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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4화 (4/62)

4화. 아스트리드는 짜증납니다

딱, 따닥, 따닥, 딱.

아스트리드의 손톱이 원목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겹겹이 철망을 둘러씌운 벽난로에서 붉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는 대제국, 그중에서도 북방영토를 차지하고 있는 미테리엔 공작저.

한 해의 절반 이상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기후인 이곳이지만, 저 벽난로 덕분에 아스트리드의 방에는 추위는 커녕 훈훈한 온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역시 없네.”

아스트리드는 들여다보고 있던 조그만 책자를 덮었다.

잘 무두질 된 사슴 가죽으로 만들어진 표지에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이라는 이름이 검게 각인되어 있는 이 책자는 원래의 아스트리드가 아주 어렸을 때, 글자를 막 깨우쳤던 그즈음부터 매일 까지는 아니라도 수시로 써 온 일기장이었다.

“없어… 없어. 아무 데도 없어.”

아스트리드는 서랍을 열어 일기장을 밀어 넣었다.

세월이 세월이라 수십 권에 달하는 일기장이 켜켜이 꽂혀있는 서랍 속.

그 서랍에 읽던 일기장을 밀어 넣고 아스트리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10년 전.

어제 아버지인 볼프강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오면서도 들었던 10년 전의 그 사건.

일기장을 뒤져볼수록 미궁이었다.

분명히, 10년 전의 그 일을 기점으로 해서 레오폴트와 관계가 급속도로 뒤틀렸다는 건 확실했다.

일기장에서도 내일은 레오폴트를 만나러 가는 날이라며, 빨리 만나고 싶다는 소녀심 가득한 일기였는데 당장 그다음 페이지에는 레오폴트를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증오심 가득한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라, 사용인들뿐만 아니라 유모에게마저 10년 전에 그때 말이야ㅡ 하고 말을 꺼내면 기겁을 하면서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고개를 젓는 통에 차마 말을 더 이어가지도 못했다.

그걸 알 수 있다면…

‘뭐 달라지는 거 있겠나.’

레오폴트와 사이가 좋아진다?

딱히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사이가 좋아진다고? 내가? 걔랑? 아니, 사절이다.

이미 레오폴트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스트리드의 일기장을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런데도 일기장을 수시로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혹시라도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에게 관심을 가지는, 즉 호감으로 바뀌게 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즉, 레오플트의 감정이 악감정에서 호감으로 바뀌는 일을 막기 위함이ㅡ

- 부대, 차렷!

그런 아스트리드의 상념은 밖에서 들려오는 힘찬 구령 소리에 깨어지고 말았다.

두꺼운 암막 커튼을 살짝 걷어 밖을 내다보면, 희뿌연 성애 사이로 연병장이 바로 내다보였다.

여자애 방 바깥에 바로 보이는 풍경이 연병장이라니, 이게 무슨 악취미인가 생각했던 때도 있지만, 일기장을 보다 보면 그게 또 이해되는 부분이었다.

이민족의 습격이 있을 때면 항상 볼프강과 함께 출전했던 게 아스트리드였고, 게다가 볼프강을 능가하는 무위를 선보였던 게 아스트리드였다는 사실이 그녀로 하여금 헛웃음을 짓게 했었다.

지금도 이민족의 습격이 있는 모양.

아스트리드가 병석에서 일어난 지 불과 반년이고, 이제 다음 주면 아카데미로 향해야 하는 몸이니 볼프강이 함께 출전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혹여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도 많이 했었다.

아스트리드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책상 바로 뒤에 걸려있는 대검을 올려다보았다.

길이만 하더라도 아스트리드의 키와 맞먹고, 검신의 너비는 아스트리드의 허리와 비슷한 정도다.

두 손으로 들어도 저걸 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무게지만, 아스트리드는 손을 뻗어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오랜 시간 걸려있기만 한 터라 방 안의 온기 덕분에 냉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손잡이를 움켜잡은 채 그대로 들어 올렸다.

미약한 무게감.

그저 미약하다, 정도의 느낌뿐인 대검이 가볍게 손의 움직임을 따라 궤적을 그렸다.

찌르는 행동은 아예 배제하고 베고, 후려치고, 내리찍는다는 행위에 최적화된 것임에 분명한 대검이 벽난로 속 불길의 빛을 반사하며 붉게 일렁였다.

‘신력…’

아스트리드에게 깃든 별의 가호 둘 중 하나, 신력.

거인과도 같은 힘을 부여하는 별의 가호는 어지간한 사람은 두 손으로도 들 수 없을 이 대검을 오로지 한 손만으로도 다룰 수 있는 괴력을 아스트리드에게 내려주었다.

- 타닥.

왼발을 반보 앞으로.

오른발을 다시 크게 앞으로.

- 후웅.

대검이 궤적을 그리며 우상에서 좌하로 그어 내렸다.

이어서 좌면을 빗겨그으며 뒤를 베어내고.

내디딘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돌리며ㅡ

- 텅.

대검이 바닥에 닿기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멈췄다.

책 한 권 정도의 두께를 남긴 채, 아슬아슬하게 멈춘 대검.

대검은 멈췄으나, 그 무게에 짓눌린 풍압이 방바닥에 맞부딪히며 둔중한 울림을 이끌어냈다.

‘신무.’

아스트리드에게 깃든 별의 가호 둘 중 두 번째, 신무.

설원을 누비는 야수처럼, 본능적인 무예.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움직이는 귀신같은 전투 감각.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본성이 아스트리드에게 깃들어 있다.

일국의 장군에게 최적의 가호, 그 둘이 모두 아스트리드에게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원래의 아스트리드와는 다르다.

한참이나 부족하다.

아무리 몸이 기억하는 무예라고 해도 의식이 받쳐주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기본적인 무예는 몸이 기억해도, 의식이 조화롭지 못한 지금의 아스트리드에게는 전투는 무리다.

‘어쩌면 좋지…’

방바닥에 닿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한 대검을 유지한 상태로, 아스트리드의 고민이 깊어져 간다.

“근질근질하신가 봅니다, 누님.”

어느샌가 열린 문 너머에서 짝짝짝, 손뼉을 치며 그녀를 향해 웃고 있는 남자.

아스트리드는 내리찍었던 대검을 거둬들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슈레이. 노크를 하라고 말했지.”

“했습니다. 누님께서 못 들으신 거죠.”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다른 것에 집중하는 바람에 못 들었을 수도 있어서, 아스트리드는 구태여 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용건은.”

아스트리드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더 큰 키의 남자가 성큼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쇠로 된 그리브가 철컹철컹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아스트리드 앞에 선 남자.

짧게 자른 머리에 얼굴을 가로지르는 굵은 자상.

아스트리드를 두 명 나란히 세워놓은 것 같은 거대한 덩치로 마치 검은 곰을 연상케 하는 남자는 아스트리드를 보며 싹싹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또 침입이지요. 출정하기 직전인데, 혹여 누님께서 지루하시진 않을까 싶어서.”

아슈레이 미테리엔.

성은 미테리엔이지만 출신은 미테리엔이 아니기에 소속명은 받지 못한 남자.

볼프강이 점령지에서 단순 변심으로 주워온 고아 출신인 그는 아스트리드보다 세 살 어렸고, 의붓동생으로 같이 자라고는 있었지만…

“그러니. 생각해줘서 고맙구나.”

아버지인 볼프강과 더불어 유이하게 아스트리드가 마음 편하게 대하는 가족이기도 했다.

설원의 백표범이라고 불리는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설원의 검은 곰이라고 불리는 아슈레이 미테리엔.

상반되는 호칭만큼이나 성격도 많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아스트리드를 살갑게 따르는 이 곰 같은 남자를 아스트리드는 내심 친동생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래, 출정식이 한창인데 어쩌고 여기에 온 거니.”

“아직 아버지 연설이 남았잖습니까. 어차피 지루한 연설일 텐데 거기 서서 듣고 있으면 말이죠… 아,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누님?”

“…….”

아스트리드는 딱히 대답은 하지 않고 한걸음 옆으로 물러서서 길을 터주었다.

들어와 앉으라는 무언의 허가.

아슈레이는 그럼 실례, 라는 말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소파가 내려앉으니 살살 앉으라고 몇 번을 말했니.”

“습관이 돼서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누님. 뭐 아무튼 거기 서서 듣고 있으면 춥기도 춥고, 어차피 출발할 때 내려가면 될 일 아닙니까?”

‘추운 곳에 서 있는 것도 고역이지.’

혹한기 훈련 출발할 때 대대장 연설 기다리느라 발을 동동 구르며 연병장에 서 있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고개를 휘휘 저어 그 기억을 날려버리며, 아스트리드는 아슈레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편하게 있어.”

아스트리드가 대검을 든 채 책상 뒤편으로 걸어가 거치대에 대검을 걸어놓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슈레이.

“그 무거운 걸 그렇게 한 손으로 휙휙 휘두른다니, 정말이지 누님의 힘은 어마어마하시구먼요. 볼수록 놀랍다고요, 그거.”

“그러니.”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

가는 말이 있으면 오는 말도 있어야 할 법인데 그러니 하고 끊어버리니 대화도 끊어져 버렸다.

“어휴… 정말,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대화가 이어지게 대답을 하십쇼. 어쩜 그렇게 단답형으로만 얘길 합니까? 레오폴트 황태자 저하도 고생깨나 하겠습니다그려.”

순간 아스트리드의 시선이 아슈레이를 향했다.

민트색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은 채, 아슈레이를 노려보며 이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 말, 한 번만 더 해 봐.”

소파에 앉아있던 아슈레이가 움찔 몸을 떨면서 아스트리드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리고, 아스트리드가 한참을 아슈레이를 노려보다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누님.”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는다.

이 정도 했으면 됐다는 생각에 아스트리드도 책상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래, 조심해서 잘 다녀와.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예.”

- 미테리엔의 아들들이여!

제법 두꺼운 창을 뚫고서 아스트리드의 방까지 들려올 만큼 커다란 목소리.

출정을 앞두고서 볼프강이 병사들에게 연설을 하는 모양이라, 아스트리드도 다시 커튼을 젖혀 창밖을 내다보았다.

연방장 가득 도열해있는 병사들.

가장 앞 열에 미테리엔의 가문 깃발을 든 기수가 서 있고, 5열로 선 병사들이 오와 열을 맞추어 서 있었다.

단상에 오른 볼프강 폰 미테리엔.

혹한의 날씨에 오히려 땀과 함께 얼어붙어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풀 플레이트가 아니라, 보온을 위해 솜을 채워 넣고 물고기 비늘처럼 찰갑을 이어붙인 미테리엔 갑옷을 착용한 볼프강은 한 손에는 방패, 다른 한 손에는 모닝 스타를 들고서 병사들에게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아슈레이, 너도 이제 내려가지 그러니. 더 늦으면 너 때문에 출정이 늦어진다고 혼날지도 모른다.”

“아이고, 누님 방이 너무 안락하니 나가기가 싫어서 그러죠. 에이, 그렇다고 안 나갈 수도 없으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하렴.”

“예.”

아슈레이의 그리브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마침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마저 멀어져 갈 그즈음.

아스트리드는 방문을 닫고 다시 창을 내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병장 문을 통해 볼프강과 아슈레이를 위시한 병사들이 진군하는 모습이 보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현실에서는 양자라고 하더라도 이름과 성 사이에 폰이 붙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작중 설정으로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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