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6화 (6/62)

6화. 아스트리드는 어이가 없습니다

아스트리드는 원래 예비역이었다.

군대를 갔다 왔다는 말이다.

“이걸 또… 또 해야 하다니.”

혹서기 대비 전투력 유지 훈련, 혹한기 대비 전투력 유지 훈련… 이게 말은 그럴 듯한데 실제로는 그냥 유격이고 혹한기 훈련이 아닌가.

이걸 또 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스트리드는 정말 심각하게 그냥 다 포기하고 얌전히 황태자비로 살면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아냐, 아니지. 소설에서 보면… 한 번 박히면 맛이 가더라고…’

눈동자에 하트가 생겨나며 이제 돌아갈 수 없어 하던 그 묘사들을 보면… 역시 무섭다.

무리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

몸이 여자면 뭐하겠는가, 머릿속은 남자인 것을.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니, 엄두가 나고 안나고의 문제가 아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불가능이라고.

군대도 두번인데, 암타하면 애도 낳아야 하잖아.

미쳤냐고.

“나는 남자라고. 몸은 여자여도 남자라고. 남자란 말이지. 남자가 남자 밑에 깔린다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 그래… 간부로 하는 훈련은 또 다를 거니까. 괜찮겠지.”

생각해보면 훈련 때 힘들었던 건 자기가 병사였기 때문이 아닐까.

간부들은 항상 꿀 빨았었다.

‘어디 보자.’

입교 안내서를 보면, 입학과 동시에 견습 기사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졸업하면서 정식으로 기사 서임을 받는다…

아무튼 견습 기사라고는 해도 기사니까 일반 사병은 아님이 틀림없다.

‘간부로 시작이면 괜찮지 않을까.’

아스트리드의 하얀 손가락이 입교 안내서를 찬찬히 짚어가며 하나씩 하나씩 숙지하기 시작했다.

글자를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읽기, 말하기, 쓰기, 듣기에는 문제가 없었으니까.

“말뚝 박은 셈 치면 되겠지…?”

부사관 갔다고 생각하는 거야.

부사관도 병사 생활하다가 하사로 가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

이틀이 지났다.

이제 아카데미로 출발하기까지 단 이틀이 남은 날 이른 아침, 기수가 달려와 가주인 볼프강의 귀환을 알려왔다.

장장 닷새만의 귀환이라, 저택 내의 모든 인원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 나와 저택 정문을 사이에 두고 양 가장자리에 일렬로 도열하여, 가주의 귀환을 맞이했다.

“아버님, 다녀오셨습니까.”

그리고 그 가운데에 아스트리드가 붉은 드레스 차림으로 나와, 비어있는 대공가의 안주인 역할을 대신했다.

왼손으로는 가볍게 가슴께를 누르며 오른손으로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서 깊이 허리를 숙여,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 가주의 귀환을 환영했다.

“아… 가 아니구나. 허헛. 그래, 다녀왔다. 별일 없었느냐?”

“예. 별일 있을 게 있겠나요. 아무 일 없었고, 아카데미 갈 준비도 거의 다 끝났습니다.”

“그러하냐.”

볼프강의 입장에서야 아빠라고 불러주기를 바란 모양이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우묵한 눈빛이, 딸을 향한 애정을 가득 담고서 아스트리드를 향했다.

온몸에 피범벅이 되어있어도, 아스트리드를 바라보는 볼프강의 얼굴에는 딸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나왔다.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

부드럽고, 따스한 그 눈빛.

아스트리드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생각했다.

‘이쯤에서 서비스를 한번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버님, 잠시 귀를 이리로 낮춰주시겠습니까?”

“음? 귀는 왜 그러느냐?”

뒤쪽에서는 병사들이 이제 승전식이 있을 연병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고생한 이들이라 군장은 다른 사용인들이 받아서 대신 막사로 옮겨주고 있었고, 병사들은 비로소 홀가분한 몸과 마음으로 승전식을 할 연병장으로 걸어간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무슨 일이길래 그러느냐? 중요한 일이라면 따로…”

“아니, 괜찮으니까요. 잠시 귀를.”

아스트리드가 올려다봐야 할 만큼 커다란 키의 볼프강이, 허리를 숙여 아스트리드의 입 근처에 귀를 가까이했다.

이건, 잠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수고하셨어요, 아빠.”

으윽. 닭살이 송골송골 돋는 아스트리드와 달리 볼프강은 차마 티는 내지 못했지만,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것이 몹시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그래, 그러면 들어가 있거라. 날이 춥구나. 나도 곧 들어가마.”

“예.”

하지만 아스트리드는 바로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뭔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마치 연어가 가득 들어 있는 연어 바구니를 보는 곰과 같은 눈빛으로 아슈레이도 볼프강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누님, 저는 뭐 없습니까?”

덩치는 곰 같아서는, 이럴 때 보면 어린아이 같기도 하다.

“고생했어. 아슈레이.”

“…끝입니까?”

“끝이지, 뭐가 더 필요하니?”

“에이, 좀 다정하게 해주실 줄 알았는데.”

“기어오르지 말도록, 아슈레이.”

덩치에 안 맞게 입을 비죽이는 아슈레이.

“…고생했어, 내 동생.”

하지만 가까이 다가와 허리춤을 툭툭 두드려주는 아스트리드에게, 아슈레이도 그 큰 자상이 실룩일 정도로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누님, 추우니 어서 들어가십쇼.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입니다.”

“내가 어디 감기 따위 걸린 적이 있다디?”

‘더 큰 문제가 있었던 적은 있다만.’

차마 소리내어 말할 수는 없는 일이기는 하다.

*

“그래, 준비는 다 됐고?”

밀로 노릇노릇하게 구워낸 빵이 볼프강의 손아귀 속에서 찢어지며 뽀얀 김에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잘 부풀려 구운 덕분에 뽀얀 속살이 길게 찢어지고, 한 조각을 옥수수 수프에 푹 찍어 한입 베어 문 볼프강이 다른 손으로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쿡 찍어 먹었다.

양파를 푹 익히고 캐러멜과 함께 푹 졸여낸 갈색 소스가 듬뿍 끼얹어진, 기름진 육수가 뚝뚝 흐르는 스테이크를 씹으며 볼프강은 아스트리드를 향해 물었다.

“예. 유모가 잘 챙겨준 덕분에.”

나이프가 접시 긁는 소리가 나지 않게끔ㅡ 이 아니라, 나이프가 접시 채 식탁까지 잘라버리지 않게끔 힘 조절을 해가며 아스트리드가 스테이크를 썰었다.

소스 위에 후추를 아주 조금 뿌려서 그대로 한입.

“낼모레지요? 누님.”

아슈레이도 옆에서 한입 거들었다.

드레싱에 잘 비빈 샐러드를 한 움큼 집어서 아스트리드의 접시 위에 올려주고, 아스트리드가 썰어놓은 스테이크를 한 점 집어 자기 입에 욱여넣는 아슈레이.

“아슈레이, 샐러드도 먹어야 한다고 했지.”

“에이, 저 같은 사내놈은 샐러드 같은 거 먹으면 힘이 안 난단 말입니다.”

“너는 정말…”

‘나도 고기 좋아하는데.’

하지만 이 몸은 어찌 된 것인지 식사량도 적다.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른 탓에, 어차피 이 스테이크를 다 먹지도 못할 것이라 아스트리드는 썰어놓은 스테이크 중 두 조각을 덜어서 아슈레이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아버지도 같이 가마.”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생각을 하니 또다시 머리가 아프다.

그 연락이 온 게 어제였다.

이게 무슨 변덕인가 싶었는데, 차라리 전화나 메신저였다면 단박에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편지로 온 연락.

‘레오폴트 그 뺀질이 자식은 왜 또 안 하던 짓을…!’

황태자인 레오폴트가 친히 데리러 오겠다는 연락.

편지에 적힌 필체가 삐뚤빼뚤한 게, 분명 자기도 어지간히 오기 싫었던 게 분명했다.

수도에서 여기까지 일주일이 걸리니, 이 편지가 도착한 어제라면 이미 한창 오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마도 크로이츠가 시킨 것이리라.

분명히 거절하면 됐을 텐데, 하지만 시키는 사람이 황제여서는 거절할 수도 없었을 터다.

“레오폴트 전하가 마중을 온다고 하셔서.”

“그러냐?”

“예. 어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하면 이미 근처까지 다 왔겠군.”

“그렇겠지요.”

“한데 너는 왜 그리 표정이 좋지 않은 게냐? 이제 레오폴트와 사이도 좋지 않으냐?”

‘어딜 봐서요?!’

아카데미행을 선언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얌전히 입다물고 있었어도, 그리고 황태자의 아카데미행을 좀 더 확인했어도 없었을 일이다.

지금와서 후회한들 다 늦은 일이지만.

“그래도 네가 아카데미를 간다고 하니, 나는 마음이 놓이는구나. 너라면 분명 중장기사 서임은 따놓은 당상. 중장기사이기도 하니, 네가 이 가문을 물려받는 데에는 더없이 완벽한 조건이 아니냐. 이 아비는 안심이 되는구나. 게다가…”

냠, 옆에 있던 훈제 고기를 사이에 끼워넣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물고서는 맥주를 들이키는 볼프강.

“네가 레오폴트 녀석과 사이가 좋아지지 않는다면, 억지로 결혼을 시킬 수가 없지 않겠느냐.”

아스트리드는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아카데미행을 취소하자.’

간단한 해결책이 있었는데도 그걸 몰랐구나.

레오폴트가 싫다, 정말 싫다, 그 녀석과 부부가 된다니 내 인생을 지옥으로 몰아넣을 셈이냐ㅡ 라고 우긴다면 그 혼담이 없었던 일이 된다니, 간단한 해결책이 여기에 있었구나!

“대신 데릴사위를 찾아봐야 했겠지. 뭐, 거기 있는 아슈레이 녀석이라던가.”

아스트리드는 다시 생각했다.

‘아카데미 꼭 가자.’

미혼으로 대공이 되어 살아간다는 선택지는 아예 없었던 모양이다.

가만히 있으면 레오폴트, 파혼한다면 아슈레이.

둘 중 누가 낫냐고 묻는다면 차라리 혀깨물고 죽겠다 싶은 선택지를 앞에 두고, 아스트리드는 반드시 아카데미를 가서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야겠다고 재차 다짐했다.

4년.

4년의 시간이 남았다.

그 안에,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암타란 없다. 절대로. 내 인생은 노맨스다. 정신차려, 아스트리드…!'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심봉사님 후원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늘도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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