해 보였다.
“륀느도 잡혀 왔다고 보고.”
륀느는 손에 든 옷을 주섬주섬 걸치고는 조용히 말했다.
너무 뻔해서 생각지도 못한 트랩에 걸려버렸다.
옷에 전이 마법을 새겨버릴 줄이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이딴 미친 짓을 가능하게 하려면 데이비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쫓던 것은 데이비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히 생각했어야 할 일이기도 했다.
륀느의 뺨이 부풀어졌다.
“여성 탈의실에 무단침입. 이것을 륀느가 낮게 평가.”
뺨을 잔뜩 부풀린 채 말하지만, 데이비는 심드렁했다.
“그거, 비화가 걸어놓고 간 거야.”
“…….”
비화의 배신이 충격적이었는지 륀느가 눈을 크게 떴다.
“너 인마. 니들 장난 때문에 에오니샤가 기절해버렸는데 비화가 잘도 도와주겠다.”
륀느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비화를 악랄한 여신으로 수정했다.
“한 개씩만 먹자. 면역력 기르는 것도 아니고 매달리는 거로는 씨알이 안 먹히니 원…….”
데이비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당장 블랙 스코빌을 먹이겠다고 덤벼들진 않았다.
“맞다. 륀느.”
데이비가 손에 들고 있던 블랙 스코빌을 아공간 속에 던져넣고는 물었다.
“비화가 나가기 전에 뭐라 했는지 들은 건 없어?”
“자세한 설명을 요구.”
“별건 아니고. 비화 표정이 심상찮아서.”
그 말에 륀느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협상을 요청.”
“좋아. 두 개에서 하나로 줄여줄게.”
“안 먹는 것을 요구.”
“세 개 먹고 싶다고?”
데이비도 뚝심 있게 밀어버리자 륀느는 말없이 데이비를 보다 조용히 답했다.
“간절한 기도가 들렸다고 언급. 거품 세계 쪽 문제라는 말도 들었음을 명시.”
“기도에 거품 세계 쪽이라…… 가상공간에 있는 그것들 말하는 건가? 갑자기 일거리가 생겼나 보네.”
인상을 찡그린 데이비는 뭔가 생각하는듯하더니 블랙 스코빌 세 개와 우유를 내려놓았다.
“하나씩 먹고 나와. 괜한 사고 좀 치지 말고. 너희 진짜 내가 어지간한 사고는 다 덮어주고 있는 거 알지?”
그는 직접 집행하진 않겠다고 말하듯 떠나가버렸다.
“저기. 륀느? 무슨 이야기죠?”
당연히 유리아와 점순이는 궁금증을 숨기지 않았다.
“륀느도 분석 불가.”
다만 륀느라고 해서 아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 * *
“죽여라!! 죽여라!!”
“불을 놓아라!!”
“마녀에게 처단을!!”
지독한 광기의 현장.
수많은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분노를 토해내는 그곳에는 아직 어려 보이는 한 아름다운 소녀가 공허한 얼굴로 커다란 장작더미 위에 묶여있었다.
“마녀 레밀리아는 들어라. 그대는 인류를 지켜야 하는 사명을 띠고 하늘 같은 황제 폐하의 은총을 받았음에도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행보를 보였다. 반역자를 두둔하고, 죄 없는 제국민을 죽인 것도 모자라 반역을 꾀하였지, 따라서 황제 폐하의 근엄한 명에 따라 너를 마녀로 규정하고 화형에 처한다.”
마치 선고하듯 말하는 귀족의 말에 소녀는 옅게 쿡쿡거렸다.
“바보 같은 새끼……. 세상을 위해서라니. 그렇게 있는 거 없는 거 다 내던져서 구한 세상이…… 고작 이거야?”
철컥!!
마치 경계라도 하듯 병사들이 창끝을 그녀에게 겨누었지만,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원통해.”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하늘을 보며 말했다.
“처참하게 죽어간 너의 넋을 풀어주지 못해서.”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듯 계속 말했다.
“자기 잇속을 챙기고 배를 불리는 구역질 나는 자들의 손에 농락당하고 죽은 네 누이의 한을 풀어주지 못해서.”
“집행하라!!”
“죽여라!! 죽여라!!”
“마녀를 불태워 죽여!!”
이윽고 화마가 일었다.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자 그녀는 허망하고 공허한 눈빛으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제 혼자 살겠다고 지켜야 할 이를 팔아버린 자들 때문에 몬스터에게 산채로 잡아먹힌 내 동생의 슬픔을 달래주지 못해서.”
그녀가 비릿하게 웃었다.
“저 악마보다 더한 괴물들을 하나라도 더 지옥 불구덩이 속에 빠뜨리지 못해서.”
화르르르륵!!!
그녀를 집어삼킬 듯 커진 화염은 이제 더없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보여? 너를 칭송하고 너를 따르던 인간들의 이면이? 거짓선동에 놀아나 널 죽일 듯 저주하던 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넌 저승에서 이걸 보고 무슨 말을 할까.”
세상이 위험할 땐 그토록 찾았던 주제에. 위험이 끝나고 자신의 권위가 시험받게 되자 곧바로 숙청하는 그들의 몰골을 보며 레밀리아가 마지막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화염은 이미 그녀의 지근거리까지 타올랐고, 곧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뒤덮으리라.
두려웠지만 공허한 마음도 가득했다.
하지만 화염이 그녀에게 닿기 직전. 시간이 멈춰졌다.
“…….”
“어서 오세요. 외부의 신이여. 이곳에 온 것은 당신이 처음이군요.”
아름다운 신전의 안에서 두 명의 남녀가 느긋한 자세로 테이블 중앙에 놓은 빛의 구체를 바라본 채 말했다.
“설마 외부의 또 다른 신이 존재할 줄 몰랐는데 말이야. 아직 어린 신인가?”
“후후, 신에게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중요한 건 그 품격이랍니다.”
오만한 말투로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를 보며 비화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과거 티오니스를 침공했던 종양이 가득하던 차원과 비슷한 케이스다.
물론, 이놈의 세계는 종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때 그런 선례가 남은 탓에 극소수로 이렇게 자신을 신이라 믿는 가짜 신들이 나타나곤 했다.
비화는 말없이 그들이 마주 보고 앉아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당신은 이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취미가 안 좋은데.”
비화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사내가 낄낄거렸다.
“아직 어린 신에겐 조금 자극적이겠지. 하지만, 유흥으론 더할 나위 없다.”
“지금 보고 있는 장면은 한때 용사로 지정된 소년의 가장 소중한 친구랍니다.”
“그래서?”
“인류를 위해 신의 신탁을 받고 검을 든 고결한 소년과 마법의 축복을 받은 소녀. 그들의 마지막이지요.”
“빙빙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흐흠. 아직 어린 신이라서 그런지 굉장히 성격도 급하고 품위도 없군.”
팔짱을 낀 채 한쪽 다리를 꼬고 있던 미형의 남성이 비화를 슬쩍 바라보았다.
“시건방진 건 아무래도 좋다만 상대는 봐가면서 까부는 게 좋지 않을까?”
동시에 무형의 힘이 비화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
이에 비화는 담담하게 여성을 바라본다.
“그만두세요. 그녀가 힘들어하지 않습니까.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니 다독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흥이 식는군.”
비화의 눈이 꿈틀했다.
이것들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렇게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가만히 있자 여성은 그녀가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남성이 만들어낸 위압을 지워냈다.
“겁먹지 말아요. 우린 당신을 해칠 의도가 없어요.”
“됐고, 이게 뭔지 설명부터 해.”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저 일개 인간 소녀가 그토록 강렬한 기도를 올렸는지.
비화는 뒷말을 삼켰다.
어차피 이것들이 다 털어놓을 테니까.
“단순한 유흥이다.”
“그와 저는 한가지 내기를 했답니다. 제가 만들어낸 가장 고결한 용사와 그 반려가 역경을 겪고 모든 일의 종지부를 찍었을 때.”
“과연 그들은 타락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타락한 그들은 심연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가. 뭐. 보다시피 얼마 가지 못해 저런 결말이다만. 생각보다 너무 시시하고 뻔해서 낡을 정도야.”
영상 속에 비친 소녀는 아무래도 저 여자가 만들어낸 용사의 반려였던 모양이다.
제법 뛰어난 마법 실력을 지녔지만 크게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
“그녀는 타락했고, 추악한 곳까지 추락했지. 이걸로 내기는 내가 이겼다. 나쁘지 않은 유흥과 서사였지. 이봐. 이렇게 찾아온 것도 인연인데. 같이 내기라도 해보겠나?”
사내의 질문에 비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너희는 지금 두 인간의 혼에 축복을 불어넣고 그걸 다시 추락시켰다 이거네? 그리고 그걸 보면서 낄낄대고 있는 거고? 용사를 만들어낸 년은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른 채 책임도 지지 않고 있고, 다른 놈은 겁도 없이 그걸 비틀어 타락시키고 있고.”
“건방진 입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야. 선배에 대한 예우는 갖춰야 하지 않겠나.”
쿠구구구구구구!!!!
다시 한번 주변을 짓누르는 압력이 비화를 덮쳐왔다.
하지만 이번엔 비화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천천히 다가간 그녀가 손을 뻗는다.
“손을 함부로 대지 않는…….”
비화에게 경고를 하려던 남성은 순간 비화의 작은 손이 그의 방벽을 모조리 분해시키며 파고들자 눈을 부릅 떴다.
콰아앙!!!!
동시에 비화의 손이 사내의 머리통을 휘어잡은 채 테이블에 처박아버렸다.
“끄으으윽?!”
순식간에 그의 육신에 거대한 노이즈가 생긴다. 마치 존재 자체가 조율되어 사라지는듯한 모습이었다.
“이…… 이년이!”
다만 사내는 단번에 제압되지 않는지 막대한 힘을 내뿜으며 비화에게 반격을 가하려 했다.
하지만.
“뭐, 왜 뭐, 너희 같은 암세포 때문에 내가 또 야근하게 생겼잖아. 어?”
쾅!! 쾅!! 쾅!!!
마치 어린아이와 어른의 싸움처럼 아예 비교 자체가 안되는 힘 싸움에 사내의 형태가 막대한 노이즈를 일으키며 비틀렸다.
“어째서 그렇게 깊고 처절한 기도가 내게 올라왔는지 의심스러웠는데. 니들. 내가 이 차원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보호 시스템을 멋대로 써대면서 생명체의 혼을 가지고 놀았구나?”
저거 뒤처리를 하는 쪽은 생각도 안 하고 말이야.
비화가 스산하게 웃었다.
“너희는 암 덩어리야. 남이 일하는데 방해만 되는 암세포 같은 것들.”
“당신…….”
사내가 순식간에 제압당하자 여성이 놀란 듯 비화를 보며 벌떡 일어났다.
“앉아 x년아.”
짜아악!!
이번엔 여성의 뺨을 후려치자 여성의 전신에서 막대한 힘이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거품 세계는 엄연히 프리아 여신이 만들어낸 하나의 세계지만 이 거품 세계가 자리를 잡고 있는 가상공간은 엄연히 비화의 영역이며 그녀의 손에서 모든 것이 정립된다.
즉 저들은 비화의 힘을 허락도 없이 빌려 쓰는 주제에 그녀에게 대적하고 있는 셈이었다.
“윽?! 이게 무슨?!”
갑자기 자신의 힘이 동결되어버리자 그녀는 당황한 듯했지만 비화는 안광이 서리는 서슬 퍼런 시선을 내비치며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 수차례 뺨을 쳐올렸다.
“난 우리 여신님처럼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야. 우리 아빠처럼 성질머리가 정말 더럽거든.”
짜악! 짜악! 퍼억!
“악!! 꺅! 악!!”
“전에 너희랑 비슷한 짓을 한 년이 하나 있었는데 말이야. 겁도 없이 세상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급기야 태초 신을 공격한 정신 나간 년이.”
“으으…….”
“그런데 말이야. 걔는 몰라서 그랬다 쳐도 너흰 질이 많이 안 좋네.”
둘 다 가차 없이 처박아 제압해버린 그녀는 미련 없이 이 두 암세포를 한쪽 구석에 던져버렸다.
꼴에 신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며 품위니 뭐니 했지만, 비화의 눈엔 하찮을 뿐이었다.
그래, 이것들은 덤이다.
화형을 당하기 직전인 저 소녀가 기도의 주체이며 지금 가장 중요한 존재였으니까.
의도하지 않았지만 축복받은 혼이 되어버린 이상 그녀의 혼에 이상이 생기면 축복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발생하게 될 터.
그리되는 순간 이 거품 세계는 이른 시간 안에 붕괴해버리리라.
그리되면 결국
프리아 여신에게 혼나는 건 비화였다.
그녀로선 갑자기 야근을 하게 생긴 이 상황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