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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3화 (3/62)

3화. 아스트리드는 결심합니다

아스트리드는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차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풍경이 이어지고 있다.

서서히 해가 떨어지며 붉은 노을이 경작지를 휘몰고, 이제 하루의 노동을 마친 이들이 굽었던 허리를 펴는 모습.

거둬들인 곡식을 털어내고 남은 쭉정이들을 모아 쌓아놓은 짚단.

풍요로운 경작지의 모습.

저택이 있는 북부 미테리엔 영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추운 탓에 이런 밭농사는 하기 힘들고, 아슬아슬하게 온대 지역과 맞닿아 있는 영지 끄트머리 일부에서나 이런 농사가 이뤄질 뿐, 대부분의 영지민들은 사냥을 주업으로 해서 거기서 얻어지는 고기나 모피, 가죽들을 팔아 곡식을 구해온다고 들었다.

“아스티.”

“네, 아버님.”

“둘만 있잖느냐.”

볼프강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사랑스러운 딸 아스트리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아스트리드는 잠시 머뭇거리며 한참을 망설인 끝에, 그것도 볼프강을 정면으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

“옳지.”

부끄러운 듯 얼굴이 확 붉어지는 아스트리드를 바라보며 볼프강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친우인 크로이츠와 같은 해, 둘 다 늦둥이로 얻은 자식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딸이고 아들이었다.

전쟁이 끝난 그해 태어난 아이들이라 분명 축복받은 아이들이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아 둘 다 영특하고 명민하며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선남선녀로 자라났고, 볼프강과 크로이츠는 두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되면 결혼을 시키자고 굳게 약속도 했었다.

그러나 황태자라면 반드시 황립 군사학교를 가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되면서 결혼식은 다소 미뤄지게 되었지만, 시간의 문제일 뿐 약속은 지켜져야 할 문제.

그러다가 일이 터진 게 반년 전이었다.

저녁 식사를 위해 계단을 내려오던 아스트리드가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으며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고, 그 길로 한 달 동안이나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했었다.

온갖 약재를 다 달여다 먹여보고, 크로이츠가 궁정 마법사를 비롯하여 남방에 있는 마탑주까지 보내서 치료하게 했어도 아무런 차도가 없던 딸이었다.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함도 있었지만, 한 달이 되던 날 아스트리드는 거짓말처럼 눈을 떴고 그 뒤로 한동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행동했었다.

오랜 의식불명 상태로 인한 부작용이겠거니 하며 최선을 다해 돌보라는 지시에 사용인들은 저마다 정성껏 아스트리드를 돌보았고, 그 덕분에 빠르게 기억도 되찾아가며 예전의 딸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마침내 상견례 자리까지 무사히 치르고 돌아가는 이 길.

볼프강에게는, 마주 앉아 차창 밖을 내다보는 아스트리드가 너무나도 귀여운 딸이었다.

“아스티, 무슨 생각을 그리하느냐?”

“음…”

약간 잿빛이 감도는 입술이 꽉 다물어진 채, 아스트리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선은 차창 밖의 밭을 비롯한 경작지에 못 박힌 채, 아스트리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스트리드가 말이 없자, 볼프강은 재촉하고자 재차 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차였다.

“…결혼을, 꼭 해야 하나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아스티.”

“저는 이제 스무 살이고,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허어.”

아스트리드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제 갓 스무 살.

소녀들이 읽는 책이나 십자수, 뜨개질이나 사교회 같은 것들보다 이민족들의 뼈를 부수고 머리를 빠개놓는 일에 더 익숙한 설원의 백표범, 아스트리드.

그런 딸에 대한 미안함이 없지 않았다.

별의 가호가 깃든 탓에 평범한 아가씨로의 삶에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못할 아스트리드가, 이렇게 결혼을 서두른다는 것에 있어서 이해하지 못할 만 한 일이기도 했다.

“아스티. 네 마음을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란다.”

“하면, 아빠.”

“네가, 레오폴트 녀석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벌써 10년 전의 일이 아니냐. 게다가 그것도 레오폴트가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고 사고였고.”

“아빠.”

“그런 것은, 살다 보면 자연스레 잊히고 또 정으로 덮을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이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만 하는 말이다.

“네가 아인트하펜 황가의 일원이 되어, 황가와 우리 미테리엔가의 결합이 이루어진다면… 아인트하펜 제국의 앞날이 그야말로 평평대로가 되지 않겠느냐.”

그 말에, 아스트리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민트 빛의 눈동자가 다시 차창 밖을 향했다.

어느새 마차는 풍요로운 곡창지대를 지나 서서히 산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결혼… 결혼인가.’

아스트리드는 볼프강이 했던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반년. 고작해야 반년이다.

아무리 익숙하다고 해도 그것은 책에서 읽었던 세상일 뿐이고, 이렇게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판타지 세상은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여간 걸리는 게 아니었다.

말투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아스트리드는 대체 어디로 가고 내가 이 몸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스트리드의 입장에서는 빠르게 적응을 해야만 했다.

컴퓨터도, 텔레비전도, 스마트폰도 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하루라도 빨리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다ㅡ 라는 일념으로, 일단 목표를 생존으로 잡았다.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으로서 의심받아서는 안된다.

철저하게 적응하고 또 적응해서 추호도 의심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그것이 최종 목표이기도 했다.

그랬던 아스트리드에게 내려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 바로 결혼이었다.

원래 남자였던 그로서는 아무리 적응을 한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적응을 할 자신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결혼한다고 하면 그 짓을 해야 할 텐데.

그리고 그 짓을 받아들이게 된다면ㅡ

‘그게 바로 암타잖아. 아니, 안돼. 절대 안 돼. 절대 그럴 수는 없어. 안돼, 안돼. 나는 노맨스야. 절대 노맨스여야 한다고.’

나는 호르몬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나는 노맨스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아스트리드는 자기가 세운 목표에, 또 하나의 목표를 추가했다.

그러자니 아무래도 아는 게 없어서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빙의를 하자마자 나이는 스무 살. 이미 사교계에는 데뷔한 지 오래고, 게다가 평판은 바닥.

대공녀이다 보니 사교계에서는 초대장이 매 주마다 날아들고 있었지만, 아스트리드는 참석하지 않았다.

예법이고 뭐고 알 게 뭔가.

병중이라는 핑계로 모든 초대를 죄다 거절하고 나서야, 초대장이 날아드는 빈도가 확 줄어들었다.

그렇게 굴곡을 넘어오고 있었는데 이제는 상견례까지 하고 말았다.

거기서 최악의 선택을 하고야 말았지만, 아무튼 이제 4년이라는 시간을 벌게 되었다.

‘어떻게든 돌아가야 해. 돌아가고야 말겠어.’

하지만 문제는 아카데미였다.

소설들을 보면 보통, 이 아카데미가 제일 문제다.

여기서 온갖 트러블이 다 생기고, 결국에는 남자 주인공의 알파 메일다운 모습에 두근거리다가 결국에는 암컷이 되어버리는 전개.

그 전개가 튀어나오는 온상이 바로 아카데미다.

아스트리드 입장에서야 합법적으로 결혼을 미룰 수 있는, 차마 고르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효과가 확실한 핑계인데다 레오폴트도 갈 거라는 걸 몰랐으니 주인공과도 이어지지 않는 가장 안전한 루트라고 생각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택한 곳.

미리 알았다면 절대 택하지 않았을 선택지, 아카데미.

바로 그 아카데미로, 바로 다음 주면 아스트리드도 가야만 했다.

황명으로 입교를 허락받았으니 인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아카데미로 가는 것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빠.”

“오냐.”

부르자마자 아스트리드를 향하는 푸른 눈빛.

저 눈빛은, 정말로 다양하게 반짝이곤 했다.

야만족들을 향해서는 살기와 투기를 뿜어내며 번뜩이는 백호의 눈빛이기도 했다가, 신하들과 내치를 할 때면 지성과 지모가 반짝이기도 하며, 영지민들을 돌아볼 때는 온화한 어버이의 눈빛이기도 했다가, 지금처럼 아스트리드를 볼 때면 부드럽고 따스한 아빠의 눈빛이기도 하다.

“아빠는, 제가 어느 병과로 가길 원하시나요.”

“중장기사단이지. 전장의 꽃은 중장기사단이란다. 마도기사단이 나름 위세를 떨치고는 있다만, 결국 마도기사단은 기사로서도 마법사로서도 일류가 아닌 것들이다. 최종적으로 적진에 진입해서 밀어내며 깃발을 꽂는 것은 중장기사단인 법이야. 전장은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다. 알겠니?”

한마디 했을 뿐인데.

이로써 아스트리드는 앞길을 정했다.

첫 번째 목표. 어떻게든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만약 그게 안 될 경우, 어떻게든 파혼부터 한다. 그리고 아카데미 중장기사서임을 받는다.

그리고 영지로 돌아와,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평온하게 여생을 보낸다.

어차피 대공이 된다면 인생 평온하게 사는 것에는 문제가 없으리라.

만약에, 정말 아주 만약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이 아예 없다면 그렇게 한다고 해도 힘든 인생은 아닐 것이다.

그래…

나는 북부 대공녀.

절대로 함락되지 않는 불락요새,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내 인생은 노맨스다.

그래야만 한다.

반드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저는 글 쓰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다른 작가님들처럼 많이 올리지를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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