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43화
이클립스가 멀쩡한 존재였다면 이런 흔적을 남겼을 리 없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존재하는 이클립스의 형상을 한 존재가 그녀 본인이 아닌 그녀의 방대한 힘으로 이루어진 존재의 일부일 뿐이라는 게 그 증거였다.
“신기한 모습이로군요.”
“생명을 머금은 정령이니까요.”
티오니스와 한국은 정식적인 무력동맹을 체결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적당한 선에서 비무력 동맹이라는 조금 애매한 호칭이 나을까.
결과적으로 내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이곳에 방문하는 건 이래저래 문제 요지가 많다.
하지만. 한창 전방부대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화작업에 손을 거들어주는 것과 더불어 이 부대에서 발생한 미확인 현상을 조사해주는 것을 명목으로 내가 이곳에 와있는 것이다.
“건물 안으로 이어져 있긴 한데…… 그 후로는 흔적이 끊겼네요.”
“그렇다면 그 빛을 일으킨 존재가 이 안에 아직 있다는 뜻입니까?”
“아뇨. 아마 흔적을 지웠거나 사라졌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강한 힘을 지닌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니까요.”
사실 지금에 와서도 느끼지만, 굳이 포스타에 달하는 육군의 최고 사령관이 직접 이렇게 곁을 지키는 것도 영 입맛이 껄끄러운 일이다.
처음엔 길 안내와 상황안내를 해줄 이 한 명을 부탁했더니 설마 장성. 그중에서도 원수를 제외한 최고위 장성이 직접 안내를 한다니.
이 양반, 이 부대의 지리도 모르는 주제에 말이다.
“딱히 파괴 흔적이나 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네요.”
내 중얼거림에 대장이 뒤따라온 연대장에게 물었다.
“연대장. 혹, 현장에 손을 댔는가?”
“그…… 그것이…….”
애초에 이클립스가 나타나서 멧돼지를 사냥해서 이곳까지 가져왔다는 것부터가 기묘하다.
아니, 애초에 이클립스는 그 정도의 판단이 가능한 존재가 아닐 텐데.
대체 어떻게 이클립스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의문이었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조종하고 있다던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 미친년을 대체 누가 조종하겠는가.
애초에 연대장이 이런 곳을 직접 관리하는 것도 아닐 테니 제대로 된 답변을 내리기 어려웠으리라.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자세를 고쳐잡으며 크게 답했다.
“관련 이들을 소집하여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해.”
이런 거로 화를 내기도 애매했는지. 아니면 곁에 있는 나라는 존재 때문인지 대장도 결국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연대장이 급히 어디론가 연락을 했고, 마치 저승사자에게 끌려오는 것처럼 한 병사와 간부가 허겁지겁 뛰어오는 게 보였다.
“추…… 충성!!”
계급은 상병 하나와 중위였는데 그들은 당장이라도 손가락을 쿡 찔러넣으면 단단히 굳어서 쓰러질 것처럼 표정에 긴장감이 가득했다.
실수하면 죽는다!!
그 생각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협조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에 이곳 간부식당을 관리하셨나요?”
정중하게 질문하자 중위가 바짝 얼어붙은 표정으로 크게 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늘 그렇듯이 위생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중위라고 해봐야 아직 젊은 청년이니 긴장하는 것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
나름대로 최선의 답변을 내놓았다 생각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단서가 훼손되어 자칫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다고 판단한 대장이나 연대장의 표정이 무거워진다.
“흡!!”
“그럼 직접 관리한 것은…….”
“사…… 상병!! 연철환!!! 제가 했습니다!”
중위도 긴장감에 쓰러지기 직전인데 아직 상꺾조차 되지 못한 상병의 상황이 좋을 리가 있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긴장한 그를 보며 나는 담담하게 물었다.
“혹시 아침에 점검할 때 이렇다 할 변화 같은 게 있었나요?”
“그…… 그것이…….”
“너 똑바로 대답해라. 잘못 하면 대형사고 터질 수도 있다.”
조용히 보고 있던 연대장이 무겁게 한마디 하자 연철환 상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분들도 자기 맡은바 일을 한 거니까요. 사실 워낙에 당혹스러운 상황이라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에 적당히 중재하자 연대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연 상병님. 생각나는 대로만 말씀해주세요.”
내 말에 그는 바짝 얼어붙은 채로 미친 듯이 눈동자를 굴렸다. 늘 하던 일이기에 변화를 깊이 신경 쓰는 이가 몇이나 될까.
마치 목숨이 걸린 것처럼 미친 듯이 머리를 굴리던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그 한마디에 연대장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지만, 괜히 나서진 않는다.
“전체적으로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조미료 쪽의 양이 제가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줄어있었습니다.”
“진짜야?”
“사, 상병 연철환!! 그…… 그렇습니다!”
그대로 두면 거품 물고 넘어갈 것 같은 모습이라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 감사합니다. 딱히 여기서 무언가를 한 것 같진 않네요.”
그래서 더 의문이다. 다시 생각하지만, 이클립스의 형상을 한 그것은 이런 행동을 할 이성이 없는 맹목적인 존재이니까.
그녀가 갑자기 배가 고파서 한국의 군부대 쪽에 있는 숲에 나타났고 멧돼지를 사냥해서 조미료를 들고 튀었다?
삼류소설도 그것보단 개연성 있겠네.
멧돼지 같은 게 군부대 근처에서 발견되곤 하니 단순히 멧돼지를 잡기 위해 나타난 건 이해할 수 있어도 그 이후의 행동이 너무 뜬금없었다.
“뭔가 알아내셨습니까?”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위험한 일은 아닌 거 같네요. 그래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분께 보답이라도 하고 싶은데…….”
고생했는데 나도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은 아니니까.
“괘…… 괜찮습니다!! 이는 군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도 상병 짬을 먹고 눈칫밥이 없진 않은지 상병은 곧바로 큰 목소리를 내어 대답했다.
“대단한 분이네요. 제가 직접 해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 대장님. 그래도 큰 단서를 꼼꼼하게 기억하고 있는 분께 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을까요?”
내 질문에 대장은 허허 웃으며 답했다. 적당히 눈치를 챈 것이다.
이 양반 말이 잘 통해서 좋네.
“걱정 마십시오. 자칫 큰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일을 꼼꼼하게 점검했으니 그에 따른 포상도 있어야겠지요. 이보게 연대장.”
“예!”
“저 두 사람 휴가 꽉꽉 채워서 보내줘. 이번에 발의된 특상휴가였나? 그 28박 29일 휴가. 내 권한으로 내려줘.”
“바로 시행하겠습니다!!”
직접 군대를 가본 경험은 없기에 잘은 모르겠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아직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휴가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화색이 돋는 모양새였다.
결국, 추가적인 정보를 얻진 못했지만 적어도 이클립스가 미쳐 날뛰지 않는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추가 조사는 무의미한 것 같네요.”
“아…… 그럼…….”
“네. 대규모 정화 작전을 펼치고 있는 곳으로 바로 가시죠. 부족하지만 손을 보태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성자라 불리는 대공의 정화능력이라면 더 볼 것도 없지요.”
한국의 입장에서도 지지부진한 정화작업을 엄청난 속도로 단축할 수 있다면 그보다 큰 이득은 없을 테니까.
어차피 작전이 시행되고 있는 지역은 멀지 않았다.
십여 명의 정화능력 각성자가 힘을 발휘하고 있고 혹시나 있을 상황에 대비하여 상당수의 병력들이 포진하고 있다.
애초에 몬스터 같은 게 튀어나온다면 군대 병력보다는 각성자가 막는 게 맞겠지만 위치가 위치인 터라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다는 모양이었다.
“흐음…….”
정화능력을 발산하고 있는 지역은 사람의 손이 잘 닿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DMZ 지역이었다.
과거엔 북한과 남한이 서로 군사분계선으로 유지하던 장소였지만 북한이 몰락해버린 이상 의미 없는 분계선이기도 했다.
“몇 달 전에 이곳에서 대규모 게이트가 한번 발현된 적이 있습니다. 다만…… 북한 쪽 게이트 중 일부는 주변을 침식시키는 변이를 일으키곤 했다.
개발도, 진입도 쉽지 않은 공간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끼어들면 해당 각성자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긴 힘들겠네요.”
“저들 또한 생각보다 길어지는 작전 때문에 지쳐있을 테니까요. 다만 걱정이라면…… 침식 농도가 너무 짙어서 쉽게 정화가 될지는 조금 미지수…….”
“저 정도면 쉽네요.”
그러면 됐고.
침식지역은 보랏빛 늪으로 가득하여 보기만 해도 스산한 분위기를 풍긴다.
당장 생명체가 저 늪에 담기는 순간 끔찍한 꼴을 보겠지만, 문제 될 여지는 없다.
“하강하겠습니다.”
헬기 조종사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공?”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그 무슨…….”
드르륵!! 터엉!!!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자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려서 다칠 정도였으면 이클립스의 잔재가 내지른 주먹질 한 방에 온몸이 곤죽이 되어도 이상할 게 없으리라.
[9위계 최후 성마법]
순식간에 빛의 날개 같은 것이 내 등 뒤로 펼쳐지며 막대한 신성력이 쏟아져나온다.
[신의 성역(Saint Sanctuary)]
화아아아악!!!!!
하늘에서 낙하하듯 빛의 기둥이 내리꽂히자 지친 얼굴로 정화작업을 진행하던 각성자들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쩌어엉!!!
그리고, 신의 성역은 순식간에 일대 전체를 휘감으며 지친 이들을 치유하고 오염된 대기와 토양을 순식간에 정화해버리기 시작했다.
“와씨…… 뭐야, 이게.”
“뭐야 뭐야?!”
상황을 잘 모르는 이들은 갑작스런 막대한 빛과 주변을 포근하게 만드는 공기.
그리고 하늘에서 거대한 보랏빛 늪으로 고속낙하하는 존재를 보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저런?!”
“무슨?!”
생명체가 닿으면 끔찍한 꼴을 보는 만큼 한복판에 낙하하는 건 문자 그대로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경악은 곧이어 펼쳐진 현상에 강제로 제동 걸렸다.
화아아아악!!!!
가장 농도가 짙은 중앙부터 시작해서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보랏빛 늪과 독연들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지워져 간다.
“내가 헛것을 보나…….”
“저게 뭔…….”
몇 달간 정말 쉬지도 않고 정화를 진행해서 겨우 몇 미터 정화한 게 전부였는데.
중앙 지역은 정화가 가능한지조차 의심스러웠는데. 이렇게 단번에?
사람들은 갑작스런 정화 현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대체 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정화능력을 보였는가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며 선글라스를 고쳐 쓰는 데이비의 존재를 보고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서…… 설마 티오니스 성자야?”
“대공이 떴다고?”
“미친…… 이게 뭔…….”
티오니스 대공에 대해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가 대단한 것도 알지만 이렇게 직접 보고 나니 할 말이 없어지는 수준이었다.
순식간에 일대 전체를 정화해버린 데이비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이 정도면 이곳이 침식되는 일은 이제 없을 겁니다.”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 느긋하게 말한다.
뒤이어 헬기가 착륙하고 천천히 하차한 대장이 멍한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그 지독하던 늪을 단번에…….”
“약속은 지키는 주의라서요.”
느긋하게 말하며 데이비가 씨익 웃었다.
물론 그의 속은 답답함이 가득 담겨 쉬이 내려가질 않는다.
‘대체 뭘 하려고 나타난 건지…….’
결국, 이클립스를 찾아 그녀가 하려는 게 뭔지 찾아내려던 그의 의도는 중간에서 막혀버렸다.
그때였다.
“음?”
갑작스레 생명력의 순환에 이상이 발견된다.
이런 식의 독특한 변화는 흔히 한가지 현상밖에 없었다.
“게이트 브레이크?”
갑작스런 이상 현상에 데이비가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이들이 흠칫 놀랐다.
“마나 이상 반응 발생! 게이트 브레이크입니다!”
“게이트 브레이크라니! 대체 어디서?!”
“위치는…….”
장비를 조작하던 한 각성자 협회 직원의 말에 데이비가 중얼거렸다.
“지하.”
콰아아앙!!!
기다렸다는 듯 대지가 갈라지며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위 지렁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록샌드웜…….”
최장길이 200미터에 달하는 최상위급 몬스터의 등장에 각성자들의 표정에 경악이 서렸다.
“마…… 말도 안 돼!! 측정불가급 몬스터잖아!!”
흔히 지구의 각성자 업계에선 측정불가급 몬스터라 부르고 레이드형 몬스터라 부르는 존재가 있다.
극히 낮은 확률로 게이트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로 게이트 안에 다른 몬스터 없이 홀로 존재하는 S급 이상의 몬스터이기도 했다.
지금이야 억제되어서 그 이상의 수준은 나오지 못하지만 그런 억제된 존재라 해도 S급이 대단위로 협력을 하여 레이드를 해야 하는 몬스터는 존재했다.
“비상! 전원 전투준비!!!”
현재 이곳을 지키는 각성자의 수준으로는 록샌드웜을 처리할 전력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두면 대참사가 날것은 뻔했으며 브레이크가 일어나 밖으로 튀어나온 이상 그냥 방치한다 해도 언젠가는 아래쪽으로 남하할 가능성이 컸다.
“말도 안 돼…… 아무리 감지가 늦었다고 해도 장기간 감지가 안될 리가 없는데…….”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브레이크를 일으킨 것 같지 않은가.
본래라면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토벌하는 게 우선적으로 취해져야 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흐음…….”
물론, 이 모든 것은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존재가 없으면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대공.”
“걱정하지 마세요. 문제 되는 몬스터도 아니니.”
담담하게 말하며 데이비가 한 손에 어마어마한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록샌드웜의 등장에 기겁한 각성자들과 병력들은 데이비의 손에서 펼쳐진 거대한 에너지의 순환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이들이 봐도 저거에 맞으면 록샌드웜은커녕 록샌드웜의 시조가 와도 버티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일었을 정도였으니까.
이에 데이비가 그것을 던지려던 찰나였다.
찌지지지지직!!!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며 허공이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흑발에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작디작은 소녀가 허공을 걸어 록샌드웜에게 다가가자 록샌드웜이 포효하며 그녀를 삼킬 듯 덤벼든다.
“꺅!”
“먹힌다!!”
각성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소녀가 저항도 못 하고 잡아먹힌다고 생각했는지 비명을 내질렀다.
푸콱!!!
소녀가 담담하게 손가락을 뻗어 록샌드웜의 머리통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리기 전에는 말이다.
“…….”
고요한 침묵이 일었다.
레이드형 몬스터인 록샌드웜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리자 그들 모두가 할 말을 찾지 못해 벙찐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랏빛 안광의 소녀는 쓰러지는 록샌드웜의 몸 안에 손을 박아넣었고…… 이내 붉은색의 고깃덩어리 같은 커다란 구슬을 끄집어냈다.
“이클립스!!”
동시에 데이비가 그녀를 향해 소리쳤지만, 이클립스는 담담하게 그것을 챙긴 뒤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스팡!!!
그리고, 데이비가 망설임 없이 그녀를 뒤따라 사라졌다.
남은 이들은 지금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이클립스가 의도적으로 내 말을 무시한 건 아니었다.
그녀는 대화를 할 정도의 이성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일전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을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미x년이 게이트에 간섭해서 일부러 브레이크를 강제로 일으켰다는 것을 말이다.
목적은 아마 록샌드웜이었을 것이다.
이클립스는 블랙 슬라임 검둥이의 힘과 이어진 탓에 녀석의 독특한 차원 이동 능력을 고스란히 갖추고 있었다.
‘우선 기척을 좀 죽여볼까.’
혹시 몰라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이클립스의 흔적을 따라간다.
이성은 없다 해도 이클립스의 눈이 장님인 것은 아니니까.
그렇게 한참을 흔적을 쫓아갔을까.
나는 생각보다 익숙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린이의 레어?”
놀란 나는 천천히 이클립스의 마나가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클립스가 검은 솥에 멧돼지를 던져넣고 록샌드웜에서 빼앗은 붉은 살점을 던져넣는다.
그리고 또 어디서 챙겨왔는지 모를 오만가지 약초나 재료들을 던져넣은 뒤 마치 놀이에 집중하는 아이처럼 쪼그려 앉아 각종 조미료를 양손에 들고 칙! 칙! 소리를 내며 뿌려대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솥에 재료들을 때려 넣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을 파괴할 힘을 지닌 고대룡이 솥 앞에 쪼그려 앉아 소금과 후추 등을 탈탈 뿌리고 있는 꼴이라니…….
정성스럽게 요리하지만 냄새나 외관부터가 심상치 않다.
물론, 그녀의 기행 자체는 새삼스럽지 않았다. 현재의 이클립스를 유지해주는 건 진화상태에 있는 붉은 보석이 흡수하고 보내주는 힘을 기반으로 한다.
그녀의 육신과 힘의 위계를 정하는 건 이클립스가 남긴 힘의 잔재. 그리고 그녀의 의식을 유지하는 건 에반젤린을 향한 모성애뿐이다.
그렇기에 온전하지 못한 이클립스가 저지르는 기행은 기본적인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게 한참을 집중해서 요리하던 그녀는 이내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국자를 들어 내용물을 살짝 맛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요리?”
저걸…… 요리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중얼거림에 이클립스가 고개를 홱 하고 돌린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하는듯하더니 뭔가 확신이 선 듯 국자에 내용물을 가득 담아 다가오기 시작했다.
뭘 원하는지 알았다.
에반젤린에게 가져다주기 전에 맛을 보라 이거 같은데…….
“썩 꺼져 이 미친년아!”
당연히 그걸 먹을 생각은 없다.
기겁하며 물러나자 그녀는 빠른 속도로 달려들더니 몸을 제압하고는 입에 국자를 들이밀었다.
오랜만에 죽음의 공포가 느껴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에반젤린의 그 괴랄한 떡볶이의 근원은…….
이클립스가 아니었을까.
이클립스는…… 모성애라는 이유로 에반젤린에게 줄 요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측 불가의 존재. 걸어 다니는 재앙 덩어리. 그렇다곤 하지만 막상 말리고자 하니 그저 딸아이에게 요리를 해주고 싶어 하는 어미의 마음이라는 게 마음이 쓰였다.
게이트를 멋대로 브레이킹하고 아무 곳에나 침입하는 꼴을 보면 어떻게 조치를 취하는 게 맞겠지만…… 그녀는 정말로 위험한 존재가 맞는 것인지에 대해서 쉬이 답을 내리지 못했다.
애초에 그녀는 대화가 통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그나마 말을 알아듣고 최소한의 의사소통이 통하는 블랙 슬라임이 빨리 진화를 해서 그녀의 존재를 제어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현재의 이클립스는 사실상 블랙 슬라임인 검둥이의 번데기. 붉은 보석이 제어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진화를 마친 녀석을 이용하면 최소한 이클립스가 도를 넘어서는 사고를 치지 못하게 막을 순 있지 않을까. 적어도 블랙 슬라임은 이클립스마냥 멋대로 날뛰진 않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덜그럭…….
그때였다.
미묘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마치 솥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새까만 형태의 솥인데 단순 금속이라고 하기엔 미묘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