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49화
서쪽 어딘가에 하인스 영지에서 뛰쳐나간 것으로 보이는 짐승이 이클립스를 기다리고 있다.
이클립스의 잔재는 내게 서쪽이라는 말을 한 뒤 다시금 의식을 잃어 버렸다.
아마 본능적으로 소모를 막기 위한 자기방어 기재가 아닐까 싶다.
그런 주제에 에반젤린을 시야에 담자마자 어떻게든 깨어나려 발버둥 치던 모습을 보면 가히 그녀가 지닌 모성애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클립스를 등에 업은 채 하인스로 돌아오는 길. 에반젤린은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의 몸에 난 상처는 이미 다 치료가 되었지만, 그녀가 우울한 것은 단순히 상처 문제가 아니라 이클립스에 관한 문제 때문이었다.
그런 에반젤린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그저 묵묵히 다독여주는 것뿐이었다.
가출했다고 혼을 내는 것도 상황을 봐가면서 하는 것이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녀를 다그치는 건 악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날이 밝자마자 나를 불러낸 거야?”
“넌 알 거 같아서.”
내 질문에 베르단데는 어두운 지하 유적 속 파괴된 구속구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
뭔가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짐승…… 직접 본 건 처음인 거 같기도 하고…….”
“너도 잘 모른다고?”
“애초에 짐승은 그 당시에도 유명했던 동화나 다름없어.”
울면 짐승이 잡아간다. 나쁜 아이는 짐승이 꿈에서 나타나 물어뜯는다.
좀 살벌하긴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있는 이야기인 건 사실이었다.
“꿈?”
“그래. 꿈의 맹수. 이름은 없어. 그저 짐승이라 불릴 뿐이지. 당시 어린아이들에게는 사실 공포의 상징이나 다름없기도 했고.”
울거나 떼쓰면 잡아가는 괴물. 두렵지 않을 리가 있나.
하지만.
“사실 나도 소문만 들었지 자세한 건 몰라. 정말 실존하는지도 몰랐고.”
하긴 베르단데가 아무리 이클립스의 양딸이라 해도 모든 것을 알 리는 없었다.
“다만 일부 어른들 사이에선 그런 이야기도 있어.”
“음?”
“꿈을 헤매는 불쌍한 짐승은 잠들지 못하기에 자신을 잠들게 해 줄 존재를 간절히 바란다고.”
이게 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그거 말곤 없어? 이놈의 특징이라든가, 뭐 생김새라든가.”
“나도 모르지. 그냥 소문들인데 무슨 수로 알까.”
그래도 당시의 존재인데 생각보다 쓸모가 없다.
그때였다.
“후후. 후후후.”
뒤에서 구속구를 쳐다보던 이실디가 스산하게 웃자 베르단데의 표정이 팍 찡그려진다.
“저런 표정 지을 때마다 엄청 짜증 나는 일이 벌어졌었는데.”
“그래. 결국 내가 없으면 안 된다 이거네?”
비실비실 웃으며 자신은 뭔가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모양새에 베르단데의 표정이 더없이 일그러졌다.
“자 어서 부탁해 봐. 난 알려 줄 수 있어.”
귀엽게 콧노래를 부르는 저 성격 나쁜 소녀가 한때 재앙이라 불린 심연의 공주 중 가장 강한 존재라는 것을 누가 믿기나 할까.
물론, 파괴에 미친 슬리지아나 이클립스도 있긴 했지만 이실디는 순수한 무력만으로 최고위급 반열에 들어 있던 미치광이이기도 했다.
“난 못 본 걸로 할래.”
베르단데는 짜증 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실디.”
“응? 왜?”
말꼬리를 늘어뜨리는 이실디를 보며 내가 말했다.
“너 이러는 거 네 사제들에게 말해도 되냐?”
이실디의 역린이라 한다면 소중한 동생이나 다름없던 중원의 사제들이다.
내 말에 이실디의 표정이 팍 찡그려지는 건 당연했다.
“걔들은 네가 정말로 믿음직한 사저일 텐데.”
그런 사저가 이런 걸로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꼴을 본다면 참 재미있으리라.
“말하면 되잖아 이 나쁜 새끼야!”
“빨리 아는 대로 말해.”
“꿈꾸는 짐승. 형체가 없는 불사의 괴물…….”
한숨을 내쉰 이실디는 조용히 말했다.
“녀석이 이름 없는 짐승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 형태가 모두 달랐기 때문이야. 그러면서도 실존했기에 그런 동화가 남아 있는 거고.”
“음…… 숲에서 이클립스를 습격한 그것들?”
“맞아. 그건 전부 꿈꾸는 짐승의 분신체이면서 다른 형태나 다름없지. 본체에 비해 품고 있는 힘은 미약하지만…….”
근본적으로 녀석들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별로 도움되는 정보는 아닌데?”
“이야기 마저 들어. 녀석은 타나토스가 만들어 낸 존재이기도 해. 다만 종족이라기보다는 오래전 타나토스가 여신의 명을 받들어 잠과 꿈을 관리하면서 만들어 낸 하나의 신수 같은 개념이지.”
본래 꿈꾸는 짐승은 생명체의 꿈을 지켜주는 파수꾼이었다. 악몽을 쫓아내거나 꿈을 꾸지 않는 이들에게 꿈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는 소리였다.
“그런 개념에 가까운 녀석이기에 녀석은 죽는다는 개념이 없어. 마나를 아무리 쓴다고 마나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게 아닌 것처럼.”
생명체가 아니고 생명체가 가지는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꿈의 생명체이기에 녀석들의 등장은 한없이 뜬금없을 수밖에 없다.
“타나토스가 비틀리면서 꿈꾸는 짐승도 같이 비틀렸어. 녀석은 본래 자신의 의도를 잃어 버린 채 누군가를 해치게 되었지.”
그게 동화의 시초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잃어 버린 짐승은 자신을 영원히 잠들게 해 줄 존재를 찾아 갈망했고. 그렇게 녀석을 영면에 들게 해 준 것이 이클립스와 헤라클래스라는 소리였다.
녀석은 신의 힘으로 봉인되어 지하에 잠들었고. 그 봉인을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헤라클래스가 가졌다.
뭐 헤라클래스는 이미 죽어 사라졌으니 그 열쇠는 여신에게로 돌아갔을 것이고.
여신은 그 열쇠를 이용해 지금의 짐승을 해방시킨 것이리라.
“약속에 따라 짐승은 자신을 영면에 들게 해주기로 한 이클립스를 찾아 헤매는 거야. 괴물이 이클립스를 계속 노리는 건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대가를 지불하게 하기 위해서겠지.”
“생각보다 잘 아네?”
“나도 왜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녀석을 찾으려면 녀석의 영역을 찾아서 꿈속의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거지.”
그곳에 놈이 있을 테니까.
“그걸 찾을 방법은 있나?”
내 질문에 이실디는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끼고 검지 손가락을 펼쳐 가볍게 좌우로 움직였다.
“그야 모르지.”
“…….”
“뭐. 왜 뭐. 이클립스가 그놈을 형상화시킨 것도 나는 이해가 안 되거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결국 도움이 하나도 안 되는구나.”
“야!”
“내가 저 등신을 믿은 게 잘못이지…….”
요란스럽게 정보를 늘어놨지만 결국 이미 예측하고 있던 사실을 확신받은 것에 불과했다.
이실디는 자신의 취급이 불만스러운지 잔뜩 표정을 찡그리고 울먹거렸지만 베르단데나 나나 그녀를 신경 쓰진 않았다.
“이클립스는 서쪽이라고 말했어. 아마 그 서쪽이라는 건 짐승이 있는 장소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은데.”
“꿈꾸는 짐승, 몽환의 마수. 뭐가 되었건 녀석은 지금 이 티오니스 어딘가에 둥지를 틀고 기다리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야, 야아…… 왜 나 무시해?”
“그럼 녀석의 힘이 짐승을 형상화시키기 위해서 움직이는 독자적인 힘을 역추적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겠지?”
“문제는 그걸 감지할 수 있는가가 문제긴 한데…….”
“야아…… 계속 무시할 거야? 응?”
이실디가 점점 울먹거린다.
“적어도 힘의 근원은…….”
“이런 방법은…….”
고민을 나누고 있자 결국 부들부들 떨던 이실디가 빼액 소리 질렀다.
“됐어!! 집어치워! 방법 따위 알려주지 않을 거야!”
울먹거리면서 돌아선 그녀였다.
물론, 그녀가 했던 말을 듣기가 무섭게 베르단데와 내가 그녀의 양팔을 구속하듯 붙잡았지만 말이다.
“이거 놔!”
“방금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더 이상 아는 게 없다고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 취급한 건 너다. 이실디.”
버둥거리던 이실디였지만 결국 포기한 듯 힘을 뺐다.
“말했잖아…… 꿈속의 짐승이라고…….”
“그래서?”
“나…… 허상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거든…….”
그녀의 말에 베르단데와 내가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뭔데 그 표정은!”
“네가 그런 힘이 있다고?”
“뭐래! 나도 고유 능력 정도는 있어!”
생각해 보니 이실디는 정말 순수한 무력만으로 강대한 힘을 얻었다.
다만, 다른 심연의 공주들이 각기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이실디는 조금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
“뭐. 무, 물론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쓸모없는 능력이라 애초에 쓸 일이 없었다지만…… 결과적으로 녀석의 둥지가 있는 지역에 가기만 하면 문을 여는 것 정도는…….”
생각지도 못한 수확이었다.
“그럼 넌 그놈이 자리를 틀고 있는 지역을 찾을 수 있어?”
“음……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방향 정도는…….”
그거면 충분했다.
내가 이실디의 양 겨드랑이에 팔을 찔러넣고 마치 아이에게 비행기를 태워주듯 들어 올리자 그녀가 당황한 듯 소리 질렀다.
“야…… 야?!”
“이야. 이실디, 처음으로 쓸모 있었네.”
“넌 진짜 개자식이야.”
퍽퍽 거리며 나를 걷어차지만 작정하고 걷어차는 건 아닌지 큰 타격이 들어오진 않았다.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이실디는 정확히 이클립스가 말하던 서쪽 방향에서 이질적인 변화가 감지된다고 말했다.
국경의 숲과 지금의 위치를 생각하면 마냥 서쪽이 아니었기에 그녀가 가리킨 방향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이동 자체는 가급적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괜히 요란스런 이동으로 남의 영토에 진입하면 그쪽의 경계를 살 수밖에 없으니까.
결국 이동인 원은 최소한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 이동을 결정한 인원은 문을 열어 줄 이실디, 그리고 베르단데와 나를 포함한 이클립스와 에반젤린이 전부였다.
물론, 특수한 상황을 가정해 헬창부의 근육 토끼도 한 명 따라붙긴 했지만 말이다.
메가로드리아를 타고 해당 위치까지 빠르게 진입한 후 고공낙하 하여 목적지에 다다른다.
계획 자체는 심플했다.
“가자. 살아 있는 나침반.”
이실디의 뒷덜미를 잡아 메가로드리아에 태우자 그녀가 악을 쓰며 화를 내지만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후 모두가 준비를 마치기가 무섭게 메가로드리아가 빠르게 날아오른다.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 자체는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나침반에 해당하는 이실디가 실시간으로 방향을 말해 주면서 조율할 수 있었으니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이클립스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녀가 잘못되어 사라져 버리면 에반젤린에게 거대한 트라우마를 줄 가능성도 있기에 실패를 용납할 순 없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중부 대수림이네.”
중앙대륙에 존재하는 작은 대수림 지역.
인적이 극히 드물며 일부 엘프들이 머무는 숲이기도 했다.
이전에도 한 번 들러본 경험은 있었기에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이 안인 거 같은데. 엘프의 결계가 있네.”
창공에서 곧바로 낙하하듯 내려와 이실디를 앞장세워서 놈의 몽환이 자리 잡은 공간으로 향한다. 겉보기엔 멀쩡한 숲이지만 이상하리만치 고요했으며 평소라면 벌써 기척을 드러냈어야 할 엘프 파수꾼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적어도 짐승이 뭔가를 했다면 이곳의 엘프들도 영향을 받았을 수밖에 없긴 해.”
이실디의 말에 나는 굳게 닫힌 결계를 가볍게 간섭했다.
다만 굳게 닫힌 결계는 침입자의 출입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부숴야 하나?”
한 번 부수면 다시 만드는 게 귀찮아지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이실디의 귀가 쫑긋거린다.
“누가 온다.”
동시에 숲 저편이 일렁이더니 겁에 질린 어린 엘프 하나가 숨을 헐떡거리며 우리 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히이익! 오, 오지 마!!”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건지 울먹거리며 소리치는 엘프의 뒤로 거대한 짐승 한 마리가 맹렬하게 쫓아오는 게 보였다.
“음…….”
이에 내가 홍단이를 뽑아 들고 놈을 베어 버리려던 그 순간.
짐승이 갑자기 멈추더니 곧바로 시선을 한곳으로 고정시켰다.
녀석이 바라보는 것은 다름 아닌 내 등에 업혀있던 잠든 이클립스였다.
-크아아아앙!!!!
애초에 녀석들은 이클립스를 집요하게 노렸다는 점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뒤쫓던 엘프에게서 우리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엘프는 자신을 쫓는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이미 어그로는 이쪽으로 튀어 버린 후였다.
청단이로 베어 버리면 쉽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되어 녀석을 분해시켜 버리면 붉은 보석으로 녀석의 힘을 흡수하지 못할 테니 적당히 다져놓는 방법을 택했다.
“이, 인간?! 도, 도망쳐요!! 저 괴물은!!”
도망치던 엘프는 뒤늦게야 우리를 발견하듯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 괴물들은 불사의 존재란 말이에요!”
다급한 외침에도 나는 멈추지 않는다.
“오래전 현인이 그런 말을 남겼지.”
“음?”
“베어서 죽지 않는다면 더 세게 베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라고.”
일순간 홍단이의 붉은 검신이 일렁였고.
서걱!!
거대한 충격파가 서린 일검이 정확히 엘프의 몸을 지나쳐 숲의 일부와 짐승을 양단한다.
* * *
숲의 어린 엘프 다나는 몸을 바들바들 떨며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수많은 화살과 정령술로도 죽지 않던 강대한 괴물이 일순간에 쓰러졌다.
온몸에 화살이 박히고도 회복하던 녀석이 이렇게 쓰러졌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지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 그녀는 얼빵한 소리를 냈다.
“어, 어떻게…….”
물론, 이건 제압이지 사살이 아니었기에 놈은 이클립스가 처음 만났던 짐승처럼 조금씩 조금씩 회복하고 있었다.
그때 다나의 눈에 신기한 현상이 비치기 시작했다.
작은 소녀가 목에 걸고 있던 붉은 보석을 꺼내 들기가 무섭게 막대한 에너지가 짐승에게서 보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단 세 마리만으로 제법 규모가 큰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건만. 그 세 마리중 하나가 이리도 허무하게 제압당했다.
멍하니 그것을 보던 엘프 다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화를 나누는 인간들을 향해 천천히 기어가듯 다가갔다.
그러고는 선두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붙잡았다.
“제발! 제발 우리 마을 좀 구해 주세요! 짐승들이…… 괴물들이 습격해서 전부…….”
울먹거리며 외치는 그녀의 말에 청년이 몸을 살짝 숙인다.
그리고는 물었다.
“이봐, 엘프 아가씨. 저 결계 열 수 있어? 무수기엔 기물파손 같아서 어쩔까 고민 중이었거든.”
뭐가 되었건 이들은 짐승을 제압할 수 있는 게 분명하다.
다나는 본래 인간의 출입을 금하는 마을의 규칙이고 나발이고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가 파수꾼이에요! 결계 정도는 열 수 있어요!!”
“그…… 알겠는데. 그만 좀 붙으면 안 될까? 콧물이 들러붙는 게 좋은 기분은 아닌데…….”
“으허어엉! 제발 도와주세요!”
더욱더 엉겨 붙는 이 작디작은 엘프 소녀의 행동에 청년, 데이비의 표정이 찡그려진다.
“야! 떨어져 임마!”
“흐어엉!! 엄므아아아! 아쁘아아!!”
엄마 아빠를 찾으며 엉엉 우는 꼴을 보니 놓으라고 해도 놓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뭔가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듯한 에반젤린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엘프 소녀의 뒷덜미를 낚아채 던져 버렸다.
“누가 네 아빠야!! 우리 아빠는 내 아빠거든?!”
* * *
데이비가 짐승을 찾아 헤매는 그 시각.
비화는 여신의 명으로 간섭하지 못한 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신이라는 자리도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니네 진짜…….”
“선배님 기운 내세요.”
“기운 나게 생겼어?”
“그래도 최선을 다한 거지 않습니까.”
“까딱 잘못하면 죄다 파멸이니까 문제지. 이런 도박을 저질러놓고 한마디도 못 한 채 구경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 내 기분을 알아?!”
“적어도…… 짐승을 흡수하는 데에 성공하면 이클립스도 당장은 버틸 시간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어차피 이클립스 본인은 아닐지 몰라도 그녀가 에반젤린을 모성으로 지키고 있는 건 틀리지 않으니까요.”
넬타리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과정에서 이클립스의 잔재가 폭주해 버리면 모든 게 끝이지만…….”
폭주한 폭룡은 되돌릴 가능성이 없다.
그 이후엔 어떤 피해가 발생할지도 가늠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지금 향하는 곳이 엘프 마을에 자리 잡은 몽환의 공간이라 외적인 피해는 적을 수 있지만…… 한 번 비틀린 이클립스를 되돌리긴 불가하리라.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건데…….”
폭주만 하지 않으면 괜찮다…… 그녀가 이유 없이 폭주할 이유도 없으니까.
하지만 비화는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모르겠다며 제 손톱을 물어뜯고 초조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