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35화
“오늘은 벤치프레스를…….”
“안 해.”
“멍청하긴 데드리프트를 하는…….”
“그것도 안 해.”
레밀리아는 질린 표정으로 눈앞의 근육 덩어리들을 바라보았다.
겉으로 잘생긴 건 부정할 수 없다.
어딜 나가도 이성의 시선을 잡아 끄는 외관을 지니고 있으니까.
보팔레빗의 경우는 조금 특이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적어도 타우르스나 두억시니가 인기가 있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까. 이 잘생긴 놈들이 사실 운동에 미친 꽃등신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연약한 몸으로 툭 치면 부러지겠군. 단련할 필요가 있다.”
“난 마법사야. 그런 건 익숙하지 않다고.”
“그렇다면 차근차근…….”
“안 해! 안 한다고! 이 미친놈들아! 누굴 근육 괴물로 만들 생각이야?!”
간간이 운동하고 있는 저놈들의 집념을 보면 이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든다.
무엇보다 저놈들의 트레이닝 룸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됐어. 난 관심 없어.”
“아쉬운 이야기로군.”
“내가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문제야, 너희가. 이 멍청이들아. 너흰 머리를 좀 식힐 필요가 있어.”
운동한다고 날뛰지만 않으면 생각보다 유쾌하고 순진한 녀석들이다.
사실 레밀리아가 그들에게 호의를 품는 건 그런 이유이기도 했다.
적어도 이들은 쓸데없는 계산을 머릿속에 담지 않으니까.
물론, 이놈들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준 이유에 대해선 들은 바 있다.
신의 축복이 서린 보충제 때문이라고 했던가.
그런 점을 들먹이면 이놈들도 똑같지만, 이 녀석들은 그 사실을 숨길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뭐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냐는 심정이었고, 그들과 엮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이놈들은 한없이 헬스에 진심일 뿐이고 그 외에 어두운 계략 따윈 없는 바보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남성으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은 아직 대답할 수 없는 분야였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렇게 속이 하얀 바보들과 지내다 보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썩어 문드러진 속내가 치유되는 기분이 들었다.
경계하고, 수작을 숨기고, 열등감을 품는 것들.
그런 것들과 달랐다.
물론, 이곳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이 근육 바보들과 비슷했지만. 근육 바보들은 그녀가 가장 먼저 친해진 이들이라는 것도 틀림없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지! 어떻게 이렇게 살아! 뭐라도 보람 있는 걸 해야…….”
“근육은 배신하지 않는다.”
“……물어본 내가 바보지…….”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이 헬창들을 끌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저하께서 찾으세요.”
영주성에서 온 시녀의 연락을 받은 세 근육 덩어리들은 서로를 흘끗 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가?”
“약속대로 계약을 이행하러 간다. 같이 가겠나?”
“어? 어어…… 그래도 돼?”
“그래도 상관없다고 하셨어요.”
아니 어떻게 알고 예측을 해?
이미 예측이라도 한 건지 수인족 시녀가 대답해주자 레밀리아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 말과 함께 미련 없이 덤벨을 내려놓은 녀석들이 이동하자 레밀리아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들을 따라나섰다.
하인스의 영주성은 필요 이상으로 으리으리하거나 하는 느낌보다는 굉장히 세련되면서도 깔끔했다.
필요 이상의 낭비를 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데이비 올 라운 같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들은 만큼 그녀도 조금 놀란 마음이었다.
보통 저 정도 위치의 존재라면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라도 이런 곳을 으리으리한 궁전처럼 만들 터다.
하인스 영지가 지닌 재력이 얼마나 막대한지 모르는 바가 아닌 만큼 그녀로선 조금 신기했다.
“어서 와.”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잘생긴 청년이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갓 소년티를 벗어난 듯한 외관은 절세 미남이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열에 아홉은 잘생긴 편이네. 라고 대답할 정도의 외관은 되었다.
“무슨 일로 부른 거지?”
“이야, 진짜 다시 봐도 도저히 적응이 안 되네. 평소에 그렇게 다니지.”
“흥. 불편할 뿐이다.”
두억시니의 대답에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너희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우선 레밀리아도 있으니 차라도 한 잔 내줄게.”
그는 능숙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티포트를 조작했고, 깔끔한 차를 그들의 앞에 내려놓았다.
“근손실!”
“근손실.”
두억시니와 타우르스는 차에 별로 관심이 없는 기색이었다.
“자, 잘 마실게요…….”
반면 레밀리아는 저도 모르게 긴장되는 몸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찻잔을 들었다.
제국의 황제와 만났을 때도 이렇게 긴장한 적은 없는데.
고작해야 20대 청년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도저히 긴장의 끈이 풀어지지 않는다.
“지구에 갈 일이 좀 생겼어.”
“지구?”
“그래. 내가 직접 움직이기엔 조금 귀찮은 사안이라. 너희가 직접 활동해줘야 할 거 같은데.”
“약속은 약속이니 들어는 보지.”
두억시니의 말에 레밀리아가 벌떡 일어났다.
“주,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으니 저는 자리를…….”
“괜찮아.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까. 가능하면 같이 가주면 나도 좋을 거 같은데. 괜찮겠어?”
“어…… 네?”
“저 바보들에게만 맡기기엔 좀 불안해서. 다른 세상 구경도 할 겸. 레밀리아 양이 저것들을 좀 제어해주면 좋겠어.”
데이비의 말에 두억시니와 타우르스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우리가 그 미식에 미친것들과 개발에 미친것들처럼 사고나 치고 다니는 줄 아는 건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는 그 질문에 데이비는 빙그레 웃으며 한쪽에 놓인 서류를 내밀었다.
“너희들이 저지른 사고 24건.”
“…….”
“그것도 최근 한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지?”
“큭…….”
“어이가 없네. 갑자기 팔씨름을 한답시고 거리 한복판에서 난리를 피워서 주변 길을 죄다 엉망으로 만들고 물자 유동에 심각한 손실을 끼쳤잖아, 양심이 있냐 너?”
데이비가 어이없다는 듯 물어오자 두억시니는 시선을 피해버렸다.
“사나이에겐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두억시니의 말에 데이비가 빙그레 웃었다.
“지금 나는 널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사나이로서 물러나지 말아야 할 때 같은데. 어때. 해 볼래?”
“…….”
아무리 미친놈들이라도 데이비와 충돌하면 무슨 사태가 벌어지는지 알기 때문일까.
두억시니는 어색하게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돌려버렸다.
“와…… 이 바보를 한순간에…….”
그 모습을 보며 레밀리아는 놀랍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못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게 됐어. 레밀리아 양.”
“괘, 괜찮아요. 그리고 편하게 말씀 주세요…… 여신님의 아버님이시니…….”
솔직히 여신의 아버지가 인간이라는 게 놀랍긴 하지만 듣기로는 데이비 올 라운도 인간이되 이미 신적인 존재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에린이의 그림 전시회 이야기 들었지?”
“음?”
데이비가 천천히 운을 떼자 세 헬창이 그를 바라본다.
“어떤 개자식들이 에린이의 그림을 위작해서 암암리에 팔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거든. 본래라면 그림자가 할 일이지만 티오니스도 아니고 지구인만큼 웬만해선 너희가 나서줬으면 한다.”
“우린 정보를 캐내는 쪽이 아니다.”
“그래. 정보는 미식연구부서에서 해 줄 거야. 너희는…….”
그냥 적이 확정되면 때려 부수기만 하면 돼.
데이비의 서슬 퍼런 미소에 두억시니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미식 또라이들이 겉으론 그래도 정보 수집 능력은 좋은 편이지. 그래. 다 때려 부수면 된다고?”
“가능한 한 인명피해는 내지 마. 너희는 가능할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레밀리아 양이 직접 저놈들을 제어해주면 좋겠어.”
“꼭 우리여야 하나?”
“너희처럼 확실하면서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전부 바쁜 상황이라.”
데이비의 말에 세 헬창은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젤린과 관련된 일이라면 못 해 줄 것도 없지.”
실제로 에반젤린은 저 셋에게서도 제법 귀여움을 받고 있는 터라 무시무시한 삼촌들이 거부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자기. 조금 이상한데.”
그때 말없이 찻잔만 보던 보팔레빗이 반들거리는 두피를 반짝이며 물어왔다.
“음?”
“에린이의 그림은 일반적인 그림이 아니지 않아? 위작을 못알아 볼 리가 없을 텐데?”
“맞아. 에린이의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그 아이의 감정이 전달돼. 그게 에반젤린이라는 이름값이 높아지는 주요 원인이고.”
데이비의 말대로라면…… 누군가가 그 방식을 흉내 냈다는 소리였다.
“그 기법에 대해선 딱히 저작권 따위를 내세울 생각은 없어. 할 수 있으면 하면 돼. 하지만. 이것들은 두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첫째. 그들이 위작 그림에 새겨 넣은 건 정신계 각성자의 힘. 이를 악용하여 보는 이들에게 환각, 현혹, 세뇌를 건다는 사실이다.
“그런 방식은 중범죄지. 이대로 두면 에반젤린의 그림도 싸잡아서 논란이 되게 된다. 그리고 둘째.”
이 개자식들이 자기만의 그림을 그린 것도 아니고 에반젤린의 그림을 똑같이 따라 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돈에 미쳐서 겁을 상실한 것들에게 지옥을 보여 줄 수 있지?”
데이비의 말에 세 근육 덩어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날뛰기 좋겠군. 그 외에는?”
“내 동생. 현아 그 대왕오징어가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이 굉장히 약하거든. 이것 좀 전해 줘. 몸에 좋을 거라고 하고.”
“엘릭서를 희석시킨 건가? 몸에 좋은 것치고는 너무 좋군. 그보다. 매번 오징어니, 꼴뚜기니 해도 동생을 챙기는 건가?”
“어떻게 모르는 척하겠냐. 일 끝내고 돌아오면 트레이닝 룸에 10배 중력장 설치 허가해 줄게.”
“콜!”
어차피 정보는 미식연구부에서 보내 줄 테니 자신들은 몸만 움직이면 된다.
게다가 10배 중력 장치? 이걸 어떻게 참는단 말인가!
“부탁할게.”
데이비를 뒤로한 채 지구로 이어진 균열로 다가가는 셋을 보며 레밀리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두억시니.”
“왜 부르나.”
“그…… 미식연구부서는 그 유리아 씨가 있는 그곳 아냐? 내가 알기로는 요리를 연구하고 식재료를 탐구하는 부서로 알고 있는데?”
“맞다.”
“그런데. 정보를 캐는 역할도 해? 정보부서도 있는데?”
그 물음에 앞장서서 전신의 몸을 빛으로 바꾸었다가 검은 슈트로 깔끔하게 바꾼 보팔레빗이 검은 선글라스를 썼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헬스에 미친놈 같았다면 지금은 감정이라곤 없는 킬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의 말투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자기. 그 또라이들은 말이야. 식재료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지구에서 가장 엄중하게 보관되고 있던 기밀도 털어버린 녀석들이야.”
“아…….”
할 말을 잃어버린 레밀리아가 입을 떡 벌렸다.
“본래 정보부서의 역할은 하지 않지만…….”
필요하면 최고기밀도 털어 낼 정도의 정보 수집 능력을 지녔다는 소리였다.
뒤이어 타우르스와 두억시니도 검은 정장 같은 의상으로 바꾼 뒤 선글라스를 썼다.
“그런데 모습을 그렇게 바꿀 필요가 있어?”
“불편하긴 하다만…… 신과의 약속이니 별수 없지.”
적어도 이런 모습이면 괜히 눈에 띄진 않을 테니까.
“다른…… 세상이라…….”
신기한 듯 균열을 따라 그녀가 걸어 들어간다.
동시에 마법사인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의 움직임이 느껴졌고, 완전히 새로운 모습이 그녀를 반긴다.
“세상에…… 건물이…… 저건…… 마차야?”
지구의 모습.
티오니스 같은 세상에서 살던 이들에게 지구의 모습은 그야말로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이곳은 생명체가 많이 밀집되어 있다. 잃어 버리지 않게 잘 따라와라.”
“어…… 어어?”
이윽고 타우르스가 그녀의 손을 조용히 잡아당기며 말하자 레밀리아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멍하니 끄덕였다.
* * *
미식연구부서.
한때 지구의 좋은 식재료에 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이유로 미국의 FBI 기밀까지 소리소문없이 털어버린 전적이 있는 이들의 실적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물론, FBI 내에 그런 기밀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몬스터, 혹은 신기한 현상을 보이는 생명체나 식물에 관한 정보가 그곳에 있다는 이유로 털려버린 것이다.
“여기 필요한 정보랍니다. 척 봐도 기밀 취급하는 걸로 봐서 이걸로 괜히 자국 내에 문제가 발생할까 봐 쉬쉬하고 독자 수사를 한 모양이에요. 뭐. 상대적으로 약소국들의 경우 여기저기 눈치 볼 곳이 많으니까요. 괜히 세간에 알려지면 티오니스가 아니라 옆 나라에서 난리를 칠 테니…….”
“복잡한 건 관심 없어. 위치는?”
유리아가 륀느에게 눈짓하자 륀느가 천천히 다가와 서류뭉치를 건네주었다.
“륀느가 위치 정보를 높게 평가.”
“다만, 그 정보는 말단일 뿐이에요. 신중하게 하지 않으면 머리들은 도망가버릴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아 그리고.”
유리아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린애들.”
타우르스가 조용히 고개를 돌리자 유리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CCTV 영상에 그들을 잡으러 온 특수부대원을 학살하는 아이들이 있었어요. 살인에 망설임도 없고 각성자 수준으로 치면 사실 그렇게 뛰어난 수준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 애들. 마치 인형처럼 움직이고 있었어요.”
그건 단순히 감정을 말살당한 수준이 아니었다.
“세뇌. 그 외에도 여러 능력자가 얽혀 있어요. 단순한 각성자가 아니라 최소 S급 세뇌술사겠죠.”
“그게 의미가 있나?”
S급. 강하긴 하다.
실제로 S급인 크리스마텐을 보면 미국의 히어로라 불리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지구의 기준이지 하인스의 전력을 생각하면 그렇게 강한 편은 아니었다.
직접 쌓아 올린 게 아닌, 얻어낸 능력이니 말이다.
“제 추측이지만 그 세뇌 능력자. 아무래도 자질이 있는 아이들을 납치한 후 세뇌해서 자신의 살인 병기로 사용하는 느낌이에요. 그 존재가 위협이 되는 이유는, 지금 이 상황을 방치했다가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우리 에린 아가씨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는 거죠.”
선례, 혹은 의혹을 남겨서 좋을 게 없다.
“은공께 보고는 드렸어요. 그리고 아이들의 경우. 가능하면 확인 후에 결단을 내리라고 하시더군요.”
그 아이들이 만약 세뇌에 휩쓸린 피해자라면.
가능하면 죽이지 마라. 그들도 피해자일 수 있으니.
“그리고, 세뇌로 인한 병기화가 맞는다면. 그 세뇌 능력자.”
유리아가 빙그레 웃었다.
“반드시 생포해서 끌고 오라고 했어요.”
“어렵지 않지.”
두억시니가 손을 뚜둑 소리 내며 꺾었다.
“더 할 말은?”
“없어요. 레밀리아 양, 저 셋을 잘 부탁드려요. 이런 어두운 일에 끼어들게 해서 미안해요.”
“아녜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죄 없는 아이들이 휘말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신 거잖아요. 비록 인간에 대한 신뢰는 잃었지만…… 그곳과 이곳이 다르다는 건 알아요. 티오니스에서 보낸 짧은 시간. 정말로 좋은사람들을 봤으니까.”
초월자에 의해 비틀려 악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그쪽 세계의 인간과 다르다.
레밀리아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했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유리아와 륀느, 점순이가 떠나자 레밀리아는 조심스레 보팔레빗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 세계의 지리는 잘 모르는데…… 뭣보다 이 세계…… 신기한 것투성이야.”
“이곳에서 꽤 떨어진 곳이야. 걸어서 가기엔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
“그럼 한참 걸리는 거 아냐?”
“두억시니가 제법 재능이 있거든.”
그 말과 동시에 두억시니는 두꺼운 한 팔로 레밀리아의 허벅지를 받쳐 안아 들었다.
“꺅?!”
“요술을 쓸 거다.”
그 말과 함께 그가 소환해낸 도깨비방망이가 대지를 두드렸다.
[축지.]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일순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 * *
베트남의 한 조용한 시골 마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이 마을에는 사실 숨겨진 장소가 몇몇 장소 존재했다.
“자자! 패 까! 얼른!”
“장난질하다 걸리면. 훅 가는 거야.”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과 수많은 칩. 그리고 카드.
이곳은 다름 아닌 불법 도박장이었다.
“으, 으으으…… 살려 주세요!”
그리고. 겁에 질린 몇몇 사람들이 속옷만 입은 채 밧줄에 묶여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불법 도박, 해외여행을 온 사람들을 몰래 납치하는 자들까지.
이곳은 문자 그대로의 인외마경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칼부림이 나는 건 기본이며, 심심찮게 총기류도 보이는 장소로, 불법을 저지르는 어떤 조직의 사업장이기도 했다.
“저기 형님. 이번에 전에 데려온 물건들은 교육이 다 되어 갑니다. 말 안 듣는 것들은 본보기도 좀 보여 주고 하니 겁을 먹더라구요.”
술병으로 나발을 불고 있는 덩치 큰 사내에게 다가온 한 남성이 낄낄거렸다.
“저것들은 어떻게 할 거야.”
“뭐. 하루 이틀 정도 빨래질하면 고분고분해질 겁니다.”
“그래. 하던 대로 하고. 이 나라 경찰들이 일본, 한국 쪽 짭새놈들 하고 공조한다고 하니까 몸 사리고 있어.”
“어차피 그놈들 절대 우리 못 찾습니다. 그런데 형님.”
“또 왜.”
“그…… 그것들은 어떻게 할까요?”
“뭐.”
“그. 그림말입니다. 티오니스 성자인지 뭔지 하는 놈의 딸년 그림.”
“아 그거? 괜한 짓 하지 말고 잘 보관해 놔. 괜히 들쑤셔서 좋을 거 없으니.”
“괜찮을까요? 소문으로 이런 짓을 했다가 박살 난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는데.”
“야.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저거 하나만 잘 넘겨도 우리 떼돈 버는 거야. 고작 일부 금액만 양도받는 데도 그렇지. 여기서 이렇게 개삽질하는 거랑은 비교도 안 된다고.”
“그래도. 들키기라도 한다면…….”
“여길 찾는다고? 여긴 경찰도 거의 얼씬도 안 하는 곳인데 지들이 무슨 수로 찾아. 세상일이라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아? 헛소리 말고 잘 숨겨 놓기나 해. 조만간 거래하러 오는 놈들이 있을 테니.”
“저는 괜히 거래를 받은 게 아닌가 하고…….”
빠악!!
덩치 큰 사내는 참지 못하고 곁에 있던 그를 후려쳤다.
“새끼 뭐 이렇게 겁이 많아. 야. 용기가 없으면 돈도 못 버는 거야 이 새끼야. 게다가 저기 저 살인 병기 같은 놈도 있는데 무슨 상관이야. 누가 오면 모가지 따고 묻으면 돼.”
덩치 큰 사내는 한쪽에 조용히 앉아 티비를 보고 있는 아직 어린 소년을 흘끗 보았다.
“에휴, 소름 끼치는 새끼.”
대화도 거의 안 하고 하루 종일 티비만 보고 있는 가녀리고 작은 소년이다.
하지만 사내들은 알고 있었다. 이번 일로 수사를 하고 있던 국제경찰 몇몇을 저 소년이 어떻게 도륙 내는지를 말이다.
“괜히 재수 없게 엮이지 말고. 가서 술이나 더 가져와.”
불안한 표정으로 나가는 사내를 보며 덩치 큰 사내는 혀를 쯧쯧 찼다.
“다 들었지? 아무래도 여기에 있는 게 맞는 거 같아. 관련된 거 같기도 하고.”
두 명의 조직원의 대화를 엿듣는 이가 있었다.
그들의 존재는 다름 아닌 헬창부와 레밀리아였다.
“흔적 쫓아온 게 맞았어. 이 안에 있는 게 분명해.”
간단한 도청계통의 마법을 이용해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레밀리아는 가볍게 몸을 푸는 세 명의 헬창을 보며 말했다.
“저기 말이야. 대충 위치는 찾았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쩌긴. 찾았으면 밀어야지.”
두억시니는 가볍게 몸을 풀었고, 덩치 큰 사내의 부하였던 이가 가까운 곳까지 오자 섬광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의 얼굴을 낚아채 바닥에 처박아 기절시켜버린 뒤 몸을 풀었다.
“식후 운동이라도 되면 좋겠구만.”
도박장의 낡은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를 보며 레밀리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 그러다가 도망가는 놈이 있으면 어쩌려고. 기다려봐. 내가 슬립이나 마비 마법을…….”
“그런 하남자나 할 짓을 우리가 할 거 같나?”
“뭐…… 뭐라고?”
“상남자의 특징은. 정면 돌파지. 함정을 파고, 계략을 꾸미는 건 우리 신조에 맞지 않는다.”
같은 생각인지 보팔레빗과 타우르스 또한 느긋하게 그의 양옆에 서며 저벅저벅 걸어간다.
“아…… 아씨…… 몰라 나도!”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레밀리아는 고급 스태프를 꼭 쥐고 따라나섰다.
“실례한다. 좋은 말 전해 주러 왔다.”
콰아앙!!!!
이윽고 두억시니의 두꺼운 주먹이 금속으로 된 문을 일순간 박살 내 버리며 진입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굉음. 자욱한 먼지 속에서 당황한 이들 중 하나가 기침을 하며 다가온다.
“뭐야. 니들. 어떻게 왔어.”
그 질문에 타우르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도 보고 왔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저기 미안한데. 항복해 주면 안 될까? 얘들이 좀 많이 저돌적이라.”
“항복 같은 소리하고 있네 X같은 년이!”
그 말과 동시에 조직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챙강!!!!
조직원 중 하나가 내지른 칼날이 두억시니의 두꺼운 근육에 닿은 순간 허무한 소리와 함께 부서져 버렸다.
“저게 뭔…….”
“야! 각성자다!! 다들 물러나!!”
칼을 받아내고도 멀쩡한 인간은 각성자뿐이다.
덩치 큰 사내는 각성자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곧바로 시선을 돌려 자신들을 호위해 줄 작은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살인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저 소년은 재수 없고 스산하지만, 그 실력은 가히 경이적이다.
어린 나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힘을 지닌 소년이었으니까.
그러니 여긴 그에게 맡기고 우선 도망을 쳐야 옳으리라.
“일할 시간이다! 저것들 다 제압해!!”
덩치 큰 사내의 말에 티비만 보고 있던 소년이 공허한 얼굴로 세 근육 바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한쪽 끝에 서서 주변을 경계하는 레밀리아를 바라본다.
과거의 레밀리아라면 전혀 문제 될 게 없지만, 지금의 그녀는 회복기였기에 힘의 사용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어린 소년은 그런 그녀가 가장 제압하기 쉽다고 판단한 것인지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없어졌다가 그녀의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녀의 경동맥에 손톱을 박아 넣으려 했다.
“읏?!”
아직 어린 소년이 자신을 바로 노린다는 것에 놀란 것인지 그녀가 급히 마법을 끌어올리려던 그 순간.
터어어엉!!!
섬광처럼 파고든 보팔레빗의 묵직한 주먹이 소년을 후려쳐 날려버렸다.
벽면에 처박힌 소년은 어떻게든 일어나려 했지만 얼마 가지 못해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추욱 늘어져 버렸다.
살인귀니 뭐니 했지만 애초에 보팔레빗은 고대마수.
녀석의 힘에 제대로 성장도 못 한 각성자가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아직도 항복 안 할 거야?”
레밀리아가 덩치 큰 조직원을 향해 묻자 그는 굳은 듯 세 근육 바보와 레밀리아. 그리고 기절해버린 소년을 바라보다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하, 항복! 살려 줘!!”
다만 레밀리아의 시선은 한 켠에 피투성이가 된 채 속옷만 입고 무릎 꿇고 있는 이들에게 고정되어있다.
단순히 도박장에서 돈을 잃은 이들과 달리 이들의 몸에는 지독한 학대의 흔적이 보였다.
“하나 물어봐도 돼?”
“뭐, 뭘…….”
“저 사람들. 왜 저렇게 된 거야?”
한 치의 존중도 보이지 않는 하대.
덩치 큰 사내는 아직 어린 소녀의 말에 심지가 꼬였지만 살기 위해 조심스레 말했다.
“그…… 사업을 하는데 자꾸 도망을 쳐서…….”
“사업? 무슨 사업?”
“그…….”
“비틀어?”
“부, 불법 도박! 불법 도박을 하는…….”
점차 작아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를 보며 레밀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님이 잡아 오라고 한 건 그 머리통들이지?”
“그랬지.”
“그럼 이 인간은 괜찮네?”
레밀리아가 스태프를 높이 들었다.
그녀의 눈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이봐! 잠깐만!”
“안 죽여 걱정 마. 그 못돼 처먹은 손발만 아작 낼 뿐이니까.”
그녀가 살던 세상에서 그녀는 이런 인간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렇기에 그를 향한 혐오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콰득!!
“으아아아아아악!!!”
레밀리아는 가차 없이 그를 응징했다.
“왜.”
“아니. 조금 놀랐다. 생각보다 깡이 좋군.”
“……그냥. 기분이 좋진 않네…… 세상이 다른 곳이라도 저런 것들은 있구나 싶어서…….”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영상이 나오는 티비가 신기한 듯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