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53화
몽환의 공간은 그 후로 약 10분이 채 되지 않아 서서히 흩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모두가 본 것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지만, 슬슬 깨어날 기색을 보이는 엘프들이었다.
녹초가 된 기분으로 하인스에 도달한 에반젤린은 곧바로 자신을 기다리던 페르세르크의 품 안에 파고든 채 어린아이 때처럼 곤히 잠들었다.
어린 시절. 곤란한 일이 있을 땐 주로 그녀의 품 안에 안겨 잠들곤 했었더랬다.
성장 이후로는 그런 일이 상당히 줄긴 했지만.
오늘만큼은 다른 생각하지 않고 그저 푹 쉬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페르세르크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다독여줄 뿐이었고, 그날 에반젤린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포근한 감정. 그 안에서 느낀 것은 이클립스라는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슬픔도 서려 있었지만, 지금의 가족에 대한 갈망도 존재했다.
이들만큼은 절대 잃지 않으리라.
데이비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고 페르세르크에 비하면 아직 영악하지 못한 그녀였지만 작은 소녀의 다짐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날 꿈에서는 엄마가 나왔다.
페르세르크가 아닌 이클립스가 말이다.
떠나기 전 웃어주던 그 모습 그대로 그녀를 말없이 다독여주며 이제는 스스로 날개를 펴고 새로운 가족과 함께 행복하라고 하던 그 꿈은 어쩌면 이클립스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대수림의 엘프 숲 문제 이후 데이비는 늦은 밤까지 무언가를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노곤한 얼굴로 잠에서 깬다.
레어에서 지내는 날이 제법 되는 편이기에 하인스에 이렇게 머무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다음부터 잠은 꼭 집에서 자도록 하자…….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나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천천히 침실 밖으로 나갔다.
곤란해할 법도 하건만 아무 말 없이 안아주던 페르세르크는 이른 시각부터 영지의 일 처리를 도우려고 나선 모양이었다.
“아. 공녀님.”
그녀의 앞에 나타난 건 에이미 실란.
데이비의 전속 시녀였다가 이제는 남작 가문의 일원이 되어 대공가의 봉신이 된 소녀였다.
아니 이제는 소녀라기보단 어엿한 여성의 성숙미가 느껴진다.
“에이미 언니. 다들 어디 갔어요?”
“다들 이리저리 엄청 바쁘셨어요. 그래도 저하께서 아가씨가 깨어나시면 아침 식사는 꼭 하라고 전달하라고 하셔서…….”
“언니는 식사하셨어요?”
“네.”
“그럼 가볼게요.”
“아…… 시녀들을 시켜서 세안을…….”
“괜찮아요.”
담담하게 말한 에반젤린이 손가락을 튕기자 상당량의 마나가 그녀의 몸에 머무른다.
수속성 마나로써 변환된 그것들은 빠르게 에반젤린을 깨끗하게 만들어냈다.
뒤에서 조금 놀란 에이미의 시선이 전해져왔지만 나른한 시선으로 에반젤린은 휘적휘적 걸어 나갔다.
통! 통!
그때 그녀의 뒤편으로 무언가가 튀어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그녀의 어깨에 올라탔다.
붉은 보석을 이마에 달고 있는 작고 검은 슬라임이다.
“왜 또 그 모습이야?”
슬라임은 몸을 갸우뚱하며 에반젤린을 보더니 이내 그녀에게서 뛰어내린 뒤 이클립스의 모습으로 변했다.
“배고파?”
할 줄 아는 말이 저것뿐인지…… 아직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이클립스와 동화하고 그녀의 흔적을 받아들임으로써 녀석은 조금씩 의사소통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녀석은 이클립스. 즉 그녀의 엄마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가족임엔 틀림없으리라…….
“이제 밥 먹으러 갈 거야. 같이 가자.”
외관은 엄마와 닮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이클립스인 것은 아니니까.
현실은 깨달아야 했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있었는지 에이리아와 일리나. 그리고 데이비 페르세르크를 포함한 가족들이 모여있었다.
“어! 에리니다!”
“에리니 잠 많아!”
한쪽에는 홍단이와 청단이가 냅킨을 두른 채 꺄르륵 웃으며 그녀를 반긴다.
그녀들은 그리 말하면서도 곁에 앉은 아벨과 다리안에게 작은 손으로 밥을 먹여주고 있었다.
“아벨, 누나가 밥 줄게!”
“꺄르륵!”
아벨은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륵 웃어대며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고 다리안은 애써 고풍스러운 척 식사를 해보려 애쓰고 있다.
그러다 잘 안 되자 청단이가 녀석을 도와주었고 그 후에야 녀석은 마음에 든 표정으로 식사를 이어간다.
“어서 와. 배고프지?”
늘 그렇듯 미소로 부르는 데이비의 모습은 그날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한결같았다.
물어보고 싶다.
괜찮은 거냐고.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네. 엄청 배고파요.”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것 같았으니까.
“엄마…… 근데 우리 막내는 언제 태어난대요?”
“음? 글쎄…… 요즘 녀석이 발차기가 심해서 말이야…….”
일리나가 곤혹스럽다는 듯 투정을 부린다.
“네 동생도 한 성격 하나 봐.”
“동생이라…….”
남동생인 아벨이 있으니 가능하면 이번엔 여동생이었으면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 비화가 안 보이네. 비화가 이런 자리를 비울 리가 없는데.
“비화 언니가 안 보이네요?”
“비화? 네 뒤에 있잖아.”
그 말에 섬뜩함을 느낀 에반젤린이 빠르게 물러나려 했지만…….
“에린아…… 언니가 미안해…….”
“으악!”
순식간에 에반젤린을 제압하듯 당겨 끌어안은 비화로 인해 시도가 무산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비화는 에반젤린을 끌어안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으읍! 이거 놔줄래?!”
당황하여 어떻게든 밀어내려 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언니가 도와줬어야 했는데. 더 꼼꼼하게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한참 동안 말하고 나서 비화는 식탁에 앉았다.
“그래. 비화야. 무슨 이유로 다들 불렀는지 이제 말해줄래?”
평소엔 이렇게 의무적으로 다 같이 식사를 하는 편은 아니었다.
적어도 식사 정도는 같이하는 게 좋다는 말을 다들 하지만 오늘은 유별나게 격식이 차려진 느낌이었던 터라 조금 의아했던 참이었으니까.
“네.”
비화는 적당히 자리에 앉은 채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털어놓았다.
짐승을 풀어놓은 존재가 다름 아닌 그녀였다는 것을 말이다.
이클립스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블랙 슬라임 검둥이까지 진화가 덜 된 상황이었기에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짐승을 풀었다는 사실이었다.
정신계 에너지로 이루어진 짐승은 검둥이가 가장 흡수하기 좋은 에너지원 그 자체기도 했으니까.
“다만 그 과정에서 여신님에게 들키는 바람에요…….”
“아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거야.”
데이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렇겠죠…… 어쨌든 쓸데없이 간섭해서 흐름을 더 망가뜨리지 말라고 혼나고 격리된 탓에 아무것도 말 못 해줬어요…….”
비화는 자신의 잘못을 고하며 사과해왔다.
“난 괜찮아.”
그때 기분 좋은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오물거리던 에반젤린이 대답했다.
사실 가족들이 조금 더 조용한 분위기였던 것은 에반젤린을 걱정하고 배려한 것도 없잖아 있었다.
막 친해진 친모와 그렇게 헤어졌으니 말이다.
“정말 괜찮은 게야?”
“엄마는 내가 뭐 어린애인 줄 알아요?”
에반젤린이 입을 삐쭉이자 데이비를 포함한 세 엄마 모두 고개를 갸우뚱한다.
“꺄르륵! 에리니 어린애야!”
“맞아 맞아! 청다니보다 어려……. 키, 키는 에리니가 더 크지만…… 청다니가 언니야.”
“그래, 우리 성숙하신 언니들, 먹는데 흘리지나 말고 드시지.”
“에리니 나빠!”
하다 하다 이제는 청단이 홍단이에게 까지 어린애 취급을 받는 꼴이라니.
할 말이 없어서 더 짜증이 났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엄마에겐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요. 충분히 울었고요. 그리고. 영혼으로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지금 내가 괜찮다고 웃는 얼굴을 보여주면 더 편하게 갈 수 있을 거예요.”
그저 어린아이가 그리 믿고 싶은 듯 말하지만, 그 한마디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그래. 에린이 이제 다 컸네.”
“좀 전엔 어린애라더니.”
“그랬나?”
데이비가 킥킥 웃기 시작하자 조금 경직되어있던 분위기가 풀어진다.
지구의 가족 단위로 치면 제법 대가족이다.
하지만 티오니스에선 제법 흔한 숫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티오니스 예법처럼 괜히 무겁지도 않고 가벼우며 친근한 분위기.
에반젤린은 이런 분위기가 참 좋았다.
“아 그리고 아빠…….”
이후 비화가 한 가지 더 있다는 듯 데이비에게 말했다.
“음?”
“여신께서 찾고 있어요.”
그 말에 데이비가 귀찮은 표정으로 손에든 포크를 떨어뜨렸다.
“씁…….”
* * *
여신의 성소에 도착했을 때 느낌이 다르다는 느낌은 받았다.
“여신님?”
평소라면 연못에 발을 담그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평소와 달리 화단 쪽에서 기묘할 정도로 신비로운 꽃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게 의미가 있나 싶지만, 이곳에서의 그녀는 다르다.
“그건 뭡니까?”
내 질문에 여신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페어리들의 씨앗.]
페어리…….
얼마 전 있었던 안타까운 두 작은 요정들의 이야기를 잊을 리가 있나.
[두 아이의 희생으로 생겨난 기회야. 나는 그 두 아이의 염원을 들어주기 위해 다시는 아프지 않은 삶을 사는 아이들을 태어나게 할 거야.]
다른 말로 하면 멸종된 페어리들이 다시 세상에 나타난다는 소리였다.
“그런가요. 여신님이 그리 생각하셨다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녀가 세상을, 그리고 생명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그 물음에 여신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가오며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여신님?”
“데이비.”
담담한 부름. 하지만 내 눈은 크게 뜨여질 수밖에 없었다. 태블릿을 통해 계시를 내리듯 의사를 전달하는 그녀가 입을 여는 경우는 가벼웠던 적이 없으니까.
“불안한데요……. 이클립스 문제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뭔가 터지는 건 아니겠죠? 여신님 아시다시피 저 이제 은퇴 선언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일이 터지고 있어요. 세간에서 이럴 거면 굳이 은퇴가 의미가 있냐면서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지금 너는 행복하니?”
그 물음에 고민이 앞선다.
행복이라. 행복하다는 말은 틀리지 않지만. 저 말뜻의 저의를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거짓을 고할 생각은 없었다.
“네. 제 인생 중에 가장 행복한 시기입니다.”
그 말에 여신은 옅게 웃었다. 동시에 그녀의 주변으로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앞으로의 네 생을 축복할게.”
“……여신님. 뭔가 말이 이상한데요.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말을 하던 내가 눈을 크게 떴다.
“여신님.”
설마 이제 와서 없어지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내가 묻자 그녀가 다시 웃어 보였다.
“장난이란다.”
“…….”
“길고 길었던 네 생을 그토록이나 고통스럽게 하였을 텐데…… 너는 끝내 나를 걱정하는구나.”
“다시는 그런 장난치지 마십시오. 하다못해 제가 죽은 뒤에 떠나세요.”
방대한 수명을 얻었으니 다른 말로 하면 영원히 존재하라는 말을 에둘러 한 표현이었다.
어차피 여신은 시간개념을 초월했으니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내 단호한 요구에 여신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는 한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고, 그녀의 신성한 의지에 따라 커다란 에너지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만들어낸 것은 신기한 문자들이 어우러진 작은 보석이었다.
“이건 뭡니까?”
“네게 행운을 가져다줄 부적.”
그리고는 그 보석을 내 가슴에 들이밀었고, 보석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내 몸 안에 스며들었다.
여신이 직접 만든 부적?
그런 건 주술로 만든 것이나 그저 미신을 담는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 자체로 신물이며,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수호부나 다름없다.
처음부터 이런 걸 줬다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한 건 이제와서야 성공한 이유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저 품고만 있어, 쓸 일이 있을 거야. 그리고 약속하나 해주겠니?”
“여신님과의 약속이면…… 어기진 못하겠네요.”
“앞으로도 그렇게 올곧게 지내주렴.”
여신은 그 말을 끝으로 나를 내보냈다.
그리고. 그런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성녀 다프네였다.
“뭐야. 굉장한걸 품고 있네?”
“바로 보이십니까?”
“넌 내가 뭘로 보이냐.”
“술 좋아하는 폭력배지요.”
퍽!!
순식간에 정강이를 걷어차였지만, 다프네의 표정이 찡그려진다.
“전엔 아픈 척이라도 하더니, 이기적인 새끼.”
표정을 숨기고 있지만 더럽게 아프다.
육체가 이미 예전에 초월했는데. 이놈의 영웅들은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조금도 방심할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때보다 더 강해진 게 문제겠죠. 그런데 이게 뭔지 아십니까?”
“다는 몰라. 그런데…… 하나는 알겠다.”
다프네가 피식웃었다.
“순산의 가호야. 좋겠네.”
“설마…… 아이나 일리나의 몸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걱정수준하고는, 그럴 일없어. 둘 다 건강하다에 걸어도 좋아.”
“로아 누님이 걸었으면 절대 안 믿었을 겁니다.”
데스 로드 로 아이아스는 지독하게도 도박을 못 하는 편이었으니까.
내 대답에 그녀는 낄낄 웃어 보였다.
“아 참. 이건 말하기가 참 그런데…….”
“또 뭡니까?”
“네 막내 아이. 우리가 이름 지어줘도 되겠냐?”
그 물음에 잠시 멈춰있던 나는 옅게 웃었다.
“부디 아이가 미래에 이름을 쪽팔려하지 않을 거로 지어주신다면요.”
이 양반들은 몇 년이 지나도 한결같다.
“그럼 태어나는 그 날. 모두를 대표해서 한 명이 갈게.”
“그래 주면 고맙죠. 그보다 한잔했습니까?”
“늘 하는 일이지.”
킥킥거리며 그녀가 내 등을 떠민다.
“어여 내려가. 에반젤린 곁에 붙어있던 그 슬라임. 사고 쳤더라.”
그녀의 말에 허겁지겁 돌아왔지만. 다프네의 말과는 다르게 블랙 슬라임 검둥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클립스의 모습으로 에반젤린의 품에 안겨 잠들어있을 뿐이었다.
무해한 녀석 맞겠지…….
하지만 이 앙증맞고 어이없는 녀석이 쳤다는 사고가 뭔지는 며칠이 지났을 때 알게 되었다.
이 망할 놈(?)에게 컴퓨터를 쥐여주면 안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