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스트리드는 제1분대 분대장입니다
“아스트리드 생도, 잘 부탁해요~!”
낭창낭창.
아스트리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뜬금없이 낭창낭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단어조차도 아니고 그냥 의성어, 아니 의태어인가. 그런 표현일 뿐인데 어쩐지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표현이 떠올랐다.
억양이 특이했다.
폭포수처럼 뻗어내린 녹색의 머리카락만큼이나 특이했다.
얼굴도 미인에, 키도 크고, 가슴도 크다.
아마 아스트리드가 남자였다면, 우연히 손이라도 스쳤다면 이미 자식 계획에 손자까지 상상하고 있었겠지만 차마 말을 걸어 볼 엄두조차 못 낼 그런 미인이다.
“같은 방을 쓰게 됐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아스트리드 생도. 아니, 분대장님?”
“자, 잘 부탁합니다.”
인사성도 밝고, 싹싹하게 말을 붙이는 저 친화력을 봐서는 분명 좋은 인상을 받아야 할 텐데 아스트리드의 직감은, 이 엘프는 절대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며 분명 폐급이라는 경종을 울려대고 있었다.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편하게 아스트리드라고 불러주세요.”
“그래요~ 아까 소개도 했지만, 저는 에라냐에요. 성은… 음, 없고요. 보시다시피, 엘프. 궁술과 단검술은 제가 좀 한답니다?”
아예 묶지도 않고 풀어헤쳐진 저 녹색 머리카락이, 아스트리드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뭐라 딱 꼬집어서 말하기는 애매했지만 그게 그런 느낌이 든다.
강당에서 분대 배정이 끝나고 번호까지 부여받은 제1분대 아스트리드 분대.
그 뒤로도 차곡차곡 분대 번호를 부여받고서 남은 것은 이제 숙소 배정이었다.
설마하니 여기까지 손을 썼을까, 손을 썼다면 레오폴트와 한방에서 지내야 하는 대참사가 벌어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게 그렇지는 않았다.
다들 모여 교회에서 지내는 베라시엔을 제외하고는 우연찮게 성비가 딱 맞았고, 그걸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레오폴트와 아스테인이 같은 방, 아스트리드와 에라냐가 같은 방. 이렇게 배정이 되었다.
“그래도 생각보다는 시설이 괜찮은 거 같아서 다행이기는 하네요~”
에라냐가 방안을 휘 둘러보면서 중얼거렸다.
아스트리드가 보기에는 제법 살풍경한 방인데, 에라냐가 보기에는 또 그렇지도 않은 모양.
황제인 크로이츠가 돈을 내서 지은 곳이라더니 이상한 곳에서 절감을 한 건지 내부는 온통 회색으로 칠해져 있고, 각자 개인용 책상과 침대, 그리고 수납장. 그게 전부다.
그리고 구석에 마련된 샤워실. 다행히 화장실이 방 안에 있는 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기는 하다.
“그래도 제가 지내던 엘프 마을보다는 훨씬 나아요.”
에라냐가 침대에 턱 걸터앉자 퍼석 소리가 났다.
안에 짚단을 넣어서 만든 매트리스인 모양이라, 아스트리드는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짚 매트리스.
저기서 어떻게 자나.
눕자마자 지푸라기가 온통 온몸을 찔러댈 텐데 불편해서… 아휴.
‘…아니 뭔, 내가 언제부터 그런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반년에 불과하지만 미테리엔 저택에 있는 솜 매트리스에 벌써 익숙해진 모양이라 혼자 생각하고도 혼자 깜짝 놀란다.
온통 신기한 것투성이라는 듯 방안을 둘러보는 에라냐.
그래도 1년간은 같은 방에서 생활을 해야 할 텐데, 그래도 좀 친해져 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스트리드는 머리를 굴려 뭔가 화젯거리가 없나 생각하다가 문득 하나 생각이 떠올랐다.
“에라냐… 가 살던 엘프 마을에는 진짜 세계수가 있어요?”
…물어도 뭐 이딴 걸 묻는 거지?
장고 끝에 악수 둔다더니 이게 딱 그 짝이네.
아스트리드가 자책하는 동안 에라냐가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짓더니 양손을 부여잡고서는ㅡ
“그럼요~ 세계수 있죠~ 어어어엄청 큰 세계수가 있어요! …뭐 이제 저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긴 한데.”
“상관이 없어요? 왜요?”
‘엘프가 세계수랑 상관이 없다니. 그건 또 신기하네.’
“제가 엘프 마을을 떠날 때 서명을 하고 나왔거든요. 그 서명을 안 하면 엘프 마을을 떠날 수가 없어서.”
“무슨 서명인데요?”
뭔가, 이 마을을 떠나는 순간 나는 이 엘프 마을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무슨 해코지를 당해도 엘프 마을에 도와달라 하거나 돌아오지 않겠다, 뭐 그런 서명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지만 설마 그게 진짜일까.
“뭐… 이제는 세계수의 보호에서 벗어나 험한 세상으로 나아가도, 세계수의 보호를 받지 못함을 인지하였고… 세계수의 가호를 받지 못함을 인지하였으며, 그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마을 떠나겠다.”
“…네?”
서명을 해도 뭔.
“뭐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요약하자면 세계수는 그냥 큰 나무다, 라는 거.”
그렇게까지 해서 마을을 떠나서 온 게 이 아카데미라는 게, 아스트리드로서는 딱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소 당황한 것 같은 아스트리드를 보면서 에라냐는 작게 미소짓고 있었다.
*
레오폴트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다소 못마땅한 눈빛으로 아스테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엉덩이를 쿡쿡 찔러대고 있는 매트리스 안의 쭉정이들이 여간 짜증 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아스테인은 그 자체로도 신경 쓰이게 하는 존재였다.
“저… 레오폴트 생도? 제 얼굴에 뭔가 묻었습니까?”
등에 짊어지고 있던 나무로 된 스태프를 책상 한 쪽에 기대놓으며 아스테인은 레오폴트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레오폴트 폰 아인트하펜이다. 레오폴트라고 하라.”
“하라?”
“…해라.”
말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황태자 신분이기는 하지만 이 아카데미에서는 그런 대우가 없다.
생도는 모두 평등하며 귀족이고 평민이고 능력 되는 이들이 입학하는 곳인 만큼 특별대우란 없다.
“그렇군요, 레오폴트 생도. 저는 아스테인입니다. 평민이라서 성은 없지만요. 하하.”
그런 것도 딱히 상관없었다.
레오폴트도 그런 권위주의에는 그리 관심이 없다.
“한데… 아스테인 생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레오폴트는 이 질문이, 과연 아스테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었지만 이대로 있기에는 너무 답답하다.
“네에?”
보급품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슬슬 짐을 풀 준비를 하던 아스테인이 레오폴트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마저도 신경 쓰인다.
레오폴트가 잠시의 고민 끝에 마침내ㅡ
“네 눈, 그건 대체 뜬 건가, 감은 건가? 앞이 보이기는 하는 건가?”
레오폴트는 그게 너무 궁금했다.
눈자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냥 보기에는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인데 과연 앞이 보이기는 하는 걸까.
그 질문에 아스테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간다.
“기,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하다. 사과하지. 하지만 정말 궁금했…”
“그게 궁금하셨군요.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눈이 이렇긴 합니다만 잘 보인답니다.”
급히 사과하던 레오폴트의 말이, 아스테인에 의해 끊어졌다.
그 얼굴은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레오폴트는 안도하는 한편으로 정말 앞이 보인단 말인가ㅡ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레오폴트 생도의,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 머리도. 그리고 약혼녀인 아스트리드 생도의 북부 설원의 새하얀 눈처럼 아름다운 은발도. 아주 잘 보인답니다.”
“그, 그러냐.”
보이긴 하는구나.
그때, 방문 바깥에서 건물을 뒤흔들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성량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전 생도, 지금 즉시 방문 앞으로 나와서 정렬한다! 지금 즉시! 정렬!」
오만상을 찌푸리고서 귀를 틀어막고 있던 레오폴트와 아스테인.
외침이 끝나자마자 다른 방에서도 약간의 소란이 이는 소리가 들려, 레오폴트와 아스테인도 잽싸게 방문을 열고 나가 앞에 섰다.
“…느리시군요, 레오폴트 생도. 겨우 방문 앞으로 나오시는 것조차.”
“네가 쓸데없이 빠른 것이다, 아스트리드.”
바로 맞은편 방.
같은 분대라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의도가 뻔히 보이는, 누가 그랬을지조차 뻔히 보이는 배치.
레오폴트와 아스테인이 쓰는 방과 아스트리드와 에라냐가 쓰는 방은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어느새 편한 활동복으로 갈아입은 아스트리드와 에라냐가 먼저 방문 앞에 나와 서 있다가, 뒤늦게 나온 데다 아직 갈아입지도 못한 레오폴트와 아스테인을 보며 한껏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전원ㅡ! 다 나왔나ㅡ! 각자 맞은편 방의 인원을 확인하고 나오지 않은 방은 보고한다!」
외침이 들려올 때마다 숙소 복도의 창문이 떨리는 것만 같았다.
「1분대 분대장,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
“네, 녜헥?!”
갑작스럽게 이름이 불려 당황한 아스트리드가 엉겁결에 대답하다가 목소리가 어긋났다. 그 덕분에 풉, 하고 레오폴트가 한껏 억누른 웃음소리가 나고, 아스트리드의 새하얀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오르던 그즈음이었다.
「신입 생도 전원 다 나왔는지 확인하고 보고한다!」
목소리의 진원지는 복도 가장 끄트머리.
복도 중간쯤에 자리 잡은 방인 아스트리드가 목을 길게 빼고 좌우를 훑어봐도 아무도 없거나 한 명만 서 있는 방은 보이지 않았다.
“전원 다 나온 것 같습니다!”
「다 나온 건가, 다 나온 것 같은 건가! 똑바로 대답한다!」
“다 나왔습니다아아아악!”
「좋다! 이제부터 저녁 식사를 하러 간다! 전원, 연병장으로 이동!」
아스트리드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 모습에 레오폴트는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웃지 않습니다, 레오폴트 생도. 분대장 망신당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싸늘한 아스트리드의 목소리에도, 레오폴트는 싱글싱글 웃고만 있었다.
“엄청 재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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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는 그냥 큰 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