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아스트리드는 욕합니다
레오폴트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모르겠다.
그냥 주변에서 남자고 여자고 생도들이 죄다 아스트리드를 쳐다보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게 이유겠지, 무슨.’
바꿔 말하면 아스트리드를 쳐다보고 있는 이 시선들이 마음에 안 든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자 생도들이 아스트리드를 쳐다보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레오폴트는 아스트리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싫어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었는데.
어릴 때는 분명 사이가 좋았고, 어릴 때부터 미색이 뛰어났던… 아니, 열 살 꼬마에게 미색이라고 하면 표현이 좀 어색하니까, 어릴 때부터 미모가 뛰어났던 아스트리드가 곧 자기 신부가 된다는 점에서 크게 기뻐했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10년 전부터 모든 것이 뒤틀려버렸다.
시작이야 레오폴트가 했다지만 아스트리드의 대응도 좋지 않았었던 그 날의 기억.
그날 이후로 서로 데면데면하게 굴다가 급기야 사춘기를 지나면서 이제는 서로 싫어함을 넘어 혐오에 가까운 감정까지 악화가 되어버렸다.
그랬던 아스트리드와 함께 아카데미 입학까지 하게 되어서 더욱더 반갑지 않은 감정이 되었건만, 바로 지금, 이 순간 남자놈들의 시선이 아스트리드에게 꽂히고 있는 걸 보면 달갑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
기분이 나쁘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아스트리드의 반응이었다.
그렇게 남자 생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면서도 아스트리드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는다.
본래부터 표정이 잘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이면 좀 민망해한다거나, 좀 시선을 신경 쓰는 기색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고.
새하얀 피부와 민트색의 눈동자는 변함없이 교본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레오폴트가 아스트리드의 뒷자리에 앉아있는 탓에, 지금 보이는 모습은 뒷모습일 뿐이지만.
한 줄기로 땋고 땋아서 그걸 그대로 틀어 올린 단아한 은빛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을 따라 내려오면… 새하얀 살결이 그대로 드러나는 가냘픈 목덜미.
그 목선이… 목선이…
“레오폴트 생도.”
“…뭡니까.”
멍하니 아스트리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레오폴트.
그런 레오폴트가 갑자기 들려온 아케밀라의 목소리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엄청나게 놀랐지만, 황태자로서 받았던 교육이 그런 감정 정도는 손쉽게 감출 수 있게 해주었다.
“레오폴트 생도는 아스트리드 생도와 약혼한 사이시지요?”
“아직 아닙니다.”
그 말에, 아스트리드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라, 아케밀라 뿐만 아니라 레오폴트까지 그 사실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아직 아니라고 하면…?”
“말 그대로, 아직 약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버님들끼리 하신 약조일 뿐, 아직 우리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황태자 레오폴트 폰 아인트하펜과 북부 대공녀인 아스트리드 폰 미테리엔의 약혼 사실은 이미 전 제국이 다 알다시피 하는 사실이었다.
아케밀라 역시도 알고 있었고, 사실 이런 약혼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야기는 그냥 말이라도 걸어볼까 하고 꺼낸 화제였는데,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확정이 아니라고 하시면… 그렇군요. 호오.”
아케밀라의 눈초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스트리드, 듣고 있는 거 알고 있다. 너도 뭐라고 말해보지 그러나.”
아스트리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예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묵묵히 교본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레오폴트가 뭐라고 해대건 관심조차 없다는 듯, 마음대로 지껄이라는 것처럼 보여서, 레오폴트는 욱하고 뭔가 가슴 속에서 치받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확정이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거기에 때마침 아케밀라의 목소리까지 끼어들었다.
레오폴트의 다소 급한 성미와 황태자로 자라오면서 제멋대로 성장해 온 그의 성정이 마침내 이 순간 일어나서는 안 될 화학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래, 확정이 아니라는 말이지.”
경어조차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급한 성미를, 누군가가 브레이크를 채워주었어야 할 레오폴트의 급한 성미가 지금, 이 순간 아무런 제동 장치 없이 폭주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온 것은, 내게 더 적합한 비를 찾기 위한 것도 있지. 북부 대공녀보다 더 나은 영애가 있다면 얼마든지 내 비로 맞아들일 생각이고.”
그 말의 파급력은 컸다.
‘…나쁜 새끼.’
아스트리드도 귀가 있기에 레오폴트가 하는 말을 모두 다 듣고 있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스트리드는 레오폴트를 싫어한다. 인간적인 면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아스트리드가 레오폴트를 봤다고 한들 얼마나 봤을 것이며, 안다고 한들 얼마나 알겠는가.
그러니 지금에 와서 인간적인 면의 레오폴트를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단지 볼 수 있는 것은 결혼 상대로서의 레오폴트지만 아스트리드가 보기에 레오폴트는 영 아니다.
아니, 애초에 결혼 따위 할 생각조차도 없다.
그걸 위해서 아카데미행을 택하지 않았던가.
중간에 꼬이는 바람에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여기서 정식 입교를 하고 나면 아카데미 도서관을 깡그리 뒤져서라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낸다는 것이 아스트리드의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저런 말을 당사자가 듣고 있는 앞에서 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레오폴트가 어린애 같다는 점은 이번 수도행에서 충분히 깨닫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
약혼녀 대우 따위를 바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거부할 셈이지만 그래도 이게 당사자 앞에서 할 말이 아니지 않은가.
“아카데미에 온 것은, 내게 더 적합한 비를 찾기 위한 것도 있지. 북부 대공녀보다 더 나은 영애가 있다면 얼마든지 내 비로 맞아들일 생각이고.”
레오폴트의 말이 들려왔다.
교본 책장을 쥐고 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어머, 그래요?”
유들유들한 아케밀라의 목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딴에는 놀라운지, 목소리에 살짝 흥분이 섞여 있기도 했다.
“그럼 저도, 황태자비 후보로 입후보해도 되는 거겠네요?”
그래, 마음대로 하라지.
애초에 황태자비 찾아주기로 했었지 않은가.
수고를 덜었으니 더 잘됐다고 생각하며 아스트리드는 교본을 들여다보았다.
검, 대검, 창, 세검, 중검 등의 운용과 병과 특성에 대한 설명이 주르륵 적혀있어도 그런 글자며 그림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 가능하지. 아케밀라 영애.”
욱.
뭔가가 훅 치밀어올랐다.
이 말만큼은 꼭 돌려주고만 싶다.
“레오폴트 생도.”
아스트리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다른 생도들의 시선도 아스트리드를 향했다.
저러다가 한 대 후려치는 거 아니냐, 솔직히 맞을 만했다, 그래도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는 수군거림이 아주 작게 들려왔지만, 아스트리드는 아무래도 좋다.
“황태자비,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따위 약혼, 저도 거절하겠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어차피 저는 당신과 결혼할 마음이 추호도 없으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짜증이 났다.
다소 놀란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레오폴트의 희멀건한, 그래도 인물은 좋다고 생각했던 그 얼굴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야말로 짜증 나게만 보였다.
“아, 아스트리드?”
“생도를 붙이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 꽝!
분을 이기지 못한, 짜증을 이기지 못한 아스트리드가 책상을 내리쳤다.
힘조절이고 뭐고 이성을 잃기 직전까지 아슬아슬하게 몰린 아스트리드가 내려친 책상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쩌적 금이 가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반토막이 나서 무너져내렸다.
“아카데미는 황궁도 아니고, 당신은 지금 황태자도 아닙니다. 여기서 황태자 대우를 받고 싶으면 황궁으로 돌아가십시오. 알겠습니까? 이 철부지 황태자…”
아스트리드는 아주 작게 심호흡을 했다.
이 말은 꼭 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개자식아.”
순간 교육장이 얼어붙었다.
*
교육이고 나발이고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아스트리드는 그 길로 교육장을 나와서 정처 없이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도달한 곳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조그만 풀밭이었다.
둥그런 원형 화단에 꽃들이 만개하고, 그 주위를 빙 둘러 벤치까지 놓여있는 보통 휴게 화단.
아스트리드는 벤치에 앉아 한숨을 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거기서 조금만 더 참지 못했지?
이렇게 대형 사고를 쳐놓고 이제 어쩌면 좋을까.
교육 첫날부터 오후 교육을 째다니, 아휴.
이렇게까지 발화점이 낮지는 않았는데, 왜 그랬을까.
약혼녀 따위 오히려 내 쪽에서 거절하고 싶은 일인데, 왜 그게 그렇게 짜증이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분대장님?”
“…?”
여기서 분대장이라는 호칭을 들을 줄은 몰랐다.
고개를 돌려보면,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모를 남자가 눈매를 호선으로 그리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스테인 생도 아닙니까? 여기서 뭐 합니까?”
“저기가 저희 교육장이어서요. 저는 잠시 땡땡이를 치는 중인데, 분대장님도 땡땡이입니까?”
“첫날부터 땡땡…”
라고 말하려고 보니 자기가 할 말은 아니어서 아스트리드는 입을 다물었다.
“이야, 이거 이것도 인연인데 말이죠.”
아스테인은 물어보지도 않고서 아스트리드의 옆에 앉았다.
하고많은 벤치 중에 왜 여기야, 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마는 아스트리드지만, 아스테인은 그런 건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우리, 같이 땡땡이칠까요?”
아스테인은 모범생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완성형보다는 성장형이 좀 더 멋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