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48화
데이비가 뒤늦게 소식을 전달받았다곤 하지만 에반젤린은 이미 데오르트의 배웅을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
이클립스가 본능적으로 흔적들을 지워버리고 있기에 데이비도 수색이 쉽지 않다는 것을 에반젤린은 몰랐다.
말이 가출이지 그냥 놀러 나온 것인 만큼 데이비도 알면서 그냥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첫 계획부터 대차게 꼬여버린 탓에 에반젤린으로선 조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대답을 바라고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클립스는 에반젤린의 곁에 앉아 있을 뿐이었으니까.
“으음…… 원래라면 마석상 주변에 있는 다른 관광지들도 보고 싶었는데…….”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관광지를 찾자마자 거대한 짐승이 나타났다는 것도 조금 마음에 걸렸다.
마치 이클립스와 그녀가 이곳에 나타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궁금증은 참을 수가 없다.
처음 짐승이 토벌된 이후 에반젤린은 이 녀석이 어디서 튀어나왔는가를 확인해 보았는데 마석상 아래의 깊은 지하에서 올라온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괴물이 무언가에 의해 눈을 뜬 것 같은 모양새였다.
게다가 그 짐승은 에반젤린이 알고 있는 부류의 몬스터가 아닌 생전 처음 보는 형태. 힘을 지닌 존재였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건 이클립스가 피떡을 만들어 놓았다곤 해도 그녀를 상대로 한참을 버티고 반격까지 가할 정도의 힘을 지닌 존재가 있냐는 것이었다.
“엄마, 그 짐승…… 혹시 봐준 건 아니죠?”
이클립스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에반젤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렇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희는 이제 가볼게요.”
“국경까지는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아녜요. 원래라면 다른 관광지도 돌아보려고 했는데. 그러자니 조금 피곤해서요. 바로 하인스 영지로 날아갈 생각이에요.”
에반젤린의 등 뒤쪽 공간이 살짝 깨지며 날개 한 쌍이 모습을 드러내자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허면 떠나시는 것까지만 확인하겠습니다.”
“네.”
에반젤린은 이클립스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체격 자체가 이클립스가 훨씬 작기도 했던 만큼 언니가 여동생을 끌어안아 든 듯한 모습이다.
“그럼…….”
기사들의 배웅을 뒤로한 채 에반젤린은 빠르게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생각해 보면 집에서도 걱정하고 있을 테니 슬슬 돌아가는 게 맞으리라. 다른 관광지는 그 이후에 다시 와도 될 문제니까.
그렇게 린디스와 라운의 국경선에 위치한 대숲에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클립스가 갑자기 고개를 든다.
동시에 그녀의 손이 에반젤린의 팔을 휘감았고…….
“으엇?!”
순식간에 몸을 비틀어 에반젤린을 지상 쪽으로 내던진다.
갑작스런 과격한 행동에 깜짝 놀란 에반젤린은 지상에 추락하기가 무섭게 고개를 들었다.
“엄마! 뭐 하는…….”
뒤이어 화가 나서 소리치려던 그녀였지만 이내 깜짝 놀란 듯 눈을 끔뻑거렸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었다.
하지만 이클립스는 담담한 얼굴로 허공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존재가 한입에 삼키려는 것을 발과 손을 이용해 막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에반젤린의 시야에 공간의 일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모플라쥬도 적당히 해야지.
투명하던 공간이 일렁이더니 거대한 카멜레온 같은 생명체가 이클립스를 한입에 삼키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클립스는 녀석의 입이 닫히지 않게 버티고 있는 상황.
이에 에반젤린이 깜짝 놀라 그녀를 돕기 위해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뽑아 든 그 순간.
카멜레온의 위턱을 붙잡고 있던 이클립스가 한 손을 빼내더니 그대로 놈의 입안으로 보랏빛 구슬 같은 것을 가볍게 던져넣었다.
터엉!!
그리고는 발로 아래턱을 걷어차듯 밀어낸 뒤 가볍게 놈에게서 벗어났다.
쩌어어엉!!!!
입안에 보랏빛 구슬을 투여 당한 카멜레온이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몸 내부로 들어간 보랏빛 구슬은 이내 어마어마한 힘의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거대한 폭음을 일으키며 하늘을 부유하던 녀석의 신형을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끼이이…… 끼익…….
고통스러운 듯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리던 녀석에게 이클립스가 다가간다.
에반젤린은 저런 괴물이 쫓아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이 이질적인 기운. 생명체 같은데 그것도 아닌 것같은 무언가.
“짐승이랑 똑같잖아…….”
크기가 다르고 생김새만 다를 뿐 일전에 이클립스가 피떡으로 만들어 버린 짐승과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놈이었다.
쾅!! 쾅!!
이클립스는 버둥거리는 카멜레온 위에 올라타 주먹을 내리치며 놈의 육신을 피떡으로 만들어버렸다.
다만 재생능력 같은 건 떨어지는지 저항하지 못하고 점점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마치 살기 위해 버둥거리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카멜레온이다.
하지만 이클립스가 내지르는 주먹은 한 방 한 방에 일대 전체에 거대한 굉음과 지진을 만들어 낼 정도였고 결국 녀석은 버티지 못한 채 추욱 늘어져 버렸다.
가히 압도적인 힘의 격차, 하지만 에반젤린은 다른 쪽으로 초점을 잡았다.
이런 괴물이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마경, 오지에는 마물왕 같은 상위 존재가 서식하는 곳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건 극히 소수일 뿐이고 저렇게 은밀하며 강한 힘을 품은 생명체는 사실상 티오니스 대륙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괴물을 하루 만에 두 마리나 본 것이다.
크게 위협적이었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 다친 곳은 없죠?”
카멜레온을 제압해버린 이클립스 쪽으로 다가간다. 혹 이번에도 붉은 보석이 저 괴물을 먹어 치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은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뭐 괜히 소란 안 피우면 이쪽도 편하니까.
그리 생각하며 이클립스에게 다가간 그 순간.
지지직…….
에반젤린의 눈이 쟁반처럼 크게 뜨여진다.
이클립스의 육신이 마치 거대한 노이즈가 생긴 것처럼 지직거리며 일렁였기 때문이었다.
“어, 엄마?!”
저 현상 본 적이 있다. 처음 짐승과 싸울 때 아주 잠깐 저렇게 된 것을 본 적이 있다.
실제로 그때 이클립스는 자신의 힘을 방출하지 못했고, 그 결과로 짐승의 공격을 허용하기도 했었다.
저건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다.
이클립스의 몸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노이즈가 일 때마다 이클립스의 존재감이 한없이 옅어지고 있다.
그때였다.
인적이라곤 동물의 기척 말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숲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반젤린의 기감에 섬뜩한 무언가가 잡혀들어온다.
스르릉…….
반사적으로 용신검 트와일라잇을 뽑아 든 에반젤린은 긴장 어린 표정으로 숲 저편을 바라보았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셋?
저런 괴물이 티오니스에 돌아다니면 티오니스는 이런 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
즉.
저 괴물들은 명백히 이상 증세였다.
쿵!!
이윽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숲 저편으로 일순간 거대한 존재감이 일었다.
나무를 박살 내고 나타난 것은 거대한 백색의 사슴이었다.
머리에 거대한 뿔을 달고 있는 녀석은 빛이 나는 안광을 번뜩이며 에반젤린과 이클립스를 직시하다 그대로 이클립스에게 덤벼들었다.
지직…… 지지직…….
하지만 이클립스는 무엇 때문인지 힘이 방출되지 않는 상황.
위험한 상황임을 직감한 에반젤린이 트와일라잇을 똑바로 세워 들고 빠르게 이클립스의 앞을 막아섰다.
적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약한 것도 아니었다.
막는 것 정도라면.
에반젤린의 검이 청명한 검음을 일으키며 옅게 진동한 그 순간.
이클립스가 에반젤린의 팔을 손으로 잡아 자신의 뒤편으로 당겼다.
이미 돌진을 시작한 사슴의 힘이 약한 게 아니었기에 이런 식이면 제대로 막아 내기 힘들다.
에반젤린이 당황해서 소리치려던 찰나.
이클립스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노이즈를 없애 버리고 주먹을 말아쥐었다.
쩌적…….
동시에 그녀가 내지른 주먹이 공간을 비틀며 일순간에 사슴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사슴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동시에, 이클립스의 몸에서 대량의 빛의 가루들이 흩어진다.
“엄마?!”
그제야 에반젤린은 이클립스의 몸에 이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빛의 가루들은 분명 처음부터 보았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 당시엔 저 빛의 가루들이 무엇인지 몰랐었기에 놀라지 않았었다.
“설마…… 그 빛의 가루들이…….”
이클립스의 한쪽 발과 팔이 상당히 투명해진 것을 보며 에반젤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클립스에게서 빛의 가루들이 빠져나와 흩어질 때마다 그녀의 몸이 아주 천천히 옅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정도는 그녀가 막대한 힘을 사용할 때마다 커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클립스는 에반젤린에게 다가와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려 했다.
쿵!!! 쿵!! 쿵!!
동시에 숲 곳곳에서 대량의 존재감이 흘러넘치기 시작했고. 에반젤린은 파랗게 질린 채 주변을 둘러본다.
모두가 하나같이 짐승과 동일한 무언가다. 각기 존재감은 다르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 있으면 이클립스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움직일 것이고, 그럴 때마다 그녀가 점점 옅어진다.
애초에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으니 그냥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에반젤린은 다르게 생각했다.
지금 저렇게 없어져 버리면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말이다.
“엄마!!”
생각을 정리하기가 무섭게 에반젤린은 이클립스를 끌어안았고 빠르게 날아올랐다.
대체 저 괴물들이 왜 튀어나오는 건지 모를 일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녀석들과 이클립스를 싸우게 두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가 힘을 사용하게 두면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도망뿐이다.
빠르게 날아오른 그녀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클립스는 괴물들과 싸워 에반젤린을 지키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절대 그렇게 둘 수 없었다.
하지만.
-키아아아악!!!
괴물들 또한 그녀가 도망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사방에서 세 마리의 짐승들이 달려들자 에반젤린은 필사적으로 곡예비행을 하듯 움직였다.
다행히 몇 번의 조우 덕분인지 놈들에 대한 감각이 어느 정도 익었다는 점은 다행이었다.
녀석들은 명백히 이상한 존재였다.
생명체는 분명한데.
녀석들에게서 정신계 에너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 꽉 잡아요! 금방 도망칠…….”
그렇게 외치며 돌아선 그 순간.
에반젤린은 언제 왔는지 모를 거대한 무언가의 존재에 눈을 크게 떴다.
뒤에서 따라오던 녀석들 말고도 한 놈이 더 있었던 모양이었다.
터어어엉!!!!
동시에 이클립스를 안고 있던 에반젤린의 신형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꺄아악!!”
비명을 지르며 추락한 에반젤린은 온몸을 타고 오르는 통증에 인상을 찡그렸다.
고대룡의 육신을 지닌 만큼 어지간한 공격으론 이렇게 타격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녀석들의 공격은 이상하리만치 강하게끔 느껴졌다.
이윽고 그녀의 시야로 붉은 무언가가 보인다.
이마 쪽이 찢어지면서 피가 흘러내린 모양이었다.
동시에 자신을 내려다보던 이클립스의 눈이 부릅 뜨여진 게 보였다.
“어, 엄마?”
본능적으로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감을 눈치챈 에반젤린이 이클립스의 팔을 잡으려 했다.
애초에 적이 무서워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이클립스가 힘을 쓰는 상황을 막기 위해 도망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다치는 걸 봐 버린 이클립스가 눈이 돌아가 버렸으니.
상황은 가히 최악 그 자체였다.
“안 돼요!!!”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지만 이미 이클립스는 사라진 후였다.
그녀가 나타난 곳은.
-키아아아아악!!!!
에반젤린을 후려쳤던 거대하고 기괴하게 생긴 괴물의 머리 쪽이었다.
뿌득…… 뿌드드득…….
이클립스는 스산하게 갈라진 세로 동공을 번뜩이며 맨손으로 괴물의 머리를 반으로 찢어 버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몸에서 더 많은 양의 빛의 가루들이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육체보다 한참 작은 이클립스를 어찌하지 못해 버둥거리던 괴물은 결국 완전히 반으로 쪼개져 사방에 선혈을 흩뿌렸다.
이후 이클립스가 고개를 슬쩍 돌려 뒤쪽의 괴물들을 바라본다…….
서슬 퍼런 안광이 일렁이더니 짐승들이 일제히 주춤하며 물러나려 했다.
물론, 이클립스가 그걸 그냥 두진 않았다.
* * *
아무리 흔적을 지운다 해도 등신이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다.
데이비는 달의 숲에서 발견된 탈출한 괴물에 대한 보고를 받던 중 느껴진 거대한 힘의 충돌에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이만한 힘을 내뿜는 건 이클립스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클립스를 찾아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그로선 한 시간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존재감이 사라지는 정도가 옅기에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사실이었으나 이클립스가 이렇게 날뛰는 게 사실이라면 그 시간적 여유마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다.
대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고 있기에. 또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건지.
안 그래도 유리아의 보고 때문에 머리가 아픈데 별의별 일이 다 터지고 있다.
메가로드리아를 이용해 힘의 진원지인 국경지대의 대숲으로 향한 데이비와 유리아는 곧이어 그곳에 펼쳐진 참상에 표정을 굳혀야 했다.
십여 마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수의 괴물들의 시체들이 즐비해 있다.
그리고. 쓰러진 괴물 하나를 찢어발기고 있는 이클립스가 보인다.
그녀의 육신에선 계속해서 빛의 가루들이 흩어지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의 육신이 더욱 옅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존재감이 약해져 있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깨달은 데이비는 곧 이클립스의 뒤에서 그녀의 몸을 붙잡고 엉엉 우는 에반젤린을 볼 수 있었다.
“안돼! 엄마 제발! 내가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만 해요! 제발!”
엉엉 울며 어떻게든 말려보려 하지만 이클립스는 에반젤린의 말도 듣지 않은 채 이미 피떡이 되어 버린 괴물들을 미친 듯이 내리치고 찢어발길 뿐이었다.
무감각한 표정이지만 이클립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명백한 분노였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분노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를 분석하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에반젤린의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으니까.
아이가 다친 걸 본 어미가 눈이 돌아갔다.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그녀를 그냥 둔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이 이상 그녀가 힘을 발산하며 날뛰다간 돌이킬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동시에 데이비의 양손에 다량의 부적이 쥐어졌고 하나하나 빛을 뿜어내더니 거대한 사슬이 되어 순식간에 이클립스를 봉인하듯 묶는다.
“어, 어어? 아빠?”
“에반젤린 물러나.”
“아빠! 엄마…… 엄마가!”
“알고 있으니까 뒤로 가 있어.”
이클립스를 상대로는 장난이 통하지 않는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데이비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클립스, 네 꼴을 봐라. 그게 뭐냐 대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미친 듯이 날뛰며 어떻게든 구속에서 벗어나려 했다.
많이 약해졌구나.
처음 붉은 보석을 회수할 때 날뛰던 사태에 비하면 가히 눈에 확 띌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정확히는 힘을 쓸수록 약해지는 것일 터다.
그 때문에 이클립스는 쉬이 봉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한참을 힘겨루기했을까.
급기야 더욱 힘을 끌어내려던 이클립스가 휘청거리더니 그대로 쓰러져버린다.
의식을 잃기라도 한 듯 쓰러지는 그녀는 본래라면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가야 했다.
“왜 안 돌아가지?”
하지만 그녀는 사라지지 않았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물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기절한 이클립스를 안아 든 데이비가 말했다.
“이 괴물들은 대체 뭐야.”
“모르겠어요…… 린디스 제국 관광지에 나타난 녀석을 처음으로 계속해서…….”
그 말에 데이비의 시선이 유리아에게 향한다.
“이 괴물들. 네가 보고 올린 그것과 비슷한가?”
“확신할 순 없겠네요. 애초에 저희가 발견한 건 하나였어요. 이렇게 다수가 아니라.”
“이것들. 육체가 없는 에너지가 응집된 것들이야.”
“그럼…… 풀려난 괴물이 이런 짐승을 만들어 내서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는 소리인가요?”
“적어도 벽화에 있던 용과 붉은 세계의 왕이라면…… 그 용이 이클립스를 뜻할 수도 있겠지.”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클립스와 여기 널브러진 괴물들. 그리고, 달의 숲에서 발견된 고대 유적은 모두 연관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그 붉은 세계의 왕이…….”
“아니. 붉은 세계의 왕은 죽었어.”
“죽어요? 하지만 봉인은 붉은 세계의 왕만이 풀 수 있다고 들었는걸요.”
“붉은 세계의 왕이 죽어도 봉인을 풀 수 있는 존재가 하나 더 있지.”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했다. 붉은 세계의 왕. 데이비 이전의 붉은 세계의 왕이자 시초. 이클립스의 남편이자 에반젤린의 친부인 헤라클래스의 죽음은 직접 본 사실이니까.
그는 이클립스와 다른 죽음이었기에 이런 잔재가 남아 있을 리도 없다.
봉인을 풀 수 있는 건 열쇠를 지닌 헤라클래스뿐이다. 하지만 그가 죽은 현시점에서 봉인을 풀 수 있는 존재는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밖에 없었다.
프리아 여신.
애초에 열쇠도 그녀에게서 비롯된 것이니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봉인을 푸는 건 어려울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왜 갑자기 그녀가 봉인을 풀어서 이런 괴물을 풀어놓은 건지 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에반젤린의 부상으로 눈이 돌아가 버린 이클립스를 금방 제압했다는 사실일까.
당장 그녀가 힘을 더 쓰지 않는다면 시간은 벌 수 있다.
그녀의 형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는 건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대체 왜 안 사라지는 거지? 최소한 자기가 있던 공간으로 돌아가야 회복이 가능할 텐데.”
온전하게는 불가능해도 어느 정도 회복은 될 텐데. 왜 돌아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이클립스의 신체 전역에 신력을 부려 변화를 감지해본다.
‘돌아가려고는 하고 있는데…… 뭔가가 그걸 막고 있네.’
그 정체가 뭔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이클립스는 현재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였다.
우웅…… 우웅…….
“폐하?”
평소엔 올 일이 없는 연락에 깜짝 놀란 데이비가 아티펙트를 받았다.
통신 아티펙트로 신호를 보낸 곳은 다름 아닌 린디스 황제 직통라인이었다.
-사위. 짐일세.
“예. 장인어른. 무슨 일이신지요.”
-짐이 아무리 고민해도 영 찜찜해서 말이네. 긴히 해야 할 이야기가 있네, 이야기 가능하겠는가.
“음…… 이른 시일 내로 뵈러 가겠…….”
-그런 거창한 건 아닐세, 에반젤린과 그 친모라고 하였는가. 이클립스라 불리던 그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네. 괜히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에린이는 모르는 듯하여서.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위. 자네 그 이클립스라는 여성의 몸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는 건 알고 있는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데이비가 눈을 크게 뜬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 괜한 이야기이지만 마석상에서 짐승을 사냥했을 때 말이네…….
이어지는 데오르트의 말에 데이비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짐승이 이클립스에게 제압당한 뒤 다시 일어나려 했을 때. 에반젤린의 붉은 보석이 놈의 형체를 모조리 삼켜버렸고.
그 후 이클립스의 붕괴가 일순간 멈춘 것도 모자라 조금 회복되었다는 사실.
가장 문제시되는 것이 이클립스의 자연붕괴였기에 데이비로선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단순히 에너지를 먹인다고 사라진 흔적이 돌아올 리는 없다.
즉.
짐승에게서 흡수한 에너지는 본래라면 복구가 불가능한 이클립스의 흔적을 복구시켜주었다는 이야기였다.
-혹 내가 괜한 소리를…….
“아닙니다. 장인어른. 정말 큰 정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크흠…… 뭐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 그럼 후에 에이리아와 함께 찾아…….
“우선 바빠서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장인어른.”
본래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며 허황되었다 말할 수 있지만 짐승들의 존재 자체가 미스터리한 지금 시험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데이비가 망설임 없이 에반젤린을 부른다…….
“에린아. 그 보석 꺼내.”
“네? 이, 이거요?”
놀란 에반젤린이 붉은 보석을 꺼내 들자 데이비는 그것을 낚아챈 뒤 사방에 널린 짐승의 시체를 향해 가져다 대고 말했다.
“흡수해.”
하지만 보석은 그것들을 빨아들이지 않았다.
“평소에 잘 처먹더니 이건 왜 편식이야. 빨리 먹어.”
데이비의 으르렁거림에 보석이 옅게 미동한다. 마치 지금은 먹기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듯한 느낌이었다.
저 짐승을 구성하는 에너지는 먹기 힘든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즈음. 데이비가 놈의 몸 안에 자신의 에너지를 쑤셔 넣기 시작했다.
‘먹는 게 힘들면 내가 힘을 보태주마.’
동시에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가 보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추욱 늘어지듯 침묵하던 보석이 옅게 번뜩이더니 서서히 주변에 널린 짐승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에너지로 이루어진 짐승들은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주 미약하지만 이클립스의 존재가 흩어지는 것들이 느려지며 아주 소량 그녀의 존재가 회복되기 시작한다.
미약한 양이다.
회복이 된다는 건 최악의 상황은 막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이클립스의 존재가 흩어진다. 그 시작은 아마 이클립스가 눈이 돌아버리면서 짐승들을 다 찢어 죽이면서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아, 아빠! 엄마가!”
“알고 있어.”
고작 이 정도론 부족하다. 더 크고 거대한 힘을 먹어 치우지 않으면 이클립스는 가만히 두기만 해도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태울 것을 다 태우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잔불처럼 덧없고 헛된 저항이다.
그렇기에 데이비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속도가 점차 빨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누군가가 만들어 낸 일부에 불과하겠지…… 그렇다면 본체라면…….”
다만 그 본체를 찾기 전에 이클립스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이 상황에 데이비가 무리해서라도 그녀의 존재를 고정시키려던 찰나.
기적처럼 이클립스의 바스러짐이 멎어 들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시간을 벌어낸 것이다.
다만 근본적인 문제는 남아 있었다. 본체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였다.
그때 데이비의 손에 누군가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이에 그가 고개를 돌리자 언제 깨어났는지 모를 이클립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를 내뱉는다.
“서쪽.”
* * *
공허의 의지 속에서 막대한 힘이 이클립스의 형체를 다시 어두운 공허 속으로 끌어당긴다.
어서 돌아오라고. 사라진 건 복구할 수 없어도 최소한의 시간은 벌 수 있다고.
이대로 가면 사라질 것이라 경고하듯 필사적인 끌림이었다.
잔재에 불과한 이클립스는 계속해서 힘을 보충받아야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힘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는 공간으로의 회귀를 거부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최소한의 힘이라도 복구하기 위해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클립스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거부했다.
죽기 위해서?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 더 단순한.
또는 좀 더 미련한 이유였다.
-나랑 같이 살아요. 이제 어디 가지 말아요.
그 어떤 우선순위보다 가장 중요한 목소리.
그녀의 손을 붙잡고 부탁하던 소중한 딸의 부탁.
그 한마디가 현재의 이클립스가 에반젤린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실질적인 이유이며 미련하고도 올곧은 이유였다.
그리고. 본래라면 불가능할 기적의 씨앗이 개화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내가 지켜야 해.
어떤 힘이 흐른다.
이클립스의 의식 속 검은 공간을 유영하던 잔재의 의식에 의지가 깃든다.
망가지고 붕괴되는 의지 속에서 작디작은, 그러나 엄청난 힘을 지닌 소녀의 의지가 조금씩 타오르기 시작했다.
우리 아가는 내가 지켜야 해.
존재를 잃어가며 서서히 꺼져가던 잔불이 다시금 억지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본래라면 고작해야 잔재에 불과한 그녀는 절대 불가능한 힘의 역행이었다.
마치 기적처럼.
기적 같은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한 이클립스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런 소모를 막아 줄 존재를 떠올려낸다.
[짐승]
-나를 찾아라. 이클립스.
“…….”
-그리고. 약속대로 나를 다시…… 잠들게 하라.
놈의 위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이클립스의 의지는 그런 것을 대화로 전달할 능력 따윈 없었다.
그렇기에.
의식을 강제로 일깨우며 데이비에게 한마디를 내뱉는다.
“서쪽.”
그곳에서 그 짐승이 이클립스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