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52화
검은 젤리 형태의 모습에 작은 눈동자가 귀엽던 블랙 슬라임 검둥이는 이클립스의 모습으로 우화했다.
물론, 녀석이 이클립스 본인이 아닌 건 확실했다.
실제로 검둥이의 이마에는 손가락 두 마디만 한 작은 보석이 예쁘게 박혀있었으며 그 분위기도 사뭇 달랐기 때문이었다.
“검둥아?”
에반젤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녀석을 부른다.
쾅!! 쾅쾅!!!
뒤이어 데이비와 두 심연의 공주가 폭주해버린 이클립스와 충돌하는 소리가 사방에 퍼져나갔다.
“너밖에 없어. 엄마를 진정시켜줄 사람은.”
에반젤린은 멍하니 서 있는 검둥이의 손을 꼭 잡으며 부탁했다.
외관이 무슨 상관일까.
애초에 블랙 슬라임 검둥이는 이클립스의 잔재와 공명했고, 동화하며 그녀와 이어졌다.
진화하면서 변화가 생기는 건 예상 가능한 범위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외관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녀석이 이클립스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희망뿐이었다.
“할 수 있어?”
그녀의 물음에 검둥이는 보랏빛 눈동자를 들어 모든 것을 종말로 이끄는 폭룡을 시야에 담았다.
목적이 사살, 소멸이 아닌 제압이었기에 쉽게 결판이 나지 않는다.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에반젤린을 위한다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서히 약해지는 이 공간이 사라져 이클립스가 티오니스 대륙에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면 그땐 데이비도 어쩔 수 없이 그녀를 사살하기 위해 힘을 아끼지 않을 터다.
“부탁해…… 엄마를 이렇게 보낼 순 없어.”
그녀의 부탁에 블랙 슬라임은 이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동시에 그녀의 고딕 드레스가 팔락거리며 주변이 공명한다.
블랙 슬라임 검둥이는 현재 이클립스의 잔재가 유지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하며, 그녀의 상태를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파칭!!!! 쿠당탕!!!
미친 듯이 날뛰는 이클립스를 제어하려던 녀석의 시도는 오래가지 못해 실패하고 말았다.
막대한 반탄력에 그대로 튕겨 나간 녀석은 바닥을 수차례 뒹굴며 튕겨 나갔고. 녀석의 입과 코에서 소량의 피가 흘러내렸다.
직접적인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제어하기 위해 이클립스와 연결된 그 순간 그녀의 잔재가 가진 지나치게 흉포해진 기운과 힘이 블랙 슬라임을 튕겨내 버렸다.
그 반동으로 베르단데의 목을 비틀어버리려던 이클립스가 크게 휘청이긴 했지만 큰 변화를 이끌진 못한다.
둘의 관계는 한쪽의 지배가 아닌 공생 공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거…… 검둥아!”
화들짝 놀라 검둥이 쪽으로 뛰어간 에반젤린이 그녀를 부축했다.
그러자 검둥이는 에반젤린에게 매달리듯 안겨들었다. 마치 주인에게 칭얼거리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겉모습은 이클립스와 흡사하지만 결국 근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 듯했다.
“에반젤린!!!”
그때 한창 이클립스와 공방을 주고받던 데이비의 외침이 들려왔다.
빨리 이클립스를 진정시켜야 하는데 진화는 마쳤는데 한참이고 변화가 없으니 재촉한 것이리라.
이에 에반젤린은 검둥이를 앞세우고는 소리쳤다.
“아…… 아빠……. 얘가 제어가 안 된대요!”
“뭐?!”
짜증과 당혹이 섞인 목소리였다.
“꾸엑!!”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이클립스의 몸 곳곳에 자상을 남기던 이실디가 이클립스의 반현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앞발에 맞아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에반젤린의 근처까지 튕겨 나온 그녀는 속옷이 비칠 정도로 자신의 상태를 관리하지 못했다는 게 부끄러웠는지 황급히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벌떡 일어났다.
“하…… 진짜 싫다…….”
유일한 희망이던 검둥이가 실패한 이상 더 이상 어리광을 피울 순 없었다.
“정말 안돼?”
이실디가 재차 에반젤린에게 물었고 에반젤린은 피를 닦아내고 있는 검둥이를 가리켰다.
“너무…… 늦은 거 같아요…….”
장난으로 하는 소리가 아님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실디는 굳은 표정으로 검둥이와 이클립스를 번갈아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네…….”
이실디는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자신의 몸에서 대량의 힘을 끌어내며 방대한 수의 기검들을 만들어냈다.
“지금부터 그녀를 소멸시킬 거야. 원하지 않는다면 눈감고 귀도 막아.”
폭주한 이클립스의 최후까지 보여주지는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실제로 폭주한 이클립스가 막대한 힘을 내뿜는 건 사실이지만 그녀는 무한한 존재가 아니었기에 점점 상태가 좋아지지 않고 있었다.
고고하던 고대룡의 장로는 몸 곳곳에 상처가 생겼고, 그녀의 예쁜 고딕 드레스에는 피가 묻어나간다.
고작해야 그녀가 남긴 잔재일 텐데.
이토록 강하고 현실적인 것은 블랙 슬라임의 공명 여파도 있겠지만 에반젤린을 향한 그녀의 모성이 얼마나 강했는지도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안 돼요!”
“어리광 피우지 마. 다른 방법이 있어? 게다가 자꾸 착각하는듯한데…….”
이실디가 에반젤린의 멱살을 잡아당기고 데이비와 싸우고 있는 이클립스를 가리켰다.
“저건 네 엄마가 남긴 찌꺼기일 뿐이야. 네 엄마는 없어.”
“아…… 아니야! 그래도 엄마는 저기 있잖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엉엉 우는 에반젤린의 항변이 이어진다.
“뭐? 장난해? 이클립스는 죽었어! 아직 이해 못 하겠냐?! 저건 이클립스가 남긴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이 심하잖아! 왜 그렇게 말하는 건데?!”
애초에 잔재였던 이상 처음 그녀가 나타났을 때 그녀의 존재가 어떻게 변할지. 언제 사라질지 몰랐다.
그렇기에 데이비는 과도한 정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 그녀를 가까이하는 걸 말렸었다.
“…….”
복잡한 표정으로 에반젤린을 노려보던 이실디가 천천히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에반젤린이 털썩 주저앉는다.
“10분.”
“응?”
“이 공간의 유예기간이야. 그전까지는 버텨볼게. 다만 잊지 마. 단순히 그녀의 폭주를 진정시키는 걸 넘어서 빨리 진행하지 않으면 진정시켜도 그녀는 금방 사라지게 될 거야. 저거 보이지?”
이클립스가 충돌할 때마다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빛의 가루들을 가리키자 에반젤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알아들었으면 뭐든 해봐.”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기검들을 이클립스 쪽으로 날려 보낸 뒤 바닥을 박차며 이클립스 쪽으로 튕겨 들어갔다.
“…….”
블랙 슬라임 검둥이는 말없이 다가와 에반젤린의 등을 토닥였다.
같은 외형이지만 에반젤린을 다독여주던 이클립스의 잔재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보니 더욱더 실감이 났다.
눈앞의 저 존재는 고작해야 이클립스의 잔재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의 일부이며, 비록 모든 것이 비어있다 해도…….
이클립스 본인이라는 것을.
아무리 이성이 없이 맹목적인 목적으로 움직인다지만 결국 이클립스 본인. 그리고, 그녀의 폭주원인은 결국 자신이다.
“검둥아. 한 번만 더 도와줘.”
블랙 슬라임 검둥이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해줄 수 있지?”
녀석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블랙 슬라임은 신기한 존재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클립스의 힘을 억제하기엔 힘이 약했다.
막대한 체급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검둥이는 망설이지 않고 에반젤린을 도와주었다.
검둥이가 이클립스와 다시 연결을 시도하기가 무섭게 에반젤린은 허겁지겁 싸움판 쪽으로 접근했다.
그나마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는 데이비를 제외하면 이실디나 베르단데는 여기저기 잔 상처들이 가득해 보였다.
저것도 회복을 거친 결과일 테니 결국 시간이 끌릴수록 점차 다치리라.
실제로 그 누가 상처를 입힐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던 데이비의 뺨에도 얕은 자상이 남아있었고 팔이나 다리 쪽의 의상이 살짝 찢어진 게 보였다.
“엄마! 그만 해요!”
다급히 뛰어가며 외쳐보지만, 이클립스는 에반젤린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닥치는 대로 파괴를 이어갈 뿐이었다.
처음은 그저 짐승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분노의 대상을 찾지 못해 근처에 있는 모든 것을 적대했다.
그렇기에 지금 에반젤린의 목소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 나는 괜찮아요 라는 한마디만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에반젤린은 이클립스가 데이비의 반격에 맞아 튕겨 나가는 그 순간을 노렸다.
에반젤린의 난입으로 데이비가 깜짝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뭔가 깊이 생각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윽고.
검둥이가 재차 이클립스와 공명하며 그녀의 상태를 순간적으로 제어해보려 하기가 무섭게 에반젤린이 달려들어 이클립스를 끌어안았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나 괜찮아……. 나 멀쩡해요!”
그녀의 외침에 이클립스가 크게 움찔한다.
반사적으로 자신을 끌어안은 존재를 파괴하려다가 에반젤린임을 깨닫고 멈칫한 것이다.
“효…… 효과가 있어?”
깜짝 놀란 이실디가 눈가에 흐르는 피를 스윽 닦아내자 그녀의 찢어진 이마가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폭주라는 게 저렇게 한다고 제어가 되는 게 아닌데.
그렇게 모두 하던 것도 멈춘 채 에반젤린을 바라본다.
“나 여기 멀쩡해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해요. 나랑 같이 맛있는 거 먹고 놀러 가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녀의 울먹거리는 외침에 이클립스의 색채가 사라진 눈동자에 조금씩 이채가 돌았다.
블랙 슬라임이 그녀를 순간 억제하고 에반젤린이 그사이에 그녀의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는 작전은 나름대로 선방했다.
하지만.
“물러나!!”
콰아앙!!!
베르단데의 외침과 동시에 에반젤린이 거대한 충격파에 의해 튕겨 나갔다.
동시에 검둥이도 털썩 주저앉아버리며 기절하듯 늘어졌다.
이클립스의 형태가 무너지며 이마에 빨간 보석이 박힌 슬라임의 형태로 돌아온다.
폭주의 반동이 너무 강해서 이클립스의 형상을 유지하는 힘도 잃어버린 것이다.
이미 준비되어있던 장막이 그녀를 보호하긴 했지만, 에반젤린은 자신을 공격한 이클립스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에반젤린. 물러나라. 더 이상은 안돼.”
이윽고 데이비가 초단이에 막대한 에너지를 끌어모으며 말하자 에반젤린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실패한 이상 그의 의사를 따를 수밖에 없다. 고집을 부릴수록 다른 이들이 다치는 것도 알았기에 그녀는 물러났다.
이윽고 데이비의 몸에서 기세가 심상찮게 흘러나오자 이클립스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어? 저 미친년이!”
공격의 여파로 쓰러진 이실디의 머리채를 잡아 당긴 뒤 그녀의 목에 자신의 손톱을 가져다 댄 것이다.
마치 조금만 움직여도 죽여버리겠다고 말하는듯한 모양새다.
폭주하여 닥치는 대로 부술 때와는 다른 영악한 행동이었다.
갑작스런 인질극에 대치가 이어지자 이클립스는 다시금 색채가 사라진 눈동자로 이실디를 내려다보고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저기…… 이대로 맞으면 나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좀 살려주면 안 될까?”
이실디가 어색하게 웃으며 이클립스를 올려다보지만, 이클립스는 오로지 데이비만을 견제하며 당장이라도 이실디의 목을 날려버릴 기세였다.
이윽고 이클립스의 손이 이실디의 목을 날려버리려던 그 순간.
“내 말 들어주지도 않고…… 나 좋다면서. 나랑 함께 있겠다면서 일부러 없어지려고나 하고…….”
울먹거리는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엄마 진짜 싫어…….”
그 한마디에 색채 없는 눈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던 이클립스가.
검둥이의 저지와 에반젤린의 필사적인 부탁에도 폭주를 멈추지 않았던 이클립스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녀의 공허한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떨리며 에반젤린 쪽으로 향했다.
“엄마 미워!!”
빼액 소리 지르듯 그녀가 소리치자 이클립스의 눈이 더욱 크게 뜨여졌다.
“어이쿠…… 뭐가 뭔진 모르겠다만…….”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자 이실디는 빠르게 이클립스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아니 그렇게 매달려도 미쳐 날뛰던 년이 애가 엄마 미워 한마디 한다고 저렇게 된다고?”
어린애들 연극의 개연성도 이것보단 개연성이 있겠다!
그리 외치며 이실디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에반젤린이 외친 그 한마디. 엄마 미워에 지대한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던 이클립스는 이내 퓨즈가 끊어진 것처럼 무너져 내렸다.
이에 초단이의 힘을 더욱 증폭시키며 그녀의 죽음을 준비하던 데이비가 힘을 거둬들인다.
“아…… 이해한다. 이클립스.”
뭘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데이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아니…… 저게 돼? 말이 되는 이야기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비화가 헛숨을 내뱉었다.
“처음 이클립스에게 매달려 그녀를 흔들어놓은 것도 원인 중 하나겠지만…… 아무래도 자식이 저리 외치는 게 부모의 입장에선 충격이 큰가 봅니다. 선배님은 이해가 됩니까?”
“내가 아냐? 내가 뭐 애가 있어 본 것도 아니고.”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비화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았다.
“최악의 사태는 피한 건가? 적어도 검둥이까지 같이 공멸하고 녀석이 먹은 에너지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사태는 피했으니…….”
“그전에 어떻게든 수습하겠지요, 다만, 이클립스에게 더는 시간이 없어요. 그녀는 이제 사라질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이클립스까지 전부 지키는 건 불가한 모양이었다.
“그럼…….”
“어차피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였습니다. 차라리…….”
“넬타리드.”
비화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예?”
“우리가 조금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그 말에 넬타리드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있을…… 아.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곳은 꿈속의 공간이지요.”
“음?”
“저 꿈 속 공간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놈은 아직 남아있어요.”
꿈을 지배하는 짐승. 악몽을 먹어치워. 생명체의 꿈을 수호해주는 파수꾼.
비록 오랜 시간 비틀려왔지만, 녀석의 근본은 누군가에게 행복한 꿈을 꾸게 해주는 이로운 존재였다.
아직 공간이 부서지지 않은 건 단순히 잔재가 남아서가 아니었다.
미약하지만 녀석의 일부가 아직 흡수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었다.
* * *
마치 굳어버린 석상처럼. 멎어버린 이클립스의 힘이 서서히 줄어든다.
폭주하여 멋대로 날뛰던 힘이 서서히 잠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곧바로 검둥이가 이클립스를 제어하려 했지만, 검둥이의 몸이 갸우뚱한다.
“왜…… 왜 그래?”
이에 에반젤린이 걱정스레 다가가자 이클립스가 흠칫 놀라더니 에반젤린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어…… 엄마. 그러니까 진짜로 미운 건 아니고…….”
그 말에 이클립스는 허겁지겁 에반젤린을 잡아당긴 뒤 품에 안았다.
갑작스런 그 행동에 에반젤린의 눈이 크게 뜨여졌지만, 그녀는 에반젤린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꿈속 공간 곳곳에서 상당한 빛의 가루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꿈속의 에너지와 융화하며 이클립스에게 스며든다.
그녀가 흘렸던 잔재의 조각들이다.
다만 그렇게 다시 흡수한다고 부서진 게 돌아오진 않았지만.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
빛의 가루들에 스며들어있던 이클립스의 마음과 기억들이 스며든다.
물리적으로도, 비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한. 꿈에서나 가능한 전능한 변화.
“내 아가…… 내 사랑하는 아이…….”
“어?”
당시의 기억이 빛의 가루에 녹아들어 그것이 구현된 것이다.
이클립스의 몸에선 더욱 많은 빛의 가루가 빠져나갔지만, 그것들은 다시 꿈의 공간과 뒤섞여 이클립스와 순환하며 그녀를 잠시동안 생전의 존재와 동일하게 모방했다.
“엄마…… 진짜 엄마예요?”
에반젤린이 눈물을 뚝뚝 떨구며 묻자 이클립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엄마가 많이 사랑해. 네가 태어날 때쯤엔 네 곁을 지켜주지 못하겠지만…….”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그저 꿈의 힘을 통해 이클립스가 당시 남겨놓은 기억과 바램을 고스란히 전달할 뿐이다.
“데이비. 저거 어떻게 된 거야?”
“조각 안에 남아있던 기억을 꿈을 매개체로 꺼낸 거야. 흔하잖아. 꿈속에선 이제 못 보는 이들도 볼 수 있는 거.”
기만이고 눈속임에 불과하지만 지금 이클립스의 말과 미소, 행동은 모두가 그녀 본인의 마음 그 자체였다.
“엄마…… 어디 가는 거 아니죠? 제발 가지 말아줘요. 제발!”
“그래도 나는 어디서든 너를 지켜볼 거야. 우리 아이…….”
그 증거로 이클립스는 단 한 번도 에반젤린을 상대로 딸이나 아들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엄마! 엄마!!”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내 마음도 아파지니까.”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는 에반젤린의 뺨을 닦아주며 이클립스가 미소짓는다.
순진무구하거나 속이 시커먼 미소 같은 게 아닌 너무도 편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사랑해. 우리 아가.”
“흐윽…… 엄마! 엄마! 나도 엄마 사랑해! 흐윽!”
대부분 흩어져 빛의 가루가 되어버린 이클립스는 마지막 미소를 뒤로한 채 에반젤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완전히 흩어졌다.
“흐윽…… 끕…… 흐윽…….”
에반젤린은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는 듯 보였다.
“그……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언젠간 보내줬어야 할 존재잖아. 그게 나중이 아닌 지금이 됐을 뿐이고……. 하 씨…… 결국 이렇게 되나…….”
되돌리면 어떻게든 될 거라던 말이 있었지만 결국은 너무 늦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어떻게든 위로해보려는 이실디의 말은 그리 큰 효과가 없었다.
엉엉 우는 에반젤린을 다독여주기 위해 블랙 슬라임 검둥이가 통통 튀어와 젤리 같은 팔을 뻗었다.
그러더니 힘을 다시 회복했는지 이클립스의 모습을 의태하기 시작했다.
이에 에반젤린은 검둥이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때였다.
“배고파?”
블랙 슬라임 검둥이가 조용히 묻는다. 처음으로 녀석이 말을 한 것이다.
“어?”
이에 에반젤린이 놀란 얼굴로 블랙 슬라임을 보자 녀석은 제 몸 안에서 커다란 솥을 하나 불쑥 꺼내더니 그 후엔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고깃덩어리를 툭 하고 던져넣었다.
재료를 닥치는 대로 쑤셔 넣고 조미료통을 거꾸로 한 채 차칵차칵 털어 넣는 저 행동은 이클립스의 잔재와 쏙 빼닮았다.
그리고 각종 조미료와 부재료. 그리고 물을 쏟아붓기 시작한 뒤 용을 쓰며 아주 미약한 불을 피워올렸다.
이클립스가 가지고 있던 힘과 비슷한, 아니 동일한 무언가였다.
“그렇구나. 이클립스와 동화하고 연동된 건 단순히 힘의 연동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동일하게 변질된 거였어.”
데이비가 중얼거린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애초에 이클립스의 잔재가 뭐냐.”
“뭐긴. 이클립스가 남긴 모성애가 형상화한…….”
“그럼 그건 이클립스 본인인가?”
“엄밀히 따지면 좀 애매하긴 하지? 일부는 맞지만, 대부분은 다르니까.”
“그럼 그건 꼭 하나만 있을 필요가 있나?”
그 질문에 이실디가 짧게 탄성을 흘렸다.
블랙 슬라임 검둥이는 이클립스의 형체와 달리 본래의 자아가 있었기에 완전히 같을 순 없다.
하지만. 이클립스의 형체가 가지고 있던 에반젤린을 향한 깊은 모성 자체는 받아들였고.
녀석은 이제 단순히 주인과 슬라임. 혹은 친구 관계를 넘어 마치 제 아이처럼 에반젤린을 대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검둥이의 근본은 다른 존재였으나 지금은 이클립스의 잔재와 흡수하여 새로운 존재로 융화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진짜 이클립스처럼 대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 떠나보내야 할 존재는 보내는 게 맞겠지.”
정작 이클립스 본인도 꿈속의 기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전달하고 떠났다.
아직 사태를 이해 못 한 에반젤린은 평소에 저지르지 않던 검둥이의 기행에 당황한 기색을 내비칠 뿐이다.
겉으로 하는 행동은 이전의 이클립스와 흡사하지만 조금 다르다.
“에린아.”
“…….”
혼란스러워하는 에반젤린을 뒤에서 끌어안고 다독인다.
“네 엄마는 죽지 않았어. 한쪽은 제 의무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떠났지만. 남은 조각은 저 녀석 안에 아직 남아있는 거야.”
비록 이클립스 같은 힘을 발휘할 수도, 이클립스의 기억도 거의 없지만 그 모성만큼은 거짓이 아니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말. 결국, 지켰네.”
데이비의 말에 에반젤린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잠시 후 요리를 완성한 블랙 슬라임 검둥이가 국자에 요리를 또 내밀었고 에반젤린은 그것을 받아 떨리는 눈으로 받아먹었다.
그리고 눈물을 다시 흘렸다.
“흑…… 더럽게 맛없어…….”
맛이 없기에. 거짓이 아닌 진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