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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5화 (5/62)

5화. 아스트리드는 절망합니다

대륙의 대부분을 먹어 치운다는 크나큰 업적을 달성한 후에도, 크로이츠 폰 아인트하펜은 황궁을 다시 짓는다거나 하는 그런 무의미한 짓은 하지 않았다. 왕궁을 그대로 이름만 황궁으로 바꿨을 뿐,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황궁의 뒤켠, 황제를 비릇하여 황제에게 허락받은 이만이 출입할 수 있는 작은 정원.

그곳에서 크로이츠와 레오폴트는 자그만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레오폴트.”

“예, 폐하.”

“둘만 있잖느냐.”

“예, 아버지.”

격식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크로이츠는 딱히 그런 격식에 구애되는 성격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단순하고 과감하며 저돌적인 성격이었는데, 황제가 된 이후에도 딱히 그 성격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 이제 만족하느냐?”

“무엇이 말입니까?”

레오폴트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전혀 짚이는 바가 없었다. 뭔가 불만을 가진 적도 없고, 그런 생각을 딱히 하지도 않았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흡족하냐는 크로이츠의 말에 레오폴트는 그 의중을 도저히 알 수 없다.

“아스티를, 아카데미로 오게 만들어서 만족스럽냐는 말이다.”

크로이츠가 음흉하게 웃으며 손깍지를 낀 채 아들을 바라보았다.

“예로부터 미녀를 마다하는 남자는 없다고 했다. 내 친구의 자식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아스티 정도면 천고의 절색이지 않으냐. 게다가 내 며느리로서 무력도 그만하면… 아니, 그만하면이 아니라 넘칠 만큼 충분하고 말이다.”

‘그 얘기였군…’

레오폴트는 저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애써 정돈하며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로 아스티… 가 아니라 아스트리드가 딱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애초에 여자는 인물이 다가 아니지 않습니까.”

“인물이 다가 아니면,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이냐?”

“예를 들어…”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고 보니 정작 말문이 막혔다.

레오폴트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스트리드가 황태자비로 결격이라고 내세울 만한 게 없다.

가문을 말하려면 미테리엔 대공가의 장녀인 데다, 미테리엔은 개국공신이면서도 수도가 아닌 오히려 변방이라 꺼려지는 북부 영지를 받아 스스로 권력에서 거리를 둔 명문가다.

외모를 말하려니 크로이츠가 말한 대로 천고의 절색이라 칭송받을 정도로 외모만큼은 완벽에 가깝다.

무력을 말하자면 별의 가호를 둘이나 받은 덕분에 그 일신의 무력은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다.

“…성격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성격 말이냐.”

흐음ㅡ 하며 크로이츠가 턱수염을 매만졌다.

왕으로서, 지금은 황제로서 숱한 사교장을 거쳐왔다.

덕분에 크로이츠 역시 사교계에서 아스트리드의 평판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말을 돌려 하지 못하여 냉소적이고 직설적인 화법과 격식보다는 실리적인 것을 추구하기에 더욱 저돌적으로 보이는 언행.

“하지만 그런 성격이 오히려 황태자비에 더 어울리지 않느냐?”

“예?”

“고집이 세서 타인의 말에 쉽게 귀 기울이지 않고,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성격은 간신들의 간언에 쉬이 넘어가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직설적으로 말함은 장차 황제가 될 네게 있어 선정을 베풀도록 하는 길잡이의 역할까지. 네게 있어 최적의 반려가 될 것이 확실하지 않겠느냐.”

단호한 크로이츠의 말에, 레오폴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콩깍지가 단단히 씌이셨군요, 아버지.”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그래, 조심히 들어가거라.”

정원을 나와, 어전을 물러나면서 레오폴트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삭히느라 연신 한숨을 쉬어댔다.

사람이 예뻐 보이면 무슨 짓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예뻐 보이기만 한다고 그랬다.

바로 지금, 아버지이자 황제인 크로이츠가 딱 그 상태였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뱀과도 같은, 겉모습은 고고한 표범 같은 주제에 속은 뱀과도 같은 여자가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것인지.

그토록 오기 싫어하던 아카데미에 무슨 바람이 불어서 따라오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레오폴트는 그마저도 영 싫었다.

4년.

4년간 떨어져 지낸다면 적당히 핑계를 찾아 파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카데미에서 그가 여태 모르고 있었던 영애를, 어쩌면 아스트리드보다 훨씬 더 황태자비에 어울리는 영애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 파혼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하면 파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어떻게든.

하지만 그 계획도 아스트리드의 변심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레오폴트의 그 속셈을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아스트리드가 서로의 부친이 있는 자리에서 아카데미로의 입교를 선언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결과, 더더욱 크로이츠가 만족스러워하는 결과를ㅡ

‘뱀 같은 년…!’

생각만 해도 으드득 이가 갈린다.

그 아름다운 얼굴 뒤로 얼마나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인지, 그 자리에서 단 한 번에 황태자비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굳혀버리는 한 수.

‘내가 당했어…’

황태자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레오폴트는 점점 더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분하고 원통하다.

‘외모, 가문, 일신의 무력, 부, 명예 빼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는 주제에…’

이제 아카데미의 입교식이 당장 다음 주로 다가온 지금.

마음 같아서는 다시 크로이츠에게 달려가 아카데미 입교 허가를 취소해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젠장, 젠장, 젠장!’

*

“아이구… 우리 아가씨가 혼자서 이걸 어찌 다 하시려고…”

너무나도 당연히 아카데미는 수도인 페르상트에 있었는데, 아카데미까지는 마차로 꼬박 일주일을 가야 하는 거리.

장거리이기도 하고 이제 가면 방학이나 되어야 집으로 돌아올 것이기에, 유모는 아스트리드의 짐을 챙기면서도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식사야 아카데미에서 준다지만 방 정리라던가 빨래, 그 외 자잘한 잡일들은 모두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 아카데미의 규율이었다.

아스트리드야 당연히 태어나면서부터 고귀한 몸이니 저 스스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겠지만, 지금의 아스트리드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자취 경력이 10년이 넘는데… 혼자서 못할 게 뭐가 있다고.’

빨래며 청소며 하다못해 요리까지 아스트리드는 충분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것도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일이라서, 아스트리드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 아카데미 입교 안내서를 뒤적이고 있었다.

볼프강과 아슈레이가 영지를 침입해 온 이민족을 요격하러 출정한 지 사흘.

이제 대공저에 있는 책이란 책은 죄다 뒤져서 더 이상은 아스트리드에 대한 기록을 찾아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지금은,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아가씨.”

“응.”

“하다못해 저 하나만이라도 따라갈 수 없겠습니까?”

이미 칠순에 가까운 노구임에도 아스트리드를 정말 친딸처럼 생각해왔을 유모다.

유감스럽게도 그 아가씨는 지금 내용물이 싹 바뀌어 있는 상태지만, 유모는 그걸 알 리 없고 그저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고서, 열 살이 넘어서는 전장을 누비며 평범한 아가씨의 삶과는 거리가 먼 거친 삶을 살아온 아가씨로 보일 터다.

“유모.”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어서, 아스트리드는 안내서를 덮으며 유모를 꼭 끌어안았다.

“나 죽으러 가는 거 아냐. 그냥 학교 가는 건데 뭐. 방학이면 돌아올 거니까. 너무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돼. 레오폴트 전하도 계시니까 말이야.”

“황태자 전하가 계시니 더욱더 걱정입니다… 아가씨…”

“응?”

황태자 곁에 있다고 하면 안심할 줄 알았다.

그랬는데 유모는 오히려 그게 더 걱정이라고 하니 아스트리드로서도 당황스러웠다.

“왜? 황태자 전하가 옆에 계신데 왜 걱정이야?”

“황태자비의 자리를 노리는 사악한 여우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아가씨, 그 사악한 여우들이 아가씨께 이빨을 드러내도, 아가씨의 여린 성정으로는 단호히 쳐내지 못하실 터, 이 늙은이가 영 마음을 놓지 못하겠습니다…”

끝끝내 유모가 손수건을 들어 눈가를 훔치고 만다.

대충 이해는 되었다.

대제국 아인트하펜의 초대 황제가 기틀을 잡으면 그 후광을 받는 건 차기 황제다.

그리고 그 황제의 곁인 황후는 황제 못지않은 권력의 구심점이 될 것이니, 그 자리를 노리는 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었다.

‘하… 지금이라도 아픈 척을 할까.’

평소에 감기조차 걸리지 않았던 강골, 아스트리드.

자기가 깨어날 때, 그 때 딱 한 번 쓰러졌었다던 아스트리드.

지금 와서 아프다고 드러누우면 또 한바탕 뒤집어질 테고, 아카데미 입교도 취소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 또 제법 큰 소란이 일어날 것도 뻔했다.

“유모, 걱정하지 마. 나 그렇게 약한 사람 아니야. 자, 그만 울고. 짐은 내일 또 싸도 되니까 오늘은 이만하자, 응?”

“아휴… 아가씨, 예에… 예, 제가 추태를 보였네요. 아가씨가 먼 길을 가신다고 하니 제가 그만…”

“아냐, 아냐. 유모 걱정해주는 거 다 알지. 응, 다 알고말고. 그러니까 그만. 내일 하자. 알았지?”

“아휴…”

못내 마음을 놓지 못하는 유모를 밀어내다시피 방 밖으로 내몰고서 문을 닫은 후에야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서 테이블에 놓인 입교 안내서를 치우고, 그 아래에 있던 커리큘럼 안내서를 집어 들었다.

“…대대 종합 전술 훈련, 긴급출동 대비 훈련, 분대 단위 전투력 측정, 혹서기 대비 전투력 유지 훈련, 혹한기 대비 전투력 유지 훈련, 진지 모의 전투 훈련…”

하나같이 익숙한 단어들이다.

진짜 군대 두 번이네.

이것들을 또 하는 것도 모자라서 4년이라고?

4년 동안 이 짓을 하라고?

“…그냥 암컷하자. 그게 낫겠다.”

아스트리드의 얼굴에 절망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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