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녀는 절대 함락되지 않는다-17화 (17/62)

17화. 아스트리드...!

“우리, 같이 땡땡이칠까요?”

아스테인의 제안에, 아스트리드는 잠시나마 고민을 했다.

첫날 오후 수업부터 땡땡이를 쳐도 되는가.

게다가 아스테인까지 같이 땡땡이를 쳐도 되는가.

하지만 좀 더 본질적으로 고민되는 것은, 이 아카데미에 올 정도면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봐야 할 레오폴트와 아스트리드의 약혼 관계에다가, 또 거기다가 황태자에게 쌍욕을 남기고서 교육장을 나온 데다가, 거기에 또 분대원이라고는 하나 남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알 게 뭐야.

그 빌어먹을 자식은 사람을 앞에 두고도 당당하게 다른 황태자비 후보도 찾고 있노라며 선언하지 않았나 말이다.

‘애새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개념까지 깡그리 해쳐먹은 싸가지 없는 애새끼인 줄은 몰랐지.’

로맨틱 판타지로 쌓은 지식이기는 해도, 이런 귀족 사회에서 평판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스트리드도 잘 알고 있다.

그뿐이랴, 약혼자가 아닌 약혼녀라는 입장이면 더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꾹 눌러 참았지 않은가.

아버지인 볼프강, 동생인 아슈레이. 그리고 나아가 이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로 묶인 이 미테리엔 가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꾹 눌러 참아왔는데.

「아카데미에 온 것은, 내게 더 적합한 비를 찾기 위한 것도 있지. 북부 대공녀보다 더 나은 영애가 있다면 얼마든지 내 비로 맞아들일 생각이고.」

이게 할 말인가 말이다.

아스트리드는 그 말을 생각하면 할수록 치솟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죠.”

그랬다.

고민은 짧았다.

*

“레오폴트 생도, 소란의 원인이 너였군.”

바리안트는 비록 아스트리드에게는 사실상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뛰어난 전사이자 교수임은 틀림없었다.

수업에 들어오자마자 아스트리드의 빈 자리가 눈에 띄고, 그 바로 뒤에 레오폴트가 부루퉁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바리안트는 무슨 일인지 눈치를 챘다.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겠다. 레오폴트 생도, 네가 아스트리드 생도의 부재에 대한 원인이 맞는가?”

바리안트의 시선이 레오폴트를 향했다.

레오폴트도 그런 바리안트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경솔했다고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수업 첫날부터 이런 소란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냐. 아버님의 명예를 뭐로 아는 거지?”

“…죄송합니다.”

때와 장소를 잘 구분해야 하는 법이건만, 레오폴트는 속으로 스스로를 책망했다.

벌써 스무 살의 성인이지만 이래서야 열 두셋 먹은 어린애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나가서 아스트리드 생도를 찾아와라.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찾아오지 못하면 교내 군법에 의거하여 징계하겠다.”

아직 정식 기사도 아니고 견습 기사조차도 아닌 단순 생도에 불과하지만, 이 아카데미도 엄연히 군문이다.

군문에서 이러한 소동을 일으킨 이상 교내 군법이 더 우선된다.

그러나 그보다도, 레오폴트는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하기에 비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을 나섰다.

하지만 막상 교실을 나와봐도 아스트리드가 어디로 갔을지 알 방도가 없었다.

이미 교실을 뛰쳐나간 지 십여 분이 지난 지금이다. 어딜 가도 갔겠지만 그게 어디일지 어떻게 알겠는가.

레오폴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없다.

그 화사하게 반짝이는 은색의 머리카락도, 훌쩍 큰 키도, 검은 제복이 어울리는 여성도.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그새 어딜 간 거야.”

이게 아닌데.

그렇게 무례한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속으로는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런데도 입 밖으로는 좋은 말이, 고운 말이 나오질 않는다.

'멍청한 놈. 바보같은 놈.'

속으로 책망해봐도 눈 앞 어디에도 아스트리드는 보이지 않는다.

교육장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도, 한참을 걸어봐도 한창 교육 시간이라 그런지 주위에는 돌아다니는 생도 하나가 보이질 않았다.

레오폴트도 이 교내 지리를 모르다 보니 무턱대고 아는 길인 식당을 향해서 걷고 있었다. 아마도 아스트리드 역시 길을 모를 테니 식당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어머, 레오폴트 전… 아니, 생도 아닌가요?”

은색 머리.

은색 머리를 찾으며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 레오폴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자주색의 롤빵 머리의 여성.

무도회에서 몇 차례 본 적이 있는 영애.

동부에 위치한 지식의 보고, 마탑의 주인인 바이지크 폰 조르지엔의 장녀, 에밀리에 폰 조르지엔.

마도기사로 하여금 지금의 위치에 있게 한, 매직 브레이슬릿이라는 불세출의 장비를 개발한 이의 장녀이기도 했다.

“조르지엔 영… 아니, 에밀리에 생도. 오랜만입니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닌데.

게다가 에밀리에 영애가 여기 왜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건 중요하지가 않다.

마음이 급한 레오폴트여서 대충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 했건만, 그 소맷자락을 에밀리에가 붙들었다.

“레오폴트 생도, 혹시 아스트리드 생도를 찾으시는 건가요?”

“그걸 어떻게?”

마법사이기도 하니 마음이라도 읽은 것인가.

황족의 마음을 읽다니, 이런 무엄한… 이라는 생각도 잠시.

“혹시 보셨습니까?”

“보았다기보다… 레오폴트 생도께서 그리 급하게 찾아다닐 정도면, 약혼녀인 아스트리드 생도에 관련한 일이 아닐까 하여.”

맞는 말이기는 했다.

좋은 일로 찾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일 뿐.

“…맞긴 합니다만, 혹시 찾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어디 계신지는 저도 알지요.”

그렇게 웃는 에밀리에의 어깨에 작은 참새가 한 마리 날아와 앉았다.

“이 아이 덕분에.”

에밀리에의 손바닥 위에 놓인 쌀알 몇 개를, 참새가 지저귀며 콕콕 쪼아먹었다.

“어디에 있습니까?”

다소 급하게까지 여겨지는 레오폴트의 물음에, 에밀리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서쪽 출구로 가고 있나 본데요. 흐음…”

서쪽 출구.

레오폴트는 거기가 어디인지 모른다.

그 모습에, 눈치 빠른 에밀리에가 작게 웃었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같이 가시죠. 어차피 레오폴트 생도, 길도 모르시지요?”

사실이라서, 레오폴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지금은 빨리 찾는 것이 급선무다.

“그럼, 가시죠.”

먼저 앞장서는 에밀리에의 뒤를 따라, 레오폴트도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화사한 햇빛이 가득한 오후였다.

*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아치형의 철문이 보였다.

아치 꼭대기에는 커다란 사자 조각이 올라앉아 포효하고 있어서, 아카데미의 위상을 그대로 뿜어내고 있었다.

이미 활짝 열려서 개방되어 있는 철문을, 아스테인은 손을 뻗어 가리켰다.

“저게 서쪽 입구입니다. 분대장님은 이곳 지리를 전혀 모르시는군요.”

“…당연한 일 아닌가요? 어제 입교한 곳의 지리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하. 하지만 아카데미 가이드에 지도도 함께 있었는걸요.”

아스테인의 이야기를 듣고 보면 그것도 그랬던 것 같았다.

지도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가이드를 들여다볼 때, 그런지도 같은 건 들여다 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커리큘럼은 어떤지, 뭐 그런 것들을 보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었던 터라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그래도 저로서는 행운이네요.”

아스테인의 말에, 아스트리드도 영문을 몰랐다.

아스트리드가 길을 모른다는 게 아스테인에게 무슨 행운이 된다는 것인지.

그 둘의 상관관계를 아스트리드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가 길을 모르는 게 아스테인 생도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행운이 될 이유를 모르겠군요.”

아스테인은 그런 아스트리드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감은 듯 뜬 듯한 그 눈이 아스트리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분대장님이 그렇게 길을 모르신 덕분에 제가 분대장님과 이렇게 데이트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단어가 있다.

“아스테인 생도, 선 넘지 마십시오.”

아스트리드의 민트빛 눈동자가 아스테인을 향했다.

화가 난 것은 아니지만, 아스테인이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도록 미리 선을 그어놓아야 한다.

“데이트라니요.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저는 이곳에서 돌아가겠습니다. 언행을 조심하시는 것이 좋겠군요.”

단호한 아스트리드의 말에 아스테인이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스트리드가 이렇게까지 칼같이 자를 줄은 몰랐는지, 아니면 정말로 농담삼아 말한 것인지.

“아니,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실언했군요.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스테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사라지면서 거듭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서 가식적인 느낌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사과를 한다면 그도 진심이라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아스트리드는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좀 과했나…? 그래도 누구보다는 낫네.’

적어도 자기 발언에 대해서 똑바로 사과할 줄 안다는 점에서, 일단 레오폴트보다는 낫다.

그 레오폴트와도, 다시 이야기를 나눠보면 될 일이었다.

머리가 식고 나니 그래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첫날 수업인데 이렇게 땡땡이를 친다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고, 어쨌든 레오폴트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원래부터 철없는 인간이기도 하고.

어쩌면 레오폴트도 지금 미안해서라도 그녀를 찾아다닐지도 모를 일이니까.

약간 흥분이 누그러진 지금에 와서는… 그래, 이해할 수 있다.

아스트리드는 걸음을 멈췄다.

함께 걷던 아스테인이, 아스트리드가 갑자기 멈춰서자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스테인 생도, 미안하지만.”

돌아가야겠다.

돌아가서, 교관님에게도 사과하자.

레오폴트와도, 내가 한 번만 더 참으면 될 일이라고 아스트리드는 생각했다.

“여기서 돌아가ㅡ”

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아스트리드…!”

어쩐지 분노를 한껏 억누른 듯한 목소리.

아스트리드가 서쪽 출구를 쳐다보았을 때, 그녀의 시선에는 레오폴트가 보였다.

어째서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어째서인지 분노한 기색이 역력한 레오폴트의 모습.

“아스트리드…!”

경어가 사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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