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스트리드는 입성합니다
충성에는 한도가 있다.
국가는 곧 군주이고, 그 군주가 군인이었기에 기사들에게서 나오는 충성심도 드높았으나 그 충성심에도 한도가 있다.
그리고 그 충성심의 한도는,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또 달라지는 법이다.
명예에 살고 충성에 죽는 기사들은 군사제국 아인트하펜을 받드는 대들보와도 같은 존재라, 일찍부터 레오폴트는 군주로서 기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것들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하지만 직접 전장을 달리며 전투를 겪고 생사의 고비를 넘어온 피로 맺어진 혈맹과도 같은 이들은 크로이츠와 볼프강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하나둘씩 은퇴하고, 지금 로얄 가드와 실버 가드, 코퍼 가드와 브론즈 가드들은 전부 선배들의 무용담을 들으며 자라온 신진세력이었다.
즉 레오폴트는 그들에게 있어서, 선배들과 같은 끈끈한 유대 관계가 없었다.
그런 밑바탕이 없는 충성심은 그 한도가 그리 높지 않아서 크로이츠는 그것이 늘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까지의 이야기.
밤이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이 밤은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이라 하더라도 공평하게 찾아오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내정의 끝에 아인트하펜의 황제, 크로이츠는 마침내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침소로 들었다.
가운을 벗어 시녀에게 건네고서 잠옷으로 갈아입은 황제가 시녀들을 모두 물리고 침대로 다가서자, 침대 옆에 놓여있던 수정구가 푸른빛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 황제 폐하께 피로 맺은 충성을.
수정구 건너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직하지만 침착하고, 무뚝뚝한가 싶으면 절도 있는 군인의 목소리.
“그래, 나다. 보고하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수정구를 향해 지시한 크로이츠가 침대에 걸터앉자, 오늘 아침 볼프강의 미테리엔 영지에서 출발할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시간대별로 정리되어 수정구 속 여자의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허어.”
점심시간, 아스트리드가 호위부대에게 다가가 자기 음식을 나눠주었던 일.
그리고 그런 아스트리드의 행동을 기꺼이 받아들여 황족의 식료를 나누어 기사들과 부대끼며 함께 식사한 레오폴트.
누가 봐도 바람직한 황태자 내외.
두 사람의 행적이 낱낱이 크로이츠에게 보고되고, 크로이츠가 손을 들어 턱수염을 매만졌다.
만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연못에 던져진 돌이 그려낸 동심원처럼 작게 떠오른 미소가 조금씩 커지다가 마침내 커다란 웃음이 되어 크로이츠가 파안대소했다.
연신 무릎을 탁탁 두드리며 환희하던 크로이츠가 간신히 웃음을 멈춘 것은 한참이나 뒤.
“그래, 그래. 그렇지. 그렇고말고. 볼프강 그 친구가 딸 하나는 기가 막히게 키워냈어. 설원의 표범이라더니 과연 그러하군. 만민의 어미가 될 여자답구나. 레오폴트, 네놈의 복이다. 네놈의 복이야. 제국의 황후로 부족함이 없구나!”
만족스러웠다.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이 대륙의 북방을 지키는 얼어붙은 방패, 미테리엔 가문의 영애다웠다.
적에게는 이빨을 드러내는 여자.
자식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여자.
설원의 표범ㅡ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레오폴트, 참으로 복 받은 녀석이로다. 좋구나, 아주 좋아. 내가 며느리 복은 있어.”
그 뒤로도 한참동안이나 황제의 침실에서는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
우겨서 될 게 있고 우겨도 안 될 일이 있는데, 지금 아스트리드가 처한 상황이 그랬다.
“아무리 봐도 전하께서 여기서 주무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만.”
“나를 웃음거리로 만들 셈인가,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만. 대검을 쓰는 이답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지 그러나?”
‘삐졌군.’
세검보다 넓다고 해줬는데 왜 저러는 거야.
아스트리드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려다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확실히, 레오폴트가 마차 안에서 자게 하고 아스트리드가 밖에서 숙영을 한다면 모양새가 썩 좋지는 않을 터였다.
이쯤에서 양보를 하는 게 나으리라.
아스트리드의 입장에서야 남자에게 배려받는다는 게, 게다가 그 대상이 레오폴트여서야 정말 싫은 일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상대방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하, 부디 평온한 밤 되시기를.”
보라색의 이브닝드레스로 갈아입은 아스트리드가 살짝 허리를 숙여 레오폴트에게 인사를 올렸다.
세안 후 취침을 위해 머리를 푼 채라, 숙인 고개 덕분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비단결처럼 그녀의 가냘픈 목선을 따라 흘러내려 새하얀 목덜미를 드러냈다.
“펴, 편안한 밤 되길 바라지.”
어쩐 일이래.
황급히 마차에서 나가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아스트리드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장난스레 한 제안이었다.
어차피 식사도 이제 같은 자리에서 하게 되었고, 이제부터 가게 될 아카데미도 말이 아카데미지 실제로는 군사학교이니 기왕 이리된 거, 기사들과 같이 숙영을 하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아스트리드의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걸 흔쾌히 받아들인 레오폴트… 였지만 가드들이 전원 아스트리드의 숙영만은 안된다고 한사코 반대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아스트리드는 황실 마차에서 자고 레오폴트가 숙영을 하게 되었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본의 아니게 레오폴트를 고생길로 밀어 넣어버렸다.
고생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랐을, 온실 속의 화초 그 자체일 레오폴트가 과연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을지ㅡ
아스트리드는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걸 그대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지.’
정말로 그랬다.
*
“괜찮다니까.”
“어디 좀 보여주세요.”
역시나 다음 날 아침.
마차 안에서는 레오폴트가 허리 통증을 호소하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아스트리드가 보기에는 전혀 괜찮지가 않았다.
“그러게 제가 밖에서 잔다니까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세요.”
“나도 남잔데, 어떻게 여자를 밖에서 재우나. 그랬다가 아버님께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네요.”
여자 대우받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스트리드 입장에서는, 말투야 어떻게든 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이런 이상한 배려 따위는 받고 싶지 않았었다.
육군 예비역이, 숙영을 못 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기도 하고.
“제가 여자로 보이긴 하시나 봐요.”
그 말에 레오폴트가 도끼눈을 뜨고서 아스트리드를 노려보았다.
“그럼 네가 여자지, 남잔가?”
“그런가요? 하도 막 대하시길래.”
“그거야 네가ㅡ”
거기서 레오폴트의 말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잠시간 기다려봐도 레오폴트의 말이 이어질 생각을 하지 않아, 아스트리드가 제가 뭐요, 라고 되물으려던 차에 레오폴트가 한숨을 쉬었다.
“…말은 정말 잘하는군. 한마디도 지질 않아.”
“말도 잘한다고 해주세요.”
“끄응…”
숙영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황궁에서 편안하게 자라온 레오폴트에게 단 하루의 숙영은 정말 힘든 고난이긴 했을 터.
“아카데미 가면 이보다 더한 훈련도 많을 텐데.”
“아스트리드, 너는 겁나지도 않나? 남자도 해내기 힘든 훈련이 그렇게 많다는데.”
“왜요, 설마 전하, 쫄으셨나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아차.’
무의식중에 원래 세계의 언어가 튀어나와 버렸다.
그게 레오폴트의 귀에는 어떻게 들렸을지는 몰라도, 아무튼 지금 여기서는 사용되지 않는 말이니ㅡ
“북방 야만족의 사투리에요.”
“나쁜 뜻이겠군.”
“맞추셨네요. 축하드립니다.”
레오폴트의 노려보는 시선을 외면하며, 아스트리드는 딴청을 피웠다.
*
일주일의 여정이었다.
그 사이 레오폴트는 제법 숙영에도 적응을 해서, 마지막 날 밤에는 근무도 함께 섰다고 들었다.
“이만하면 제법 군인이군.”
하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레오폴트를 보며 아스트리드가 풉, 하고 웃는 바람에 다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제법 무탈하고도 평온한 여정이었다.
“전하, 성벽이 보이고 있습니다.”
아인트하펜의 수도, 페르상트.
군사제국 아인트하펜 답게 페르상트로 들어가는 관문에는 전부 높다랗게 성벽이 둘러져 있었는데, 멀리서 오다가도 이제 그 성벽이 보이면 페르상트에 다 와 간다는 의미로 “페르상트 환영의 벽”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바로 그 성벽.
“환영의 벽이 보이는 걸 보니… 아이고, 드디어 다왔네.”
으드드, 하고 레오폴트가 기지개를 크게 켜자 우두둑하고 뼈마디 맞춰지는 소리가 났다.
“어으, 개운하다.”
영감님 같은 소리를 내는 레오폴트 옆에서 아스트리드는 목을 길게 빼고 환영의 벽을 올려다보았다.
높다.
높고, 크고ㅡ 거대하다.
이렇게 멀리서 봐도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차곡차곡 쌓아, 하늘이라도 찌를 기세로 높게 솟아오른 성벽.
실로 대단한 기세였다.
마차가 움직일수록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환영의 벽은 그 위용을 더욱더 강하게 뽐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 앞에, 성문 앞에 길게 늘어선 마차 행렬.
그 마차가 마치 성냥갑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성벽.
“전하, 이대로 바로 입궁하겠습니다.”
“그리하지.”
황실의 마차인 만큼 성벽을 통과하기 위해 기다릴 필요가 없다.
마차는 다른 일반 마차들이 늘어서 있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빠져나가 성벽 검문소가 아닌 황실 검문소로 향했다.
'근데, 왜 내 의사는 안물어보는 걸까.'
황궁으로 동행하겠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심지어 물어보지도 않고.
물론 안가겠다는 건 아니지만 아스트리드는 내심 짜증이 났다.
순 지맘대로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