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15화 (15/62)

15화. 아스트리드는 놀림을 받습니다.

“힉.”

“하지 마세요.”

“힉.”

“하지 마시라고 했습니다.”

“힉.”

“하지 마시라니까요.”

“힉.”

식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등에 대검을 짊어지고서 걷는 아스트리드와 그 곁에서 함께 걸으면서 힉, 힉, 힉. 하고 희한한 소리를 내고 있는 레오폴트.

“레오폴트 생도, 체통을 좀 지키십시오.”

마침내 짜증이 난다.

그 얼음 같던 표정에 은은하게 분노한 기색이 어리고, 아스트리드가 레오폴트를 노려보는 눈에 짜증이 어리기 시작하자 레오폴트는 피시식 웃어버렸다.

“아니, 그래도 말이야. 그 얼음 조각 같던 네가 힉, 하고 귀여운 소리를 냈잖나. 내 지금까지의 평생에서 네가 그런 소리를 내는 건 처음 들었단 말이지.”

“저도 사람입니다. 놀랄 수도 있는 겁니다. 아시겠나요?”

슬슬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며 아스트리드는 심호흡을 했다.

심호흡을 하면서, 옆에서 깐족거리는 레오폴트를 한 대 후려치고 싶다는 욕망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치면 안 된다.

치면 죽는다.

아까 교관과의 시합에서도 봤듯이 아스트리드의 힘은 이미 인간을 벗어나 있다.

이 힘으로 레오폴트를 후려치면… 반역이다, 반역.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아스트리드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힉.”

“…그만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래. 그만하지.”

어흠,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와 나란히 걸었다.

“그래도,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이제 떨지 않는군.”

‘…!’

과연 그 말대로다.

아스트리드의 손끝은 이제 떨리지 않고 있었다.

식당 앞은 이미 분대별로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4주간 진행되는 입교 적응 기간에는 식사도 분대끼리 하라는 지시가 있어서, 수업이 빨리 끝났다고 하더라도 먼저 먹고 먼저 쉰다는 게 안된다.

‘무슨 신교대냐.’

끝없이 몰려오는 데자뷰에 아스트리드는 못내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규정은 규정이고 지키라고 있는 거니까.

“아스트리드 생도.”

“…?”

레오폴트와 함께 식단표를 올려다보고 있던 아스트리드를 누군가가 부르던 건 그즈음이었다.

돌아보면 화사한 벌꿀색의 금발의 소녀가 아스트리드를 보며 화사하고 온화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다.

“아케밀라에요. 아케밀라 유레이드. 귀족은 아니니까 편하게 대하셔도 괜찮아요.”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수업 시간에 레오폴트를 불러냈던 그 아가씨다.

묘하게 낯이 익다 했더니 바로 그 아가씨.

“레오폴트 생도, 아케밀라 생도가…”

레오폴트를 찾아왔겠거니 싶었다.

막을 생각은 전혀 없다.

보아하니 제법 예쁘기도 하고, 여기에 와있을 정도면 능력도 있을 테고, 평민이라는 게 단점이기는 해도ㅡ

“아케밀라 생도가?”

옆에 서 있던 레오폴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아케밀라와 아스트리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케밀라 생도,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이럴 때는 존댓말 잘도 하네. 나한테는 반말 말곤 하지도 못하더니.”

이상한 데서 화가 나는 아스트리드는 어찌 되었건, 아케밀라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레오폴트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 저는 지금 아스트리드 생도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요.”

“저 말씀이신가요?”

레오폴트가 아니라, 아스트리드.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는 아스트리드를, 아케밀라는 빤히 바라보다 방긋 미소를 지었다.

“네. 이따 점심 식사 후에,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점심 식사 후에요?”

식사 후에 쉬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애초에 점심시간이라고 해도 한 시간 밖에 안된다. 그 소중한 휴식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곤란하시면 일과 후 자유시간에, 어떠세요?”

눈치가 빠르다.

자유시간이라면 거리낄 건 없었다.

“네, 최대한 자세하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레오폴트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가장 가까운 아스트리드에게 레오폴트에 대한 것들을 물어보려는 것이 아닐까 지레짐작한 아스트리드의 말에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요, 그러면 저녁 식사 후에 제가 찾아뵙도록 할게요.”

“네, 알겠어요.”

“앗, 분대장님. 여기 계셨네요.”

아케밀라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서기가 무섭게 누군가가 뒤에서 아스트리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돌아보면, 녹색의 머리카락이 인상적인ㅡ 그리고 그 머리카락 사이로 툭 튀어나온 길다린 귀가 더욱더 인상적인, 엘프 에라냐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저희,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뭐예요.”

가리키는 곳은 아스트리드와 레오폴트가 왔던 곳의 정반대 방향.

한마디로 그냥, 길이 엇갈렸다.

“분대장님, 오늘 오전에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대단하셨지요?”

실눈이, 여전히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등 뒤에 메고 있는 물음표 모양의 나무 지팡이가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아뇨, 별일 아닙니다. 그럼 어서 들어가죠. 휴식 시간이 점점 줄어듭니다.”

한 시간 겨우 있는 점심시간.

이제 시간도 점점 지나가고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 것이 좋으리라.

*

“그래가지고 이렇게, 도끼 머리를 팡! 날려버리는데 말이지.”

식사하는 것도 조용하지가 못했다.

아스트리드의 얼굴도 어느 정도 붉게 물들어있는데, 레오폴트는 그것도 모른 채 아스테인과 함께 아스트리드가 싸우던 모습을 흉내 내고 있었다.

“맞습니다, 레오폴트 생도. 거기서 아스트리드 생도가 이렇게 싸늘한 표정으로 말이지요ㅡ 피차 빈손이군요. 그럼 남은 건 하나겠지요? 하고…”

“그 모습이 장관이었단 말이지, 아스테인 생도. 쾅! 하고 서로 마주 서서 양손을 이렇게…”

“어머, 진짜요? 무슨 곰도 아니구.”

“아스트리드가 키는 곰이랑 비슷하긴 한데.”

“곰이라니요. 그런 말씀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아스트리드가 조그맣게 항변했다.

하지만 아마 그 모습이 옆에서 보면 진짜 곰 같기는 했을 터라 차마 크게 강변하지는 못했다.

“본 그대로를 말하는 거잖나. 말 그대로 설원의 표범이 아니라 설원의 백곰이라는 별명이 붙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만.”

“…좀 더, 약…”

약혼녀를 소중히 여겨주시지 않겠냐는 말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아스트리드는 제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는데도 그 말이 왜 나오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하하. 하지만 레오폴트 생도, 곰이라고 하기에는… 이렇게 예쁜 곰이 세상에 어딨다고요. 이런 아름다운 영애께 붙일 호칭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아스테인, 분대장에게 잘 보이고 싶은가 본데. 나는 본 대로 말할 뿐이다.”

레오폴트뿐만이 아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아스테인이나 에라냐까지 소문을 어떻게 들은 것인지 기사학 첫 수업부터 교관과 아스트리드가 맞상대를 벌이고, 게다가 힘싸움에서 아스트리드가 교관을 아예 찍어버렸다던가 팔을 부러뜨렸다던가 아예 바닥에 꽂아버렸다든가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다들 식사 하십시오. 점심시간이 아주 긴 줄 아십니까?”

어서 밥 먹고 숙소에서 조금이라도 쉬어야 한다.

피곤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아스트리드 생도가 저희 분대장이라서 다행입니다. 모의 전투 같은 거라도 하면 적어도 지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아스테인이 아스트리드를 보고 있었다. 눈동자가 도통 보이지를 않으니 정말로 아스트리드를 보고 있는 건지도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얼굴이 아스트리드를 향하고 있으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건 아직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전투는 힘만으로 하는 건 아니죠. 그러니 저만 믿어서는 안 됩니다. 에라냐 생도도 아스테인 생도도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하겠다는 각오를 가지시고ㅡ”

“자자, 아스트리드 분대장님. 식사합시다. 다 식겠어, 아주. 응?”

“…이럴 때만 그렇게 경어를 붙이지 마십시오, 레오폴트 생도.”

능글능글 웃고 있는 레오폴트를 있는 힘껏 노려본 후, 아스트리드는 숟가락을 부지런히 놀렸다.

“아니 대체 이 빌어먹을 순무 간 거는 언제까지 먹어야 하는 거냐.”

레오폴트의 투덜거림을 귓등으로 흘리며.

*

식사를 끝내고 식당을 나서면 그래도 30분 정도는 남아있는 시간.

숙소로 가는 길에 5분, 숙소에서 교육장까지 10분이라고 치면 15분 겨우 남은 시간.

숙소로 가서 쉴 것이냐, 아니면 어디 한적한 곳을 찾아볼 것이냐.

“매점이 있다 하던데.”

“매점… 음료수나 간식이라도 살 수 있으려나요?”

제일 먼저 반응하는 게 에라냐였다.

엘프이면서도 어쩐지 그 모습이 참으로 세속적이어서 이질적이다.

“에라냐 생도는 엘프면서도 그런 걸 먹습니까?”

“먹지요~ 얼마나 맛있는데.”

바람이 불어서 날리는 녹색 머리카락을 앗, 하고 정돈하면서 에라냐가 헤죽헤죽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티끌조차 없이 맑아 보이기만 해서 그게 오히려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그럼 뭐 매점 가실 분은 가시고, 저는 교육장 근처에서 좀 쉬고 있겠습니다. 다들 매점 가십니까?”

“저도 교육장 근처로 가려고요.”

레오폴트와 에라냐는 매점을 갈 모양이었고, 아스테인도 아스트리드처럼 교육장 근처에서 쉴 모양이다.

“그래요, 그러면 이따가 숙소에서 다시 봐요. 저녁 식사는 숙소에서 좀 쉬었다가 같이 모여서 하는 거로 하지요.”

“네엡! 알겠습니다 분대장늼!”

어설프게 거수경례를 붙이고서 에라냐가 레오폴트와 함께 신나게 떠나가고, 둘만 남은 아스트리드와 아스테인.

“그럼, 아스테인 생도. 이따 뵙도록 하지요.”

기사학 교육장과 마도학 교육장은 반대 방향이어서, 아스트리드도 아스테인에게 가볍게 목례하고서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멀어져가는 아스트리드의 뒷모습.

아스테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멀어져가는 아스트리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감은 것처럼 보이는 그의 실눈이, 어느 순간 번쩍 떠지며, 그 동공에 아스트리드의 뒷모습이 가득 비쳤다.

“…잘 자라줬구나, 아스트리드. 그래, 잘 자랐어… 아주. 아주, 잘… 자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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