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47화
공격이 닿기 전 이클립스의 서늘한 시선이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닿았던 것을 보았다.
아마 거대한 충격에서 보호한 무형 무색의 장막은 그녀가 펼쳐 준 것이리라.
그 여파 때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현재 이클립스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이다.
알싸한 통증이 그녀를 감싼다.
겉보기엔 말랑말랑해 보이는 이 몸도 사실은 엄청 단단한 편이라 어지간한 공격으론 이렇게 상처가 생기거나 피가 날 일도 없을 텐데.
짐승의 본능이라고 할까.
고대룡의 형질이 짙은 에반젤린은 눈앞의 저 거대한 짐승이 단순한 몬스터 같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길 수 있을까.’
데이비와 비교했을 때 약한 거지 그녀 본인도 약한 편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저 괴물을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갈 정도로 깊은 무저갱을 보는 기분이었다.
저게 저렇게 나와서 사고 치고 제압당할 존재가 아님을 알고 있는 것이다.
품고 있는 힘만 보면 대륙의 명운을 걸고 막아야 할 법한 존재임은 분명한데…….
저런 게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
저릿저릿해지는 피부를 보며 에반젤린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중간한 위압이면 겁도 없이 다가오는 이들이 있을 테지만…….
그녀의 육체에 직접 영향을 줄 정도인 위압을 내뿜을 수 있는 괴물이라면…… 겁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이들은 없을 테니까.
-크아아앙!!!
이윽고 짐승이 거대한 포효를 울리며 곧바로 이클립스를 향해 재차 공격을 가한다.
이에 이클립스 또한 손가락을 뻗는 것으로 대응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지만 이내 손가락을 거둔다.
정확히는 뻗은 손가락을 말아쥐고 그대로 주먹을 만든 것이다.
“읏?!”
갑작스러운 기류에 온몸이 저릿저릿해지는 살기가 퍼져 나간다.
에반젤린은 깜짝 놀란 얼굴로 흠칫 몸을 떨며 이클립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방금…… 엄마가 낸 살기야?’
이걸 살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과는 달리 깔끔하면서도 섬뜩한 무언가. 에반젤린은 저 살기가 자신을 향했을 때 과연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쩌어어엉!!!
이클립스의 반격은 가히 섬광과도 같았다.
저 작은 체구로 주먹을 내질러봐야 얼마나 아프겠냐라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세상에…….”
마치 잔상처럼 흐려진 이클립스가 내지른 주먹은 거대한 짐승의 육체 일부를 완전히 소멸시켜 버리며 튕겨 낸다.
-그르르륵…….
텁…….
허공에 발을 딛고 내려선 그녀는 무감각한 얼굴로 튕겨 나간 괴물을 시야에 담았다.
몸의 일부가 완전히 소멸된 듯 찢겨 나간 괴물은 수백 미터에 달하는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보는 창공 위의 이클립스를 향해 맹렬한 적대 의식을 내비쳤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육신을 복구한 녀석이 입가에 거대한 에너지를 모으기 시작하자 이클립스의 눈동자가 용의 눈처럼 세로로 찢어지며 보랏빛 뇌광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녀의 입 앞에 얼마나 응축된 건지 모를 거대한 에너지가 모여든다.
-크르르아아아아!!
찌잉!!!
거대한 포효를 울리며 선공을 취한 것은 짐승이었다.
놈은 작디작은 이클립스를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 한 치의 힘도 아끼지 않고 그대로 브레스를 발사했다.
하지만, 녀석의 브레스가 이클립스에게 닿는 것은 불가능했다.
스읍…… 찌지지직!!!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숨을 크게 들이쉰 이클립스가 그대로 브레스를 내리꽂아 버리며 짐승의 브레스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 버리고 괴물을 덮쳤다.
동시에 지상에 닿은 그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는 일대 대지 전체와 공명했고,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이거나 대지 전체를 뒤집어 버리는 듯 엄청난 재앙을 일으켰다.
* * *
쾅!!! 쾅!!
브레스에 직격하고도 살아남은 건 놀라운 수준이었다.
빠르게 현신시킨 날개를 이용해 날아올라 아직 남아 있는 거대한 석재다리에 올라선 에반젤린은 서로를 죽일 듯 싸우는 이클립스와 짐승을 보며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짐승이었다.
“대체 저 녀석 뭐야?”
어떻게 이클립스와 정면으로 싸우면서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이클립스가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고 있다.
비록 그녀가 온전하던 당시와 비교하면 상당히 약해져 있지만, 절대자가 조금 약해진다고 어중이떠중이가 이길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같았다.
육신의 대부분이 소멸해버린 주제에 다시 재생하는 불사에 가까운 생명력도 그렇지만 이클립스가 방어 대신 회피를 선택하는 것만 봐도 짐승의 공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에반젤린이 보기에 저 괴물은 단순한 야생 마물왕 같은 존재로 보기엔 어려웠다.
물론, 싸움의 형세는 이클립스의 일방적인 폭행으로 이어졌다.
처음엔 좀 버티는 듯하더니 이클립스의 공세를 계속해서 받아 내는 건 어려웠는지 짐승도 주춤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렇게 한 발 두 발 물러나더니 결국 녀석은 이클립스가 휘두른 양산에 거대한 상흔을 남기며 수백 미터를 물러났다.
-그르르르르…….
이윽고 녀석이 이클립스를 노려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당연 이클립스가 녀석을 쫓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굳이 슬금슬금 물러나는 놈을 쫓지 않았다.
평소라면 쫓아가서 죽여야 한다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에반젤린은 그러지 못했다.
조금 전 괴물과 처음 조우했을 때. 이클립스의 몸에 생겼던 노이즈가 그녀의 생각에 제동을 건 것이다.
“엄마! 괜찮아요?!”
슬금슬금 울창한 숲 쪽으로 물러나더니 거대한 빛으로 화하여 사라져 버리는 짐승을 뒤로한 채 에반젤린은 급히 이클립스에게 다가갔다.
“다친 곳은?!”
대답이 들려올 리는 없었다.
대신 이클립스는 말없이 에반젤린을 올려다보다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팔 쪽에 생긴 커다란 상처를 보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환부를 잡아당겼다.
“어, 어어? 왜…… 꺅!”
이윽고 이클립스의 작고 까슬까슬한 혀가 에반젤린의 환부에 닿는다.
깜짝 놀란 에반젤린이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클립스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어미가 새끼의 상처를 핥아 주듯 분홍빛을 띠는 작은 혀로 상처를 핥아 주자 놀랍게도 아물지 않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기 시작했다.
그제야 그녀를 괴롭히던 알싸한 통증도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졌다.
“엄마…….”
상처가 말끔히 낫자 이클립스는 담담하게 에반젤린의 손을 잡아끈다.
사방에는 파괴의 흔적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그저 묵묵하게 다음 장소로 가자고 말하는 듯했다.
“저…… 당장 가긴 힘들지 않을까요?”
이만한 습격이라면 그냥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에 에반젤린이 이클립스를 저지하기가 무섭게 파괴되지 않은 저편으로 다수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랴!!”
다급히 현장으로 다가오는 것은 다름 아닌 린디스의 기사단이었다.
저 깃발, 어디서 봤더라. 아, 할아버지 깃발이다…….
린디스의 황제가 왜 여기에?
놀라운 기색을 애써 숨기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기가 무섭게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온 노령의 사내가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뛰어오듯 다가왔다.
“에린이 아니더냐.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할아버지? 여긴 어떻게…….”
“시찰을 나왔다가 마물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와 본 게다. 다친 곳은 없느냐.”
“아…… 네. 괴물은 도망쳤어요.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구요.”
“그렇군…….”
물론 물적 피해는 상당하겠지만 린디스 황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1부대는 혹여나 있을 피해자를 수색하고 2부대는 피해 현황을 조사하여 보고하라.”
“예!!”
기민하게 움직이는 기사들을 뒤로한 채 데오르트 황제가 씁쓸하게 웃었다.
“한데…… 그녀는?”
이윽고 그의 시선이 이클립스에게 닿았다.
본능적으로 이클립스의 힘을 눈치챈 것일까. 경계심 반 의아함 반이 섞인 시선이었다.
“아…… 그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엄마라고 해야 할까. 그게 맞는 말이긴 하지만 뭔가 설명하기가 미묘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일단은 가자꾸나. 이곳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니.”
“앗…… 네.”
데오르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에반젤린과 이클립스를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
데오르트 황제를 따라 도착한 곳은 근처의 작은 별장이었다.
듣기로는 데오르트 황제가 자주 애용하는 린디스 황실의 별장 중 하나라는 모양이었다.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그래. 당분간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 받잡겠습니다.”
조용히 대답하며 사라지는 시녀를 뒤로한 채 그가 찻잔을 향해 손짓했다.
“이 지방에서 유명한 찻잎이다. 들거라.”
“고마워요. 할아버지.”
“끌끌.”
만족스러운 듯 끌끌거리며 웃는 그를 보며 에반젤린은 최선의 예를 갖춘 채 차를 음미했다.
반면 이클립스는 무덤덤한 얼굴로 찻잔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낮춰 킁킁거리며 향을 맡았다.
“음?”
이에 데오르트 황제의 시선에 의문이 서린다.
“엄마?”
말없이 차의 향을 맡던 이클립스는 뜨거운 찻잔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들고는 에반젤린에게 내밀었다.
먹으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 그건 엄마 거예요. 엄마가 마셔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클립스였다.
“엄…… 마라고?”
물론 둘의 대화에 놀란 것은 데오르트 황제였다.
그는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에반젤린을 바라봤다.
“에린아.”
“아, 할아버지 그게 말이죠…….”
이후 에반젤린은 데오르트에게 사실의 일부를 털어놓았다. 지금 옆에 있는 것은 이클립스의 잔념이 뭉쳐져 만들어진 형상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군,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다만…… 작은 소녀의 모습이라 짐이 거기까진 생각지 못했구나.”
대화는 불가능해 보인다. 다만 에반젤린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아이에게 뭐라도 더 해주고 싶어 하는 어미의 모습 같았다.
물론 겉보기엔 에반젤린이 언니고 이클립스는 동생 같은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다만 그 외에도 데오르트는 이클립스를 보며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겉보기엔 유약하고 무해할 것 같은 엉뚱한 소녀지만 데오르트 정도 되는 실력가였기에 본능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이 작은 소녀가 마음먹으면 자신은 한순간에 핏물이 되어버릴 수 있는 거대한 포식자라는 것을 말이다.
에반젤린이 고대룡이라고 하였으니 아마 그녀도 드래곤 계통의 존재이리라.
겉모습은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다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저 작은 소녀와 결혼하고 임신시켰다는 말만 놓고 보면 이클립스의 남편이라는 작자가 정말 제정신인가?’
고인을 모욕하는 건 할 짓이 아니라지만 겉보기에 너무 어려 보이지 않는가.
“그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에반젤린이 안전한 건 다행이지만 우선적으로 당시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할 의무는 있었다. 이에 에반젤린은 이클립스와 관광 도중 있었던 마석상 붕괴사건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괴물은……. 그대로 사라졌다는 뜻인 게냐?”
“네…… 정확히 녀석에게 얼마나 타격이 가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브레스를 맞고 멀쩡한 녀석은 본 적이 없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데오르트 황제였다.
“냉정하게 볼 때 놈이 다시 나타나면 피해 규모는?”
“으음, 사실 엄마의 상태가 생전에 비하면 많이 약해져 있다곤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순간에 숲을 사막으로 바꿔버릴 힘은 있어요…….”
다른 말로 하면 그만큼 강력한 존재가 죽이지 못하고 쫓아낸 정도라면 녀석이 다른 도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그 순간…….
지옥문이 열린다.
“후우…… 머리 아프군…….”
“저…… 할아버지, 제가 손을…….”
“아니. 이런 일에 손녀의 도움을 받을 순 없는 게다. 넌 아무 걱정 말고 네 어미와 함께 마저 관광을 즐기려무나.”
“할아버지이…….”
“그래도 제국민들을 구해 준 건 고맙구나…… 너와 이클립스 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얼마나 큰 피해가 발생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구나. 마음 같아선 응당한 보상을 해 주고 싶다만…… 시기가 좋지 못한 것을 용서하거라.”
일국의 황제. 세간에선 철혈황제라 불리지만 에반젤린은 눈앞의 할아버지가 참 좋았다.
“헤헤 아니에요. 그래도 그냥 두면 많은 사람이 다칠 수도 있으니 저도 거들 수 있게 해 주세요. 제가 공식적으로는 직급 같은 게 없으니 국제적인 외교면에서도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에반젤린의 말에 데오르트는 대견하다는 듯 에반젤린의 머리에 손을 뻗으려 했다.
찹!
그러자 이클립스가 그의 손을 가볍게 쳐내고는 에반젤린의 머리를 끌어 품에 안은 뒤 쓰다듬었다.
“어, 엄마?!”
“크흐흐흐흐…… 아무래도 질투가 심한 모양이로군.”
황제의 손을 쳐낸 시점에서 불경죄로 목을 쳐도 이상하지 않지만 데오르트는 그저 껄껄 웃을 뿐이었다.
애초에 불경죄를 묻는다고 한들.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물론, 그것 이상으로 이클립스는 어린 외모와 달리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기품이 서려 있었다.
순수한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기품이 묻어난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그때 이클립스의 무표정이 데오르트에게 닿았다.
겉보기엔 무표정인데, 마치 부럽지? 라고 묻는 듯한 저 눈빛을 보니 괜히 오기가 생기는 기분이었다.
“에린아. 할애비 품으로 오지 않으련?”
“네? 아…… 네.”
에반젤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이클립스가 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에반젤린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자 결국 놓아준다.
이후 에반젤린이 데오르트의 무릎 위에 앉자 데오르트가 에반젤린의 시선을 피해 이클립스를 흘끗 보고는 피식 웃었다.
동시에 이클립스가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와작! 깨뜨려 버렸다.
“엄마?!”
“이런, 괜찮으시오? 잠시…… 밖에 있는가.”
“예. 폐하.”
기다렸다는 듯 시녀들이 들어와 이클립스의 주변에 흩뿌려진 잔해들을 빠르게 치우기 시작했다.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는군…….”
“…….”
이클립스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데오르트를 해치진 않았다.
그렇게 충분히 승리자의 기분을 만끽한 데오르트는 에반젤린을 내려 주었다.
“폐하. 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사옵니다.”
“뭔가.”
“그것이…… 놈이 도망간 흔적을 발견했습니다만…….”
“음?”
“추적에 나선 기사단 대부분이 크게 다치는 바람에…….”
아무리 정예기사들이라 할지라도 이클립스와 정면 힘 싸움을 벌인 짐승이다.
그런 짐승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 잘못하면 대규모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어요. 제가 아빠한테 말씀드려서…….”
“에린아. 린디스 제국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수도 있는 일이란다.”
“아…….”
마냥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주자 에반젤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에반젤린이 이클립스의 힘을 빌려 무언가를 하려 해 보지만 전투 당시 이클립스의 몸에 노이즈가 일었던 게 내심 불안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이클립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에반젤린을 제 곁에 앉혔다.
그렇게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에반젤린은 어떤 묘한 감정을 느꼈다.
“엄마?”
“힘들어?”
그녀가 입을 연다. 이렇다 할 복잡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말을 못 하는 존재가 아님은 알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이에 에반젤린이 쓴 미소를 지어 보이자 이클립스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엄마? 어디로…….”
물론 이클립스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창문을 열고는 순식간에 날아올라 사라져 버렸다.
“하, 할아버지?”
“흐음?”
이에 당황한 데오르트도 짧게 침음성을 삼켰다.
갑자기 사라져 버렸으니 찾기도 어려웠지만, 우선은 그녀가 간 곳을 찾으려 했다.
그때였다.
쿠우웅!!!!!
멀지 않은 곳에서 어마어마한 폭음이 일며 주변 일대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했고 갑작스러운 지진에 데오르트는 반사적으로 에반젤린을 보호하듯 움직였다.
“으왓?!”
“조심하거라!!”
폭음과 진동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이 흘렀을까.
폭음과 지진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을 느꼈는지 데오르트는 곧바로 기사단을 소집하여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에반젤린을 데리고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에도 처음에 비하면 미약한 폭음과 지진은 계속 일어났다.
“할아버지…… 어떻게 된 거예요?”
“이 할애비가 보기엔 네 어미가 아무래도 그놈을 잡으러 간 것 같구나…… 혹시 모르니 최대한 빨…….”
그렇게 쉬지 않고 말을 내달린 데오르트와 기사들, 그리고 에반젤린은 숲 저편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떡 벌렸다.
숲이었던 지역은 하나의 불지옥도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불지옥도의 중앙에는 수백 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짐승이 피 칠갑을 한 채 쓰러져 있었고…… 그 위로 이클립스가 담담하게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내고 있는 게 보였다.
“폐, 폐하!”
그 서슬 퍼런 기색에 놀란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데오르트를 보호하듯 감쌌지만 데오르트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경악스럽군…….”
에반젤린이 힘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괴물을 찾아가 그대로 찢어발긴 것도 황당했지만, 이 거대한 지옥도를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저 작디작은 소녀라는 게 놀라운 그였다.
이곳이 인적이 없는 숲이 아닌 도시였다면 그 잠깐 사이에 도시가 잿더미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흔적들이 보였다.
“세상에…… 아까 전엔 이 정도까지의 힘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네가 다칠까 힘을 억제한 모양이구나…….”
“우리 엄마 짱 세…….”
에반젤린이 순수하게 감탄한다. 이후 이클립스는 에반젤린을 발견했는지 스르륵 사라졌다가 에반젤린의 앞에 나타났다.
기사들은 경계하며 무기를 들었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에반젤린에게 다가왔다.
물론, 몇 걸음 두고 다시 멈췄지만 말이다.
말없이 자신의 몸에 묻은 짐승의 피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공간을 열어젖혔고 무언가를 한참 찾아내듯 뒤적거리다 물기가 있는 수건 같은 것을 꺼냈다.
그러고는 손과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낸 뒤 다시금 다가왔다.
“엄마…… 나 때문에 저걸 잡은 거예요?”
에반젤린의 질문에 이클립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그르르르르…….
갑작스레 쓰러져 있던 짐승이 낮게 울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정말 불사라도 되는 것일까. 치명상이 분명한데도 천천히 일어나 다시 움직이려는 짐승의 모습에 이클립스가 다시 움직이려 했다.
치이이잉!!!
에반젤린의 목에 걸린 붉은 보석이 멋대로 떠오르면서 멈춰졌지만 말이다.
“어, 어어? 검둥아!”
붉은 보석이 멋대로 날아오르자 에반젤린이 당황한 듯 손으로 잡으려 했다.
하지만 보석은 멋대로 그녀의 손을 피해 날아올랐고, 짐승의 위로 이동한 뒤에 놀라운 현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르륵…… 그륵…….
짐승의 몸이 마치 거대한 에너지처럼 변하더니 붉은 보석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짐승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이고 그걸 먹어 치우는 것처럼.
다시금 일어나려던 짐승은 그렇게 저항도 못 한 채 완전히 흡수되어 버렸고, 붉은 보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에반젤린에게 돌아온다.
“…….”
그 모습을 보던 데오르트 황제는 조용히 그를 호위하던 마스터급 기사에게 물었다.
“경.”
“예…… 폐하.”
“그대는 어떠한가.”
“무슨 말씀이시온지…….”
“제국 최고의 기사 중 하나인 그대는 저런 것이 가능한가 물었네.”
그 질문에 노령의 소드마스터는 말없이 파괴 현장을 스윽 훑었고 단호하게 부정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로선 도저히 흉내 낼 수도 없는 수준이옵니다…….”
“그대를 탓하려던 건 아니었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해야 할지…… 경은 우선 하인스의 대공에게 가서 이 일을 전하라 이르게.”
“명 받들겠습니다.”
무언가를 발견한 듯한 데오르트의 복잡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클립스는 에반젤린에게 삼각김밥을 들이밀고 있었다.
“흡수라…….”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데오르트는 이클립스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빛의 가루를 흩뿌리고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이클립스의 몸이 순간적으로 흐리게 보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를 구성하는 게 조금 흩어진 것처럼 말이다.
다만 에반젤린이 목에 걸고 있던 보석이 괴물을 빨아들인 그 순간.
아주 찰나의 순간, 보석에서 기묘한 힘의 흐름이 빠져나와 이클립스에게 스며들었고, 조금씩 흐려지는 듯 보이던 이클립스의 그 현상이 멈춘 것을 볼 수 있었다.
에반젤린은 모르는 듯했지만 말이다.
뭐가 되었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닐 테니 가능하면 못난 사위 놈에게 이 상황을 전달해야 한다는 직감이 그를 지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