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55화
후루룩. 벌컥벌컥!
“요즘 그 사람 많이 바쁜가 봐요.”
“그렇겠지. 한창 아이가 태어나니 마니 하고 있으니까. 그보다 여기 정말 맛있네.”
“그렇죠? 예전에…… 이곳을 자주 찾았어요. 3대째 이어져 오는 곳이래요.”
일본의 한 라멘집.
천족이자 데이비의 사도이며 한때 평행선의 일리나였던 레이나, 그리고 일본소속의 각성자였으며 붉은 공허를 지키던 시간의 모래용 아비트의 사역인이었고 최근에 와선 차원의 핵을 찾고 다룰 수 있게 된 코오나는 최근 이런저런 일로 같이 다니는 편이었다.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었던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친해지는 데에 사실 뭐 특별한 계기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실제로 이번일 또한 일본 정부와의 협약으로 오염된 땅을 정화하기 위해 레이나가 갔고, 코오나도 일단은 모국인 만큼 직접 투입된 상황이었으니까.
그렇게 엮이는 일이 잦다 보니 자연스레 거리감이 가까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번에 태어날 아이를 보면 조금 기분이 묘하겠네요.”
“굳이? 그녀와 나는 뿌리는 같아도 완전히 달라. 살아온 배경도, 생각도, 몸도, 이제는 영혼조차도.”
뿌리가 같은 것을 부정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같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레이나에게 있어서 일리나는 동생 같은 느낌이 강했으니까.
“그래도 좀 신기한 건 사실이긴 해. 이번엔 어떤 아이일까 좀 궁금하기도 하고.”
“굳이 특색이 있어야 하나요?”
“복잡하게 따지면 그럴 필요는 없지만. 따져보면 하나같이 뭔가 크게 품고 있었으니까.”
유일하게 평범한 축에 속하는 게 아벨이다.
아벨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권능을 미래의 아벨과 연동하여 반납하였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아벨이 고작 젊은 나이에 최고의 대마법사 수준까지 성장한 건 일반적으로 평범하다 보기 힘들지만 말이다.
“코오나 양. 슬슬 시간이 됐습니다.”
“식사 거의 끝났으니 마저 하는 대로 이동할게요.”
“이동수단을 준비해두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아쉬운 듯 젓가락을 탁 내려놓은 코오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이나 또한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넌 성을 안 써?”
“네?”
“주변에서 널 대부분 이름으로 부르잖아. 아니면 그게 성인 건가?”
“뭐…… 이래저래 일이 있으니까요. 그 사람은 제게 올 라운 이름을 주고 싶어 한듯하지만……. 솔직히 그건 제가 거절했어요.”
미들 네임과 성을 받는다는 말은 데이비와 혈육이 된다는 뜻이니까.
데이비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코오나로썬 절대 해선 안 될 선택이었다.
아무리 페르세르크가 견제나 간섭을 안 하겠다곤 했다 할지라도 코오나는 그런 식으로 데이비와 이어지는걸 바라는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주길 바라기에 최선을 다한다.
끝내 그가 받아주지 않더라도. 코오나는 지름길을 과감하게 치워버렸다.
“제게 가문을 의미하는 성은 별로 달갑지 않으니까요. 요즘 시대에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서류상으로는 과거 그 가문의 성이 남아있지만, 조만간 바꿀 생각이에요.”
“뭘로 바꿀 건데?”
“와카바.”
와카바 코오나라…… 그런 선택을 한 것에 조금 의아하긴 했다.
“막 특색있는 성은 아니네.”
“제 모국어가 아니에요. 발음은 비슷하지만. 고대어 중 하나의 발음을 변형시킨 거라고 했거든요. 실제로 표기법은 이렇게 되죠.”
일어와 한자가 섞인 단어가 아닌 독특한 단어였다.
“뜻은?”
“글쎄요?”
자기 성의 뜻도 모르다니 이게 맞나 싶었다.
“와카바…… 와카바, 와카바아……. 그렇구나.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들어본 적이 있는 단어의 조합이긴 하네.”
“뜻을 알아요?”
“별빛? 은하수? 황금 모래? 조합에 따라 다르긴 한데 나쁜 단어는 아니었을 거야. 짬짬이 고대어도 공부하는데. 도움이 됐으려나 모르겠네.”
“충분히 도움 됐어요.”
코오나는 어떤 의미로는 새로운 가문을 만든 셈이나 다름없었다.
“축하해.”
“고마워요.”
코오나에게 있어서 중요한 건 이름이지 성 따위가 아니었다. 가문? 유서 깊은 역사? 그딴 게 무슨 상관인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을.
스릉…….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무기를 점검한 코오나가 한걸음 내디뎠다.
“얼른 끝내고 가요. 아이가 태어나는 걸 저도 보고 싶으니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언젠가 자신도 그렇게 아이를 낳게 될지.
미래 일이란 모르는 것이고 데이비는 그녀를 여성으로 보지 않는다.
게다가 결혼한 유부남이기에 그녀의 행동은 부적절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100년이고 200년이고 지나면?
사실 데이비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코오나는 자신의 방대한 수명을 완전히 놓은 게 아니었다.
본래라면 방대한 수명을 전부 버림으로써 그녀는 일반 인간과 같은 수명을 지녀야 하지만 어째서인지 조금씩 수명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저승이로부터 들었고, 계획을 전면수정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서 차근차근 접근한다.
그것이 그녀의 나름 치밀한 계획이었다.
“그래…… 나중에 다른 사람도 눈에 들어오고 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레이나 언니는 괜찮은가요? 그 사람……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응? 좋아하지.”
“그럼 왜…….”
“다만 나는 방식이 다를 뿐이야. 사랑이냐 묻는다면 그건 애매하거든. 지금처럼 그의 곁에서 그의 검이 되어주는 게 더 좋기에 그 이상 나아갈 생각은 없어.”
일리나가 그의 부인으로서 그의 검이 되어준다면 그녀는 외부에서 그의 검이 되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내 자리를 노리는 것들은 좀 달갑진 않지.”
“언니도 제정신은 아니네요.”
“천족이 그런 걸 어쩌겠어.”
“실제로 그런 인간들이 제법 있었거든. 성질나게…….”
레이나가 스산한 기세를 내뿜자 코오나도 얼마 전 티오니스에 들렸다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연회에 참석해서 데이비의 곁에 달라붙어 어떻게든 아양을 떨던 몇몇 영애들이 떠오르자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저 가문을 위해서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무작정 들이대는 꼴이라니. 자신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최소한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많은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 은근슬쩍 데이비에게 신체접촉을 가하려던 영애들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분노가 스멀스멀 치고 올라온다.
지금의 그녀를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어이없어할 행동이긴 했지만 가끔 질투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오. 코오나 양. 반가워.”
그때였다.
누군가가 다가와 코오나에게 친한 척 말을 걸어왔다.
“누구세요?”
“이런 내 소개가 늦었네. 나는 코스케 아시아라고 해. 잘 부탁해?”
싱긋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사내는 아무리 봐도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그제야 기억이 난다. 국제기업인 신성소속이 된 일본 각성자 중 하나가 그와 엮였던 적이 있었던가.
분명 그의 여자친구에게 추파를 던져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다.
실제로 다른 각성자들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거로 보니 그리 좋은 인간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
수준은 A급 정도. 각성자 중에선 제법 뛰어난 편이다.
“신경 써줘서 감사하지만 저는 당신과 딱히 잘 지낼 생각이 없어요.”
“그러지 말고. 이깟 간단한 문제 금방 해결하고, 같이 술이나 한잔하는 게 어때. 좋은 가게를 알거든. 그쪽의 아가씨도 같이 가자고.”
“관심 없으니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코오나는 차갑게 일갈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말고. 응?”
주변에서 치켜세워주니 겁이 없는 것일까.
놈은 코오나가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려 들었다.
이에 레이나가 손을 쓰려던 찰나.
우드득…….
“윽?! 끄아아아악?!”
코오나가 차갑디차가운 표정으로 그의 팔을 꺾어버렸다.
“어딜 손 대.”
과거의 그녀였다면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무심하게 털어냈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가능할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함부로 누군가가 그녀의 몸에 손대는 걸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느낀 질투로 인한 분노도 한몫했지만.
순식간에 모여든 시선을 보며 사람들이 경악하는 게 보였다.
그래도 제법 실력이 있는 강화계 능력자가 일순간에 제압당한 탓에 더 놀란 기색이다.
“코오나 양이 저렇게 강했었나?”
“글쎄…… 예전에 봤을 땐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일부 각성자들이 수군거린다.
일본에서 현재 코오나는 좋은 이미지와 나쁜 이미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일본의 각성자이며 국제기업인 신성의 소속이기도 했으니까.
그나마 신성이 다국적 각성자들을 포용하고 있으니 그 분위기가 덜한 것일 뿐.
어느 나라든 같은 상황이리라.
“이 인간하고 같이 작업 못 해요. 이 인간 쳐내든지. 아니면 제가 나가든지 할게요.”
“아…… 아 잠시만요! 코오나 씨! 우선 진정하시고…….”
“진정이요? 지금 장난해요? 목숨 걸고 싸우고 정화하러 모였는데 저 인간 대체 뭐죠?”
어쩔 줄 모르는 각성자 협회 사람을 보며 코오나는 따박따박 쏘아붙였다.
확실히 일반적인 게이트도 아니고 국가에서 주도하는 토벌전에서 이런 행동은 친한 사이가 아니면 지양하는 게 맞았으니 말이다.
그동안 주변에서 워낙에 오냐오냐해주니까 선을 넘어버리는 케이스는 어디를 가나 존재한다.
“그…… 그래도 일단 어렵게 소집된 각성자이니까…….”
“그윽…… 커억!!”
코오나는 쓰러진 사내를 한 번 더 걷어차 버리자 그가 신음을 토해내며 바닥을 수차례 굴렀다. 이번엔 뼈도 제법 나갔으리라.
“부상자라면 굳이 같이 활동할 필요 없지 않나요?”
“……네”
어쩌겠는가. 그가 주변에서 떠받들어주는 신인 각성자라 해도 결국 지금 이번 게이트의 주 전력은 코오나와 레이나인 것을.
협회 측에서도 굳이 메인전력인 코오나에게 들러붙으려 들던 신성보다는 코오나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게 이득이었다.
“너…… 은근히 성질 있었구나?”
“예전에…… 그렇게 억눌려서 살 때와 다르니까요. 그 사람이 제 존재를 인정해주는 만큼 저도 제 가치를 낮게 볼 생각은 없어요.”
“사실 화가 난 게 아니고?”
“그것도 맞아요.”
담담하게 말한 코오나가 겁에 질린 듯 그녀를 바라보는 몇몇 각성자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할 말 있어요?”
“아…… 아뇨, 없어요…….”
상상을 초월하는 박력에 그들이 주춤하는 게 보였다.
“그럼……진입하죠.”
와카바 코오나. 알게 모르게 한 성질 하는 이로 성장 중이었다.
* * *
“으윽…….”
고통스러운 듯 숨을 거칠게 내쉬며 고통스러워하는 일리나의 곁에는 페르세르크와 에이리아, 그리고 영웅들을 대신해 오랜만에 강신한 신의 히포크리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천천히 심호흡하고 긴장 풀어. 몸이 경직되면 아이도 산모도 힘들어지니까.”
“그…… 말처럼 쉽게 되질 않아서…….”
“그래도. 통각이 많이 무뎌지게 손을 써뒀으니까. 죽도록 아프진 않을 거야.”
“그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배 아파 낳는다고들 한다. 사실 아픈 게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처음엔 그것조차 엄마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날 페르세르크와 에이리아의 알게 모르게 진행된 지독한 가스라이팅에 제대로 당해버린 일리나는 겁에 질려버려 결국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현재 그녀는 양수가 터져 분만을 준비중이었다.
데이비가 예측했던 예정일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그동안 뱃속에서 고이 자라오던 아이가. 처음엔 거짓이라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기적처럼 자리 잡은 아이가. 이제야 세상 빛을 보려 한다는 게 새삼 대견했다.
“저, 괜찮은…… 으읍!!”
이윽고 진통이 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잡히는 것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적응이 되지 않는 상당한 고통에 그녀는 숨을 들이쉬며 고통에 적응하려 했다.
육신은 뛰어난 터라 사실 일반적인 여성보다 면역이 높아야 할 텐데…….
“숨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고. 힘줘!”
이윽고 분만이 시작되자 일리나는 이를 악물고 비명을 참아야 했다.
눈물이 흐르고 비명을 지르고 싶지만 애써 참아낸다.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격통에 숨이 가빠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저…… 얼마나 됐어요?”
“이제 시작이야. 마음 단단히 먹어.”
일리나는 생에 몇 없는 두려움을 느껴야 했다.
그러는 동안 페르세르크와 에이리아는 일리나의 땀을 닦아주거나 그 외의 것들을 하며 직접 그녀를 도왔다.
보통 귀족가에서 안주인이 이렇게 직접 돕는 경우는 드물지만, 이들에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제발…… 제발! 빨리 나와 아가야……. 엄마 죽을 거 같아!’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그녀가 다시 힘을 준다.
* * *
아아아아악!!
상당한 고통이 느껴지는 비명이 울려 퍼진다.
데이비는 안절부절못한 채 문 앞을 서성거리며 표정을 굳혔다.
어느 쪽이든 문제는 없다. 분만 자체에 크게 부담되는 몸 상태도 아니었고, 곁에는 신의가 붙어있으니까.
하지만 직접 보지 못하는 건 매번 겪으면서도 불안한 요소가 가득했다.
일리나는 환골탈태를 몇 번 겪으면서 일반인 간과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강도를 지니고 있다 해도 그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게 왜 고집을 부려서…….”
고통을 완전히 억제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만큼은 그녀도 거부했다.
오히려 아이에게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막내가 무사히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아빠. 정신 사나우니까 좀 앉아있어요.”
그때 공간이 열리며 비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애들은요?”
“괜히 소란스럽다고 오지 말라고 했어.”
보는 거야 태어난 직후에 보면 되니까.
몇 시간이고 지속하는 동안 다 같이 기다리고 있을 필요까진 없었다.
“아빠를 보니 그러네요.”
아아아악!!!
그때 또다시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온다.
“생명체의 몸은 참 신기하죠. 저렇게 아이를 낳는 게 고통스러운데. 또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그 고통을 본능적으로 잊는다잖아요.”
“그래서 걱정이다. 에오니샤는 나와 비슷한 케이스니까.”
완전기억능력.
데이비 정도는 아니지만 에오니샤가 언젠가 커서 결혼하게 되고 아이를 낳으면 그 고통을 기억할 텐데.
“그땐 뭐…… 별수 있나요. 아빠가 손 써야지. 그보다 에오니샤 고모는 아직 어리잖아요.”
“시간은 잘 가는 법이니까.”
“……아빠. 나도 언젠가 저런 일이 있을까요.”
비화의 질문에 데이비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물었다.
“어떤 새끼야.”
“아니 어떤 새끼고 나발이고…….”
“네가 잘 엮이는 이가 그렇게 많진 않은데, 설마…… 넬타리드냐?”
“미쳤어요?!”
뻬액 소리를 지른 그녀가 돌아섰다.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애가 태어나니까 전부 바보가 돼서는…….”
애초에 여신인 그녀가 아이를 가질 수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지금같이 태어나는 과정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장난스레 던진 말이었는데 저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묘하게 기쁘면서도 주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정신사나 우니까 좀 앉죠? 의자도 놔두고 뭐 하는 거람.”
“비화야. 이건 말이다.”
“됐고, 앉으라고요!”
주책을 떠는 데이비의 등을 떠밀어 의자에 앉힌 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데이비의 가슴 쪽에 손을 뻗었다.
“음?”
“그냥 둬도 되겠지만…… 저렇게 비명을 듣고 있으니까 마음이 쓰여서 안 되겠어요.”
비화는 데이비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천천히 빼냈다.
그러자 신기하게 생긴 무언가가 끌려 나온다.
“부적?”
“순산의 축복. 원래는 조금 있다가 자연적으로 나올 거긴 했는데…… 조금 일찍 쓴다고 문제 되진 않을 거예요.”
비화는 그렇게 뽑아낸 부적을 문 너머로 밀어 넣듯 손을 뻗었다.
그러자 부적이 빛의 줄기로 변하며 문 너머로 스며든다.
그러자 괴로운 듯 비명을 지르던 일리나의 비명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소리. 고통스러운듯한 신음은 들리지만 조금 전처럼 비명이 들리진 않았다.
“아마 굉장히 편해졌을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아아아앙! 우아아앙!!”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예정시간은 몇 시간이고 뒤였어야 했건만 비화가 부적을 스며들게 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비화……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니…… 이게 이런 거였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린 비화가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축복이라고…… 아무래도 산모에게 부담을 줄이기 위해 빠르게 태어난 거 같은데요?”
잘 태어났으면 문제는 없으리라.
이윽고 문이 열리더니 신의 히포크리아가 나왔다.
“아이는 태어났어. 공주님이야.”
“고맙습니다. 누님.”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조금 전에 빛이 스며들었던 거……. 여신님이 준 축복이지?”
“네.”
“본래 이런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지만…… 그게 가능한 게 어이가 없긴 하네. 산모와 아이 모두 건강해. 게다가 회복속도도 엄청나서 몇 주 회복기를 거치거나 할 필요도 없을 거야.”
“예?”
“내일이면 멀쩡해질 거라고.”
축복의 효과는 상당했다.
“비화는 들어가서 봐봐.”
“앗싸! 우리 막내! 언니가 왔어!”
비화가 쪼르르 들어가 버리자 데이비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복잡한 표정으로 신의가 그의 팔을 붙잡는다.“
“왜 그러십니까?”
“하……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싶긴 한데…….”
신의 히포크리아는 한숨을 내쉰 채 조용히 말했다.
“아이의 배꼼 아래에 성흔이 있어. 태생적인 성흔은 일반 성흔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 알지?”
“…….”
“저 애. 태어나면서부터 성녀로 내정 받은 거야.”
사실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디에 성흔이 있었다고요?”
“배꼽 아래쪽. 걱정하지 마. 아무리 성흔이 흉터라곤 해도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성흔은 문양에 가까우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
데이비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어쨌든 그리 알고. 어릴 때부터 신성력에 과하게 노출되면 보통 아이와 다르다는 뜻이니까 네가 신경 많이 써야 할 거야.”
복잡한 심경으로 방 내부로 들어가자 땀에 절어 침대에 누워있는 일리나와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아이가 보인다.
포대기에 쌓인 아이는 언제 울었느냐는 듯 어미의 품에 안긴 채 곤히 잠들어있었다.
“데이비? 왔어?”
“어…….”
“쿡쿡…… 표정이 왜 그래. 자, 봐. 우리 막내야.”
울먹거리며 말하는 일리나의 눈엔 서러움이나 아픔보다는 기쁨이 가득해 보였다.
“두 사람도 고생했어.”
이윽고 데이비가 페르세르크와 에이리아에게 말하자 두 사람이 쓰게 웃었다.
“그…… 이야기 들었어요. 서방님?”
“아…… 응. 듣긴 들었는데…….”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구나. 잘 태어난 것과 성흔 자체는 문제가 없다만…… 태생 성흔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 자칫 이 아이의 이야기가 퍼져나가면 성국에서 얼마나 말이 나올는지…….”
“뭐 문제겠어. 성국에서 난리 치면 내가 쳐내면 돼.”
그러기 위해 키운 힘이었다.
“고생했어.”
“뭔가 뿌듯하다…….”
천천히 다가가 일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자 그녀의 뺨이 발그레해졌다.
“왠지 모르겠는데 아픈 게 싹 가시고 있어.”
“다행이다.”
“우리 아이…… 이름은 어떻게 할 거야?”
“당장은 괜찮아. 곧 정해서 올 테니 그때 생각하자.”
그때였다. 일리나가 피곤한 듯 끙끙거리자 아이가 조금씩 버둥거린다.
꼬물거리며 움찔거리던 아이의 몸에서 갑자기 신성력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데이비가 억누르려던 찰나. 놀란 듯 주춤한다.
화아아악!!!!!
동시에 엄청난 크기의 성마법이 펼쳐지며 영주성 전체를 휘감았고. 이내 하늘에서 새하얀 깃털 같은 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방금?”
“4급 회복마법이야…….”
아무리 하위급이라 해도 4급이 마냥 낮은 것도 아닌데.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사용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리 막내 시작부터 화끈하게 사고 치네…….”
비화가 뒤에서 중얼거리는 말에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