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32화
사람이란 자신의 행동이 제어되지 않을 때 당황하곤 한다.
허겁지겁 뛰어 도망쳐버린 그녀는 인적이 드문 들판의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을 때 멈췄다.
“후우…… 후우…….”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그녀는 몸을 웅크리듯 쪼그려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동시에 알 수 없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내가 웃었다고?”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중했던 사람들을 모두 잃고 악귀처럼 복수만을 찾아 헤맸던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 같은 감정은 너무 오래전에 잃어버린. 그리고 이제 와서는 절대 찾을 수 없고, 찾아서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가려지지 않은 입가가 형태를 어찌할지 몰라 파르르 떨리다가 이내 변했다.
이를 악물며 그녀가 끔찍한 자괴감이 서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이렇게까지 가벼운 존재였어?”
손을 천천히 뗀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죽었을 때…… 다시는 웃지 않겠다고 했는데…….”
잘생긴 이들과 잠깐 지냈다고 헤벌려서 자신도 모르게 전부 잊고 웃고 있다니.
도저히.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네 묘비 앞에서 난 맹세했어. 우리를 나락에 빠뜨리려 한다면…… 그곳에서 그들을 끌어내리기로…… 그런데 나만 위로 다시 올라간다니…….”
도저히 스스로가 증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모든 행동에 그녀는 더 이상 뒤가 없다는 듯한 행동이 많았으니 말이다.
“내 손…… 내 손은…….”
피가 잔뜩 묻어있는데.
분명 새하얀 손이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시뻘건 피가 잔뜩 묻어 누군가의 절규마저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아무리 신의 허락이 있었다지만 그녀는 수많은 인간을 죽인 존재였다.
물론 그녀가 죽인 존재에게 동정을 품을 생각은 없었다.
다시 돌아가더라도, 혹여 시간이 완전히 되감아지더라도 그녀는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는 소중한 친구와 한 약속을 져버려야 했다.
복수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의 외침도 무시하고 악귀처럼 날뛴 적도 많았다.
오로지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그런 피비린내 가득한 길을 당당하게 걸어온 주제에 이제 와서 밝고 빛나는 길에 어물쩍 손을 대려 하는가.
쾅!!
분을 참지 못한 그녀는 등을 기대고 있던 바위에 주먹을 내질렀다.
“아야야…….”
그리고는 곧바로 비명을 지르며 추욱 늘어졌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이건 옳지 않아.”
그래. 시작은 여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부터였다.
그녀에게 이런 건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살인자이며, 학살자. 그리고 피에 미친 악귀일 뿐이다.
“저런 곳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그런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그녀는 이제 과거의 망령일 뿐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것들은 해선 안 될 일이기도 하다.
생각을 마친 그녀는 공허해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휘청휘청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 * *
“그녀가…… 사라졌다고요?”
“그런 거 같아요. 영지 내에 설치해둔 시스템을 확인해봐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어요.”
에오니샤의 대답에 유리아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네요. 너무 가볍게 접근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결국…….”
계획 자체는 순조로웠지만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느낄 지독한 거부감이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상처가 깊었나 보네요. 미안해요.”
“유리아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애초에 시작은 비화가 먼저 한 거니까.”
에오니샤의 말을 비화가 들었다면 그거 맞아요. 고모? 하며 어이없어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럼 현재 그녀가 있을 곳은…….”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 륀느가 추적을 높게 평가.”
“아뇨. 저희는 나서면 안 됩니다.”
유리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도록 하죠. 우리 비화 아가씨가 며칠이라는 유예를 두긴 했지만 사실 좀 더 늦어진다고 문제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지금 상황은 그저 그녀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전부였다.
“다만. 그녀가 향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은…….”
“거기 뭔가 있나요?”
“아뇨…… 얼마 전에 몬스터 스탬피드가 한 번 있었죠. 신수 청룡인 쿠릉이가 난동을 피웠다가…….”
“그건 잘 해결되지 않았나요?”
“네. 뭐 그렇긴 한데…….”
티아라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뭔가 빼먹은 기분이라…….”
“그쪽 평야 근처에 있는 숲이면…… 일단 출입금지 구역 아닌가요?”
“그렇죠. 여러 실험을 하는 곳이기도 하고 몬스터가 간혹 유입되는 곳이기도 하고.”
그때 에오니샤가 뭔가 생각하다 인상을 찡그렸다.
“저도 기억력은 좋은 편인데, 발전기 말고는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별일 없겠죠.”
* * *
아무도 없는 고요한 들판.
작은 바위 하나에 등을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는 방향을 잃어버렸다.
여신의 힘으로 이곳으로 온 이상 그녀에게 있어서 스스로 돌아갈 방법도 없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비화의 힘 때문인지 불가능했다.
정확히는 급속도로 그녀의 마나가 휴면상태로 들어가고 있다.
회복을 위한 수단이라는 느낌은 있지만 지금 그녀는 사실상 비화의 힘을 받은 후의 수준은커녕 본래 수준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의 힘을 다룰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들의 노력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역시 자신은 그런 밝은 곳으로 갈 자격이 없다.
그때였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있었나.”
담담하게 다가오는 상당한 체격을 지닌 사내. 본래라면 거부감이 들 정도가 아닐까 싶지만 어째서인지 굉장히 그 체격이 자연스러운 사내였다.
“두억시니 씨.”
“네 영혼에서 절규가 느껴져서 찾아왔다.”
담담하게 다가오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소리 질렀다.
“멈추세요!!”
빽 소리 지르며 그를 멈춰 세운 레밀리아는 휘청거리며 한발, 두발 물러났다.
“거기서…… 다가오지 마세요…….”
“왜 그러지? 휘청거리고 있지 않나.”
“나…… 난 그런 존재가 아니에요. 저를 생각해서 노력해주신 건 고맙지만…… 전 이럴 자격이 없는 존재예요.”
“자격이 없다?”
“……네. 자격이 없는 살인자. 피에 젖은 학살자. 복수에 미친 악귀.”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보이며 말했다.
“당신의 눈에 제 손은 어떻게 보이죠?”
“평범한 손이다만.”
“아뇨. 제 눈에는 시뻘건 피가 가득 묻어있어요. 지독한 혈향에 끔찍한 몰골이죠……. 이 피는 물로 씻는다고 사라지지도 않아요. 그리고. 당신들과 닿으면 당신들에게도 이 피가 묻고 있죠.”
물론, 사실은 아니었다. 그저 지독한 PTSD를 겪는 레밀리아가 그리 여길 뿐이다.
“멍청한 생각이다. 그런 건 실존하지 않아.”
“내 눈에 보인다고요!!!”
그녀의 외침에 두억시니는 무언가 말하려다 멈췄다.
“영혼이 불안정해지고 있군……. 그래. 그런 것이었나.”
“죄송해요……. 당신들과 보낸 시간은 아주 짧아요. 바보같이 헤벌려서 저도 모르게 웃어버릴 만큼 너무 그리우면서도 행복한 기억이었어요.”
하지만 그렇기에.
“하지만, 그렇기에 더는 당신들과 있을 수 없어요. 당신들과 있으면 나는 과거를 전부 부정해버리는 느낌이 드니까.”
악귀가 되어 모조리 나락으로 떨어뜨린 주제에. 친구와의 약속마저 헌신짝마냥 버려가며 피를 묻힌 주제에 이제 와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는 게 가당키나 할까.
죽은 이들을 동정하는 게 아닌. 그들의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똑바로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업을 짊어지는 행위는 보통 쉬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나? 그놈들은 죽어 마땅한 것들이었다고 알고 있다만.”
“맞아요. 죽어 마땅한 것들이죠. 하지만, 학살자가 된 것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외면한 것도 사실이에요.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가 죽어간 이들의 시체를 밟고 나서야 할 때도 많았죠.”
그들의 원성이 아직도 귓가에 들린다. 손에 묻은 그들의 피가 지워지지 않는다.
그녀의 말에 두억시니는 혀를 짧게 찼다.
“쓸데없이 귀찮은 성격이로군.”
“……그러니 저는 그곳으로 갈 수 없어요. 저는 당신들과 달라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고개를 꾸뻑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네 선택이 그러하다면 존중은 하겠다만.”
애초에 두억시니는 그녀를 어떻게 다독이겠다는 계획이 없었다.
도깨비의 시선에서 보기에 그녀의 고민은 참 하찮고 별 볼 일 없는 고민이지만 적어도 도깨비와 인간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최근 하인스에서 지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바뀐 것도 분명 존재했다.
잘 모르겠다면. 차라리 침묵하라.
그것이 현재 그의 스탠스였다.
“그럼 뭘 하고 싶은 거지?”
“……제가 웃고 즐거워하는 건 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향한 모독이에요.”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녀와 용사를 저버렸지만 그중 일부는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존재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죽어버렸기에, 더는 희망이 없기에 인류의 멸절을 바라기도 했다.
그걸 부정하진 않았다.
“여신님께 간청해서 제자리로 돌아가겠어요. 친구의 묘 옆에서 제 마지막을 보낼 수 있…….”
콰아아앙!!!
그때였다.
숲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충격파가 날아와 그대로 두억시니를 튕겨 날려버렸다.
“두…… 두억시니 씨?!”
깜짝 놀란 그녀가 벌떡 일어난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방금 전 느낀 충격량은 극도로 위험한 압축탄이 분명했다.
어지간한 생명체라면 간단히 찢어버릴 수 있는.
그런 공격을 직격당했다면, 두억시니라 할지라도 버틸 수 없을 터.
그녀는 억지로 마나를 활성화하며 숲 저편에서 다가오는 무언가를 향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저게…… 무슨.”
숲에서 나온 것은 거대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무언가였다.
“아이언 네메시스…….”
거대한 사자 형태의 몸에 원숭이의 머리. 그리고 뱀의 꼬리를 지닌 키메라.
유명한 몬스터였다.
다만 일반적인 키메라와 달리 금속을 주식으로 하는 아이언네메시스는 말 그대로 재앙에 가까운 몬스터로 분류된다.
다만 아이언네메시스는 일반적인 키메라형 네메시스와 달리 굉장히 온순하고, 생명 친화적인 녀석이기도 했다.
즉, 위험하지만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굳이 다른 생명을 해치는 존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분노했어?”
그런 아이언네메시스가 극도로 분노한 증거로 꼬리인 뱀의 비늘들이 마치 칼날처럼 바짝 세워져 있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굳이…… 이겨야 할까?’
아이언네메시스가 왜 여기 있는지. 또 왜 저렇게 화가 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녀석의 적의 어린 시선이 그녀에게 닿은 것은 분명했다.
이윽고 그녀를 향해 빠르게 돌진하는 거대한 금속 몬스터를 보며 그녀가 눈을 감았다.
그래. 차라리 여기서 죽는다면, 모든 게 옳게 돌아가는 것이리라.
-크아아아앙!!!
거대한 포효소리와 함께 녀석의 거대한 앞발톱이 그녀를 찢어발기려던 찰나.
터어엉!!!
묵직한 소리와 함께 두꺼운 금속이 무언가에 막히는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놀란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희귀종인가? 얼마 전에 아이언네메시스 한 마리가 이 근방에 자리를 잡았다는 건 알았다만. 이성을 완전히 놔버렸군.”
거대한 앞발을 팔뚝으로 막아서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두억시니였다.
옷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지만, 그의 몸에는 어떤 상처도 없었다.
“두억시니 씨?”
“다친 곳은?”
“어…… 어, 없어요…….”
떨떠름하게 답하자 두억시니가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그녀의 눈이 더욱 크게 뜨여진다.
“다행이군. 예쁘장한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슬픈 일이지.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재밌게 놀았는데 다치면 마음이 편치않았을 거다.”
“아…….”
왜 그가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감이 드는 것일까. 그가 저런 미소를 짓는 것에 심장이 뛰는 건가.
“죽고 싶어 한다고 했던가?”
“네?”
의아한 질문에 그가 피식 웃었다.
“이상하군, 네 친구는 그걸 바라지 않는 모양이야.”
아이언 네메시스의 공격을 한쪽 팔뚝으로 막아낸 그는 나머지 손을 뻗어 그녀의 목걸이를 가리켰다.
“신기한 힘이구나. 이건…… 여신님이 활성화해놓은 건가?”
“그게 무슨…….”
“네가 다치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란 누군가의 염원이 물건에 남은 거지. 비록 미약하지만, 여신의 힘이 깃들면서 그게 눈에 보일 정도로 드러난 거다.”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두억시니는 잠시 고민하듯 침묵하고는 다시 말했다.
“우선 이놈부터 치워야겠군.”
“자…… 잠깐만요! 아이언네메시스는 위험한!!”
[도깨비 방망이.]
한 손에 빛이 모여든다.
동시에 두억시니의 비어있던 손에 커다랗고 묵빛을 띠는 거대한 도깨비 방망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네 영역을 벗어났는지는 모르겠다만. 공격을 시작한 건 네 녀석이다.”
그 말과 동시에 아이언 네메시스의 입에 거대한 충격파가 모여들었다.
지근거리에서 다시 압축탄을 발사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두억시니는 심드렁하게 방망이를 빙그르르 돌렸고 왼팔로 온몸을 짓누르는 아이언네메시스를 튕겨냈다.
터엉!!
-크아악?!
압도적인 중량과 힘이 순식간에 밀려 나가버리자 아이언네메시스가 당황한 듯 크게 포효했다.
하지만.
녀석이 압축포를 쏘기도 전에 두억시니는 이미 녀석의 앞에 자리하고 양손으로 도깨비 방망이를 움켜잡고 있었다.
쩌어어어어엉!!!!!
그리고, 그 찰나의 틈 속에서 두억시니의 도깨비 방망이가 압축된 공기탄을 그대로 찢어발기며 아이언네메시스의 머리통에 작렬했다.
콰직!!
섬뜩함 소리와 함께 금속으로 된 녀석의 육신이 일순간 일그러지며 튕겨 나갔다.
“묵직하구만. 손맛이 좋은 건 좋다만, 고작 이런 놈을 상대로 저항감을 느끼는 건 쇠질이 부족해서겠지.”
온순하다곤 하나 재앙급의 몬스터나 다름없는 아이언네메시스를 한방에 뭉개버린 두억시니의 말투는 굉장히 가볍기 그지없었다.
“크하하하!”
호쾌하게 웃으며 돌아서는 그를 보며 그녀는 혼란스러워 해야 했다. 그가 다친 곳이 없다는 것에 안도하는 자신이 예전의 자신과 너무 달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말로만 아니다, 그곳으로 갈 수 없다. 자신은 더럽혀진 학살자다 말은 했지만.
정작 내면의 어딘가에선 그가 나타나 준 것에 감동했고, 그가 다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지 않았나.
이 기묘하고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그녀가 혼란스러워하던 찰나.
그녀는 조금 전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에게 소리쳤다.
“저기!”
“엉?”
“방금 했던 말이 무슨 말인가요?”
그녀가 자신의 목걸이를 들어보이며 물었다.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였던 용사가 죽기 전 그녀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말 그대로다. 누군가가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준 그 염원이 여신의 힘에 의해 가시적으로 보인 것이라고.”
그 말에 레밀리아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괴롭게 죽었으면서. 넌 염원으로나마 남아 내가 행복하길 바랐다고?
멍청이야? 대체 왜?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목걸이를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고작해야 빛나는 것 말곤 아무런 효능도 없는 목걸이다.
본래라면 평생 드러날 일이 없어야 하지만 용사가 남긴 소망의 잔재를 비화가 볼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목걸이에는 그의 혼 따위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런 작은 빛나는 효과 하나뿐일지라도 그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음…… 이럴 땐…….”
엉엉 우는 레밀리아 때문에 잠시 고민하던 두억시니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등을 토닥인다.
“듣기로는 이럴 때 다독여주라더군.”
“흑…… 흐흑…….”
“주변엔 아무도 없다…… 라고 해야 한다고 했던가.”
두억시니의 말에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음……. 쉽지 않은 작전이군……. 그래도 꽤 즐거운 것도 사실이다. 보통은 우릴 보면 무서워하거든.”
물론, 그 시작은 그들의 외형이 문제였지만 레밀리아는 생각 이상으로 단시간에 그들과 친해진 케이스였다.
그녀가 울음을 멈춘 것은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유리아는 두억시니로부터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달받았고, 한창 차원의 복구와 조율로 정신이 없는 비화를 만났다.
“비화 아가씨.”
“이야기 들었어요. 신경 써주셨다면서요?”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랍니다.”
“뭐, 과정이 좀 엉성하긴 해도 결과는 괜찮네요.”
그 말에 비화가 피식 웃었다.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애초에 이런 상황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
비화가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사태가 이렇게 커지지도 않았을 텐데.
“그 용사 아리스라는 소녀와 상황이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죠. 기왕 도와주고자 했으면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니, 은공께서 기뻐하시겠어요.”
“아 참. 아빠 지금 영지개발부 잡으러 갔는데.”
“네?”
“그 아이언네메시스요.”
생각지도 못한 고위 몬스터의 폭주사태. 유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비화가 피식 웃었다.
“그 숲에서 여러 실험을 하는 건 알고 있죠? 영지개발부서가 거기서 발전기 실험을 했었거든요.”
“발전기?”
“네. 에린이의 떡볶이가 품고 있는 어떤 에너지가 먹는 이들을 쓰러뜨리는 게 아닌가, 반신도 쓰러뜨릴 정도면 그 에너지는 정말 친환경 최고의 에너지가 아닌가 하면서 기괴한 실험을 하다가 엎어진 적이 있거든요. 아빠한텐 비밀로 했었는데.”
“설마…….”
“네. 그 잔재를 아이언네메시스가 먹고 쓰러졌다가 이성이 날아가 버렸나 봐요.”
심심하면 드러나는 에반젤린의 떡볶이.
그 악명은 익히 알지만 정말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고대룡의 특성 중에 그런 게 있는 건지. 아니면 정말 제조과정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는 것인지.
“실제로 그 애가 나름대로 열심히 만든 건데, 그걸 에너지원, 무슨 핵분열 반응하는 우라늄 보듯이 본 게 화났나 봐요. 아주 매달아버릴 기세던데.“
어이가 없는 상황이다.
“흐음……”
그래도 사고는 사고이니 데이비가 잡으러 간 것일 터.
“설마 저희도?”
“아뇨. 미식연구부서는 이번에 상점이래요. 좋은 일을 해줬다고.”
비화는 뒷짐을 진 채 빙그르르 돌며 말했다.
“아 참. 그 셋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지금 한창 레밀리아 양과 당구를 치고 있을 거예요. 처음 해보는 거라 그런지 엄청 재미있어하던데.”
“응어리진 건 털어냈나 보네요.”
“털어냈다기보단 노력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이성의 한켠에선 아직 살인자이며 학살자인 자신이 이렇게 즐거워선 안 된다고 하지만……제 친구의 염원을 마냥 무시할 순 없었나 봐요. 그보다 신기하네요. 정말 그런 기능이 있는 줄은.”
“기능?”
“네. 물건에 그런 염원이 남아서 오랜 시간 그녀의 곁을 지킨 것 말이죠. 아무리 신의 권능이 있었다곤 해도…….”
“보통은 그렇게 되지 않아요. 유리아.”
“무슨 말씀이세요?”
“극히 드문, 아주 천문학적인 확률로 생겨나는 현상, 말 그대로 기적이라는 뜻이죠.”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비화의 말은 유리아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아 참. 그리고, 당분간은 레밀리아와 그 근육 바보 셋을 붙여둘 생각이에요.”
“돌아가야 하는 거 아니었나요?”
“조율하면서 그녀가 차원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을 늘리고 있어요. 조만간 완전히 떨어져도 괜찮을 정도로.”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관련이…….”
“넬타리드를 쥐어짜서 알아낸 사실인데…….”
비화가 한숨을 내쉰다.
“그 근육 덩어리 바보 셋 중에 하나와 레밀리아가 붉은 실로 이어졌어요.”
운명의 붉은 실.
다른 말로 하면 소울메이트라 할 수 있다. 데이비가 페르세르크와 붉은 실로 두껍게 이어져 있는 것처럼.
“사실 소울메이트라곤 하지만 꼭 사랑이 관련될 이유는 없어요. 다른 시선으로 보면 가장 소중한 친구도 될 수 있죠. 어쩌면 그녀는 많은 차원 중에 극히 낮은 확률로 태어난 저 근육 바보들의 최고의 친구, 혹은 연인이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정작 데이비는 차원 수호 용사파티에 마법사 포지션이 생기겠다면서 잡아놓고 가르칠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비화는 그걸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퍼즐도 아니고 용사에 성녀에 이번엔 마법사라니.
“세상에 그 미치광이 근육바보들에게 그런 상대가 있다는 게…….”
“같은 생각이에요.”
“악!! 악! 오라버니! 제발!”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걱정 마라. 피가 안 통할까 봐 거꾸로 매달진 않았다. 그리고, 이 팻말은 목에 걸고.”
“다시는 조카의 노력을 가지고 장난치지 않겠습니다?! 오라버니! 제가 장난을 친 게 아니라고!”
“알았으니 매달려있어 임마.”
데이비가 영지개발부서의 둘을 잡아 와 매달고 있는 모양이었다.
“차원 하나가 엮인 큰 사건인데. 왜 이렇게 평온한지.”
물론, 끝이 아닌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