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아스트리드는 짜증이 납니다
한 번 굳어버린 빵은 데운다고 해도 다시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부드러운 밀가루로 만든 빵도 그런데, 하물며 이렇게 호밀을 대충 갈아서 알갱이가 곱지 않은 상태에서 구워낸 빵은 더더욱 심하다.
“시큼하군…”
“음식 투정은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레오폴트 생도.”
“너는 잘도 먹는군, 아스트리드 생도.”
“분대원끼리는 상호 존중입니다.”
식판 한칸에 부어진 뭔지 모를 허여멀건 죽과 딱딱한 호밀빵 두 개.
거기에 잼인 줄 알았더니 먹어보니 갈아낸 순무.
그걸 가지고도 아스트리드는 비교적 잘 먹고 있었다.
“저도 괜찮은 것 같은데요? 봐요, 고기도 들어있다고요?”
에라냐가 보여주는 죽을 떠서 보여주자, 아주 조그만 고기 조각과도 같은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이게 무슨… 아카데미 입교하고 첫 식사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는데…”
입교 후 첫 식사이지만 식사는 정말 볼품없었다.
식당으로 들어갈 때 조교들이, 입교 후 일주일간은 야전을 가정한 식단이라고 말했었는데 그 때는 레오폴트도 이런 것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레오폴트 생도, 아버님들께서 전쟁중에 이런 식사를 하셨다는 걸 감안한 식사입니다. 아버님들이 하셨는데 저희가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됩니다.”
“오오, 역시 분대장님. 대단한 설득력이시네요.”
아스테인이 죽을 먹다말고 숟가락을 놓고서 아주 작게 손뼉을 쳤다.
그 모습을, 아스트리드가 잠시 노려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스테인 생도, 사람을 비꼬는 건 매우 나쁜 습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저는 진심으로 감탄해서 그런 거라…”
“…믿어보겠습니다. 다른 의도가 다분히 있어보이지만요.”
그도 그럴 게 아스테인이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도 자세히 안보면 모를 정도로 실눈이었다. 그런 얼굴로 미소를 짓는다고 해도 아스트리드에게 있어서는 딱히 와닿지는 않았다.
“그러고보니 베라시엔 생도는 저희랑 같이 안먹나요?”
“신성학 전공자들은 이번주까지는 따로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 무슨… 기도 주간인가 뭔가 그거라고 해서.”
5명씩 총 50개 분대니까 총원이 250명. 여기서 신성학 전공자들을 빼면 200명.
1학년 식당인데도 크기가 상당해서 이 인원들이 모두 한번에 들어가서 먹는데도 붐빈다는 느낌은 별로 없다.
“식사 후의 일정은 딱히 전달 받은 게 없나?”
“레오폴트 생도, 생도 간에는 상호 존대를 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아스트리드의 말에 레오폴트가 얼굴을 찌푸렸다.
다른 상대라면야 존댓말을 함에 딱히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상대가 아스트리드. 지금까지 20년 평생 살아오면서 아스트리드에게 존대를 한 적이 없다.
“식사 이후에 일정은 따로 전달받은 게 없나? 요.”
“그게 존대입니까?”
“존대이긴 하잖나… 요.”
“…없습니다. 곧 전달 받겠지요. 레오폴트 생도, 저희 때문에 에라냐 생도와 아스테인 생도가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어서 식사 하시지요.”
‘아니 무슨 갓 사춘기 지나는 애새끼도 아니고. 주변에 오냐오냐 하는 어른들만 있으니 애가 이따위로 자라지. 어휴…’
페르상트로 향하는 여정에서 잠시 좋은 모습 보여줘서 제법인가 생각했는데 그도 아니라며 아스트리드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입교 첫날이라 그런지 식사 후에는 딱히 통제가 없었다.
50명의 분대장을 따로 불러내서 내일부터 시작될 기본 교육 시간표를 나눠주고, 매일 아침 저녁 점호라던가 자유시간 등에 대한 설명만이 이어졌다.
“아침 6시 기상, 6시 30분에 일조 점호, 7시 30분까지 분대 단위로 아침 식사, 그리고 9시부터 교육 시작. 오후 12시 30분부터 한시간 동안 점심 식사, 4시 30분이 되면 교육 종료, 휴식 및 자유 시간, 7시부터 분대 단위로 저녁 식사. 그 뒤는 자유시간…”
‘우와. 군대보다 훨씬 좋네.’
두 명이서 쓰기에 딱 적합한 크기의 방인데, 분대원 넷이 한번에 들어와있으니 좁다. 어쩔 수 없이 아스트리드는 책상 앞에 선 채 다른 분대원들을 앉히고 설명에 앞서 본인이 먼저 일과표를 읽어보았다.
나쁘지 않은 시간표다.
일단 자유시간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교육을 끝내고 나면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외출도 가능하고.
“ㅡ시간표는 대충 이렇네요. 그리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각자 전공에 따른 교육을 받다가 오후에 교육 종료 하기 전에는 분대 단위 전투에 대한 교육도 있다고 하니까요. 전공 교육장은 각자 알아서 잘 챙겨보시고요.”
전공에 대한 가이드는 이미 개개인에게 분배가 되어있으니 아스트리드가 딱히 필요가 없다.
“…뭐하세요? 남자분들은 방으로 돌아가세요. 이걸로 끝이에요.”
“끝이라고?...요?”
레오폴트의 말에 아스트리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더 뭐 할 말이 없다. 시간표도 알려줬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줬다.
이제 오늘 할 일은 끝났다.
*
“왜 교육장까지 같은 거냐.”
생도끼리는 상호 존대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왔지만 아스트리드는 꾹 눌러 참았다.
그래, 이 놈은 황태자니까. 게다가 내가 아스트리드니까. 아스트리드에게 존댓말을 쓴다는 건 그 드높고도 고결하실 자존심에 큰 상처가 남으시겠거니. 지금은 둘만 걸어가고 있으니까 내가 참는다ㅡ 라고 속으로 수 차례 중얼거리며 아스트리드는 꾹 눌러 참았다.
“제가 할 말을 대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쯧.”
아침 식사 후 숙소로 잠시 돌아왔다가 본격적인 교육을 위하 교육장으로 이동하는데, 마도기사와 중장기사의 교육장이 하필 같은 건물이었다.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애초에 뿌리가 같은 기사 계열이고 중간에 분류가 나뉘는 것 뿐이니까 1학년은 굳이 나눌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기사학 교육에는 중장기사와 마도기사가 같은 교육장.
마법학 교육에는 마도기사와 마법사가 같은 교육장.
궁수와 합을 맞추는 섬멸전 교육에는 중장기사와 궁수가 같은 교육장.
이런 식으로 둘씩 엮어서 같은 교육장에서 수업이 있었다.
그 첫 시간으로 기사학 교육.
교육장 입구에는 무기고가 이미 개방되어 있고, 이름표가 붙은 목검들이 주르륵 줄지어 격납되어 있었다.
그 중 유별나게 사이즈가 큰 대검이 단 하나.
바로 아스트리드의 무기였다.
“네 키만큼이나 멀대같은 무기로군. 둔하기 그지없어.”
“그렇군요. 한번 맞아보시면 둔한지 아닌지 아실텐데.”
아스트리드는 불안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겉모습만 아스트리드라는 게 티가 날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의 불안함과는 별개로, 교육장 안에는 이미 백 명 가까운 생도들이 모여 앉아 저마다 뭔가 소근소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으로 아스트리드와 레오폴트가 들어서자,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아무리 평등하다고는 하더라도 성씨가 가지는 위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 미테리엔 가의 영애인 아스트리드와 황태자인 레오폴트의 등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좌중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게다가 제 키만한 대검을 장비하고 있는데다, 그 대검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차가운 냉기가 풀풀 흘러넘치는 아스트리드는 가만히 있어도 상대방을 압박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앉죠.”
수업은 눈에 띄면 딱히 좋을 게 없다.
하물며 여기는 군대니까, 그냥 중간만 하는 게 제일 좋다.
그 지고불변의 진리를 아스트리드는 너무나도, 여기 있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어서 앞에 앉는다거나 하지 않고 중간에 앉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의 옆자리에 앉으려던 그 때였다.
“레오폴트 생도, 괜찮으시다면 이리로 오시지 않으시겠어요?”
나긋나긋하고 조용한, 분위기 있는 목소리.
“오… 유레이드 영애… 아니, 아케밀라 생도. 그쪽도 입교하셨었군. …요.”
그 말에 아스트리드도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반짝이는 레오폴트의 금발과는 달리 벌꿀처럼 은은한 금발.
온화함이 가득한, 자애롭기 그지없는 미소.
풍만함을 가득 드러내는 몸매까지.
허리 양쪽에 검을 하나씩, 쌍검을 찬 영애가 바로 뒤쪽 책상에 앉으며 레오폴트를 향해 꾸벅 목례를 하고 있었다.
“아케밀라…”
아케밀라 유레이드.
태생부터 귀족은 아니지만 먼 황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유레이드 가문의 장녀.
귀족은 아닐지라도 서부에 근거지를 둔 초대형 상단의 상단주인 유레이드 가문은, 크로이츠가 통일 전쟁을 하던 당시 절대적인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그 덕분에 딱히 귀족 집안은 아닐지라도 대우 자체는 개국 공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잘됐군요. 저도 마음 편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시지요, 레오폴트 생도.”
방긋 미소 지으며 말하는 아스트리드에게, 레오폴트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케밀라의 옆 자리로 가 앉았다.
“잘 부탁드려요, 레오폴트 생도.”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뒤쪽에서 오고가는 인삿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아스트리드는 들고 있던 대검을 책상 옆에 세워두었다.
“자, 다들 왔나? 첫 수업부터 늦는 멍청한 새끼들은 없으리라 믿는다.”
아빠인 볼프강보다, 어쩌면 동생인 아슈레이보다 덩치가 더 클 것 같은 근육질의 거한이었다.
수업 시작 종이 울린 직후, 교육장 문을 부숴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들어온 남자는 교탁 위에 오르자마자 사나운 언행을 조금도 숨길 기색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올 1년, 너희 마도기사와 중장기사들의 검술을 가르칠 바리안트다. 중장기사 출신이지. 그래도 세검이나 일반검이나 내게는 모두 문제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래, 마도기사고 중장기사고 처음에는 무조건 검술부터 시작이지. 한손검이건 양손검이건 해머건 뭐건, 너네들 가문에서 제법 익히고 왔으리라 믿는다. 그러면 일단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봐야겠지?”
‘…설마 이거 대련인가?’
“그래, 대련부터 한번 보자. 그나마 실력이 나아보이는 놈들이…’
왜 항상 짜증나는 예상은 어긋나질 않는 걸까.
“그래, 너. 대검 쓰는 여자. 이름이 뭐냐.”
주위를 둘러보면 여자도 많고 대검 쓰는 이도 좀 있지만, 여자이면서도 대검 쓰는 이는 없다.
즉, 아스트리드 혼자다.
‘중간만 가자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군.’
“아스트리드 폰…”
“아아, 가문명은 대지 않아도 좋다. 가문명이 칼 막아주진 않거든. 아스트리드 생도, 나와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좀 틀린 거 같은데.’
어쨌든 호명이 되었으니까.
아스트리드는 천천히 일어서서 대검을 집어들고 걸음을 옮겼다.
아직 제복 치마 길이가 익숙하지 않아서 조금 어색한 느낌.
“좋다, 아스트리드 생도. 여자 생도 치고는 드물게 대검을 쓰는군.”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카데미이니, 교관이 생도를 아는 체 해서 좋을 일이 없다.
“오늘은 특별히, 내가 상대해주도록 하마.”
…아니, 분명 알아봤지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일개 교관이 생도에게 저토록 호승심 넘치는 눈빛을 보낼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내일부터는 저녁 7시에 한편씩 올리겠습니다...
왜냐면 중간고사라...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