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57화
흔히 말하는 자존심이라고 할까. 미식연구부서든 영지개발부서이든 헬창부서이든 모두 다른 성향을 띠며, 치는 사고도 대부분 제각각이다.
하지만. 이 녀석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은 나머지 둘에 비하면 얌전하다고 믿는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장난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닌 진심으로 믿는 꼴이다.
“그래서. 매달린 거예요?”
“어머, 뮤우 그래서라니. 이건 음해이고 모함이라는.”
“하지만 사고 쳤다고 들었는데? 뮤우도 사고 칠 때마다 교수님들이 혼내고 벌점 주고 그랬어!”
“…….”
순수한 아이 앞에서 뭐 하는 짓인지. 유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의 실험인 터라 단순히 주의 정도로 끝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자신이 다른 두 부서보다 사고를 많이 친다는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던 두 부서는 서로가 서로를 팔아넘긴 결과 결국 매달리기에 처하고 만 그녀들이었다.
데이비의 입장에선 걱정이 앞서는 모습이었다.
지금이야 서로 친하니 그렇다 치지만 이게 시간이 흘러 세대가 교체되었을 때 얼마나 큰 알력 다툼으로 번질지 감을 잡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정작 본인들은 세상 즐거운 취미 활동들이었지만 말이다.
영지개발부쪽은 다른 곳에 매달려있을 터.
보통 사고를 치면 꽤 오랜 시간 매달려있는 그들이었지만 나름대로 안전수칙을 지켰고, 문제가 발생함과 동시에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을 참작하여 매달리는 형벌이 끝을 맺었다.
타이머 마법이 풀리기가 무섭게 가볍게 지상으로 뛰어내린다.
장시간 매달려있으면 감각이 이상해지기 마련이지만 유리아를 포함한 미식연구부서는 굉장히 익숙하다는 듯 바닥에 내려서고는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우와…… 난 매달리면 엄청 어지러워서 처음엔 서 있지도 못했는데…….”
휘청거림 하나 없이 멀쩡하게 내려서는 그녀들의 모습에 뮤우가 순수한 감탄을 흘리자 륀느가 무표정한 얼굴로 양손을 허리춤에 대었다.
그리고는 빈약한 가슴을 보란 듯이 펴고는 말했다.
“이것이 관록이라 륀느가 명시.”
“배우고 싶진 않아…….”
물론, 뮤우는 가끔씩 이들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하는 편이었다.
과거 어린 하프 엘프 뮤우는 순수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달의 숲의 문제점이 해결되고 세계수 문제가 해결되며 지원을 받고 고삐가 풀려버린 유리아를 가까이서 계속 보다 보니 그 순수함이 빠르게 빛바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여러분.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아니겠죠?”
“륀느. 새로운 주류의 패러다임을 위해 멈추지 않을 것을 명시.”
“나도 술은 좀 끌리는데. 한번 더해보자.”
점순이가 눈을 반짝이기가 무섭게 유리아와 륀느의 시선이 모인다.
“처음에 미친것들아 그만둬! 라고 말하던 분은 어디 가셨을까요.”
“점순이. 아닌 척하면서 가장 먼저 부뚜막에 올라가는 소인배라고 분석. 륀느가 그 옹졸함을 낮게 평가.”
“륀느, 네 가슴만큼이나 옹졸하다는 거지?”
촤르르르륵…….
륀느와 점순이의 주변으로 빛 가루들이 날아오른다.
“너 죽고 나 죽고 해보자 이거지?”
“륀느는 륀느보다 약한 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평가.”
본래라면 자신도 휘말려야 했지만, 유유자적, 자연스레 둘의 싸움을 붙인 채 유리아는 품안에서 수첩을 꺼낸 뒤 만년필 뒤쪽 끝부분을 입에 살짝 물었다.
새로운 주류는 잘만하면 하인스에 엄청난 수익원을 만들 수 있다.
그동안 정말 많은 것들을 시도하여 식재료를 발굴하고,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 왔다.
하지만 술 쪽으로는 아직 미숙한 것을 통감해야 했다.
조건은 두 가지.
이번 컨셉의 중요점은 다름 아닌 대중성이었다.
맛이야 기본 베이스로 깔고 가야 하지만 칵테일 같은 케이스와 달리 맥주 같은 느낌을 원하는 그녀였다.
그 예시로 창고 내에서 여러 종류의 술을 발효시키다가 독 환각연이 발생하지 않았던가.
먹는 이의 정신을 해치거나 몸을 망가뜨리는 건 배제해야 할 요소이기도 했다.
“이 부분에 관해선 드워프 분들이 좀 더 지식이 깊겠지만…….”
이미 술고래 중 하나인 골다나 골고다 장로 형제에게 물어봐도 큰 수확은 없었다.
쾅!! 쾅!!
점순이와 륀느가 치고받고 싸우는 것쯤은 가볍게 무시한 채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자 뒤따라서 뮤우가 따라온다.
“저 둘은 어떻게 해?”
“그냥 두면 지쳐서 그만둘 거랍니다.”
진지하게 고민하는 유리아를 보며 뮤우는 새삼스럽다는 분위기를 내비쳤다. 집중할 땐 정말 멋있는데…… 평소 하는 짓을 보면 요즘은 존경보다는 씁쓸함이 밀려온다.
“에휴…….”
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뱉으며 뮤우는 같은 동아리원이었던 오크가 선물로 주었던 잎을 오물거렸다.
“흐헤…….”
묘하게 기분이 좋은 향과 맛이 느껴진다.
씹어먹는 게 아닌 입에 물고 쪽쪽 빨아먹기만 하면 된다고 해서 처음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요즘에 와서는 심심하면 꺼내서 물고 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
“뮤우? 그건?”
“아. 선물로 받은 잎인데 쪽쪽 빨고 있으면 엄청 맛이 있어!”
뮤우가 잎 한 장을 내밀자 유리아는 조용히 그것을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잠시간 침묵이 인다.
“어…… 어어? 왜 그래?”
갑작스레 굳어버리는 그녀의 태도에 뮤우가 당황한 듯 그녀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거에요!!”
이윽고 유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이건 어디서 난 거죠?!”
“그…… 오크 영지에서 가져온 거라던데…….”
“이거 요청해야겠군요!”
이걸로 뭘 하겠다고? 뮤우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유리아는 망설임이 없었다.
* * *
“어떠신가요?”
“어쩌고 자시고…… 아직 잘 모르겠는데.”
“느낌은 있지 않나요?”
“제대로 발효만 되면 괜찮을 거 같긴 해.”
“다행이군요.”
유리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하인스에 비어있는 부지 중 한 곳에 이 물건의 재배를 요청할게요. 기후문제로 이곳에선 재배가 불가능하지만 하인스의 특성을 생각하면 가능할 거라 생각해요.”
“흠…… 예산이 크게 넘치는 것도 아니니 어려울 건 아니지만…… 일단 완성품은 만들어보고 생각하는 게 어때.”
데이비의 대답에 유리아는 콧김을 뿜으며 눈을 반짝였다.
“물론이죠. 영지개발부에서 지난번의 실패를 발판삼아 고속 발효장치를 만들었으니 한번 시도해볼 가치가 있을 거예요.”
유리아의 행동력은 가히 벼락과도 같았고 그녀는 곧바로 영지개발부서로 쳐들어가더니 며칠 만에 완성품이랍시고 와인병 하나를 들이밀었다.
“원가가 비싸지 않기에 대중성도 충분하고, 맛도 일반적인 술과 달리 굉장히 매력이 있답니다.”
유리아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데이비는 조용히 와인병에 담긴 술을 잔에 따랐고 천천히 먹었다.
“그에 어울리는 요리도 생각해둔 참이에요. 은공, 어떠신가요. 이 정도면 충분히…….”
“불합격.”
데이비가 단호하게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어째서죠?”
“직접 마셔봐.”
데이비가 내민 잔을 받아들고 마신 유리아는 숨을 조금 음미한 뒤 눈을 찌푸렸다.
“이건…….”
“발효 중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한데. 고속발효장치는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렇군요. 하지만 이건 발효과정에서 생긴 문제 같아요. 시간을 들인다 한들 같은 사례가 반복될 것 같네요.”
짧은 시간에 맛이 변질된다면 그건 실패작이다.
유리아는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첨가물을 조금 찾아봐야겠군요.”
“그래. 고생하고, 완성되면 또 보여줘. 괜찮으면 바로 투자금 유치해줄 테니까.”
“그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유리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가버렸다.
먹을 것에 관해선 저토록 한없이 진지한 그녀다. 그런 그녀가 새로운 영감을 얻었으니 또 단시간 안에 엄청난 사업 하나를 추진할 수 있으리라.
“하인스에 있던 불안정한 자금유통도 이쯤 되면 괜찮아질 테고.”
인복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났고. 유리아는 결국 현시대에 알려진 술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주류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 * *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결과물을 가져온다.
하인스에서 만들어진 하인스산 발효주는 여기저기 퍼져나가더니 삽시간에 입소문을 타고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상단이나 각 세력이 연락을 취해오겠는가.
싼 티가 나는 맛도 아닌데 가격은 저렴하기 그지없으니 계급 고하에 상관없이 굉장한 인기를 구가하는 것이다.
덕분에 하인스는 한창 바쁜 시기를 보내야 했고, 그 과정에선 데이비도 포함되어있었다.
“당분간은 티오니스 내에서만 유통해야겠네.”
주류는 소모량이 많은 만큼 손이 갈 곳이 많다. 제조나 물품이 상하지 않게 할 필요도 있으니까.
특히 뮤우가 알려준 잎을 이용해 만든 술이라곤 해도 누군가가 따라 하기엔 생각보다 복잡한 과정과 숨겨진 레시피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단시간 내에 잘도 만들었어.”
“사실 원래 제가 만들던 술에 첨가하는 방법을 택했답니다. 단순 잎으로만 만들어내는 건 금방 변질되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금방 질리는 걸 피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당연히 유리아 이외에도 이걸 이용해보려던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발견된 문제점이 발목을 잡았을 터.
유리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 최대한의 이점을 끌어낸 셈이었다.
저런 걸 보면 천재가 맞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은 이렇게 단시간에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건 쉽지 않으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 발효시킬 필요도 없고.”
“장치를 활용하면 나흘 정도 발효하는 거로도 충분하니까요. 제 예상에 따르면 잘만 유통이 된다면 하인스에 엄청난 재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 거라고 분석하고 있답니다.”
“그거면 돼? 노예도 아니고 이건 네 개인 자산으로 해줄 수도 있는데.”
“근본적으로 따지면 은공이 제공해주신 재화와 재료를 이용해서 만든 것이니까요. 가능하면 저는 삭감된 예산을 올려주신다면야.”
“……그래. 이야기해둘게.”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아 참. 그리고 사고 싶은 게 있는데…….”
“명세서 올려. 결재해줄게.”
이 또라이 엘프는 완성하는 데에 의의를 두고 그것이 널리 퍼지면 더 좋아하는 괴짜였다. 단순히 돈으로 가치를 매기는 건 그녀의 취향이 아닐 터다.
“고생했어. 관리는 직접 할 거야?”
“품질 쪽만 확인하고 나머지는 하인스 상단에 맡길 생각이랍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바리스나 윈리에게도 보내줘야겠네. 내 개인 자금으로 계산해줘.”
“어머나. 이 정도는 제가 직접 따로 빼둔 것으로 엄선해서 준비할게요.”
사업 자체는 금방 진행되었다.
최근 하인스 내에서도 자체적인 상단을 운영하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상단에서 취급하는 품목은 주로 티오니스가 아닌 지구나 유르기안. 아트렐리아 등등 여러 타 세계에서 들여온 물품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니까.
각 세계만의 고유특색이 서린 물건들은 제법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본래라면 교류가 있을 수 없는 세계이기에 무리하게 기술의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조심해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사고를 자주 치긴 하지만 유리아 덕분에 큰 자금확보가 가능했던 만큼 가능한 선에서 그녀가 바라는 걸 이루어줄 생각이었다.
사고도 요즘엔 귀엽게 치는 편이고, 이 정도면 뭐. 믿어줄 만하다.
며칠 뒤에 들려온 소식만 아니었다면…….
“저하…… 미식연구부서와 영지개발부서가 또 이상한 실험을 하다가 대규모 폭발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출하를 준비중이던 달의 풀 물량이 일부 전소…….”
“유리아 헬리샤나!!!”
재화를 관리하던 페르세르크의 포효가 들려오는 것과 내가 코트를 입는 건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디로 도망갔냐.”
“지…… 지구로 튀었습니다.”
긴장한 그림자 부대원의 보고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 창틀을 박찼다.
“사흘 동안 매달릴 준비 해라.”
또라이와 천재는 종이 한 장 차이다.
하인스는 늘 그렇듯 평소의 모습대로 겉보기엔 평화롭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