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56화
결론만 놓고 보면 막내는 정말 대단한 녀석이었다.
제대로 된 의사 결정도 눈조차 제대로 못 뜨는 아이가.
본능적으로 신성력을 이용해 회복마법을 쓴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니까.
사실 한순간 이 녀석도 전생의 기억 같은걸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애초에 막내는 완전히 새로 태어난 영혼. 전생 같은 게 있다면 그렇게 태어나는 건 불가했다.
일반적인 아이와 다를 바 없으면서도 신성력 자체만큼은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꼴이라니.
내가 아는 신성력 사용의 최고봉인 초대 성녀 다프네조차 이런 케이스는 아니었다.
제대로 옹알이도 못 하면서 어떻게 판단하는 건지 품에 안고 말을 걸어줄 때마다 방긋방긋 웃는 아이는 순식간에 모두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우아! 웃었서! 우리 막내 웃었서!”
자신도 작은 주제에 훨씬 작은 막내가 혹시라도 불편할까 조심스레 끌어안은 홍단이가 꺄르륵 웃자 청단이가 조심스레 아이의 뺨을 콕 찔러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귀…… 귀여워어…….”
두 작은 언니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는 막내는 자신의 행동을 아는지 모르는지 꼬물거리며 제 존재감을 드러낼 뿐이었다.
막내가 태어난 당일 일리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모습이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아이가 품고 있는 힘은 신성력이지만 그 영향력이 너무 강해서 실시간으로 산모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 추가적인 조치가 없었으면 아이를 낳는 동안 엄청나게 고생했을 가능성이 크리라.
하지만 부적의 가호와 여러 요소가 겹친 덕분에 일리나는 고작 며칠 만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수준까지 회복했다.
단순한 무리가 아니라 문제없다고 판단된 수준이 그 정도였다.
“원래 이렇게 회복이 빠른 건 아니지?”
“그럼요. 보통 아이를 낳고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언니처럼 그렇게 빠르게 회복한 후에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 여신님이 주신 부적이라는 거. 굉장하네요.”
“다행인 일인 게야. 부적이 없었다면 그대가 꽤 곤욕을 치르거나 자칫 몸의 밸런스가 깨졌을 수도 있다고 하니…….”
일리나는 강대한 존재지만 그 역사가 짧다.
“몸이 엄청 가볍게 느껴져. 그동안 아이에게 부담이 갈까 제대로 훈련도 못 했는데. 오랜만에…… 꾸엑!”
오랜만에 몸을 격하게 움직이려던 일리나의 머리가 짓눌렸다.
“후손님. 당분간은 아이 곁을 지켜 줘야 할 거 아닌가.”
“어? 서…… 선조님?!”
깜짝 놀란 일리나가 눈을 크게 뜨고 페르세르크도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아…… 아버지……”
“오랜만이구나, 페르.”
담담하게 말한 그가 쓰게 웃었다.
갑작스런 강신이지만 나는 조용히 고개만 숙여 보였다.
애초에 그가 내려올 건 예상했던 일이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검신 하레스. 그에게 있어서 일리나는 까마득한 후손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물론, 수천 년 단위의 후손이라면 사실상 타인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사제관계이기도 한만큼 마냥 멀진 않았다.
다만 하레스 이 양반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내려온 주제에 그의 딸이었던 페르세르크의 안부에 더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네.”
조용히 답하며 어렵게 미소지어 보이는 걸 보며 그 또한 떨떠름한 미소를 지어 화답했다.
“행복해 보이니…… 다행이구나.”
“아버지께서는 잘 지내셨습니까.”
“그래…… 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괜히 이런 분위기에서 끼어들 생각이 없었지만, 속이 터지는 것도 당연했다.
“거 오랜만에 봤는데 좀 안아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제안에 페르세르크가 눈에 띄게 당황하고 하레스는 헛기침을 흘렸다.
“언제까지 눈치만 보고 살겁니까.”
내 말에 하레스는 애써 시선을 피했지만, 페르세르크는 달랐다.
뭔가 결심한 듯 조심스레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고, 경직된 듯 움찔한 그는 이내 말없이 페르세르크를 품에 안고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네겐 언제나 미안하다는 생각밖에 없구나.”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가 있었기에 본녀가 현재 있는 겝니다…….”
“그래…….”
그렇게 한참이고 서로를 안아주고 난 후에야 홍단이와 청단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보고 있는걸 눈치챘는지 페르세르크가 황급히 떨어진다.
“헤헤. 엄마 빨개!”
“그…… 그만! 놀리지 말래도.”
“꺄르르륵.”
아이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장인어른, 그래서 막내 이름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품안에서 신력으로 가득한 종이를 꺼내 들었다.
거기엔 여러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름 한 번 정하려다가 아포칼립스가 다시 일어날뻔했다.”
고작 이름 하나 정하겠다고 영웅들끼리 또 치고받고 싸운 모양이다.
“그래서 후보군 이름 중 하나를 너희가 골라줬으면 한다.”
나쁘지 않은 결과이기도 했다.
어감에 뜻까지. 사실 이름이라는 게 여신이 지어준 아벨 같은 이름이 아닌 이상 큰 영향력을 미치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름엔 여러 후보군이 존재했다.
하지만 나도, 페르세르크도 에이리아도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골라?”
유일하게 기분이 좋은 표정으로 이름들을 훑어보는 일리나만을 바라본다.
“네가 골라.”
“응? 내가?”
“그래. 네가 아이 엄마니까. 네가 골라야지.”
“그런 게 어딨어. 괜찮은 게 있으면 고르는 거지.”
이름 자체는 대부분 무난했다. 아니 나름대로의 뜻을 깊게 품고 있기도 했다.
각기 다른 뜻이지만 말이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누가 무슨 이름을 지어주었는지는 따로 말하지 않으마.”
그렇게 말한 하레스는 자신의 몸을 서서히 투명하게 만들었다.
“벌써 가십니까?”
“비화와 달리 우리는 지상에 오랜 시간 있을수록 부담이 커지는 법이니까.”
특히 영향력이 큰 힘을 지닌 존재일수록.
신의 히포크리아가 그나마 무력 면에선 굉장히 약한 편이기에 크게 부담이 적은 편이기도 했다.
“다 지어지면 어련히 알 거다. 페르세르크, 건강하거라. 후손님과 데이비도.”
그말을 끝으로 하레스가 돌아가자 모두가 조용히 종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내가 골라?”
“그리하거라.”
“언니 이거 엄청 기다렸잖아요. 아이 이름 지어주는 거.”
보통 티오니스에선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이름을 지어주곤 한다.
하지만 막내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흐음…… 고민되네……. 아가야…… 넌 무슨 이름이 좋니?”
그리 물어본들, 포대기에 싸여 꼬물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 막내가 그걸 판단하고 고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일리나는 녀석이 꼬물거리는 게 마음에 드는지 그저 지켜본다.
그때였다.
녀석은 본능처럼 신성력을 가지고 놀며 주변의 것들을 치유하고 활성화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신성력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오?”
무슨 근거나 판단을 두고 움직이는 게 아닌 본능적인 움직임이다.
녀석의 신성력이 마구잡이로 뻗어 나가다가 종이에도 닿았다.
우연일까.
순간적으로 나는 신성력이 가장 먼저 닿은 부위를 바라보았고, 그 이름을 조용히 읊었다.
“트리아나. 순백의 아이.”
“트리아나?”
“방금 녀석의 신성력이 가장 먼저 닿은 부분이야. 애초에 우연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상징성은 충분하네. 성흔도 물려받았겠다…….”
내 설명에 일리나는 트리아나라는 이름을 읊조렸다.
“트리아나…… 트리아나…… 트리아나 올 라운……. 예쁜 이름이다.”
“괜찮구나. 한데 어디 쪽 고어인 게야?”
그녀는 어원이 어디인지 궁금해하는 기색이었다.
“페스리사 대륙의 고어. 뭐 고어라고 하긴 뭣하지만 로 아이아스 누님이 가르쳐준 단어야.”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페스리사 대륙 출신의 영웅은 그리 많지 않다. 그중 가장 가능성이 있는 건……
“데스 로드 님이 지어준 이름이라는 거네?”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뭐. 애초에 확신할 순 없지만.”
“트리아나……. 좋다. 응.”
해맑게 웃으며 일리나가 아이를 품에 안았다.
“트리아나. 지금부터 네 이름은 트리아나야. 아가.”
그렇게.
막내의 이름이 결정되었다.
트리아나 올 라운.
순백의 아이라는 잘 어울리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 * *
좋은 소식은 연달아 들려온다고 했던가.
비화가 이어준 인연인 시우와 몽마수녀 엘리시아가 조만간 결혼식 날짜를 잡는다는 모양이었다.
그 외에도 현아와 크리스도 슬슬 결혼을 약속하고 공식적으로 공표할 날을 잡고 있다고 하는 걸 보면 그 아이들도 좋은 인연이 되었으면 하는 쓸데없는 오지랖도 생겼다.
하인스에 경사가 난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고통받는 이들도 있었다.
“하악…… 하악…….”
숨이 넘어갈 듯 거칠게 몰아쉬며 볼품없이 바닥에 늘어져 있는 소녀가 하나.
그리고 그녀의 뒤편에 기절한 듯 쓰러진 채 침묵하고 있는 이가 셋이 더 보인다.
“벌써 쓰러지면 안 되는데.”
“저기…… 이대로 하다간 진짜 우리 죽을 거 같은데…….”
“걱정 마. 사람 쉽게 안 죽어.”
“데이비!!”
용사 아리스의 처절한 구원요청에도 나는 담담하게 서류철에 시선을 내려다보았다.
거품 세계의 용사 아리스.
외곽차원 출신의 내 성녀, 슈네리아 레켄.
최근 헬창부에서 몸담고 지내며 한때 마법사로서 이름을 날렸으나 최근 이 등신 같은 헬창들을 조율하기 바쁜 레밀리아.
마지막으로. 대수림에서 데려온 어린 엘프 파수꾼 다나까지.
이 넷이 현재 반쯤 시체가 된 몰골로 연무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다.
“너희 그러다가 진짜 위험한 상황 되면 아무것도 못 하고 죽어. 몸의 생존본능에만 맡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설사 잘되어서 살아남았다 해도 몸이 망가진다.”
“지금…… 하악…… 하악……. 지금 망가질 거 같은데…….”
“걱정하지 마. 내가 치료해주잖아.”
아리스의 눈매가 흐물거렸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려버릴 것 같은 모습이지만 나는 요지부동이었다.
“자. 일어나. 바로 움직이자. 너희를 어릴 때부터 가르친 것도 아니고, 너희를 나처럼 방대한 시간에 넣고 굴릴 생각도 없어.”
일리나처럼 역사에 다시없을 말도 안 되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이 기본만 잡아주면 끝이지만 이 녀석들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재능은 천재에 가까우며 이대로만 가면 몇 년 안에 이전과는 비교도 못 할 관록을 손에 넣게 되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렇다고 해도 다나는 제법이네. 못 따라올 줄 알았는데.”
대답도 못한 채 추욱 늘어진 엘프 하나가 바닥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고 있다.
다잉메시지마냥 내 이름만을 반복해서 쓰고 있는 꼴을 보니 아직 움직일 힘은 남아있는 듯 보인다.
이들이 이렇게 구르고 있는 이유는 새삼 간단했다.
내가 편하기 위해서라는 사욕이 주를 이루긴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도 이들은 요시아처럼 내 제자의 위치에 있다.
다나의 합류는 조금 의외이긴 했지만,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아폴론의 궁술에 잘 맞는 체질을 지니고 있는 것을 확인한 만큼 기회를 주었다.
이에 그녀는 강해질 수 있다는 말에 마을을 떠나 이곳까지 온 셈이었다.
물론, 그 결과를 위해 지옥 같은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지만.
“더…… 더는 못해…….”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쓰러져버린 이들을 보니 더는 굴리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왜 이렇게 못 버텨. 요즘 것들은 근성이 없어요.”
“데이비…… 네가 제일 싫어하는 게 꼰대짓이랬잖아…….”
“너희를 보니 좀 해야 할 거 같다. 너흰 재능을 너무 썩히고 있네. 속이 답답하다.”
“차라리 죽여어어…….”
말은 그리하지만, 그녀들의 성장은 제법이었다.
그중 가장 성장이 빠른 건 사실 엘프 다나였다.
가장 약한 편에 속했던 평범한 엘프인 그녀는 하드코어한 극한 단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빠르게 다른 이들을 따라가야 했으니 말이다.
이클립스와 검둥이의 일 이후 벌써 몇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제법 많은 일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그녀의 발전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레밀리아의 경우도 사실은 그녀가 아닌 요시아를 굴릴 생각이었지만 이 요망하고도 눈치 빠른 녀석은 아카데미 일도 바쁘고 내 피를 빨 시간도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쳐버렸다.
반대로 여기 있는 이 녀석들은 요시아같은 경험이 부족했기에 도망치는 타이밍이 늦었고…….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지고 말았다.
“너흰 그걸 알아야 해. 어느 대륙이고 내게 뭘 배워보려고 드는 인간들이 줄을 섰어. 알아 임마?”
“그으으…….”
대답이 없다. 좀비인듯하다.
한숨을 내쉬며 아공간에서 영약에 가까운 회복수를 던져준다.
“이거 마시고 오후에 또 모여. 처음에만 힘들지. 나중엔 할만할 거다.”
“어…… 얼마나?”
용사 아리스가 바짝 얼어붙은 표정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
쩌억!!
동시에 하늘에 있는 구름 하나가 가볍게 잘려나가 흩어진다.
“…….”
“저것까진 바라진 않겠다만……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말아야지.”
“차라리 날 죽여…….”
제법 저항이 거세지만 사실 게임 캐릭터 육성하는듯한 맛이 존재했다.
근래 들어 자극적인 일이 없다 보니 이런 일에 더욱 시간을 쏟는 기분이기도 했다.
“오후에 실전훈련에 들어갈 거다. 그래도 걱정하진 마. 실전이라곤 했지만 정말로 죽는 건 아니야.”
내 말에 아리스가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내가 아닌 다른 이와 대적하는 거라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한 듯했다.
착각은 자유라지.
그리고.
정확히 오후가 된 시각. 그녀들은 내가 펼쳐준 연무장의 환영결계속에서 과거 내 손에 죽었던 존재.
사실상 이클립스를 제외하고 심연의 공주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 중 하나로 알려진 폭군, 슬리지아의 형상을 만났다.
당연 슬리지아는 강한 편이긴 하지만 지금의 나와 비교하면 어불성설에 가깝다.
하지만. 훈련으로 내가 봐주던 것과 달리 영악하며 악의로 가득 찼고, 이기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 따윈 가릴 이유가 없는 슬리지아의 환영은 그녀들의 어떤 생각의 틀을 단번에 개박살 내며 그녀들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그 충격속에서 그녀들이 회복하는 데엔 꽤 시간이 걸려야 했다.
* * *
트리아나가 태어난 이후부터 하인스는 평소 이상으로 활발하고 교류가 많아졌다.
방송을 하느라 바쁘다 보니 가끔씩 레어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에반젤린조차 방송 이외의 시간과 식사나 수면은 성에 돌아와서 취할 정도였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하인스는 과거 사람 몇 없는 다 죽어가는 황폐한 땅이었지만 수차례 혁명에 가까운 변화를 일으킨 뒤로 거대한 영지가 되었다.
땅의 저주가 사라지니 이 땅이 가진 교통이 상당히 큰 도움이 되기 시작했고, 그 외에도 넓은 땅과 생각보다 다양한 지하자원이 많은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라운은 몰라도 하인스만큼은 눈치를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타국에서도 하인스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편이기도 했기에 그 영향력은 가히 놀라운 수준이 아닐 수 없다.
마음 같아선 이곳에 마족들도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지만, 아직 이 대륙은 마족과 온전히 섞이기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마왕인 나를 대신하여 마족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알리타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분위기를 보고 있는 참이다.
지하산맥 너머 마족의 땅은 이제 햇볕이 닿아 더 이상 척박한 땅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그들로서도 굳이 목숨까지 걸어가며 인간과 충돌할 이유가 사라진 셈이기도 했다.
현재 마족의 숫자에 비교하면 그 땅의 크기는 매우 넓은 편이기도 했으니까.
“생각이 많아 보이는 게지.”
영주성의 정원에서 말없이 영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페르세르크가 품에 트리아나를 안아 들고 다가왔다.
일리나가 주기적으로 직접 수유를 하는 편이라 피곤에 절어있어서 그녀가 대신바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대와 본녀가 만난 게 벌써 몇 년째인지……. 시간은 참 잘 가는구나. 그동안 1초가 1분 같았거늘…….”
헤실거리며 내 곁에 앉은 페르세르크가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울드], 그대와 제법 즐겼던 게임이로고.”
그녀는 곁에 놓여있던 상아로 만들어진 체스와 흡사한 보드게임을 펼쳤다.
곁에 가져온 요람에 트리아나를 고이 눕힌 그녀는 혹여라도 찬바람이나 아이에게 해가 되는 게 생기지 않도록 수차례 마법을 건 뒤 자리에 앉았다.
“슬슬 본녀도 이길 때가 되지 않았는가.”
“꿈도 크네.”
나는 활발함과 평화로 가득 찬 영지를 다시 한번 흘끗하고는 기마에 해당하는 말을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보고 드려도 되겠습니까.”
“……분위기 파악 못 하네. 데이트 할 땐 그냥 모른 척 지나가지.”
내 투덜거림에 그림자 부대원이 조용히 고개를 숙여 사죄해왔다.
“죄송합니다만 보고를 드려야 할 거 같아서…….”
“말해봐.”
“영지 외곽에 있는 창고 쪽에서 대량의 환각 연기가 발생했습니다.”
“유리아?”
“네. 미식연구부서가 연지개발부서와 새로운 주류를 증류하던 중에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인명피해는 없는 모양이다. 하긴 미식연구부서도 이런 위험한 시도를 할 때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사고 친 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이제와서는 하나의 연례행사로 활력을 불어넣는 일부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나는 말을 내려놓았다.
하인스에선 유명한 말이 있다.
뭔가 사건이 터졌을 때 미식연구부서의 부서장인 유리아 헬리샤나를 짚어라. 그럼 대부분은 맞을 것이다. 라는 말이.
실제로 사고뭉치 탑3 안에 드는 녀석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각지에서 모여든 또x이들 중에서도 최고봉이나 다름없는 녀석이니까.
동시에 페르세르크는 요람에 눕혀둔 트리아나를 다시 소중하게 품에 안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갔다 올게.”
“승부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구나.”
“뭣하면 밤에 한판 붙던지.”
내 우스갯소리에 그녀가 피식 웃으며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코를 가볍게 꼬집었다가 놓았다.
“기대하고 있을 터이니 얼른 다녀오게.”
포근한 감촉이 뺨에 닿는다. 그녀가 뒤꿈치를 살짝 들어 내 뺨에 입을 맞춰온 것이다.
그리 말하는 페르세르크의 뺨은 복숭앗빛처럼 붉게 물들어있었다.
* * *
하인스 외곽의 인적이 드문 창고.
연기가 흘러나오는 창고 속에서 일련의 무리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가스! 가스! 가스!”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튀어나온 이들은 일사불란하게 현장을 벗어나려 했다.
물론.
“이것들은 아주 쉴 틈 없이 사고를 치는구나. 에오니샤. 영지개발부 동결 풀어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사고야.”
“으악! 오라버니!”
비명을 지르는 에오니샤의 뒷덜미를 낚아채자 그녀가 대롱대롱 매달린 채 버둥거린다.
“나머지도 집합.”
그리고 잽싸게 도망치려던 이들을 전부 불러내며 말했다.
“요즘엔 헬창부 그 근육 바보들도 사고를 안 치는데 니들은 대체 뭐냐. 걔들보다 못한 존재야?”
그 한마디에 미식연구부서와 영지개발부서의 인원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
“그 교양 없고 머릿속에 근육밖에 없는 등신들하고 저희를 비교하지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