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33화
“와아. 이 깍쟁이 녀석.”
마치 말 안 듣는 아이처럼 한 부분만 복구가 되지 않던 거품 세계의 차원은 이제 비화의 의도에 따라 마지막 부분까지 치유가 되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레밀리아와 깊게 연관되어있는 차원이 그녀의 상태를 확인. 그녀가 이제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마음씨도 곱고…… 아유 귀여워라.”
차원의 핵인 옅은 빛을 품에 끌어안은 그녀는 말없이 그 핵을 어루만져주며 뺨을 비볐다.
“자. 이제 다되었으니 다시는 그런 것들 만들지 마. 뭐, 이젠 만들 수도 없겠지만.”
비화는 이 차원을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거품 세계에 그녀가 부여한 권한을 대부분 거두어들였다.
막대한 힘과 권한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견고한 성을 무너뜨리는 법이다.
물론, 그녀가 권한을 거둔다 하여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차원에는 무수하게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이유 없이 피해를 보는 존재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거품 세계가 존재하는 가상공간을 관리하는 만큼 그 책임은 비화에게 있었다.
“쉽진 않겠지만, 조금 더 신경 써야겠네…….”
이윽고 그녀는 차원과 레밀리아 사이의 연결을 서서히 끊어냈다.
그리고 조율의 힘을 발현해 그 틈을 채워주자 차원의 회복이 가속되더니 이내 완전히 회복하듯 상처들이 아무는 게 보였다.
“됐다.”
차원의 상태가 온전히 정상화된 것을 확인한 비화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남은 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일.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뒤처리를 해야 했던 비화인 만큼 급격히 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신이 아무런 조건 없이 하계에 강신하는 건 본래 불가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큰 힘을 사용하지 않는 조건과 그녀의 특수성을 이용해 강신을 할 수 있었다.
엄연히 혼자선 강신이 거의 불가능한 넬타리드와는 달랐다.
콧노래를 부르며 하계로 강신한 그녀는 영주성에 들어서자마자 멍한 얼굴로 매달린 채 광합성을 즐기고 있는 두 소녀를 보곤 풉! 하고 웃어버렸다.
“아하하하하!!”
“우…… 웃지 마!”
“아니 왜 크흐흐흣. 아하하하!”
에오니샤의 목엔 다시는 조카의 노력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 않겠습니다 라는 팻말도 걸려있었다.
“고모. 에린이 상처받아요. 진짜 그러다가.”
“으윽…….”
“물론, 에반젤린 그 기지배가 만든 음식 중에 유별나게 떡볶이만 지옥문 개폐기라는 건 알고 있지만.”
“니가 더 나빠 이년아.”
에오니샤 올 라운.
참 겁도 많고 방에 처박혀 책 읽기만 좋아하던 소녀지만 간간이 데이비와 말투가 비슷해지는 걸 보면 역시 남매는 남매구나 싶었다.
스스로 생각하고도 헛소리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언제까지 매달려있는데요?”
“나도 몰라…….”
“아하하하하!”
“너…… 두고 보자.”
세상에 대체 어느 국가에서 왕족을 저렇게 매달아 놓는단 말인가.
사실 왕족의 권위에 직결되는 문제라 여러 말이 나올 수 있는 장면이다.
심지어 데이비는 비화도 매달아버릴 수 있는 만큼 사실 이곳에서만큼은 권위 따위가 무슨 의미인가 싶기도 했다.
물론 데이비도 가능한 영주성 내에 매다는 것으로 불필요한 이목은 피하고 있지만 말이다.
“저기 비화야…….”
그때 에오니샤가 조심스레 물러왔다.
“네?”
“비…… 좀 내려주지 않을래? 이렇게 태양만 쬐고 있다간 탈수로 죽을 거 같아…….”
“설마요. 아빠가 그 정도 대비도 안 해놨으려고…….”
“그냥 더워!!”
“음…… 지금 비 내리면 나도 혼나는데…….”
“비화야. 넌 고귀한 여신님이잖아. 반면 오라버니는 그래 봐야 인간에서 신이 된 존재 아냐?”
에오니샤가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려 들자 비화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그녀가 있는 범위에만 짧게 비를 내려주는 건 어렵지 않다.
축축해지긴 하겠지만 태양 빛에 바짝바짝 마르는 그녀에겐 그 빗물도 시원하게 느껴질 테니까.
“고모.”
“응, 그래. 비화야.”
“이거 아빠한텐 비밀이에요.”
그렇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쏴아아아아아!!!
동시에 하늘에 적당한 먹구름이 모여들며 에오니샤와 티아라만 있는 곳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흐아아…… 살 거 같다…….”
“비를 맞는 게 좋긴 오랜만이네요.”
둘은 시원한 빗방울을 맞으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쁜 드레스가 젖어가는 것도 모른 채 웃고 있는 저 모습을 괜히 다른 이들이 보면 묘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저기 근데, 고모, 그거 속이 다 비치는데 괜찮아요?”
“속? 아…….”
“그러네요……. 이건 좀 곤란하네.”
“기다려봐요.”
비화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들의 옷에 묻은 수분기들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아빠한텐 비밀이에요.”
“그래. 비밀이야.”
“네. 괜히 잔소리듣기 싫단 말이에요. 아빠 잔소리 한 번 시작하면 귀가…….”
말을 하던 그녀가 바짝 얼어붙었다.
동시에 에오니샤와 티아라는 모르는 일인 양 고개를 돌리고는 휘파람을 불었다.
“비화야.”
“어…… 어어어…….”
그녀의 뒤엔 언제 왔는지 데이비가 빙그레 웃으며 와있었다.
“아빠.”
“너도 저기 올라갈래?”
“아…… 아뇨!”
비명을 내지르며 비화가 손을 에오니샤 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뜨거운 빛이 한창 몸이 수분기가 남아 있던 두 사람의 몸을 강하게 쬔다.
“으갸아아아악!”
“이 배신자!!”
버둥거리면서 악을 쓰는 두 사람을 무시한 채 비화가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아빠. 이제 괜찮죠?”
그 말에 데이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어 내려주었다.
“흐아아…… 살 거 같다.”
“솔직히 별거 아닌 거 같은데 정말 다시는 매달리기 싫네요.”
두 사람의 말을 듣고 피식 웃어 보인 데이비는 비화를 향해 말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임마.”
그리고는 거칠게 비화의 머리를 헝클어버리고는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좀 따라와.”
데이비가 그녀를 지나쳐가자 비화는 그를 뒤따라가다 고개를 돌려 두 사람에게 혀를 쏙 내밀고는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왜 비화를 찾는 걸까요.”
“글쎄요. 워낙 바쁜 사람이니 또 무슨 일이 있는 거겠죠.”
그러거나 말거나 두 사람은 뻐근해진 몸을 풀며 도망갈 뿐이었다.
“빨리 근신이 해제되면 좋겠네요.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러게 말이죠.”
* * *
레밀리아의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에반젤린이 찾아왔다.
“나 왔어요.”
에반젤린이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등장하자 유리아와 륀느가 그녀를 반겼다.
“어서 와요. 아가씨. 무슨 일로?”
“그냥 잘하고 있는지 보러왔어요. 보아하니 사고 친 것도 아닌 거 같고.”
“우리가 매번 사고를 친다는 고정관념은 필요하지 않답니다.”
유리아가 한 손을 뺨에 올리며 대답하자 에반젤린의 표정이 팍 찡그려졌다.
“실은 고생하는 김에 나도 뭐 도울 게 없나 싶어서요. 먹을거리 좀 만들어봤어요.”
에반젤린이 반찬 통을 꺼내 들자 한창 놀고 있던 레밀리아와 헬창 바보들까지 모여들었다.
“호오? 간식인가? 나쁘진 않지.”
두억시니의 모습에 에반젤린이 눈을 크게 떴다.
“와…… 이야기는 들었는데 진짜…….”
놀랍다는 듯 두억시니와 타우르스, 그리고 보팔 레빗을 이리저리 바라보며 그녀가 물었다.
“왜 평소에 그러고 다니지 않은 건지 모르겠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그보다 슬슬 배고프다!”
헬창 바보들과 레밀리아는 방금 전까지 보드게임을 하고 온 참이었다.
헬창 바보들에겐 그건 그리 달가운 종목이 아니었지만 오리하르콘제로 만든 종을 중앙에 둔 할리갈리 앞에선 이야기가 달라졌다.
단순히 종을 때리면 이긴다는 전제조건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상대의 손을 아작내겠다는 집념으로 바뀐 공포의 게임이 되었으니 말이다.
반면 레밀리아는 조금 지루한 느낌이 들었는지 묘하게 나른한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반찬이라니 뭘 만들어온 건가요?”
“얼마 전에 동료 스트리머들에게 이런저런 많은 걸 배워서요. 튀김이랑 쿠키랑…….”
하나둘 뚜껑을 열자 모두가 반색한다.
하지만. 마지막 뚜껑이 열렸을 때.
심해의 끝자락 같은 침묵이 모두를 덮쳤다.
“그리고, 로제 떡볶이.”
“…….”
“…….”
“……”
미식연구부서는 공허해진 눈동자로 그것을 바라보았고 헬창 부서는 보기 드물게 식은땀을 흘리며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그…… 그.”
“에러…… 에러…… 에러!”
륀느는 고장이라도 난 듯 몸을 부르르 떨다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반면 유일하게 한 명만이 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맛있겠다. 고마워요. 공녀님. 잘 먹을게요.”
“맛있게 먹어주면 그걸로 최고의 보답이죠. 자자 많으니까 드세요.”
동시에 미식연구부서와 헬창부서의 시선이 마주친다.
‘저거…… 그것이냐?’
‘아직 몰라요. 일반 떡볶이가 아니니 그래도 괜찮을지도…….’
‘그럼 네가 먹어봐라.’
‘그건 좀…….’
짧은 시간 안에 무수한 의견이 교차하는 눈싸움이 펼쳐졌다.
“그…… 그럼 전 튀김으로 먹어볼까요? 오늘은 기름진 튀김이 끌리네요.”
“뤼…… 륀느도 튀김을!”
“어허. 골고루 먹어야죠. 전 기름진 게 필요해서 튀김을 먹는 것뿐이니 륀느 양은 골고루 챙겨 드세요.”
유리아가 륀느를 배신하자 륀느가 떨리는 눈으로 쿠키를 강하게 가리켰다.
“뤼…… 륀느는 쿠키를 높게 평가!”
그리고는 다른 건 전혀 먹지 않겠다는 양 쿠키 통을 낚아챘다.
“아이참 다들 좋아해 주니 기쁘네요. 자자 거기 셋도 좀 들어요.”
에반젤린이 떡볶이를 들이밀자 무슨 일에도 당당하던 세 근육 바보가 차려자세로 굳은 채 벌벌 떨었다.
“안 먹을 거예요? 열심히 만들었는데…….”
그쯤 생각이 미친 세 근육 덩어리들은 이내 눈을 번뜩였다.
“크…… 크하하하! 그래. 열심히 만들었다면 먹어보는 게 인지상정이지! 이봐. 레밀리아. 한번 먹어봐라.”
그래. 일반 떡볶이도 아니고, 에린이가 배워온 거라는데. 설마 이전과 같으려고.
참 비열하고 쪼잔했지만, 세상 무서운 게 없던 그 세 명의 헬창들조차 겁에 질리게 하는 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네. 같이 먹어요.”
그리고 상황을 모르는 레밀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포크를 들어 떡볶이를 집어 들었다.
독이면 차라리 은제 식기에 변색이라도 되지. 일반적인 것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레밀리아가 떡볶이를 입에 집어넣은 그 순간.
모두가 침을 꼴깍 삼키며 그 꼴을 바라보았다.
“음, 맛있다.”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결론이 나오자 모두가 경악한 듯 떡볶이를 노려본다.
“엄청 맛있어요. 다른 세상엔 이런 맛있는 음식도 있었네요……. 그도 있었다면 맛있게 먹었을 텐데…….”
정말로 맛있다는 듯 레밀리아는 떡볶이를 꼭꼭 씹어 삼켰다.
이에 헬창부와 미식연구부서는 서로 시선을 마주한다.
‘저거…… 괜찮은가 본데요?’
‘그런 것 같군…….’
‘그런데. 여러분. 그녀를 지켜줘야 할 입장인 세 분이 너무한 거 아닌가요? 그녀를 팔아먹다니.’
‘그…… 그것은…….’
두억시니가 식은땀을 흘리며 시선을 피하고 타우르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시선을 돌려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타우르스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자자! 많으니까 다른 분도 드세요.”
‘괘…… 괜찮은 게 맞겠지?’
‘적어도 레밀리아 양이 멀쩡한 걸 보면 저건 일반 떡볶이와 다른 모양이에요.’
‘그럼 일단 먹어 보…… 아니다. 타우르스 네가 먼저 먹어라!’
‘난 먹지 않아도 살수 있…….’
학습된 공포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해 떨떠름해 하던 찰나.
인상을 찡그린 레밀리아가 포크에 떡볶이를 쿡 찍어 그대로 두억시니에게 내밀었다.
“안 먹을 거예요?”
그녀가 약간 풀이 죽은 기색을 내비치자 세 헬창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은제 식기를 들어 떡볶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미식연구부서도 뒤따랐다.
모두가 그것을 내려다보았고, 이내 그것을 입에 밀어 넣었다.
“어때요. 맛있죠?”
에반젤린의 질문에 미식연구부와 헬창부는 침묵했다.
그리고.
털썩…….
가장 먼저 유리아가 쓰러져버렸다.
털썩…… 털썩!!
뒤이어 륀느와 점순이 타우르스 등등 모두가 쓰러져버리자 에반젤린과 레밀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이게 무슨?!”
“이상한데?! 분명 먹어볼 땐 맛있었는데?!”
기절하기 직전 헬창부와 미식연구부서는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호러틱한 음식에 면역인 존재가 존재할 수 있었고, 자신들은 그 존재를 못 알아봐 이런 꼴을 당한 것이라고 말이다.
“아…… 아빠! 아빠아아!! 여기 이 사람들 다 쓰러졌어요!!”
에반젤린이 파랗게 질려 소리 질렀다.
그때였다.
에린이의 목에 걸려있던 붉은 보석이 또 제멋대로 움직이더니 에반젤린의 로제 떡볶이를 마치 흡수하듯 빨아들인다.
스르르륵…….
호기심이 동해서 먹어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곧이어 바닥에 툭 떨어진 보석도 깜빡거리며 상태가 좋지 않게 변해버렸다.
“아니 맛만 좋은데 왜들 그러지?”
“어…… 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