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상견례
일국의 황제가 행차한다고 하면 그 호위는 비상이 걸린다.
하물며 대륙의 중부, 남부, 동부, 서부를 모두 통일한 대제국 아인트하펜, 그 아인트하펜의 황제라고 하면 더더욱 그렇다.
수백명에 달하는 근위기사단, 그 근위기사단 중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인 로얄가드가 겹겹이 둘러싸고, 그 위를 기수를 태운 대공마룡 편대가 날며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하고 있는 이 상황.
바깥의 상황은 아는지 모르는지, 화려한 샹들리에에 비해 비교적 단촐한 테이블에는 장년 남성 둘과 갓 성인이 되었음직한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앉아있음에도 꼿꼿이 곧추세운 허리.
떡 벌어진 어깨와 장대한 체구는 그가 보통 용력을 가진 이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남자의 말에, 맞은 편에 앉아있던 중년 남성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못지 않은 큰 덩치.
관록이 묻어나오는 얼굴은 불그스름하고, 멋드러지게 기른 수염은 이제 드문드문 흰 수염도 섞여있었다.
“말씀 편히 하시게, 미테리엔 공. 전장을 함께 누비던 친우 아닌가. 게다가 이 자리는 황제와 신하가 아닌, 자식 가진 아비들로 만난 자리가 아니오.”
“그렇다면, 사양 않고.”
그제서야 두 남자는 꼿꼿이 세우고 있던 허리를 편히 하며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괴었다.
“이보게, 크로이츠. 호위가 너무 부족한 게 아닌가?”
“로얄가드 50명에 대공마룡 편대가 둘이네. 이게 부족하다면, 충분하려면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여기에는 자네도 있지 않나. 나도 있고.”
크로이츠 폰 아인트하펜.
볼프강 폰 미테리엔.
지리멸렬한 전쟁 끝에 마침내 대륙 북방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통일한 사자왕, 크로이츠 폰 아인트하펜.
그리고 크로이츠가 제국을 선포함과 동시에 자기 역할은 다했다며 스스로 북방 영지를 청해 수도에서 멀어지기를 택한 볼프강.
아인트호펜의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공신임과 동시에 막역한 친우인 두 사람.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마침내, 슬하의 자녀들의 혼사를 위해 이 자리에 앉은 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여전히 여자다운 면모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군.”
단정하게 빗어넘긴 금발.
푸르른 눈동자는 별빛이 박힌 듯 반짝이고, 수려하게 깎아내린 얼굴과 함께 제국의 황태자라는 직위까지 모두 가진 남자, 레오폴트 폰 아인트하펜.
“그래요. 오랜만에 만난 약혼녀에게 하는 첫 인사 치고는, 당신답지 않게 부드러운 대답이군요.”
긴 머리를 세 가닥으로 땋아 하나로 묶어 틀어올린 은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드문 민트빛의 눈동자가 살짝 움직이다가 이내 찻잔을 향했다.
잔을 집어드는 긴 손가락이 마치 눈처럼 새하얗다.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은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약혼자랍시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레오폴트도 그렇고, 지금 자녀들은 어찌되었건 환담이 이어지다가 이제는 전쟁 중의 에피소드로 넘어가서 서로 자기네 편제가 더 강했노라는 이상한 경쟁이 붙고 있는 두 중년들도 그렇고.
“정말 불편한 자리로군.”
“동감이에요. 당신과 마주 앉아 있느니, 차라리 북방 이민족과 마주 앉는 게 편할 것 같군요.”
“하.”
레오폴트가 비웃음 섞인 한숨을 자아냈다.
그저 그런 중소규모의 왕국도 아닌, 대륙의 4/5 를 정복한 대제국 아인트하펜의 황태자를 면전에 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정말이지, 무례하기 짝이 없군.”
“그렇군요. 약혼녀에게 그런 폭언을 내뱉는 이도 있고 말이지요. 자아성찰은 적당히 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만.”
찻잔을 들어 가볍게 차를 마셔보고서 아스트리드는 속으로 오만상을 찡그렸다.
맛이 없다.
원래 세계에서는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하디 흔한 게 커피믹스였건만, 지금에 와서는 제발 그거 하나만 달라고 애걸복걸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황제와 그 황제의 장남.
북부의 대공과 그 영애.
이 네 사람의 만남이 있는 자리에 나오는 차라면 분명 최고급임에 틀림 없을텐데도, 이런 맛의 차가 나온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인트하펜의 황태자에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다니, 정말로 간이 배밖으로 나온 게 틀림없어.”
“그런가요. 하지만 어쩌겠나요. 저의 목이라도 치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니, 그럴 수야 없지.”
레오폴트는 씩 미소를 지었다.
기본 바탕이 워낙 뛰어나다보니, 그냥 미소만 지어도 그림이 된다.
“혼사는 예정대로 해야지. 아인트하펜의 혈통과 미테리엔의 혈통. 이 둘의 결합은 제국에 있어서도 반드시 성사되어야 하는 일이니까.”
“거절하겠습니다.”
“황명에 따르지 않을 생각인가? 농담으로 했던 말이건만, 간이 배밖으로 나온 게 사실인가보군.”
아스트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살짝 잿빛이 도는 입술에 힘이 들어가며 가볍게 흰색으로 물들어간다.
절대 안돼.
사내놈이랑 결혼을 할 수는 없다.
아스트리드는 속으로 재차 굳게 다짐하며, 이번에는 어떻게 받아쳐야 좋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끌려가서는 안돼. 황태자의 입에서 스스로 결혼을 물리자는 말이 나오게 해야 돼.’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비록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랐다고는 하지만, 이 알 수 없는 세계로, 게다가 성별조차 정반대인 여자로 떨어져버린 이상에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해야만 한다.
전제군주제인 이 국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시 황제의 명에는 따라야 한다.
‘어떻게든 합법적으로 결혼을 피해야 돼. 아예 파기할 수 없다면 연기라도 해야 돼…’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문득 부르는 소리에, 생각에 잠겨있던 아스트리드는 갑작스레 현실로 끌려나왔다.
레오폴트의 못마땅한 시선이 그녀를 향하고 있다. 몇 차례 연거푸 부른 모양이라, 아스트리드는 그녀도 모르게 사과를 할 뻔 했지만 가까스로 그 말을 멈출 수 있었다.
ㅡ그녀는, 사과 따위 하지 않는 성격이다.
“네.”
“무슨 생각을 하기에 불러도 못듣는 건가?”
역시나 여러 번 부른 모양이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원래 아스트리드의 성격으로 봤을 때는 절대 그런 성격이 아니긴 했다.
‘여기서는 오히려 적반하장이 맞아.’
“숙녀의 사색을 방해하셨으니 먼저 사과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사색? 이런 자리에서 사색이라니. 농담이 과하군.”
“어디서든 할 수 있기에 사색이고, 그 사색의 끝에 얻어지는 결실이 깨달음이니. 사색에 장소는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군. 그래. 아무튼, 좋아. 좋다고.”
뭐가 연신 좋다는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레오폴트는, 지금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고풍스러운 의자에 깊이 몸을 기대며, 레오폴트는 다리를 꼬아앉았다.
이미 두 사람의 아버지들은 술이 거나하게 올라서 서로 간의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옆에 앉아있는 자식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그런 것들은 이제 관심도 없어진 모양이었다.
“뭐가 좋다는 말씀이신가요?”
“그야 좋을 수 밖에. 아스트리드, 네가 아무리 날고긴다고 해봐야 결코 황태자인 나를 넘어설 수는 없지 않겠나?”
불쑥 상체를 내밀면서, 레오폴트가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었다.
깍지 낀 손에 턱을 올리며, 유들유들한 미소를 지은 채 레오폴트는 결코 온화하다고는 할 수 없을 눈빛으로 눈 앞의 미녀, 아스트리드를 노려보았다.
“결국에는 네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 운명. 그리고 황태자비가 되고, 이후엔 황후가 되는 것. 그것 또한 운명. 지금 너처럼 이렇게 도도하고 안하무인인 네가 결국에는 내게 순종하게 될텐데, 어찌 좋지 않을 수 있겠어.”
‘누가 네 맘대로 될 줄 알고…!’
“게다가 이토록 아름답기까지 하니, 제국의 흥복이로군.”
아스트리드의 얼굴에 아주 작게 짜증이 피어났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레오폴트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아스트리드는 찻잔을 들어 다 식은 차를 마저 비워냈다.
“아버님.”
제국의 얼어붙은 방패, 미테리엔 대공ㅡ 볼프강 폰 미테리엔.
그는 친우이자 황제인 크로이츠와의 환담에 빠져 딸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님.”
계속되는 환담.
“아버님, 저는 아카데미로 가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볼프강과 크로이츠 사이의 환담이 뚝 멈췄다.
끼기긱 소리라도 낼 듯한 기세로, 볼프강의 고개가 돌아가며 아스트리드를 향했다.
“아스트리드, 지금 뭐라 했느냐?”
“아카데미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북방의 대공녀로서, 제국을 수호하는 얼어붙은 방패인 미테리엔 가문의 영애로서, 제국의 명예로운 군인이 되고자 합니다.”
아스트리드는 생각했다.
군인이라니.
군인이 되겠다는 말을 내가 내 스스로 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군대를 두 번 가는 일이, 내게 일어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아카데미라고 불리는 황립 군사학교가 있다.
군사대국인 아인트하펜답게 군사학교를 통한 체계적인 기사 양성을 기치로 내걸고 세워진 군사학교ㅡ 아카데미는, 입교 후에는 결혼 등의 세속적인 인연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다.
즉, 이 아카데미에 입교하면 졸업할 때까지 황태자와의 혼담은 자연적으로 연기된다.
그 사이에 어떻게든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이것이, 아스트리드가 내린 결론이었다.
군대를 두 번 가게 되었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남자와 결혼하는 사태보다는 나으리라.
아스트리드는 속으로 절규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